|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 4,10-17ㄴ
사랑하는 그대여,
10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11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
12 티키코스는 내가 에페소로 보냈습니다.
13 올 때, 내가 트로아스에 있는 카르포스의 집에 두고 온 외투와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져오십시오.
14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행실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15 그대도 그를 조심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말에 몹시 반대하였습니다.
16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불리하게 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17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1-9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만이 전하는 부분으로,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루카 10,2)
이 말씀은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곧 ‘복음 선포의 시급성’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먼저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추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종말론적인 ‘추수꾼’ 은 천사를 표상하는데, 여기서는 ‘복음 전파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고 기도하기를 명하십니다.
그러니 첫 번째로 맨 먼저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 10,3)
'이리 떼 가운데 양처럼' 보내신 것은 종말에 늑대와 새기 양이 평화롭게 뒹굴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닐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이사 11,6;65,25 참조)을 이루는 것을 보여줍니다.
곧 ‘하늘나라의 때가 왔음’을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여기서도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평화를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15)
천사들의 이 노래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이는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단순한 인사나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의 노래가 아닌, ‘지금’ 그리고 ‘여기’에 ‘성취된 실재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늘에는 영광’이, ‘땅에는 평화’가 성취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구원을 일구어 내시고 ‘평화’를 가져오심으로써 스스로 당신 이름을 영광되게 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평화’를 빌어 줄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건네준 그 평화를 형제들 안에 심고 가꾸고 일구며 건네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준미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루카 10,5)
주님!
저희의 평화가 아니라 당신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타인을 억눌러 이루는 평화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 이루는 평화가 되게 하소서!
분쟁과 갈등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와 진리가 이루어진 참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고, 평화를 위해 일하다가 배척을 받을지라도 제 자신을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도 다른 제자>
오늘 복음의 말씀은 다른 복음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은 열두 사도의 파견만 전하는데, 루카 복음은 다른 일흔두 제자의 파견 내용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열두 제자의 파견과 일흔두 제자의 파견을 비교해봤습니다.
루카 복음은 열두 제자 말고도 일흔두 제자의 파견이 필요한 이유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음을 얘기하며 추수의 주인께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고 그래서 일흔두 제자를 뽑으신 것은 단지 숫자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열두 사도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것이고 일흔두 제자는 이 제자들과 다른 제자들이니,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곳, 곧 이방인들에게 가야 할 제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사가인 루카는 이방인 지역에도 복음의 선포가 시급하고 절실하며, 이곳 복음 선포를 위해 열두 사도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필요하고, 유대인뿐 아니라 다른 민족의 제자들도 필요함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일흔두 제자에 루카 복음사가도 우리도 포함되는 겁니다.
일흔두 제자의 파견 기사에는 다음의 내용도 추가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 10,3)
그러니까 이방인 지역으로 가는 것이니까 12 사도의 파견보다 훨씬 더 어려운 지역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이리, 곧 자기들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72 제자는 파견되는 겁니다.
행복과 평화를 전하는 자기들을 오히려 죽이려 드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들에게 그래도 제자들은 평화를 빌어주라는 겁니다.
그리고 평화를 빌어주라는 이것이 12 사도의 파견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자기를 죽이려 드는 사람들과 결코 싸우지 말라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공격적인 선교를 하지 말고 평화로운 선교를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평화롭게 선교하고 평화를 전하는데도 누구나 좋아할 것 같은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며 그런 상황도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분노, 적대감이 포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참으로 어쩔 수가 없고, 무기업자들처럼 반평화적인 상황이 자기에게 유리한 사람도 어쩔 수 없고, 적대적인 외부 환경을 조성하여 자기 세력을 내부적으로 규합하려는 사람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볼 것은 길을 가면서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12 사도 파견 때의 말씀에다가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을 추가하시는 겁니다.
평화를 빌어주는 사람이 인사를 하는 것은 기본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 하심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아마 이런 뜻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가거라.” 하시면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고 하시는 것이니 이것은 아비의 장례도 치르지 말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과 그 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의 추수 일꾼이 추수하러 길에는 사람들과 노닥거리며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시급성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때는 인정도 배제해야 한다는 그 절박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루카 복음사가는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이렇게 복음을 선포한 경험을 바탕 삼아 우리에게도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한눈 팔지 마라>
학창 시절에 자취생활을 하였고, 신부가 된 후에도 특수 사목에 종사하다 보니 자취 아닌 자취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는지 많은 분이 맛있는 반찬도 해 주시고, 곰국도 끓여 주셨고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주었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냉장고에 있는 곰국을 꺼내보면 국물에 기름이 엉겨 있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금방 맑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랑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좋은 점만 보입니다.
이때 ‘콩깍지 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기도 시간도 많고 성경도 읽으며 활동도 적극적으로 합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그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열정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루카 10,3)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눈 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 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주머니나 식량 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요한 15,9-10)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한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각각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한눈 팔지 말고 신분에 따른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구원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일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선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기왕이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더욱이 길에서 인사하느라 지체함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일꾼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과 자비의 루카 복음서>
저도 젊은 수도자 시절 해외 선교 열망으로 활활 불타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학부를 졸업하고 사목 실습을 시작할 때, 장상들에게 제발 좀 선교지에서 실습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장상들 눈에는 제가 선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였나 봅니다.
답은 언제나 묵묵부답.
너무 답답해서 부르짖으면 겨우 오는 답장은 먼저 한국에서나 잘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를 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늘 그런 열망이 남아있기에, 선교지로 훌훌 떠나는 후배 형제들을 보면 얼마나 부럽고 대견스러운지 모릅니다.
한번은 오지 중의 오지, 도착하려면 비행기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언제나 수하물이 제대로 인수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나라로 선교를 떠났던 한 형제가 휴가차 귀국했었습니다.
공항 입국장을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불과 일 년 반 전의 그 당당하다 못해 풍성했던 풍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바짝 마르고 노쇠한 중늙은이가 한명 꾸부정하게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일 년 반 만에 체중이 30킬로나 빠졌답니다.
그러면서 장난삼아 돈 한푼 안 들이고 자연 다이어트에 성공했으니 꽤 돈 번 거라며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과도 비만'으로 고생하시는 분들 선교지로 초대하겠답니다.
너무 갑작스레 왜소해지고 노쇠해져 적응이 잘 안 되는 형제를 바라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그래 해외선교사들이야말로 이 시대 순교자들이로구나!’
그와 함께 여기저기 같이 다니면서 전해 들은 더위와의 싸움은 정말이지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항상 더우니 잠자는 것이 그렇게 힘들더랍니다.
그나마 쪽잠이라도 자기 위해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서둘러야 된답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잔뜩 뜨거워진 매트리스에 미리 물을 한 사발 부어놓는답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열기가 사라져 머리를 눕힐만하다네요.
자다가 몇 번이고 일어나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해야만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답니다.
철저하게도 문명 세계와 단절된 곳, 흙바닥에 양철 지붕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곳,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국지전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다시 떠나는 형제의 환한 얼굴이 참으로 고맙고 대견스러웠습니다.
초대 교회 선교사였던 바오로 사도와 루카 복음사가의 삶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티모테오 2서에 그들이 복음 선포 과정에서 겪은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었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굳게 믿었던 동료들로부터의 배신과 따돌림으로 인한 상처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 와중에 주님, 그리고 루카 복음사가만이 끝까지 등을 돌리지 않고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2 티모 4,10~17 참조)
루카 복음사가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로 추정됩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예수 그리스도 육화 사건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각적 효과를 활용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여러 상황들을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함을 통해 독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51년경에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제2차 전도여행 때 그를 수행하였으며, 57년까지 필리피 교회 공동체에 머물면서 사목활동을 수행했고, 바오로 사도의 제3차 전도여행 때에도 수행했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투옥 중이던 61~63년까지 로마에 머물면서 큰 의지요 힘이 되어 드렸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 번째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로 추정됩니다.
그는 사도행전을 통해 초대교회 공동체 생활상과 복음전파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그가 집필한 루카 복음은 사랑과 자비의 복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따뜻한 시선으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인간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죄 많은 여인 이야기', '돌아온 탕자의 비유', '우도 직천당 사건' 등입니다.
고통받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했던 루카 복음사가의 복음서는 2천 년 세월이 지나온 오늘 우리에게도 한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지녔던 고통 받는 한 인간을 향한 한없는 측은지심과 따뜻한 동료애가 오늘 이 시대 다시 한번 메아리쳐지길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로...>
1)
루카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전승이 있는데, 그 직업은 그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글 쓰는 재능’은 주님께서 특별히 주신 탈렌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탈렌트는 흔히 생각하는 재주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데에 필요한 능력'입니다.
루카가 쓴 복음서와 사도행전 덕분에 많은 이들이 큰 은혜를 받았으니, 루카는 받은 탈렌트를 잘 활용하여 많은 결실을 얻은 ‘충실한 종’입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16.19-21)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말’로 할 수도 있고, ‘글’이나 ‘그림’이나 ‘음악’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인다운 삶’으로 복음과 신앙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받은 탈렌트를 잘 활용해서 주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일이 되고, 그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는 일이 됩니다.
루카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그가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선교활동에 동참한 것을 오늘날의 상황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할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제자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을 버린 것은 어부 출신 사도들이 어부라는 직업을 버린 것보다, 또 세리 출신 사도인 마태오 사도가
세리라는 직업을 버린 것보다 더 큰 것을 버린 것입니다.
그 시대 의사들의 사회적 위치가 오늘날과는 좀 다르겠지만, 어떻든 루카는 열두 사도 못지않게 ‘버림’과 ‘따름’을 실천한 신앙인입니다.
2)
자기가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과 원하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이 하나로 일치하는 사람은 그리고 그 일들이 모두 하느님 뜻에 합당하고 선한 일이라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과 원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모두 다르다면, 일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는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그 중에 하나라도 악한 일이 있다면, 또 자신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일이 바로 그 악한 일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기도 하고, 멸망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선택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을 정말로 내가 원해서 하고 있는가?
해야 하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닌가?
‘그 일을 잘하는가? 못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평소에 좋아해서 즐겨 하는 일들이 ‘나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일이 악한 일이라면 무조건 중단하고 끊어버려야 하지만, 악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신앙생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방해만 되는 일이라면 과감히 중단하는 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사실 그 일 자체는 악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신앙생활을 방해한다면, 방해한다는 것 자체가 ‘선의 반대쪽’이기 때문에 그것은 ‘악’입니다.
3)
“나는 잘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탈렌트를 조금도 안 주셨다.” 라고 불평하는 경우가 있고, 그렇게 불평하면서 여러 가지 재능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불평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
(로마 9,21)
이 말에서 ‘귀하다. 천하다.’ 라는 말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고,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하느님의 ‘귀한 자녀’ 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의 경우를 보면,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가 단순히 가난한 병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사실 어떤 상황이라도 ‘기도’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믿는 우리의 신원 - 관상의 제자, 선교의 사도>
“당신께 비옵는 누구에게나,
진정으로 비는 누구에게나,
주님은 가까이 계시나이다.”
(시편 145,17)
오늘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어느 예수회 사제의 이색적인 기사를 읽었습니다.
어제는 보름이요 유난히 크고 밝은 보름달(supermoon)이었고 다음과 같은 기사였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하며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고 거의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
밤하늘, 특히 달의 아름다움은 한결같은 아름다움이요, 우리에게 우리보다 더 큰 무엇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 인간은 너무 빛을 밝게 만들어 하느님의 빛에 눈 멀게 되었다.
별을 바라보는 단순한 수행이 기도처럼 되어야 한다.
한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할 수 있다면 매일 실천할수록 좋다.”
하루 중 얼마나 하늘을, 하늘의 태양을, 하늘의 별들을, 하늘의 노을을 바라보는지요?
땅에서의 활동에 앞서 하늘의 관상이, 선교에 앞서 주님과의 친교가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은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이자 밖으로는 선교의 사도입니다.
안으로는 관상의 마리아로, 밖으로는 활동의 마르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사랑, 똑같습니다.
안팎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관계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과의 친교 관계가 우선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늘 읽어도 늘 새로운 제 자작 애송시 '하늘과 산'입니다.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관계를 상징하는 하늘과 산의 시입니다.
오늘 주님은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합니다.
오늘은 루카 사도 축일이며 우리 요셉수도원의 김종훈 루카 수련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혹자는 루카가 일흔 두 제자들 안에 포함되지 않았겠나 추측하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라는 고백에서 보다시피 바오로 사도의 의리있는 제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때가 되자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새삼 이들 제자들의 배경에는 늘 주님이 함께 하심을 깨닫습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우리 삶의 복음 선포의 현장은 바로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존재론적 복음 선포라 합니다.
말 그대로 무소유라기보다는 무소유의 정신으로 민폐를 최소화하면서, 주님과의 관계로 무장하고, 이리떼 세상 한복판에서 형제들의 환대에 의존하면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의 평화의 사도로서 주님의 평화를 나누는 삶의 선교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되어 산다면 치유는 저절로 일어나고 복음 선포는 저절로 이뤄질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선교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과의 깊어지는 관계가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되게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선교활동에 전념한다 할지라도 이들의 돌아갈 중심은 주님뿐입니다.
이어지는 복음에서 이들 일흔두 제자들은 주님께 돌아가 그 활동 사항을 보고합니다.
언제든 돌아갈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제자들 역시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임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우리의 선교활동도 선교에 앞서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과의 관상적 친교 관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바오로가 로마에서 순교의 죽음을 앞둔 수인 상태에서 저리도 평온할 수 있음은 어제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처럼 주님과의 깊은 믿음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완전히 죽음에 초연한 바오로입니다.
바로 다음 고백이 사도의 믿음을 반영합니다..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바로 주님과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바오로 사도의 모든 선교활동의 원천이었음을 봅니다.
바로 우리의 정주서원이 의도하는 바도 우리 삶의 중심인 주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데 있음을 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며. 충실히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늘 바쳐도 늘 새롭고 좋은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여러분에게 루카 복음은 어떤 복음인지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한 일이 아니라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한 일입니다.
콜럼버스는 새로운 대륙을 찾을 목적으로 대양을 건넜지만 결국 대륙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콜럼버스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데 베스푸치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베스푸치에게는 전기 작가가 없었던 반면 콜럼버스에게는 한 사람의 전기 작가가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전기 작가는 바로 그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대륙을 발견하는 일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마땅히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삶에 관한 책을 쓰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플라톤이 없었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슐레가 프랑스인들에게 프로이센의 침입자들을 몰아낼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서 잔다르크를 재발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잔다르크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2027년에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중에 하나는 본당의 역사를 기억하는 기념 책자의 발행입니다.
복음사가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저는 루카 복음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루가복음 1장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은총이 가득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도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상대방을 축복하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0장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사제인 저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아픈 사람, 지금 가난한 사람, 지금 외로운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제와 레위 사람은 그냥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신앙인은 지금 고통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15장의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감동입니다.
저는 늘 큰아들처럼 살아왔습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하기보다는 비난하고 단죄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저의 성실함을 드러내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큰아들도 사랑하였지만, 돌아온 아들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우리가 뉘우치면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고, 눈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종교의 진정한 가치는 용서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루가복음 19장은 회개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을 만나고 싶다면 믿음의 나무로, 사랑의 나무로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나누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24장의 엠마오 이야기는 아름다운 그림 같습니다.
지친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의 청을 들어주시고, 함께 머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을 전해주시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전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성가 엠마우스를 참 좋아합니다.
이 성가를 작곡하신 원선오 신부님도 존경합니다.
그분은 일본에서 사목을 하시다가 한국으로 오셨습니다.
한국이 어느 정도 발전을 하자 케냐로 가셨습니다.
케냐에서는 더욱 어려운 수단으로 가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힘든 이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에 계실 때, 매일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했던 학생들은 신부님의 따뜻한 눈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교문 앞에서 비를 맞고 있는 아이를 보았고, 우산을 들고 아이에게 가셨습니다.
우산을 함께 쓰고 데려다주신 신부님을 아이는 기억하였고, 신부님의 영향으로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축복과 은총, 사랑과 기쁨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길의 끝은 부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길도 감사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제게는 자비로운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복음입니다.
저 또한 따뜻한 이웃이 되도록 촉구하는 복음입니다.
사제는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임을 알려 주는 복음입니다.
여러분에게 루카 복음은 어떤 복음인지요?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위로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21년 영국에서 ‘아서’라는 여섯 살 난 아이가 친부와 계모에게 아동학대로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이의 몸에는 수백 개의 멍이 있었고, 영양실조로 사망한 것입니다.
아이의 집에는 가정용 CCTV가 있었고, 여기에 아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배고픔에 잠을 이루지 못한 아이는 서럽게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이렇게 외치는 동안 그 어떤 위로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아.”
다른 이의 위로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뿐입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분이신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위로도 필요했습니다.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말은 분명히 필요했습니다.
이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할 때는 하느님의 소리도 잘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이 모두 비판하고 있을 때, 그래도 위로할 수 있는 ‘나’가 되어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도 없다며 절망에 빠지고 그 결과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더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곳을 향해 고개를 들 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위로하기 위해 우리도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서 눈높이를 맞춰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이렇게 높이를 맞출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을 뽑아서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둘씩 보내십니다.
단순히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일까요?
그것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으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게 하십니다.
왜일까요?
시선을 맞춰서 진정한 위로를 하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맞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루카 복음사가 역시 이렇게 세상에 위로를 주기 위해 온 힘을 전한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그림자라고 불릴 정도로 함께 하였고, 또 전교 활동을 하며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의 위로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단순히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위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