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테리 웨이트 영국 성공회(聖公會) 신부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이슬람교 시아파 무장단체에 납치됐다. 당시 레바논에서는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교 세력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웨이트 신부는 무장단체에 잡힌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협상에 뛰어들었다가 억류되고 말았다.
웨이트 신부는 4년 넘게 독방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자주 두들겨 맞았고, 목을 자르겠다는 협박에 시달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무장단체 감시원들은 점차 그의 행동과 인품에 감동하기 시작했다. 다만 언어가 달라서 직접 소통하기는 어려웠다. 어느 날 그와 가까워진 감시원이 책을 한 권 구해주겠다고 했다. 웨이트 신부는 고민했다. 설령 책 제목을 얘기해 준다고 해도 감시원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웨이트 신부는 고민 끝에 책 귀퉁이에 새가 그려진 책이면 아무것이나 좋다면서 펭귄 한 마리를 그렸다. 감시원은 이 뜻을 이해했고, 펭귄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구해서 가져다 줬다. 1991년, 웨이트 신부는 1763일 만에 석방됐는데, 종종 감시원들이 가져다 주는 펭귄의 책을 읽으면서 힘든 시간을 견뎌냈다고 한다.
특정 책도, 특정 저자도 아니었다. 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면 뭐든지 읽어도 좋다는 신뢰는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일까.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을 펭귄 그림 하나로 엮어줄 수 있는 브랜드 이미지와 가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펭귄은 1935년 영국에서 앨런 레인(Lane)이란 사람이 창업한 출판사다. 출판사의 탄생에도 일화가 있다.
시골로 기차 여행을 떠나던 레인은 역 안의 작은 책방에서 당대의 유명 추리소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책 값이 너무 비싸 살 수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책이란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부자들이 즐겨 읽는 지적 유희였다. 책 한 권 값이 7~8실링(5펜스가 1실링, 20실링이 1파운드) 정도였는데 모두 하드 커버에 질 좋은 종이를 쓴 호화본이었다.
레인은 같은 내용의 책을 손바닥 만한 크기로 출간하고, 가격을 6분의 1 수준으로 낮춰 6펜스에 팔았다. 이른바 문고판(文庫版·paperback)을 낸 것이다. 이 덕분에 부자의 전유물이던 책은 서민도 읽을 수 있게 됐고, 펭귄은 '지식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출판사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올해로 탄생 80주년을 맞는 펭귄출판사는 영국 런던의 주요 관광지인 '코벤트 가든'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있다.
톰 웰든(Weldon·49) 펭귄 랜덤하우스 UK 사장은 웃는 인상이어선지 나이보다 5년은 더 젊어 보였다. 그는 2011년 펭귄의 사장을 맡았고, 합병 이후에는 펭귄 랜덤하우스의 영국 사장을 맡고 있다.
웰든 사장은 출판사에 어떻게 강력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했느냐는 질문에 "펭귄은 출판사 중 처음이자 유일하게 '브랜딩'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해한 회사"라고 말을 꺼냈다.
"책을 살 때는 무엇부터 봅니까? 가장 먼저 보는 건 '누가 썼는가'일 겁니다. 두 번째는 주위 사람의 추천이나 후기, 서평일 겁니다. 펭귄은 여기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누가 편집했는가'입니다. 저희는 옛날부터 '펭귄이 편집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힘썼습니다.
펭귄의 초기 책 표지 디자인을 알고 계시나요? 예나 지금이나 책의 표지는 보통 내용과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디자인을 적용합니다. 표지만 봐도 무슨 내용일지 예상이 가능하도록요. 이에 비하면 펭귄의 디자인은 무심하다 싶을 만큼 단순합니다. 책 제목과 저자, 로고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펭귄의 책에는 통일감이 있었고, 브랜드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각각의 책보다 펭귄이라는 출판사 자체를 알리는 데 주력하는 방식인 셈입니다.
책은 장르에 따라 표지 색깔로도 구분할 수 있었어요. 소설은 오렌지색, 전기 문학은 남색, 추리소설은 녹색과 같은 식입니다. 독자들은 표지만 봐도 펭귄이 출판한 서적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죠."
펭귄이라는 사명도 브랜드 전략의 일환이었다. 창업자 레인은 회사 이름이 문고판처럼 부담 없이 가벼운 이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우아하고 유쾌한 이미지를 가진 펭귄이 선택됐다. 당시 신입 직원이던 에드워드 영이 런던 동물원에서 그린 펭귄 스케치를 기반으로 로고가 탄생했다. 웰든 사장은 말을 이어갔다.
"두 번째 전략은 '시리즈 물(총서)'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펭귄 클래식'이죠. 엄선한 고전 문학을 동일한 표지 디자인으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참신한 기획력을 이용해 시대의 수요를 찾아냈고, 이를 묶어서 출판해 펭귄이라는 브랜드를 알리는 데 기여를 했다는 점입니다."
펭귄은 펭귄 클래식 외에도 시집 총서, 미술책 총서, 어린이용 그림책 총서 등 주제가 다양한 시리즈물을 출간했다. 이들은 낱권으로도 뛰어난 작품이지만, 시리즈로서 수집 욕구를 자극하기도 한다. 브랜드 컨설팅 업체인 JOH의 조수용 대표는 "사람은 연속된 것을 다 모으지 않으면 이를 채워넣으려는 본능적 욕구가 생기며, 펭귄은 일관성 있는 디자인을 도입해 모으고 싶은 시리즈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펭귄은 탁월한 시리즈물을 출간해 왔습니다. 시리즈물 기획의 노하우가 있는 것인가요.
"시리즈를 기획한다는 건 결국 이슈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현재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포착하고, 이를 이슈화해야 하죠. 사람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찾아내야 하고, 그들에게 좋은 지식·지혜를 전달해야 합니다. 방대한 정보 가운데서 필요한 것을 꼭 짚어내 줘야 한다는 것이죠. 또한 사람들의 관심이 각 권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 권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시리즈 전체가 일관성을 갖춰야 합니다.
결국 저는 이것이 '큐레이션(curation)' 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정말 많습니다. 사람들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죠. 그 때문에 점점 큐레이션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고 있습니다. 펭귄은 독자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을 골라서 출판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설립 이후 지금까지 80년간 펭귄이 해 온 일이 바로 큐레이션인 셈입니다."
―훌륭한 큐레이션이 브랜드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는 말씀이군요.
"네, 맞습니다. 펭귄은 지금까지 최고의 책을 만들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예컨대 펭귄 클래식에는 호머의 '오디세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구글 검색창에서 오디세이를 쳐보면, 전문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많은 고전 문학이 인터넷에서 공짜로 구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펭귄 클래식이 잘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희는 같은 책이라도 최고의 번역을 해서 문학의 깊이를 전달하고자 노력했고, 독자가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을 달았습니다. 돈을 내고 사도 아깝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의 품질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겁니다. 이런 노력이 오랜 기간 쌓이면서 신뢰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훌륭한 큐레이션을 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요.
"사실 출판이라는 것은 편집자의 역량에 달렸습니다. 편집자들은 마치 극단(劇團)의 단장이나 영화감독처럼 독립적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맡은 저서에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그들이 어떤 판권을 사고 어떤 저자와 함께 일하느냐에 회사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어요. 저는 재능 있는 편집자, 뛰어난 디자이너, 능력 있는 마케터 등 좋은 인재가 좋은 책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재능을 가진 사람을 발굴하고, 그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저희는 이들을 가르치고 지원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자책은 현대판 문고
―펭귄이 성공 가도를 달렸던 것은 지식의 대중화 덕분입니다. 그러나 그 상징인 문고판이 요즘 들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문고판이 성공을 거두려면 규모의 경제가 필수적입니다. 가격은 낮추는 대신 많이 팔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문고판 자체의 판매량이 줄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전자책(e-book) 때문입니다. 전자책이 문고판을 대체하면서, 시장에서는 문고판과 전자책의 '자기 잠식 효과(cannibalization)'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범죄 추리물, 로맨스 소설과 같은 시장에서 두드러집니다. 요즘 추리물 작가의 1년 수입 중 절반은 전자책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전자책이야말로 '현대판 문고'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펭귄도 전자책을 출판하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전자책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e펭귄'이라는 브랜드도 따로 있어요. 지난해 저희 매출의 25% 정도가 전자책에서 나올 만큼, 전자책 시장은 이미 성숙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전자책의 핵심은 단순히 책이 디지털 매체로 나온다는 게 아닙니다. 출판 트렌드가 바뀐다는 점이 훨씬 중요합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책을 사려면 일단 서점에 가서 책장을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걸 사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책을 구매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인터넷에서 서평을 찾아 읽고 SNS에서 친지들의 추천을 받습니다. 출판사가 이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하면 망할 겁니다. 그리고 전자책은 이 트렌드에 가장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모델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인터넷 서점 아마존과도 좋은 파트너 관계를 유지합니다. 아마존은 유통업체로서, 저희는 생산업체로서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사실 여러 미디어에서 아마존 때문에 출판 업계가 아주 어려워졌다고 보도하는데, 저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펭귄 랜덤하우스는 지난해 유례없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거든요. 아마존이 잘할수록 저희도 성장할 겁니다. 윈윈 관계라는 겁니다."
―앞으로 전자책이 전통적인 종이책을 완전히 대체하게 될까요?
"2~3년 전만 해도 전자책이 종이책을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염려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변화가 우려했던 것 만큼 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전자책 시장의 성장세가 주춤합니다. 지난해 영국에서 전자책의 시장 규모는 불과 10% 성장했습니다. 수년 전만 해도 한 해에만 50~60%씩 성장하던 시장이 말입니다. 저희 매출의 25%는 전자책에서 나오지만, 반대로 75%는 종이책에서 나옵니다. 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종이책을 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자책은 한 번에 여러 권을 들고 다닐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읽을 수 있고요. 분명히 독자에게는 큰 도움이 됐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한 번에 책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책을 만지면서 종이의 질감을 느끼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책을 선물하는 데 쓰는 사람도 많습니다. 전자책을 선물하는 일은 흔치 않죠. 펭귄은 책의 본질을 '소장하는 것'이 아닌 '읽는 것'으로 정의했고, 그렇기 때문에 전자책을 출판합니다. 그렇지만 책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습니다. 그들이 있기 때문에 전자책이 종이책을 완전히 대체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앞으로 몇 년간은 종이책과 전자책의 매출 비율이 7대3 정도에서 굳어지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 마음을 얼마나 소유하느냐가 핵심
―사실 출판 업계에서 전자책보다 무서운 것은 스마트폰 아닐까요? 사람들은 책 읽을 시간에 스마트폰을 보고 있습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진짜 문제는 스마트폰이죠. 콘텐츠를 소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터치해서 읽고, 한 번 터치해서 꺼버립니다. 더 큰 문제는 어린이들이 스마트폰 화면의 화려함에 익숙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책을 읽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이는 앞으로 출판 업계 전체를 뒤흔들 큰 문제가 될 겁니다. 이 때문에 저희는 다른 출판사들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펭귄의 진정한 경쟁자는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는 회사들, 예컨대 디즈니, 가디언, BBC, 레고 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마음을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앞으로 판도가 달라지게 될 겁니다."
―그러면 스마트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저희는 요즘 적극적으로 SNS 마케팅에 뛰어들었습니다. 펭귄의 트위터 채널은 팔로어가 90만명입니다. 페이스북 계정에는 팬이 35만명 있어요. 사진 공유 중심의 SNS인 '인스타그램'과 '핀터레스트'도 하고 있고, 이메일로 50만명에게 뉴스레터를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펭귄이 독자와 직접 소통하고 연결되고자 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출판사가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오직 책밖에 없었습니다. 출판사가 책을 내면 독자가 읽는 것이죠. 그런데 요즘은 서점이 사라지고, 신문과 같은 전통적 미디어의 역할이 작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책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독자들은 어떤 콘텐츠를 소비해야 할지, 어떻게 읽을거리를 접할지 잘 모르게 됩니다. 저희가 이 해결책으로 생각한 게 바로 출판사가 나서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SNS를 통해서 읽을거리를 추천해주고 신간을 소개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거의 책을 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더 책을 자주 읽게 할 방법은 없을까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결국 '콘텐츠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책이 다른 매체보다 뛰어난 경쟁 우위 요소는 한둘이 아닙니다. 책은 그 어떤 매체보다 깊이 있는 콘텐츠를 제공합니다. 또한 가보지 않은 세계를 탐색하는 가장 보편적인 도구이자, 지식을 전달하는 확실한 통로입니다. 솔직히 300~400페이지씩 콘텐츠를 담을 수 있는 매체가 책 말고 더 있을까요? 소중한 지식은 여전히 책에서 나옵니다. 더 좋은 책, 더 좋은 읽을거리가 나온다면, 책 시장 수요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출판사 '펭귄'
1935년 창립한 영국계 글로벌 출판사. 펭귄 역사상 책 한 권으로 올린 가장 큰 성공은 1960년 당시로는 금서로 분류되어 있던 D. H.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무삭제 출판이다. 이 소설책은 350만권이 팔렸다. 펭귄이 영국에서 갖는 위상은 이 말 한마디로 정리된다. '영국 날씨가 영국인을 만들었다면 펭귄은 영국인의 머리를 채웠다.' 1970년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을 소유한 교육 출판 그룹인 피어슨에 인수됐고, 2012년에는 독일계 출판사인 랜덤하우스와 합병, 펭귄 랜덤하우스로 재탄생했다. 펭귄 랜덤하우스는 영미권 출판 시장의 25%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출판사로, 지난해 약 33억유로(약 3조85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큐레이션
여러 정보를 수집, 선별하고 여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전파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 과거에는 예술 작품을 수집·보존·전시하는 일을 의미했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삼고초려 끝에 당대 최고 서체·편집 디자이너 영입… 디자인으로 브랜드化
펭귄은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도구로 디자인을 활용했다.
펭귄에서 나오는 책 표지는 창립 이후 오랜 기간 제목과 저자 이름, 펭귄 로고와 이를 감싸는 오렌지색 타원만 그려 넣는 간결한 디자인이었다. 이는 '펭귄이 편집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창업자 앨런 레인의 브랜딩 전략이었다.
당시 서점에서 팔리던 책의 표지는 손으로 그린 일러스트에 금박을 장식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게 해야 각각의 책이 돋보여 더 많이 팔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인은 일관성 있는 디자인을 도입해 출판사 전체 브랜드 파워를 높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봤다.
펭귄은 창립 이후 지금까지 당대 최고 디자이너를 영입해 디자인 총괄 책임자를 맡겨 왔다.
펭귄 디자인의 정체성을 세운 인물은 1935년 런던 동물원에서 직접 펭귄을 스케치해 와, 회사 로고로 만든 에드워드 영이다. 그는 펭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3단 수평 분할 구성을 최초로 도입했으며, '길 산스(Gill Sans)'체를 활용해 제목을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6년 펭귄의 디자인 수장으로 임명된 얀 치홀트(Tschichold)는 펭귄의 디자인 규범을 만든 인물이다. 앨런 레인은 당대 최고 서체·편집 디자이너(typographer)였던 치홀트가 살던 스위스로 직접 날아가 삼고초려 끝에 그를 영입했다. 창립 초기 제각각이었던 펭귄의 표지 디자인은 치홀트의 지휘 아래 규칙성을 갖게 됐다.
펭귄의 디자인적 노력은 브랜드 파워로 이어졌다. 1950년대 많은 출판사가 펭귄의 성공을 본떠 문고판 브랜드를 설립했지만, 펭귄은 고유의 디자인 덕에 사랑받는 출판 브랜드로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문고판이나 시리즈물을 출판하는 일이 드물어지면서 펭귄도 과거 디자인보다는 책 내용에 맞는 표지 디자인을 새로 개발해 붙이고 있다. 대신 과거 디자인을 활용해 머그컵과 보온병, 쿠션과 가방 등 생활용품을 내놓고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