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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원문보기 글쓴이: 김명
산속의 기와집 김 명 속세를 벗어나 산사로 간다. 맑은 공기 마시며 오솔길로 쉬엄쉬엄 걸으며 산속의 기와집을 찾아간다. 아무리 깊은 산이라도 이처럼 아늑한 모습은 처음 보는 듯하다. 계곡이 깊어 적막이 감도는 고요한 산인 줄 알았는데 산새가 불자의 마중을 나온다. 꼬불꼬불 산길 걸어갈 때 산새가 나타나 내 앞에서 이 나무 저 가지로 날아다닌다. 동박새의 작은 몸짓으로 재롱을 부리는 모습에서 청아하고 낭랑한 소리로 재재거리며 반가움을 전한다. 오솔길 언저리에는 들국화 중에서 구절초가 하얗게 꽃을 피워 향기 풍긴다. 개울 언저리로 걸어갈 때 졸졸거리는 물소리는 속세의 잡념을 씻으라고 노래한다. 오솔길 걸어갈 때 박새의 노랫소리와 미물들의 잡다한 소리도 함께 들린다. 이처럼 자연에서 일어나는 다종의 소리가 내 심금을 울려준다. 이런 소리를 접할 때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워진 느낌이다. 오솔길 따라 산속으로 걸어갈 때 은은하게 들려오는 풍경소리는 산사가 가까웠다는 느낌이다. 좀 더 걸어가면 목탁 소리가 바람의 등에 앉아 불자의 마중 나온다. 스님의 불경 소리가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가자고 마중 나온다. 미물들에게 바람의 세기를 알리는 풍경소리는 계절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계단이든 급경사든 아랑곳하지 않고 거북이처럼 쉬엄쉬엄 걷는다. 산속에는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이 하늘을 가리지만, 햇볕은 우듬지의 틈으로 팔을 길게 뻗어 땅바닥까지 내려와 미물들을 보살핀다. 작은 생명체라도 비타민을 흡수하려고 알몸으로 햇볕에 샤워한다. 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물이 살아 움직이며 서로 천적에 먹히지 않으려고 재빨리 몸을 피하지만, 산새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리로 벌레를 쫒으며 배를 채운다. 삶의 경쟁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으나 산속이라고 예외는 없는가보다. 고목이 우거진 계곡에는 습도가 높아서 산소 음이온이 아주 풍부하다. 산이 좋아 온종일 피톤치드가 풍부한 공기 마시며 머물고 싶은 숲속이다. 스님을 꿈꾸며 가출하는 사람은 나이나 남녀가 따로 없다. 살다보면 흔히 보고 느끼지만, 막상 내가 속세를 떠나려고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마도 가는 길이 아니라서 담벼락처럼 앞이 막혀버린 느낌이다. 대학캠퍼스에서 불자들의 모임에서 단체로 가출했다는 소식을 방송에서 들었다. 그들은 행정고시과정을 마치고 직장에서 업무에 열정을 쏟던 국가의 일꾼들이라고 했다. 직위나 월급은 남들이 부러워하지만, 이들은 다시 모여 속세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각자의 삶은 수행의 길이라 생각하고 떠나겠다는 의견이 일치하여 일곱 명이 동시에 가출했다는 이색적인 뉴스를 접했다. 그들은 총각도 아니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녀까지 있었으나 불심에 매료하여 오욕을 버리겠다는 굳은 집념을 아무도 말리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이처럼 삶의 흐름이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것을 보고 우리는 살다 보면 이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한다. 이러하듯 내가 산속의 집을 찾아가는 근본적인 원인은 가출할 여건을 찾는다. 노년에도 일면엔 가출하겠다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는 나를 보더니 가출했더라면 큰 스님이 되었을 것인데 삶의 행로가 아니라서 어렵게 살아간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내 나이 일흔이 되어도 가출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슨 미련 때문에 가정을 버리지 못한 집념이라고 생각한다. 가출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내 생각일 뿐이다. 생활 속에서 사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도 삶의 견문에서 깨달았다. 가출하고 싶은 마음보다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 살다 보면 깨달음을 터득하겠지 하는 마음이다. 속세에 살면서 오욕을 버리려는 방법을 배우려고 산속의 집으로 발걸음 옮긴다. 계곡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향내가 지긋이 풍기며 불경 소리가 들린다. 예불 시간이 끝나지 않아 조용한 산사에는 적막감이 쌓일 정도로 움직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일주문을 지나면서 천천히 걸으며 사방을 살핀다. 발을 들고 걷듯이 소리 없이 살그머니 들어서면 양 옆에는 사천왕이 장엄한 모습으로 위험을 보일 때 손 모아 고개 숙였다. 절에 도착하니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징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공양 시간을 알리는 소리인 듯하다. 스님들은 목탁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징을 사용하는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찰은 본당에서 작은 여러 개의 암자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그 속에서 불경을 공부하는 행자나 스님에게 알리는 무선의 소식으로 느껴진다. 암자에 머물던 스님들도 발우를 들고 공양실로 모여들 때 밤손님을 알아보려고 깔아놓은 자갈을 밟으면서 발을 이고 오는지 소리 없이 들어선다. 법당에 들렀을 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세 동자승이 편안하게 앉아 불자들에게 깨우침을 주려는 모습으로 느껴진다. 좌측 동자승은 손으로 양 귀를 막았고 가운데 동자승은 손으로 양 눈을 가렸으나 우측에 앉은 동자승은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동자승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속세에서 언행을 조심해야 하겠다는 깨우침을 주는 모습이다. 세 동자승을 보면서 큰 스님이 설법하는 이상으로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다. 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행자를 생각하면 거지를 보듯 애처로움이 앞선다. 고난과 수난 속에서도 묵묵히 깨달음을 통해 수행하는 행자들의 모습은 환한 미소가 그들의 행복한 생활임을 느낄 수 있다. 각자 삶의 행로가 다르므로 행자들은 절간에서 느끼는 생활은 내가 구름 타고 날아가는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행자 생활에서 환한 웃음은 활짝 핀 야생화의 모습과 다르지 않게 보인다. 마음을 비운다는 행자들은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생활이 즐거워 보인다. 절에서 세 동자승의 모습을 보고 속세에서 반드시 실천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