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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입행입理入行入과 안심법문安心法門
서산대사는 선가구감 서문 첫머리에 “옛날에 불교를 학습하는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고, 부처님의 행실이 아니면 행하지 아니하였다.”(古之學佛者 非佛之言不言 非佛之行不行也)라고 하셨다. 불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에 대하여 밝은 안목을 갖추고, 또한 행해가 상응해야 한다. 그런데 후인이 이르기를 달마대사는 교외별전教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창했다고 한다. 달마대사의 본지풍광은 과연 그러한가? 위 제명은 달마대사의 근본법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이입과 행입은 그 근원을 찾아보면 금강삼매경 입실제품에 이른다. 이에 그 경문과 상호 연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입실제품入實際品의 이입과 행입
금강삼매경의 제5장이 입실제품이다. 실제實際를 진실제극眞實際極이라 한다. 제극이란 한제限際가 구극究極 또는 궁극窮極에 이르니 무한제無限際와 같다. 진실이 불가설불가설전에 이르니, 진실의 무한대 확장판이 바로 실제이다. 이에 진실구경眞實究竟의 경지라 말하기도 한다. 진여와 동의어다.
법화현의法華玄義는 실상實相 묘유妙有 진선묘색眞善妙色 실제實際 필경공畢竟空 여여如如 열반涅槃 허공虛空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중실이심中實理心 비유비무중도非有非無中道 제일의제第一義諦 미묘적멸微妙寂滅 등 14개 명칭을 들었다. 그밖에 일여一如 일여법계一如法界 일법계一法界 일진법계一眞法界 진여일실眞如一實 진여실상眞如實相 진여무상眞如無相 제법실상諸法實相 실상인實相印 대지인大智印 진실제眞實際 진실제眞實諦 진승의제眞勝義諦 성제聖諦 승의제勝義諦 실제이지實際理地 보광명지普光明智 부동지不動智 무의주지無依住智 필경지畢竟智 자각성지自覺聖智 불지佛智 여래지如來智 여여지如如智 자연지自然智 무애지無礙智 무착지無著智 무단지無斷智 무사지無師智 무치지無癡智 무이지無異智 무실지無失智 무량지無量智 무승지無勝智 무해지無懈智 무탈지無奪智 일체지一切智 일체종지一切種智 일체지지一切智智 제일의공第一義空 이심理心 불어심佛語心과 일심一心 등이 있다. 이상 43개 명칭을 추가한다. 실제이지實際理地에 서면 일진一塵도 수용受容하지 않지만, 불사문중佛事門中에서 보면 일법一法도 버릴 것이 없다.
입실제품은 실제에 들어가는 품이니, 실제에 들어가고자 하면 방편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존삼수일存三守一하여 여래선如來禪에 들어가는 것이다. 존삼存三이란 허공해탈과 금강해탈 반야해탈의 삼해탈을 말하고, 수일守一이란 일심이 일여一如함을 호지護持하는 것이며,(守一者守一心如) 여래선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이지理智로 일심이 청정 일여함을 관하고, 이와 같은 심지에 들어가면 바로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다.(入如來禪者 理觀心淨如 入如是心地即入實際) 먼저 대력보살大力菩薩이 묻고 다음 부처님이 답변하셨다. 그리고 해설한 논은 원효대사의 금강삼매경론의 관련 부분이다.
문: “마음이 만일 청정하여 모든 경계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 마음이 청정한 때는 응당 삼계도 없겠습니다.”(心若在淨 諸境不生 此心淨時 應旡三界)
답: “그러하다. 보살아, 마음이 경계를 일으키지 않으면 경계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나타나는 모든 경계는 오직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음이 환처럼 바뀌지 않으면 바로 나타내는 마음도 없다. 보살아, 안에 중생이 없고 삼성三性이 공적하면, 자기 무리도 없고 또한 타인의 무리도 없으며, 심지어 이입二入에도 또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로움을 얻으면 곧 삼계가 없다.”(如是 菩薩 心不生境 境不生心 何以故 所見諸境 唯所見心 心不幻化 卽旡所見 菩薩 內旡衆生 三性空寂 則旡己衆 亦旡他衆 乃至二入 亦不生心 得如是利 卽旡三界)
문: “어찌 이입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마음이 본래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이입이 있습니까?”(云何二入 不生於心 心本不生 云何有入)
답: “이입二入이란 첫째는 이입理入을 말하고, 둘째는 행입行入을 말한다. 이입이란 중생이 진성과 다르지 않지만 동일하지도 않고 함께하지도 않는데, 다만 객진번뇌로 인하여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는 것이다.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면서 응집하여 각관覺觀에 머물며, 불성을 자세히 관찰하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자기도 없고 남도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니다. 금강심金剛心의 경지에 굳세게 머물며 옮기지 않으면 적정한 무위라 분별이 없다. 이를 이입이라고 일컫는다.”(二入者 一謂理入 二謂行入 理入者 深信衆生不異眞性 不一不共 但以客塵之所翳障 不去不來 凝住覺觀 諦觀佛性 不有不旡 旡己旡他 凡聖不二 金剛心地 堅住不移 寂靜旡爲 旡有分別 是名理入)
논: 이 가운데 이입理入이란 이지理智를 수순하여 신해하지만 여전히 증행證行을 얻지 못한 것이니, 이 때문에 이입이라 이름하며, 지위는 지전地前에 있다. 행입行入이란 이지를 증득하고 수행하여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 때문에 행입이라 이름하며, 지위는 지상地上에 있다.(此中理入者 順理信解 未得證行 故名理入 位在地前 行入者 證理修行 入旡生行 故名行入 位在地上)
이입의 경문 중에 네 구절이 있다. “중생이 진성과 다르지 않지만 동일하지도 않고 함께하지도 않는데, 다만 객진번뇌로 인하여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십신의 이입이다. “동일하지 않다.”라고 한 것은 중생상이 진성과 다르지 않지만 동일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함께하지도 않는다.”라고 한 것은 또한 동일한 것도 또한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理入文中 有其四句 深信已下乃至翳障 是十信入 不一者 謂衆生相不異眞性 而非一故 不共者 非亦一亦異故)둘째 구절에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면서 응집하여 각관에 머물며”라고 말한 것은 십주의 이입이니, 중생이 공적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거나 가지 않는 것이며, 중인衆人이 공적한 문에서 고요하게 그 마음에 머무르고 불성을 각찰하면 가고 오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第二句言不去不來凝住覺觀者 是十住入 悟衆生空 故不來去 於人空門 靜住其心 覺察佛性 旡去來故)
셋째 구절에 “불성을 자세히 관찰하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라고 한 것은 십행의 이입이니, 이미 법공을 얻고, 법공문法空門에 의지하여 불성을 자세히 관찰하면, 법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성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第三句言諦觀佛性不有不旡者 是十行入 已得法空 依法空門 諦觀佛性 不有法相 不旡空性故)
넷째 구절에 “자기도 없고 남도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니다. 금강심의 경지에 굳세게 머물며 옮기지 않으면 적정한 무위라 분별이 없다.”라고 한 것은 십회향위의 이입에 이미 자타가 평등한 공적을 얻었음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마음이 금강과 같이 굳세게 머무르며 물러가지 않는 것이다. 범망경 가운데 십금강十金剛이라 이름하고, 인왕경 가운데 십견심十堅心이라 이름하니, 이는 십회향의 이명이다.(第四句言旡己旡他凡聖不二等者 是明十迴向位理入已得自他平等空 故心如金剛堅住不退 梵網經中名十金剛 仁王經中名十堅心 是十迴向之異名也)
답: “행입行入이란 마음이 편향되지 않고, 영상은 유변流變함이 없으니, 모든 곳에서 정념靜念으로 구함이 없는 것이다. 대풍大風의 고동鼓動에도 부동함이 마치 대지와 같고, 마음과 나를 버리고 떠나서 중생을 제도하는데, 마음의 생김도 없고 경상境相도 없으며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行入者 心不傾倚 影旡流易 於所有處靜念旡求 風鼓不動 猶如大地 捐離心我 救度衆生 旡生旡相 不取不捨)
논: 이는 지상地上에서 증입하는 행을 밝힌 것이다. “마음이 편향되지 않고”라고 한 것은 여리지如理智의 마음이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고, 반연하는 마음은 생기生起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상은 유변함이 없다.”라고 한 것은 여리지의 경계는 삼제三際를 여의었기 때문이고, 유변하는 경상境像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일체 세간의 복락과 심지어 보리 대열반의 과위果位까지, 여기에서 일체를 모두 구하고자 원하는 바가 없는 것은 평등함을 통달하여 피차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경계의 대풍이 고동하는 바가 아니다. 이는 자리의 행입을 밝힌 것이다.(是明地上證入之行 心不傾倚者 如理智心不攀緣故 攀緣之心不生起故 影旡流易者 如理之境離三際故 流變境像不復現故 所有一切世間福樂乃至菩提大涅槃果 於是一切皆旡願求 通達平等旡此彼故 故非境界風所鼓動 是明自利行入)
“마음과 나를 버리고 떠나서 중생을 제도하는데, 마음의 생김도 없고 경상境相도 없으며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라고 한 것은 타인으로 하여금 행입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이공二空을 증득하면 인상人相과 법상法相을 여의며, 이 때문에 널리 일체를 제도할 수 있다. 비록 마음이 생김이 없고 또한 경상도 없지만, 그 적멸의 성상性相을 취하지 않으며, 항상 일체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이러하기 때문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고 말한 것이며, 이와 같은 이행을 일컬어 행입이라 한다.(捐離己下 令他入行 以證二空 離人法相 故能普遍救度一切 雖心旡生 亦旡境相 而不取其寂滅之性 恒不捨於一切衆生 以之故言 不取不捨 如是二行 名爲行入)
답: “보살아, 마음은 나가거나 들어옴이 없고, 나가거나 들어오는 마음도 없으니, 들어감이 없는 곳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이름을 입入이라 한다.”(菩薩 心旡出入 旡出入心 入不入故 故名爲入)
논: 이는 둘째 저 논란을 회통하는 것이다. 이지를 증득하는 마음은 생멸을 멀리 여의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이 때문에 “마음은 나가거나 들어옴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나가거나 들어옴이 없고 나면 또한 옛적에 나가거나 들어오는 마음도 없으며, 이 때문에 “나가거나 들어오는 마음도 없다.”라고 한 것이다. 옛적에 있었던 나가거나 들어오는 마음을 버리고 여기에 들어오면 나가거나 들어오지 않는 마음이다. 이 때문에 “들어감이 없는 곳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이름을 입入이라 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앞의 논란이 훌륭한 회통을 얻은 것이다.(此是第二通彼所難 證理之心 遠離生滅 旡始旡終 故心旡出入 旡出入已 亦旡昔日 出入之心 故旡出入心 去昔有出入心 入此不出入心 故言入不入故 故名爲入 如是前難得善通也)
답: “보살아, 이와 같이 법에 들어가면 법상이 공적하지 않고, 공적하지 않은 법이면 법이 허망하게 버려지지는 않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없어지지 않은 법은 공덕을 갖추고 있으며,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니, 법이 이와 같이 청정하다.”(菩薩 如是入法 法相不空 不空之法 法不虛棄 何以故 不旡之法 具足功德 非心非影 法爾淸淨)
논: “이와 같이 법에 들어가면”이란 실제에 들어갔음을 말한다. 출입이 없는 법은 없어지지 않는 법이며, 능소가 평등하여 모든 과실과 우환을 여의고 모든 공덕을 구족한다.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마음과 경계가 평등하여 능소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법이 이와 같이 청정하다.”라고 한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모든 형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다.(如是入法者 謂入實際 旡出入法 是不旡法 能所平等 離諸過患 具諸功德 非心非影者 心境平等 離能所故 法爾淸淨者 旡始旡終 離諸相故)
2.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삼장의 안심법문安心法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는 능가종의 초조를 능가아발다라보경 4권을 번역한 구나발타라 삼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안심법문이 있다. 아래와 같다.
“우리 중국中國은 정법이 있는데 비장秘藏하고 죽간竹簡을 전하지 않는다. 인연이 있거나 근기가 순숙한 이는 길거리에서 어진 현인을 만나고 길을 걷는 가운데 받을 수도 있다. 만일 어진 현인을 만나지 못하면 부자간에도 주거나 받을 수 없다. 능가경에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이라 한다. 내가 이 법을 전수할 때는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라야 옳다. 이 법은 삼승을 뛰어넘고, 십지를 초월하며, 구경에는 불과의 주처이다. 다만 정심靜心하여 스스로 알 수 있을 뿐이니, 무심히 양신養神하고, 무념으로 안신安身하며, 한적한 처소에서 정좌淨坐하고, 본심을 지켜 진제에 돌아갈 수 있다. 나의 법은 비장되어 정묵靜黙하니, 범부나 우인 식견이 천박한 이를 위하여 전할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복덕이 두터운 사람이라야 바로 받고 행할 수 있다. 만일 당처를 알지 못하면 여섯 명 중에 일곱 여덟 명이 있고, 만일 당처를 안다고 해도 여덟 명 중에 여섯 일곱 명은 없다. 부처가 되고 싶은 이는 먼저 안심을 배워야 한다. 마음이 여전히 안정하지 못하는 때에는 선행도 오히려 선행이 아닌데, 더군다나 그러한 악행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마음이 안정을 얻은 때에는 선행과 악행이 모두 의지할 곳이 없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법과 법이 서로 알지 못한다.’라고 한다. 이 국토에 이르러 지금까지 오면서 오히려 도를 닦는 사람도 보지를 못했는데, 더군다나 안심한 이야 말할 것이 있으랴.”(我中國有正法 秘不傳簡 有緣根熟者 路逢良賢 途中受與 若不逢良賢 父子不得 楞伽經云諸佛心第一 我教授法時 心不起處是也 此法超度三乘 越過十地 究竟佛果處 只可默心自知 無心養神 無念安身 閑居淨坐 守本歸眞 我法秘默 不爲凡愚淺識所傳 要是福德厚人 乃能受行 若不解處 六有七八 若解處 八無六七 擬作佛者 先學安心 心未安時 善尚非善 何況其惡 心得安靜時 善惡俱無依 華嚴經云 法法不相知 至此國來 尚不見修道人 何況安心者)
“지금 안심이라 말한 것은 대략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배리심背理心은 지난 한때의 범부심凡夫心을 말한다. 둘째 향리심向理心은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추구함을 말하며, 지취가 적정寂靜에 다가가니 성문심聲聞心이라 일컫는다. 셋째 입리심入理心은 비록 장애를 다시 끊고 이지를 드러냈지만 능소가 여전히 없어지지 않음을 말하며, 이것이 보살심菩薩心이다. 넷째 이심理心은 이지理智 밖에 이지가 없고, 마음 밖에 마음이 없음을 말한다. 이지가 곧 마음이라 마음이 평등할 수 있으니 이를 일컬어 이지라 하고, 이지가 비추어주면 밝아질 수 있으니 이를 일컬어 마음이라 하며, 마음과 이지가 평등하니 이를 일컬어 부처라 한다. 마음으로 실성實性을 깨달은 이는 생사와 열반에 차별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범부와 성인이 다름이 없고, 경계와 이지는 둘이 없으며, 이사가 함께 원융하고, 진속眞俗을 가지런히 관찰하면 염정染淨이 일여하니, 부처와 중생이 본래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今言安心者 略有四種 一者背理心 謂一向凡夫心也 二者向理心 謂厭惡生死 以求涅槃 趣向寂靜 名聲聞心也 三者入理心 謂雖復斷障顯理 能所未亡 是菩薩心也 四者理心 謂非理外理 非心外心 理即是心 心能平等 名之爲理 理照能明 名之爲心 心理平等 名之爲佛 心會實性者 不見生死涅槃有別 凡聖爲異 境智無二 理事俱融 眞俗齊觀 染淨一如 佛與衆生 本來平等一際)
위 문장 중에 우리 중국은 천축국을 말하며, 죽간竹簡은 왕명으로 국외에 반출을 금하는 일승 경전을 말한다. 범성위이凡聖爲異는 범성무이凡聖無異가 옳을 것이다. “마음으로 실성을 깨달은 이”는 생사와 열반의 차별상을 보지 않는데, 어찌 범부와 성인의 일이상一異相인들 보겠는가. 아래는 종경록에서 발췌했다. 위 내용보다 더 간략하다.
“구나발타라 삼장이 말씀한 것이다. ‘이심理心이란 마음이 이지 밖에 없고, 이지도 마음 밖에 없다. 마음이 곧 이지이고, 이지가 바로 마음이다. 마음과 이지가 평등하니 이를 일컬어 이지라 하고, 이지가 비추어주면 밝아질 수 있으니 이를 일컬어 마음이라 하며, 마음과 이지가 평등함을 깨달으면 이를 일컬어 부처라 한다. 마음으로 실성을 깨달은 이는 생사와 열반에 차별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범부와 성인이 다름이 없고, 경계와 이지는 일여하며, 이사가 함께 원융하고, 진속을 가지런히 관찰하면 원통하고 무애하니, 대도를 닦는다고 일컫는다.’”(跋陀三藏云 理心者 心非理外 理非心外 心即是理 理即是心 心理平等 名之爲理 理照能明 名之爲心 覺心理平等 名之爲佛 心會實性者 不見生死涅槃有別 凡聖無異 境智一如 理事俱融 眞俗齊觀 圓通無礙 名修大道)
이심理心에 대한 해설이 능가사자기와 종경록에 다른 점이 있다. 결과는 “마음이 곧 이지이고, 이지가 바로 마음이다. 마음과 이지가 평등하니 이를 일컬어 이지라 한다.(心即是理 理即是心 心理平等 名之爲理)”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개과정이 전자는 “이지 밖에 이지가 없고, 마음 밖에 마음이 없다.(非理外理 非心外心)”라고 하고, 후자는 “마음이 이지 밖에 없고, 이지도 마음 밖에 없다.(心非理外 理非心外)”라고 한다. 전자는 이지도 유일하고 마음도 유일하다. 양자가 모두 유일하기 때문에 이지가 곧 마음이다. 후자는 마음과 이지가 부즉불리不卽不離하다.
3. 보리달마의 약변대승입도사행略辨大乘入道四行
달마대사의 이입 행입과 사행론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의 약변대승입도사행 그리고 선문촬요禪門撮要 등에 있다. 여기서는 앞에 제자담림서弟子曇林序 부분만 번역했다.
법사는 서역의 남천축국인이고, 대바라문 국왕의 셋째 왕자이다. 신혜神慧가 확 트여서 밝고, 들으면 모두 분명하게 깨달았으며, 뜻을 마하연의 도에 두었다. 이 때문에 백의를 버리고 치문을 쫓으며, 성현의 종자를 이어받아 흥성하게 하며, 마음을 그윽하게 하여 허무적멸하고, 세간의 일에도 명백히 비추어주니, 내전과 외전에 모두 통달하여 그 덕망이 세간의 밖을 초월했다. 변방에 정교正教가 쇠락함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드디어 멀고 먼 산과 바다를 건너서 한위漢魏를 유행하며 교화했다. 마음을 잊고 적묵寂默하는 선비는 귀의하여 믿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상을 취하고 견처가 있는 부류들은 바로 시기하고 비방하였다.(略辨大乘入道四行 弟子曇林序 法師者西域南天竺國人 是大婆羅門國王第三之子也 神惠疏朗 聞皆曉悟 志存磨訶衍道 故捨素從緇 紹隆聖種 冥心虛寂 通鑒世事 內外俱明 德超世表 悲悔邊隅正教陵替 遂能遠涉山海 遊化漢魏 亡心寂默之士 莫不歸信 取相存見之流 乃生譏謗)
그 때에 오직 도육과 혜가만 있었다. 이 두 사문은 연령은 비록 후생이지만 지닌 의지가 고원하고, 다행히 법사를 만나서 여러 해를 시봉하며, 공경히 자문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받았다. 법사가 그 정성에 감동하여 진도眞道로 교도敎導하시니, “이와 같은 안심安心이고, 이와 같은 발행發行이며, 이와 같은 순물順物이고, 이와 같은 방편方便이니라. 이것이 바로 대승의 안심법문安心法門이니 틀림이 없게 하라.”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안심이란 것은 벽관壁觀이고, 이와 같은 발행이란 것은 사행四行이며, 이와 같은 순물이란 것은 시기나 혐오를 방호防護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방편이란 것은 그것을 버리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인유를 간략히 서술한 것이며, 대의는 후문에 있다.(於時唯有道育惠可 此二沙門 年雖後生 攜志高遠 幸逢法師 事之數載 虔恭諮啟 善蒙師意 法師感其精誠 誨以眞道 如是安心 如是發行 如是順物 如是方便 此是大乘安心之法 令無錯謬 如是安心者壁觀 如是發行者四行 如是順物者防護譏嫌 如是方便者遣其不著 此略序所由 意在後文)
4. 보리달마사행론 입도수행강요문入道修行綱要門
경허스님이 편찬한 선문촬요 중에 보리달마사행론이 있다. 제일장 입도수행강요문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무릇 도에 들어감에 길이 많지만, 간단히 말한다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는 이입이고 둘은 행입이다. 이입이란 경교經敎에 의지하여 종취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함생含生이 동일한 진성眞性인 줄을 깊이 믿지만, 단지 객진망상客塵妄想이 되어 뒤덮어진 것이라 드러날 수 없다. 만일 망상을 버리고 진성으로 돌아가서 응심凝心하고 벽관하면, 나도 없고 남도 없으며, 범부와 성현 등이 일여하다. 굳세게 머무르며 옮기지 않는다면 다시는 언교를 따를 것이 없다. 이는 곧 이지와 그윽이 부합하여 분별이 없으니 적연寂然한 무위이다. 이를 이입이라 일컫는다.(夫入道多途 要而言之 不出二種 一是理入 二是行入 理入者 謂藉教悟宗 深信含生同一眞性 但爲客塵妄想所覆 不能顯了 若也捨妄歸眞 凝心壁觀 無自無他 凡聖等一 堅住不移 更不隨於言教 此即與理冥符 無有分別 寂然無爲 名之理入)
행입이란 이른바 사행이다. 그밖에 나머지 모든 행은 이 사행 안에 다 들어있다. 어떤 것들이 사행인가? 첫째는 보원행이고, 둘째는 수연행이며, 셋째는 무소구행이고, 넷째는 칭법행이다.(行入者 所謂四行 其餘諸行悉入此中 何等爲四 一報怨行 二隨緣行 三無所求行 四稱法行)
무엇이 첫째 보원행報怨行인가? 도행道行을 닦는 사람이 만일 고통을 받을 때에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기를, “내가 과거 지나온 한량없는 겁 가운데 근본을 저버리고 지말을 좇아서 육도를 윤회하며 수많은 원증怨憎을 일으키고 한없이 위협하며 해쳤다. 비록 금생에는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지금 수많은 고통을 받는 것은 내가 숙세의 앙화와 악업의 열매가 익어서 나타난 것이며, 하늘이나 타인이 이를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참고 받아들이며 전혀 원통하다고 호소할 마음이 없다. 경에 이르기를 “고통을 마주쳐도 근심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어째서 그러한가? 업식業識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이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생길 때 이지로 더불어 상응하면 원심怨心을 체달하여 도문에 나아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보원행이라 말한다.(云何第一報怨行者 修道行人 若受苦時 當自念言 我從往昔無數劫中 棄本從末 流浪諸有 起多怨憎 違害無限 今雖無犯 是我宿殃惡業果熟 非天非人所能見與 甘心忍受 都無怨訴 經云 逢苦不憂也 何以故 以識達故 此心生時 與理相應 體怨進道 是故說言報怨行)
둘째는 수연행隨緣行이다. 중생이란 참나가 없고 아울러 업식을 반연하므로 육도에 유전流轉하며, 고락苦樂을 함께 받는 것이 모두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다. 만일 수승한 과보나 영예 등의 일을 얻을지라도 이는 나의 과거 숙세에 인연이 감응한 것이며, 지금에야 비로소 이를 얻을지라도 그 수승한 인연이 다하면 오히려 없어지고 만다. 어찌 이를 기뻐하고만 있겠는가. 얻고 잃음이 인연을 따르는지라 마음에는 증감增減이 없다. 희풍喜風에도 부동하며 그윽이 도를 수순隨順한다. 이 때문에 수연행이라 말한다.(第二隨緣行者 衆生無我 並緣業所轉 苦樂齊受 皆從緣生 若得勝報榮譽等事 是我過去宿因所感 今方得之 緣盡還無 何喜之有 得失從緣 心無增減 喜風不動 冥順於道 是故說言隨緣行)
셋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이다. 세상 사람들이 장겁長劫을 미혹하여 이르는 곳마다 탐착하니, 이를 구하는 행이라 일컫는다. 지혜로운 이는 진성을 깨닫고서 이지를 세속으로 되돌리며, 안심경계安心境界는 적정함에 신체도 안심을 따라 운행하며, 만유는 바로 공하여 원하는 쾌락도 없다. 공덕천녀와 흑암천녀가 항상 서로 뒤쫓아 따르니, 삼계에 오래 거주해도 오히려 화택과 같다. 몸이 있으면 모두 고행이라 누가 이를 얻고서 평안하랴. 이곳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일체를 버리며, 망상을 쉬고 구하는 행이 없다. 경에 이르기를, “구함이 있으면 모두 고행이고, 구함이 없으면 바로 즐거움이다.”라고 한다. 구함이 없는 줄을 분명히 알면 진실로 도행이다. 이 때문에 무소구행이라 말한다.(第三無所求行者 世人長迷 處處貪著 名之爲求 智者悟眞 理將俗反 安心無爲 形隨運轉 萬有斯空 無所願樂 功德黑暗 常相隨逐 三界久居 猶如火宅 有身皆苦 誰得而安 了達此處 故捨諸有 息想無求 經云 有求皆苦 無求乃樂也 判知無求 眞爲道行 故言無所求行)
넷째는 칭법행稱法行이다. 자성이 청정한 이지이니, 이를 간주하여 법이라 한다. 이 이법은 모든 상이 곧 공하여 오염이 없고 집착도 없으며,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 경에 이르기를, “법에는 중생상衆生相이 없으니 중생상의 허물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법에는 아상我相이 없으니 아상의 허물을 여의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지혜로운 이들이 만일 이 도리를 신해할 수 있다면 응당 법에 칭합하게 행해야 한다. 법체에는 간탐慳貪이 없으니, 몸과 목숨과 재물까지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희사한다. 마음에 간석慳惜이 없으니, 삼공三空을 달통하여 의지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단지 허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중생을 섭화하지만 상을 취하지는 않는다. 이는 자신을 이롭게 하지만, 다시 남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며, 또 보리의 도를 장엄할 수도 있다. 보시바라밀이 이미 이와 같고, 나머지 다섯 바라밀도 또한 그러하다. 망상을 제거하기 위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지만 행하는 바가 없다. 이것이 칭법행이다.(第四稱法行者 性淨之理 目之爲法 此理衆相斯空 無染無著 無此無彼 經云 法無衆生 離衆生垢故 法無有我 離我垢故 智者若能信解此理 應當稱法而行 法體無慳貪 於身命財 行檀捨施 心無慳惜 達解三空 不倚不著 但爲去垢 攝化衆生 而不取相 此爲自利 復能利他 亦能莊嚴菩提之道 檀施既爾 餘五亦然 爲除妄想 修行六度 而無所行 是爲稱法行)
5. 금강삼매경과 달마대사의 이입理入
금강삼매경 입실제품에 이입과 행입이 있고, 달마대사의 사행론에도 또한 이입과 행입이 있는데, 양쪽의 이입은 공통점이 매우 많다. 첫째 입실제품의 “중생이 진성과 다르지 않음을 깊이 믿지만”(深信衆生不異眞性)이 사행론은 “함생이 동일한 진성인 줄을 깊이 믿지만”(深信含生同一眞性)이고, 둘째 전자는 “다만 객진번뇌로 인하여 가려져 있는 바”(但以客塵之所翳障)가 후자는 “단지 객진망상이 되어 뒤덮어진 것이라”(但爲客塵妄想所覆)이며, 셋째 전자는 “응집하여 각관에 머물며”(凝住覺觀)가 후자는 “응심하고 벽관하면”(凝心壁觀)이고, 넷째 전자는 “자기도 없고 남도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니다.”(旡己旡他 凡聖不二)가 후자는 “나도 없고 남도 없으며 범부와 성현 등이 일여하다.”(無自無他 凡聖等一)이며, 다섯째 전자는 “금강심의 경지에 굳세게 머물며 옮기지 않으면”(金剛心地 堅住不移)이 후자는 “굳세게 머무르며 옮기지 않는다면”(堅住不移)이고, 여섯째 전자는 “적정한 무위라 분별이 없다.”(寂靜旡爲 旡有分別)가 후자는 “분별이 없으니 적연한 무위이다.”(無有分別 寂然無爲)이다. 글자는 조금 다른 곳도 있지만 대의는 거의 동일하다. 이를 의거하면 보리달마사행론의 이입은 금강삼매경 입실제품을 근본으로 삼았음이 분명하다.
달마대사가 숭산 소실봉 소림굴에 들어가서 9년 동안 면벽하고 좌선함에 세인世人이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 또는 벽관호승壁觀胡僧이라 호칭했다. 이 벽관壁觀은 면벽정관面壁靜觀이고 선관禪觀이다. 그러나 금강삼매경의 응주각관凝住覺觀과 달마대사의 응주벽관凝住壁觀 또는 응심벽관凝心壁觀은 동의어로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
이를 의거하여 나는 벽관壁觀은 곧 각관覺觀이라 정의한다. “불성을 자세히 관찰하고자 하면”(諦觀佛性) 반드시 “응집하여 각관覺觀에 머물러야 한다.”(凝住覺觀) 이 각관이 바로 벽관이다. 벽관은 곧바로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으로 들어가는 관문觀門이다.
6. 능가경의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
이 사행은 달마선사의 친설親說이고, 나머지는 제자 담림이 스승의 언행을 기록하고 편집하여 1권으로 만들고 제명을 달마론이라 했다. 보리달마대사는 또 좌선하는 대중을 위하여 능가요의 1권을 주석했는데 12~3쪽이며, 또한 달마론이라 제명했다.(此四行 是達摩禪師親說 餘則弟子曇林 記師言行 集成一卷 名曰達磨論也 菩提師又爲坐禪衆 釋楞伽要義一卷 有十二三紙 亦名達磨論也)
당조의 기주 쌍봉산 도신선사는 승찬선사를 계승한 후예이다. 그 도신선사가 선문을 거듭 넓게 펼쳐서 천하에 유포하였다. 보살계법 1본이 있고, 이어서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을 저술하여 인연이 있거나 근기가 순숙한 이들을 위하여 설했다. 나의 이 법요는 능가경의 제불심제일을 의거하며, 또한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를 의거한다. 곧 염불하는 마음이 부처이고 망념이 범부이다.(唐朝蘄州雙峰山道信禪師 承粲禪師後 其信禪師再敞禪門 宇內流布 有菩薩戒法一本 及制入道安心要方便法門 爲有緣根熟者說 我此法要 依楞伽經諸佛心第一 又依文殊說般若經一行三昧 即念佛心是佛 妄念是凡夫)
능가사자기에 기록된 위 양편의 글에 의거하면, 달마대사의 본래면목은 사행론과 능가요의이며, 도신선사의 진면목도 또한 능가경의 제불심제일과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를 포괄한 입도안심요방편법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양사가 저술한 원본이 전부 소실되어 전문을 알 수 없는 점은 매우 아쉽지만, 능가사자기에서 편린이나마 남아있어서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제불심제일의 뜻을 해인사문 덕청스님은 관능가경기에서 아래와 같이 해설했다.
위없는 세간해께서는 대혜가 설한 게송을 들으셨네.
대승의 모든 바라밀이고 제불의 마음 첫째 법문이로다.
옳고 옳게 질문했구나. 대혜야 자세히 잘 들을지니라.
내가 이제 그 차제를 너의 질문과 같이 설하겠노라.
無上世間解 聞彼所說偈 大乘諸度門 諸彿心第一
善哉善哉問 大慧善諦聽 我今當次第 如汝所問說
상구는 결집한 분이 서술해 놓은 것이고, 하구는 부처님이 찬탄하고 허락하신 말씀이다. 앞의 한 게송을 실차난타 삼장의 당역에 이르기를, “그때에 세존이 그가 청한 대승의 미묘하고 제불의 마음인 최상법문을 들으셨다.”라고 한다. 그러나 대혜가 의문한 바 십법계 의보와 정보의 차별상은 바로 삼승이나 범부 외도의 망견 분별의 경계이다. 진실로 대혜가 이를 말미암이 질의를 일으킨 것이지만, 대체로 이러한 등류의 모든 법이 무엇을 인하여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짐짓 이 의문을 일으킨 것이고, 결집한 분도 바로 이를 가리켜 미묘한 불심의 최상법문으로 삼은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금강반야경에 이르기를, “일체 현성이 모두 무위법을 쓰지만 차별이 있다.”라고 하는데, 하물며 중생의 세계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이른바 일체 분별이 모두 분별하는 자기 마음이다. 만일 분별이 생기지 않으면, 그 당체를 바로 제불의 자각성지라 일컫는다. 짐짓 이처럼 의문한, 성인 범부의 의보와 정보, 삿되거나 올바른 인과는 그 자성이 상주하며, 바로 이것이 미묘한 불심이니, 지안으로도 명견明見할 바가 아니다. 무엇이 이와 함께하겠는가. 이 때문에 그 사구게를 서술해 놓은 것이다.(記曰. 此結集者敘置 及佛贊許之辭也 前一偈 唐譯云 爾時世尊聞其所請大乘微妙諸佛之心最上法門 然大慧所問 乃十界依正差別之相 正是三乘凡夫外道妄見分別境界 實大慧因之而起疑者 蓋不知此等諸法因何而有也 故興此問 而結集者即便指爲微妙佛心最上法門 何也 金剛般若云 一切賢聖皆以無爲法而有差別 況衆生世界乎 所謂一切分別皆分別自心 若分別不生 當體即名諸佛自覺聖智矣 故此所問聖凡依正邪正因果 自性常住 即是微妙佛心 非智眼明見 何以與此 故敘置之)
달마대서는 능가경 4권을 혜가대사에게 전하고, 능가요의를 저술했으며, 도신대사는 제불심제일諸彿心第一을 능가경의 골수로 파지했다. 제불심제일의 용어는 부처님이 친히 말씀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당역에서 “대승의 미묘하고 제불의 마음인 최상법문”(大乘微妙諸佛之心最上法門)이라 기술한 바와 같이, 미묘하고 부사의하여 지안도 감당하지 못하고 오직 불안이라야 감당할 수 있는 경계이다. 제불심제일이 최상법문이고, 바로 안심법문이다. 안심법문은 능가종의 능가사楞伽師가 시종일관하여 추구하는 구경의 법문이다.
능가사자기에 의하면 역대 능가사는 다음과 같다. 초조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이조 보리달마菩提達磨, 삼조 혜가慧可, 사조 승찬僧粲, 오조 도신道信, 육조 홍인弘忍, 칠조 신수神秀 현책玄賾 노안老安, 팔조 보적普寂 경현敬賢 의복義福 혜복惠福 등이다. 홍인대사의 문하에 지선智詵대사가 있고, 그 법계는 처적處寂 무상無相 무주無住로 이어진다.
7. 근원으로 돌아가라
후인이 달마대사의 종지라 주창하는 교외별전教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중에 교외별전이 가장 이채롭다. 대승과 일승 경전은 모두 인심을 직지하고 견성성불을 언급하지 않음이 없다. 불립문자도 또한 “내가 어떤 날 밤에 최정각을 얻고 나서 어떤 날 밤에 열반에 들어가기까지 그 중간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我從某夜得最正覺 乃至某夜入般涅槃 於其中間 乃至不說一字)라는 구절 중에 불설일자不說一字를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부처님이 한 글자도 설하지 않으셨다면, 교외별전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일찍이 말씀한 경교가 없는데 어찌 경교 밖에 선지가 따로 있겠는가?
보살이 여래선을 의거하여 수행하면 여래가 되고, 조사를 지향하는 범부가 조사선을 의거하여 수행하면 조사가 될 것이다. 여래는 법신이 있고 보신이 있으며 화신이 있다. 일체 미진수 여래의 법신과 보신은 모두 평등하다. 불설일자는 화신불의 경계가 아니다. 일체 미진수 여래의 화신은 동일하지 않다. 가령 응공은 어떠한가? 아라한이 바로 응공이다. 이 응공의 경계가 선서 세간해 여래나 정변지 등과 동일한가?
법계도기총수록에서는 34심 또는 34념으로 습기를 끊고 보리를 얻는 부처(三十四念斷結得菩提之佛)와 자수용불自受用佛 종교불終教佛 돈교불頓教佛 그리고 보현안普賢眼의 원교불圓教佛을 차제로 거론하고 있다. 이는 화엄종에서 일대시교를 소승 대승시교 대승종교 돈교 원교로 나누는 5교불신관五教佛身觀을 말한다. 각각 수행하는 교법이 다르기 때문에 증득하는 과불果佛도 또한 다르게 시현示現한다. 이 때문에 통현장자는 삼승보살의 십일지 등각위가 바로 화엄의 초발심주에 상당한다고 말씀한 것이다.(이상은 이전에 쓴 글을 인용한 것임)
금강반야경에 이르기를, “일체 현성이 모두 무위법을 쓰지만 차별이 있다.”라고 하는데, 하물며 중생의 세계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바로 위에서 쓴 글이다. 차별이 어찌 중생과 성현에게만 있다고 한정할 수 있겠느냐? 화신불도 또한 차별이 있다. 조사선을 주장하는 이들이 말하는 조사의 경계는 아마도 미진수의 화신 중에 그 하나보다 더 높을 수는 있을 수도 있겠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는 무한한 가정 중에 하나이다. 영명연수 스님의 종경록이나 주심부에는 조사선이란 용어가 없다. 여래선보다 더 높다고 하는 조사선은 종경宗鏡으로 삼을 만하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역에도 불원복不遠復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를 신행하는 사부대중도 또한 그러하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근원으로 돌아가라.
2021년 6월 5일 73세 길상묘덕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