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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선배들이 무게 있는 말로 조언했다. 우쭐대던 선배들은 자기가 아내 잡아 놓은 무용담을 앞 다투어 늘어놓았다.
“옛날부터 여자는 빨강치마 입었을 때 꽉 잡아 놔야 된다고 했어. 명심해야 돼.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내를 내 소유로 만드는 거야”
결혼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그 소유라는 뜻을 자세히 물어 봤다. 여자는 내 만년필 손목시계 지갑처럼 내가 서랍에 두고 싶으면 서랍에 두고, 앞주머니에 넣고 싶으면 앞주머니에 넣을 수 있어야 된다고 했다.
결혼을 했다. 아내를 어떻게 사랑할까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잡아서 숨 못 쉬게 기죽여야 할까를 고민하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지금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고, 안경의 코걸이에 매달고 싶은 아내지만, 언제 어떤 괴물로 바뀔는지 모르는 것이 여자라니 어쩌랴?
나는 아내를 기죽이려고 빈틈없이 계획을 짜서 이상한 짓이나 말도 해 봤다. 어느 날 보면 꽉 잡힌 것 같아 마음이 놓이던 아내가, 그 이튿날 보면 또 아니다. 경고와 엄포를 섞어놓은 후, 이제는 잡혔겠지 하며 안심하고 이틀 후에 보면, 또 말짱 헛일이 되어 있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남편인 내가 지레 죽게 생겼다. 목표는 미달상태였지만 그래도 아내가 나를 잡으려고 덤비진 않으니, 즐거울 수밖에 없었고 꿈처럼 아름다운 시간은 흘러갔다. 얼마 후 미국이라는 새 땅에 와서 새 인생을 시작하니까, 그동안 노력했던 아내잡기는 처음부터 도루묵이 되어 버렸다.
“이에라 이 등신아, 너 못 잡을 줄 알았다” 친구들의 야유가 귀를 간질여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지만, 당장 먹고 살기 죽겠는 터라 아내잡기에까지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남부 스페인 해변 길을 이른 아침에 지나가게 되었다. 밤새 썰물이 지나간 모래사장은 넓고 깨끗했다. 그 모래밭에는 두 연인이 중간까지 걸어 들어간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있었다. 그 발짝은 서로 2m 정도 떨어져 있어서 그들이 손잡고 들어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각자 자기의 깔개를 가지고, 서로 이야기하며 나란히 걸어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여자가 약간 좌로 걸으면 모르는 사이에 남자도 약간 좌로 치우쳐 걷고, 남자가 우로 벌리면서 걸으면, 벌린 만큼 여자가 우로 달라붙으며 걸었다. 기차선로처럼 나란히 움직인 발짝만 봐도, 그들이 깊이 사랑하고 있는 사이임을 보여 준다.
그들의 깔개도 2m 정도 떨어진 상태로 깔려있음은 그들이 거기서 서로 부둥켜안았던 적이 없었음을 알려준다. 그들은 각자의 깔개에 누워서 아침햇살로 각각 선탠을 즐기고 있다. 그들은 딱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떨어져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사이의 간격은 사랑의 대화를 나누기엔 충분히 가깝고, 잔소리나 지나친 요구를 하기엔 너무 먼 거리다.
사랑의 증표인 양, 두 남녀는 발을 똑같이 바다 쪽으로 향하고, 닮은꼴의 자세로 나란히 누워있다. 둘이 똑같이 노란 바탕에 검은 얼룩무늬 수영복을 입고, 둘이 똑 같이 빨간 깔개를 깔았다. ‘매기의 추억’을 듀엣으로 부를 수 있는 거리지만, 깔개를 오고가며 싸울 수는 없는 거리다. 저들 사이의 적당한 간격은 둘 중 누가 정했을까? 누울 장소를 정하느라 머뭇거렸던 발자국도 없고, 의견을 조율하느라 헤맸던 흔적도 없다. 직접 깔개로 들어간 발짝 모양새는 그들이 서로 얼마나 협조적이고 죽이 척척 잘 맞는 남녀인지를 보여준다.
인류역사상 아내를 맘대로 조종할 수 있었던 남자가 있었을까? 만년필이나 지갑처럼 주머니에 넣고 싶으면 주머니에 넣고 서랍에 두고 싶으면 서랍에 두는 남자가 있었을까? 인도에도 없었고, 이란에도 없었다. 선배들의 무용담은 허풍이었으며, 그들의 아내무섬증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었기 쉽다. 물론 내 이야기도 뒤돌아보는 옛날 일에 불과하지만, 이조시대도 고려시대도 그런 말캉한 여자는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기막히다며 마빡 치고, 미련한 남편이라며 잔소리 쏟아붓는 아내와 사는 것은 고달플 것이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남편이 하는 말끝마다 고개 돌려버리며, 잘난 체하는 아내는 정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견이 전혀 없어, 남편만 쳐다보는 아내는 더 피곤할 것이다. 더욱이 낯선 땅 미국에서 살려면 부부가 서로 타협하고 의론하여 최상의 결론을 이끌어 내야만 살아갈 수 있다. 남부 스페인의 아침 모래밭에서 본 그림은, 부부가 배워야 될 사랑의 기초그림인 듯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