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 이익(李瀷)의 《서경질서(書經疾書)》 서문 -
《서경》은 설명하기가 가장 어렵다. 오래된 경문(經文)으로는 《역경》, 《시경》, 《서경》만한 것이 없는데, 《역경》과 《시경》의 글은 모두 문왕(文王)의 시대에 기원하였다. 천 년 뒤에 정씨(鄭氏: 정현(鄭玄))가 《역경》을 주석하고 모씨(毛氏: 모형(毛亨)과 모장(毛萇))가 《시경》을 주석하였는데, 그 언어와 문장은 고금이 매우 달라 소리 값이 같다고 하여 바꿔 읽기도 하고 글자가 잘못되었는데 알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리도 또 천 년 뒤 송(宋)나라 학자들의 경우에는 한(漢)나라의 문자도 간혹 이해하지 못하였으니 더욱이 경문의 본뜻에 바로 부합하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서경》은 요순(堯舜) 시대에 기원하여 《역경》, 《시경》과는 또 천 년의 시대적 차이가 있고, 나는 또 송나라 학자들보다 5백년 뒤에 태어났으니, 내가 한나라와 송나라 학자들이 알아내지 못한 뜻을 함부로 헤아리려고 한다는 것은 분명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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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말하기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해야 한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안다[知]’는 것은 아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또한 모르는 것도 분명히 아는 것이니, 그저 양쪽이 분명한 것일 뿐이다.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안다고 하는 자는 아는 것도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서경》을 설명하면서 빼놓는 것이 없는 자는 모두 성인의 문하에 부끄러워해야 함이 있는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문자란 만대(萬代)가 함께 보는 것이니, 책을 짓는 목적은 어찌 후인들이 책에 근거하여 터득함이 있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육예(六藝: 육경(六經))의 글들도 널리 살펴보고 두루 논증한다면 때때로 묵묵히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데 만약 그 말의 맥락과 표현의 기세를 살펴보지 않고 일괄적으로 논리와 의미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글쓴이의 뜻이 아닐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지으면서 글을 따라가며 그 뜻을 탐구하였는데 해결하지 못하면 바로 그만두었다. 이는 마치 모래사장에서 구슬을 찾다가 빈손으로 돌아오기를 전혀 꺼리지 않는 것과 같으니, 만약 찾다가 얻지 못해서 비슷하지만 진짜가 아닌 것을 얻고서는 귀한 보물인양 자랑하는 것이 어찌 맞겠는가.
說《書》最難. 凡經文之古, 莫有如《易》《詩》《書》, 《易》《詩》之文, 皆起於文王之世. 後一千歲, 鄭氏註《易》, 毛氏箋《詩》, 其言語文章, 古今判別, 或音同而轉讀, 字譌而未詳也. 又後一千歲, 至宋儒, 卽於西京文字, 尙或未了, 況何望於直契本旨乎? 《書》起於唐虞, 則距《易》《詩》又一千歲之遠, 而余生於宋儒五百歲之後, 乃欲妄揣漢宋未覰之義, 宜若無是理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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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所謂知者, 不獨明知其所知, 亦且明知其所不知, 只是兩㨾分明也. 強知於不知者, 知亦未十分也. 故說《書》而無闕者, 皆有愧於聖門也. 雖然文字者, 萬代之所同, 爲之書者, 豈不以後人之据以有得哉? 今六藝文字, 亦多博觀旁證, 往往可以嘿會. 若不審其語脈筆勢, 一以理義爲斷者, 要非其人之志也. 余之爲此書, 沿其文而究其意, 不得則便休. 比如求珠於沙水之際, 顧不憚徒手乃還, 苟使求之無得, 得似而非眞者, 詑爲寶重, 奚可哉?
공자가 그의 제자인 자로(子路)에게 ‘안다는 것[知]’에 대해 일깨움을 준 말이 있다.
“너에게 안다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안다는 것이다.[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너무나도 멋진 말이다. 하지만 웬만한 소양이 있는 사람은 너무 많이 들어 식상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익숙한 만큼 마음가짐에 크게 자극이 되지 않으며, 일상의 실천으로 잘 연결되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하여 그 공부를 한 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의 큰 병폐 중의 하나가 “모른다”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 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정말로 자신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여겨 그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유형은 식견이 너무 좁아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니, 비유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일 것이다. 한문 공부를 예로 들어 살펴보면 사서(四書)를 어느 정도 읽혀 쉬운 문장의 글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느끼는 착각인데, 다음 진도를 나가지 않거나 새로운 유형의 많은 글을 보지 않는다면 남들의 평가가 어떠하더라도 상관없이 좁은 세상에 갇혀 나름 행복한(?) 삶을 누릴 지도 모른다. 내가 과문해서인지는 몰라도, 스스로 한문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 중에 정말로 잘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전자의 유형은 주로 선생의 위치에 있는 사람 중에서 많이 보인다. 학생들에게 모르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는 일종의 불안감 때문에 두루뭉술 얼버무린 뒤에 추가 질문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거나 억측으로 설명한 뒤에 학생들이 의문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학생들을 속이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까지 속이는 일이다.
《서경》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는 요(堯) 임금에게서 시작된다. 유가의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에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논어》는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약 2,500년 전의 글이고, 《시경》과 《주역》의 글이 문왕(文王)의 시대에서 기원하였다면 약 3,000년 전의 글인데, 《서경》은 《시경》보다도 또 천 년이 앞 선 글이라 한다. 요 임금의 실존성과 내용의 진위 여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약 4,000년 전의 글이 되는 셈이다. 30년 차이가 나는 부모 세대의 언어도 간혹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300년, 400년도 아닌 4,000년 전의 글은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 《서경》이 유가의 기본경전이고 과거 우리 선현들의 필독서였기에 한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학습의 필수과목이 되어 있다.
《서경》은 맨 처음에 “曰若稽古”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曰若”의 의미부터 학자들의 의견은 매우 분분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曰若”을 발어사로 이해하면서 “그 말이 이와 같다”의 의미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송(宋)나라의 학자 채침(蔡沈)이 저술한 《서경집전(書經集傳)》의 견해를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 한(漢)나라의 학자 공안국(孔安國)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에 포함된 《상서정의(尙書正義)》에서 “若”을 “順”과 같은 뜻으로 보아 “옛 도를 따른다”의 의미라고 풀이하였으며, 그 외 수많은 학자들의 또 다른 견해들도 매우 많다. 원 저술의 뜻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맨 처음 구절부터 난관에 부딪히게 되며, 곳곳의 내용들이 다 그러하다. 그리고 책의 전승 과정을 감안할 때에 원문에 혹여 오자가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한 글자도 분명하게 확정하여 볼 수 없는 글이 바로 《서경》이며, 어떤 한 학자의 견해를 전적으로 따르더라도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도 많은 글이 또한 《서경》이다. 이렇듯 어느 것 하나 자신하여 말할 수 없기에 《서경》은 공부하는 사람을 참으로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조선 후기의 대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서경》의 주석서로 《서경질서(書經疾書)》를 저술하고서 《서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는지 서문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깊이 탐구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것을 억지로 아는 채 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고 하였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그 본뜻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지만 탐구하다가 해결하지 못했을 경우 모르는 것을 모르는 영역에 우선 남겨두고, 남들에게도 분명히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모르는 것을 분명하게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아는 것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앞서 공자가 말했던 참된 ‘知’일 것이다.
글쓴이 이정원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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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자가 말하기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해야 한다. 감사 합니다^^*
공부 잘 하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의미가 깊은 글입니다.
잠시 들려서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해도
실천하지 못하면
그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