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화통일시 천안시장은 권력순위 8위
(본 글은 이석기 사건과 유사한 내용이 있어 박사모에 올립니다.)
(2009. 12. 14.)
서울에 있는 在京 이북오도청(以北五道廳) 사무실에 가보면 6.25동란(한국전쟁)이전의 북한 행정구역에 따라 연세 많은 어른들이 도지사 뿐만 아니라, 시장ㆍ군수까지 임명되어 있고, 이들은 당시 그곳에서 사시던 분들이라 고향향우회장 업무를 겸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도 적화통일을 위하여 남한의 지방행정구역장들을 임명하고 있는데, 심지어 주요지역에는 통ㆍ반장과 리장까지 임명했습니다.
예컨데 지방행정단체장 권력순위 1위는 서울시장이고, 2위는 부산시장, 3위는 인천시장, 4위는 울산시장 등인데, 특이한 것은 충남 천안시장이 8위이고, 제주도지사는 30위 바깥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 전 천안시장으로 임명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당시 이 사람의 신분은 보위부 소속으로 극동러시아에 파견된 벌목공과 건설ㆍ수산ㆍ탄광 현장에서 일하는 북한노동자들의 감독관이었고, 이것 말고도 이 사람은 극비 업무로 6.25 당시 북으로 끌려간 국군포로 8만2천여명중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舊소련으로 방출시킨 1만2천여명의 포로들 흔적을 없애는 업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 사람의 존재를 알고 추적한 적이 있었는데, 최근에 이 사람이 서방세계로 극비 망명하였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오늘 이것에 관한 사연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 薛烝仁씨 선행사건
설증인氏를 처음 만난 것은 1991년 5월 하바로브스크 시내 인투어리스트 호텔 로비였습니다. 당시 그는 제가 한국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자기 가족을 찾아 달라고 하소연했는데,그는 1948년 10월 소련 군사고문단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당시 강원도 주문진 농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자신을 소련어 통역관으로 차출하여 극동러시아에 일하는 북한노동자와 합류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몇년 후 남한 사람들이 대거 몰려왔는데, 그들이 바로 국군 포로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혹독한 노역에 사고(事故)와 병사(病死)로 다들 죽고, 1991년 당시 일백여 명이 생존해 있을 것이라면서 그들의 대략적인 소재지를 알려 주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죽기 전에 꼭 찾아서 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아울러 자신은 소련군에 끌려갈 때 신혼이었고, 부인은 출산을 앞둔 만삭이었다면서 아들을 낳으면 동수(東壽)로 부르라고 이름까지 지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주문진이 남한 땅이므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신신당부 하였습니다. 저는 귀국후 주문진 읍장과 경찰청에 수소문 하였는데, 얼마 후 주문진 읍장의 회신은 설증인氏의 부인은 유복자를 낳아 김氏 가문에 재가하여 아들은 김동수로 되었다면서, 서울 방배동에 사는 부인과 아들의 호적을 보내주었습니다. 저는 설증인氏를 만나 부인과 아들의 주소를 알려주고 설氏로부터 편지를 받아 아들인 동수氏에게 전해주었고, 동수氏는 저를 따라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출국당일 김포공항에서 저와 정보담당자가 기다리는데 동수氏는 전화로 어머니가 만류한다면서 못 가겠다고 하여 우리끼리 가게 되었습니다. 하바로브스크 공항에 내리니 설氏는 어제 밤에 아들이 오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면서 저에게 국군포로들의 흔적을 없애려 다니는 보위부 감독관의 성명과 계급을 알려주었고, 며칠후 설氏는 모든 재산(미화 약700만달러)를 고아원과 노인협회에 기증하고 한 많은 생을 스스로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사연이 러시아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것이 바로 “설증인씨 선행사건” 입니다.
● 제 조카와 북한임업대표부
제 집안 조카의 할아버지는 일제 식민지때 징용나온 25살의 형님을 대신하여 19살에 형님이름으로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분은 그곳에서 징용따라 온 노처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다시 조카를 낳았습니다. 설증인氏와 비슷한 시기에 시멘트 포장종이로 만든 족보를 들고 한국사람을 찾는 젊은 고려인 후손이 있다고 하여 만난 사람이 제 조카였는데, 조카를 처음 본 순간 온 몸에 전율이 올랐습니다.
조카는 의사(콩팥전문의)였는데 북한 임업대표부에 주일마다 한 차례씩 방문하여 벌목현장에서 사고로 후송되어온 벌목공들의 치료를 해준다기에 저는 설氏로부터 받은 보위부 감독관 성명과 계급을 적은 쪽지를 조카에게 주면서 ‘가는 김에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문제의 사나이를 찾게 되었고, 이후 상당기간 추적하여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얼마 전에 천안시장으로 승진되었다고 했는데 임업대표부 소장(도당위원장급)을 호통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직급자임이 분명했습니다.
보위부 감독관이며 천안시장으로 임명된 그의 수첩에는 1995년 기준 천안시 인구가 40만명에, 천안시 주변에 대학교가 11개가 있고, 재학대학생 5만4천명에 한총련 소속학생이2만3천명이고, 시청을 중심으로 좌ㆍ우 각각 8km 이내에 경부철도ㆍ국도ㆍ고속도ㆍ송유관ㆍ가스관ㆍ초고압전류선 등이 지나고 있어 미사일 한 방이면 남한 산업의 허리가 부러져 마비된다면서 큰소리를 치는 등 기고만장해 하였습니다. 그때는 김일성이 죽고 김정일이 권력승계 할 때이고, 하바로브스크 의과대학의 교환교수로 재직하던 재미교포 이주현박사 부부가 벌목공을 가장한 보위부의 만행에 도끼로 살해된 해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비밀리에 남조선 행정구역 담당자를 정해놓고 교육을 시킨다고 했으며,심지어 천안시내버스 노선표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천안은 북한의 적화통일전략차원의 시각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과 러시아 오지에 국군 포로가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정부에 알렸고, 보수정당인 자민련과 공동조사하기로 했으나 예산타령만 하고 흐지부지되었습니다.저는 국방부에 “러시아에 있는 국군포로를 데리고 오면 탈북국군포로 1호인 조창호 소위처럼 국가차원의 보상이 있느냐”는 질문서를 보냈으나, “북한에서 직접 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며 보상은 불가능하다”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DJ대통령시절인 1999년 여름, 저는 러시아군 극동관구 사령부를 통하여 국군포로 51명이 생존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차로 KBS와 공동으로 캄챠카州내에 있는 코략(高麗岳)자치구(郡단위)의 행정도시 팔라나 근처에 국군포로 가족들을 취재키로 했으나 모처의 압력으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저는 이러한 사실들을 하바로브스크州 옆에 있는 유태인자치州 행정수도인 비로비잔에 선교사로 활동하는 이스라엘 모사드(MOSAD)에게 알려주었고, 이후 그들의 끈질긴 공작의 결과로 국군포로 흔적을 없애려 다니는 이 사나이는 서방세계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세상으로 전향한 것으로 소문이 있었고, 앞에서 설명한대로 최근 망명한 것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극동러시아내에서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들을 찾아 다닐 때 저 말고도 한국의 또 다른 기관과 단체들도 많은 정보를 입수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마가단 광산에서는 20피트 컨테이너에 이들을 감금하여 바다에 수장시킨 기록을 찾아냈다는 소문도 있었고, 츄코츠카 다이아몬드 광산지역에는 이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내용을 부산출신 某수산회사 사장의 진술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MB정부는 좌ㆍ빨 정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의 정보를 수집ㆍ추적하고 정리하여 북한과 舊소련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후세에 알려야 할 책무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 하고 다음기회가 있을 때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올릴 것을 약속 드리면서 시베리아 등지에서 노동자로 활동하다 한국으로 오신 탈북자 여러분들 중에서 국군포로의 행적을 아시거나 소문을 들으신 분들은 댓글로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