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는 마음만 내면 된다” 지광스님 턱없는 자금으로 시작
총지휘 김영일-도감 신영훈-도편수 조희환 등 발벗고 나서
僧俗 하나되어 1300년만에 3층목탑 창건 ‘목조 건축사 한획’
진천 보탑사는 당대의 장인들이 모두 모여 만든 예술품이다. 도감을 맡은 신영훈 선생을 비롯 조희환 도편수, 한석성 화사, 그리고 이들을 총 지휘, 공사를 시공한 김영일 씨 등 장인의 혼과 열정이 배어있다. 사진은 보탑사 기공식에 참여한 조희환, 김영일, 신영훈 씨 모습(왼쪽부터).
진천 보탑사를 21세기 국보로 만든 이들은 당대의 장인들이었다. 그리고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높이 42.71m, 연건평 193.27평의 목조 탑을 1300여년만에 이 땅에 쌓아 올린 조희환 도편수, 생전 처음 만들어 보는 삼층 목탑을 설계한 태창건축 박태수 소장, 문짝을 만든 심용식 소목장, 상륜과 금속물을 제작한 최교준 야철장, 장엄을 도맡은 이진형 조각장, 단청을 맡은 한석성 화사, 999기 백자탑을 조성한 이화여대 조정현 교수, 도감을 맡은 신영훈 한옥문화원 원장. 그리고 이 모든 장인들의 솜씨를 모아 탑을 형상화한 김영일(가산건설 회장)씨. 기획단계부터 함께 고민하고 요즘도 보탑사 홍보에 여념이 없는 이시형 의학박사, 회의 장소를 제공하고 거액의 건축비를 선뜻 보시했던 국시집 사장 이옥만(79) 보살, 상량문을 써 보탑사의 진면목을 세상에 널리 알린 서희건 전 조선일보 부국장, 그리고 고사리 손에 쥔 귀한 돈을 불사금으로 선뜻 내놓았던 한 중학생을 비롯한 이름 없는 수많은 시민 등 옛 문화재가 그렇듯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품은 결코 한 두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탑사는 말해주고 있다.
시공자 김영일 씨는 30년 이상을 한옥 건축을 지은 이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삼선포교원을 세울 때부터 인연을 맺었다. 신영훈 원장도 김 회장의 소개로 함께 인연을 맺어 삼선포교원 건물을 세웠다. 김 회장은 포교원 건물을 짓고 전탑을 완성해 공사비를 받았는데 그 중 상당금액을 스님 앞에 다시 내놓으면서 “이건 과외로 벌게 되었으니 부처님께 시주합니다”라고 했다. 그 뒤 김 회장과 삼선포교원은 하나가 되었다. 1989년 아직 터파기 공사 2년 전 일이다. 현 보탑사 자리에 사찰을 짓기로 결정났다. 김 회장은 삼선포교원을 비롯 김유신 사당, 길상사 등 오래 전부터 함께 일했던 신영훈 선생을 모시고 진천 현장으로 달렸다. 터를 소개하고, 보탑사 완공 뒤 두 번 연속 진천군수를 지낸 김경회 씨와 스님 김영일 씨 등이 함께 자리했다. 몇 번을, 둘러본 뒤 신영훈 선생은 “목탑이 들어설 자리”라고 했다. 김 회장이 “삼층으로 지으면 공사비가 1층 세 채를 짓는 세배가 든다”며 고개를 저었다. 삼선포교원이 돈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김 회장으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런데 지광스님이 말했다. “목탑에 걸맞는 형태라면 그렇게 해야죠” 더 이상 이의는 없었다. 그런데 지광스님은 ‘겨우’ 5000만원을 내놓으며 시작하자고 했다. 공사 착수도 못할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김 회장은 공사를 시작했다. 능현스님의 회고. “나중에 김 회장이 ‘이 돈을 받고 해야하느냐를 놓고 망설였는데 세상물정 모르는 스님들이기 때문에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하시더라.” 능현스님은 “불사는 마음만 내면 된다는 것이 은사스님의 생각이셨다”고 했다.
목탑을 세우기로 정해지자 탑 순례가 시작됐다. 안동 의성 등의 토탑(土塔)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리고 한 달에도 몇차례 회의가 열렸다. 현장과 서울을 오가며 삼선포교원 스님들과 ‘멤버’들은 이후 수없는 회의를 거쳤다. 회의는 돈암동 국시집에서 열렸다. 삼선포교원 신도인 보련화 보살이 이왕 밥을 먹으면서 회의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시작부터 끝까지 회의는 ‘국시’에서 열렸다. 멤버는 스님들과 함께 공사 도감 김영일 회장, 목탑을 제안한 신영훈 원장, 조희환 도편수, 박태수 설계사무소 소장, 이시형 박사 등이었다.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운 백제의 장인 ‘아비지’와 비교되는 김영일 씨는 “눈으로 본 일도 없고 우리나라에 유사한 목탑도 없는, 40m 높이의 목탑을 세워서 그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건축 기법, 구조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며 “설계부터 지붕 곡선 처리까지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꿈속에서라도 아비지가 나타나 도와주기를 수도 없이 빌었다”고 말했다. 설계상 가장 큰 문제는 밖에서 볼 때의 층수와 실제 내부의 층이 다른 점을 착안, 층과 층 사이에 암층을 만들어 공간을 확보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신영훈 선생은 암층의 존재에 대해 “신라가 자존심을 무릅쓰고 백제 장인 아비지를 초청한 것은 이 암층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만큼 한국 목조 건축사에서 획기적인 창안이었던 셈이다. 한 대학교수가 아름다움에 감탄했다는 보탑사 처마곡선은 김 회장이 오랜 고민을 하다 어느날 환영을 보고 답을 얻었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김영일 씨는 1971년7월5일 무령왕릉을 발견한 사람이다. 3층 목탑을 지은 후 더 높은 탑을 지어달라는 주문이 있었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자신이 깨친 것은 3층 탑까지라는 것이다. 김씨는 그 후로도 지장전, 선방 등 보탑사 불사를 모두 책임져 현재까지 끝나지 않은 상태다.
보탑사 전경. 17년째 공사가 진행중이다.
조희환 도편수는 보탑사 처마곡선을 살린 장본인이다. 조선 고종 때 경복궁을 중수한 도편수 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이어지는 대목장의 맥을 이은 당대 최고의 도편수다. 송광사 대웅보전 중건을 비롯해 운문사 대웅보전 등 사찰 건축물을 주로 지었다. 보탑사 목탑은 조 도편수의 대표적 작품으로 그의 장인정신과 혼이 서려있다. 그 역시 보탑사에 대해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새로운 몸 받으면 황룡사 9층탑과 같은 목탑을 만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신영훈 선생은 보탑사 불사 진행과정을 샅샅이 기록하고 남긴 공로자다. 회의장소와 식사를 제공한 ‘국시’집 이옥만 보살은 건축비가 없을 때 집을 담보로 1억을 대출할 정도로 공이 크다. 스님들이 약속한대로 1년 만에 원금을 갚자 이 보살은 “제가 대신 이자를 내면 스님들께서 느긋해 하실 것 같아 그간 이자를 받았다”며 1년 동안 받았던 이자 3천만원을 돌려주었다.
이들의 힘을 한 곳에 모으고 뒷받침 한 것은 스님들이다. 능현스님은 “계를 지키고 바르게 살며 열심히 기도정진하면 원(願)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한 것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스님들의 원력을 믿고 많은 전문가들이 발벗고 나서자 큰 돈을 낸 시주자가 없는데도 불사는 완성됐다. 진천 보탑사는 불사의 또다른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 또 하나의 걸작 단청
고구려벽화 주조로 현대적 색감
故한석성 화사 “평생 필력 발휘”
보탑사 내부 단청. 한석성 화사의 최고 역작으로 손꼽힌다.
보탑사 단청 무늬의 주조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채택했지만 색감은 현대인의 기호를 고려했다. 그래서 보탑사 단청은 다른 곳과 많이 다른 점을 느낄 수있다. 보탑사 단청을 그린 이가 당대 최고의 장인 한석성 화사다.
한석성 화사는 이렇게 말했다. “평생 동안 익혀온 필력이 제 빛을 발할 기회가 주어졌다. 보탑사 삼층목탑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단청이 완성되어가는 시점이다.” 구한말 거의 모든 궁궐 단청을 주관했던 부친 동운화상으로부터 화업을 전수받아 조선 단청의 계맥을 이어 60평생을 한 길에 매진한 장인이 생의 결정체를 놓고 간 곳이 바로 보탑사 단청이었다. 단청은 95년에 시작했다. 그 때 한석성 화사의 나이 72세. 지광스님과 김영일 회장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했다. 당시 단청 작업에 대해 한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보탑사는 3층이라 층마다 무늬를 다르게 냈다. 2, 3층 무늬는 고려시대 단청과 조선 초기 무늬를 꾸준히 연구한 것에 창작을 겸했지만 1층은 온전한 창작품이다. 1층 초를 낼 때는 얼마나 고심을 많이 하고 그리고 또 그렸던지 지금도 왼쪽 어깨가 결리고 아프다.” 당대의 장인은 평생 작업한 것 중에서 마음에 안드는 것은 빼고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보탑사 무늬초에 반영하고 새로운 창작품을 남기고 2003년 세상을 떠났다.
한 선생은 100일간 열심히 그린 뒤 당시 보수금 1800만원을 돌려줬다. “단청기술자로 태어나 하고 싶은 걸 다해봤다”는 것이다.
[불교신문 2321호/ 4월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