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화가 아뢰기를,
“정축년 이후로 국가가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실로 최명길(崔鳴吉)의 공인데,
명길이 난리 뒤에 신인(新人)들을 끌어다 등용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또 사족 부녀자로서 저들에게 잡혀갔던 자들에 대해서 이혼을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비방하는 자들이
‘그 집안에 필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최후상이 등제하자 바로 이러한 비방이 있었으니,
그 말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다만 지금 만약 그 말의 근원을 따지게 되면 점점 서로 끌어들어 추핵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고 나라의 체모만 손상시킬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이미 상께서 그 근거없고 망령된 것을 통촉하셨고 여러 신하들도 모두 자세히 알았으니,
그 말의 뿌리에 대해서 다시 물을 것이 없겠습니다.”
- 현종 개수실록 5년 윤 6월 3일
허적이 말하기를,
“최명길(崔鳴吉)이 병자년 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가장 국가에 공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오늘이 있게 된 것은 그의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육(金堉)은 충근(忠謹)한 마음으로 효종[孝廟]을 섬기어 비익(裨益)된 바가 많았는지라,
나라도 그 공에 힘입었고 백성도 그 혜택을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다 함께 유루(遺漏)됨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조용히 상의(商議)하여 확정하는 것만 같지 못하겠습니다.”
- 숙종 2년 7월 2일
임금이 허적(許積)을 인견(引見)하고 최명길(崔鳴吉)과 김육(金堉)이 배향(配享)에 참여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를 물으니,
허적이 답하기를,
“최명길(崔鳴吉)은 사생(死生)을 걸고 국가의 위급할 때에 몸바쳤고,
김육(金堉)은 옛 것을 널리 알고 직간(直諫)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그 이익이 백성에게 미쳤으니,
요컨대 시속의 한 정승은 아니었습니다마는, 그 때에 유자(儒者)라고 이름하는 자에게 영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배향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식자(識者)들은 모두 지금까지도 한탄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 숙종 2년 7월 8일
대사헌 김시형(金始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 원래 전해오는 규모가 있었으니, 소중한 것은 인재요, 긴급한 것은 민사(民事)입니다.
인조조[仁廟朝]에 이르러서 이원익(李元翼)·최명길(崔鳴吉)·이경여(李敬輿) 등의 노성(老成)하고 덕망이 있는 신하가 정성을 다하여 보필(輔弼)하고
정경세(鄭經世)·박정(朴炡)·유백증(兪伯曾) 등의 강직하고 직언(直言)하는 신하가 일에 따라 바로잡았으니,
사대부(士大夫)가 평일에 강구(講究)하는 것은 백성을 위한 걱정과 나라를 위한 계책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 영조 15년 10월 10일
임금이 말하기를,
“고 상신(최명길)의 병자년 차자는 진실로 성실한 혈침(血忱)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 상신이 아니었으면 누가 감히 청의(淸議)가 한창일 때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겠는가?”
하니, 정민시가 말하기를,
“그때 이 사람이 없었다면 국가가 어떻게 오늘을 보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최명길은 과연 사대주의 탈레반 조선국의 영원한 역적 껄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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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은 저도 최근 활동을 시작한 곳이라서.... 토탈워보단 활발하고; 역개루보단 매너가 좋은 느낌이지만,
역사 이야길 은근히 안 하는 느낌이네요. 가입하고 글쓰기 위한 조건도 은근 까다로운 느낌이고..
박시백을 까진 않습니다. 인정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문제 있다고 지적하는 정도.
이덕일은 대놓고 잘깝니다.
이너서클은 다 없어지고 좋은 세상입니다...ㅎ
이래서 인터넷 카더라는 못 믿겠다니까요. 이거 보니 부끄러움이 확 밀려옵니다. 아이고...
박시백도 문제가 많았나 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