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불러놓고
김종숙
더위가 무섭게 기승을 부리더니 녀석도 어쩔 수 없이 다가온 가을에 쫓겨 한걸음
물러나고 이제는 조석으로 시원함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언제나 느끼는 것
이지만 이계절의 냄새는 달콤하고 구수하다.
붉은 석양을 등지고 넉넉한 향기로 고추잠자리의 등을 타고 빨간 가을은 그렇게 다가
온다.
며칠 전 모임이 있어 한껏 멋을 부려보리라 마음을 먹고 정성껏 화장을 하고 머리도
드라이로 볼륨을 주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친구들이 “야, 처녀 같다. 나이는 어디로 먹냐? 점점 더 젊어 보인다.”며 너스레를
떨고 한마디의 비아냥도 곁들였다.
“야, 눈 밑에 주름만 수술하면 너 시집가도 되겠다.”
“그으래, 그렇다면 내일 수술하고, 모레 시집간다. 너희들 축의금 봉투 두께보고 우
정을 판단할 거야."
"으이구 저 속물덩어리, 알았어. 천 원짜리 지폐로 꽉 채워줄게.”
히히 흐흐 영양가 없는 이야기 들이 오가며 2차 노래방 까지 신나게 놀고 친구들과 헤
어져 시원함을 즐기며 걸어가고 있었다.
롯데마트 앞 큰길을 달리는 차를 피해 후다닥 뛰어 멋지게 건너서 폼 나게 걷고 있는
데 주차장 쪽에서 "야!” 하고 부르고 있었다.
돌아보니 남자가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걸어가고 있었다.
뒤에서 남자가 야! 야! 저벅저벅 쫓아오며 계속 불렀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한 두 사람씩 걷고 있었다.
남자는 계속 "야!" 부르며 오고 보기에도 술에 취한 듯했다.
안되겠다 싶어 "나?" 하니까 그 남자가 대답했다.
“엉! 그래. 너, 이리 와봐”
“왜?”
“글쎄 이리 와봐!”
나는 걸어갔다. 그 남자는 서있기도 힘들어 보였다. 내가 앞에 다가서서 “왜애?” 하
니까 그 남자가 얼굴을 쳐다보더니 “으허억! 아니야, 가!” 어찌나 심하게 놀라던지 웃
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재차 물었다.
“왜 불렀는데?”
“아냐, 그냥 가! 얼른 가" 손사래를 치며 도망치듯이 바삐 걷고 있었다.
나는 왠지 서운한 생각이 슬며시 가슴에 젖어들었다. 그리곤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저느므시키<저녀석>, 쥐를 보는 고양이 눈으로 쳐다보다간 족제비를 본 고양이
처럼 기절초풍 할 듯이 놀라 눈까지 허옇게 뜨고 달아날건 뭐람!' 하긴 녀석의 얼굴이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아마 어두운 밤에 조그만 여자가 볼륨 준 머리를 뒤에서 보고 아
가씨로 착각한 모양이다.
아! 나도 한때는 긴 생머리 바람에 나부끼며 타이트한 치마 짧게 입고 금강둔치를 걷
고 있으면 혼자 나온 남자들이 열심히 작업 들어오던 때가 있었는데…………. 그 시절엔 경
제가 많이 어렵고 차량도 지금처럼 많지 않을 때라 걸어서 데이트를 즐기곤 했는데 젊은
남녀가 금강둔치를 많이 찾았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베크족의 거리라고 불리기도 하
였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좀 튕겨야지 순순히 데이트에 응하면 헤픈 여자로 보인다는
인식 때문에 맘에 들어도 무조건 튕기고 봤다. 그럴 때면 나는 적당히 튕기는 조절에 실
패했고 남자는 저만치 앞에서 혼자 걷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 조금 걷다보면 어느새 둘이
손을 잡고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그럴 때면 '바보같은 시키, <녀석> 한번만 더 시도
해 볼 것이지. 그러면 넘어가 주려고 생각했는데! 에이, 안 받아 주길 잘했다.' 생각 하
고는 턱을 앞으로 내어 밀고 콧대 높고 도도하게 그들 옆을 스쳐 바쁘게 걷곤 하였다.
헌데 지금의 내 모습은… 나는 젊은 청년이 술취한 눈으로 어두운 밤에 보아도 기절초
풍 하게 놀라서 도망치듯이 사라져야 하는 그 모습이 된 것이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26년의 결혼생활 열심히 살았다. 자식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힘든 줄도 모르고 내 얼굴에 바를 로션 살돈 있으면 바르지 않으면 어때!' 하며 애들
이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 하나 더 사주고 내 몸은 푸대접 하고 귀히 여기지를 않았다.
'흐흐흐' 입안에서 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도 마음은 공허
하다. 머리를 슬며시 뒤로 젖히니 맑은 하늘이 보인다. 약간의 비가 내린 뒤라서 그런지
검푸른 하늘에 드문드문 별들이 붉게 반짝이고 있다.
유년 시절에 하늘을 보면 바닷가의 조약돌 보다 더 많은 별들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
었는데 하늘도 늙어서 이가 빠진 것일까! 생각하니 실없는 웃음이 나온다.
그래, 풍요와 고독이 공존하는 이 가을에 이상이 같은 남자를 만날 수 있으면 해서 나
에게 은밀한 작업이 들어온다면 튕기지 말고 데이트하기 좋은 이 계절에 팔짱 꼭 끼고
설레이는 데이트를 한번 즐겨 보자는 생각을 해보며 피익 또 웃음이 나온다.
결국 혼자만의 상상으로 끝나겠지만 누가 알아? 세월의 무게에 눈꺼풀이 처져 동공을
약간 가려진 남자가 카메라 렌즈에 얇고 투명한 막을 씌워 모습이 고와 보이게 표현 하
듯이 나를 아름다운 여자로 봐줄지. 그러면 나는 향기 짙은 들꽃보다 화려한 단풍잎이
되어 정열을 불태우고 빨간 잎으로 떨어져 누군가의 책갈피에 꽂아져 영원히 붉게 남아
있을지…………
2004/19집
첫댓글 결국 혼자만의 상상으로 끝나겠지만 누가 알아? 세월의 무게에 눈꺼풀이 처져 동공을
약간 가려진 남자가 카메라 렌즈에 얇고 투명한 막을 씌워 모습이 고와 보이게 표현 하
듯이 나를 아름다운 여자로 봐줄지. 그러면 나는 향기 짙은 들꽃보다 화려한 단풍잎이
되어 정열을 불태우고 빨간 잎으로 떨어져 누군가의 책갈피에 꽂아져 영원히 붉게 남아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