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독거노인 연수중
이희근
어느 날 설거지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모처럼 점심식사나 함께하자는 후배 교장의 목소리였다. 내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아직도 연수중이어서 외출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연수가 끝나는 대로 연락하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외출을 삼가고, 아내로부터 삼식(三食)이라는 별칭 대신에 칙사 대접을 받으며 방콕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사람의 팔자 시간문제’라는 속담을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때가 찾아온 것이었다.
어느 날 몇몇 친구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많이 아프단다. 택시를 타고 곧장 달려가서 보니 앞이 컴컴했다. 옴짝달싹도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119의 도움으로 간신히 Y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척추 골절이었다.
다음날 일반병실로 옮겼을 땐 여자들만 입원하는 병실이어서 남자가 환자 옆에 오래 머물기에도 불편하여 간병인의 도움을 받았다. 빨리 쾌유하기만을 바라면서, 냉장고에 보관된 반찬으로 혼자 식사를 해결하고, 상태를 확인하러 가끔 병원에 들락거리고 있었다.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의사는 아직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환자에게 퇴원하라고 통보했다.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골절상이어서 더 이상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단다. 퇴원했다가 2주 후에 내원하여, 상태를 점검·확인하고, 그에 따른 처방을 강구하자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두 딸들은 환자를 요양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멀쩡한 사람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지만, 둘 다 환자가 되면 더 큰일이라고 걱정했다. 운동선수 경력이 많은 사람이 그까짓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이 한 몸 편하겠다고, 50년 동안 나에게 봉사한 사람을 요양병원에 보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은 강력한 내 의도에 어느 정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두 딸들이 외출 준비를 하고, 냉장고를 보러 간다기에, 대형 냉장고가 두 대나 있는데 웬 냉장고 타령이냐고 했더니, 노인들만 사는 데는 냉장고가 더 필요하단다. 새로 산 냉장고에는 골절에 좋다는 우족과 쇠꼬리를 곤 것으로 가득 채웠다. 그때부터 수습 독거노인의 연수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중병을 앓고 있는 배우자라도 아랫목에 누워 있을 때는 마음이 든든하다는 옛말이 있다. 남자든 여자든 홀로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또 부인을 앞세우는 것보다 부인 앞에서 죽는 남자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시쳇말도 있다. 실제로 상처 후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자살한 친구도 있고, 혼자 지내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여 어렵게 살아가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장수시대에는 독거노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따라서 독거노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의 연수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냉장고 안에 저장해 놓은 것만으로는 식생활을 해결하는 데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런데 남자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나 시장에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갈 때는 주머니를 호주머니 속에 넣을 수 있지만, 물건을 채우고는 호주머니 속에 넣을 수도 없으니 들고 다녀야 한다. 물건을 고르는 안목도 없어 무조건 처음에 띄는 것을 고른다. 마스크 덕분에 그냥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걸으니, 다행히 알아보는 이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재래시장에까지 다녀와야 할 때는 배낭을 이용했다. 어느 날, 배낭 안에 대파와 양파를 사서 짊어지고 걷고 있을 때였다. 천변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던 아주머니가 다급히 불렀다. 파가 다 쏟아지겠다는 말을 듣고, 배낭을 벗으려고 하자, 얼른 옆으로 와서 배낭 속에 집어넣고, 지퍼를 잘 채워주었다. 고마운 아주머니였다.
이미 각오한 바였지만, 나훈아의 테스 형을 부르고 싶을 때도 있었다. 세 끼니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 줄을 미처 몰랐다. 식사할 준비를 마치고, 밥솥을 열어보면, 속이 텅 비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서 홀로 화장실에 다닐 정도가 되었을 땐 여유가 생겼다. 옆에 서서 가르쳐주는 대로 찌개나 국을 끓이기도 하고, 시간을 정하고 화산공원이나 전주천변을 걷기도 했다. 하지만 끼니때만은 피해야 했다. 후배 교장의 점심초대를 거절한 이유였다.
어느 날 그 교장에게 전화를 걸어 근처 식당에서 만났다. 순대를 시켜 놓고 한참 소주를 마시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였다. 어디냐고 묻기에 교장 선생님과 둘이서 소주를 마시고 있다고 말했더니, 안 보여서 전화를 걸었단다. 얼른 알아듣고, 아직도 연수중인데 무단 외출했다가 들켰다며 일어서자, 눈치가 빠른 교장도 웃으면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