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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나해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조재형 [umbrella]
저는 친할머니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친할아버지는 기억하지만 추억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는 추억이 많습니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도 살아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외가에 놀러 가면 할머니는 맛있는 것을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밥장사를 할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안쓰러워서인지 자주 오셔서 반찬도 만들어 주셨고, 설거지도 함께 해 주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말씀은 별로 없으셨지만 긴 수염을 쓰다듬으셨고, 농사지으신 것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두 분은 아직 세례는 받지 않으셨지만 제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신학교에 오셔서 축하해 주셨습니다. 외할머니가 마리아로 세례를 받으셨고, 나중에 외할아버지는 요셉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두 분 모두 고운 모습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고, 제가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성품을 많이 닮았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를 낳아주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성품도 닮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부모님이신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신앙인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마음에 담는 인내를 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품에 안으신 성모님을 봅니다. 그러나 모든 슬픔을 이겨내고,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성모님을 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모든 것을 맡기며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했던 순명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 시절에 외가에 다녀왔을 것입니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도 어린 예수님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신학은 철학적인 사유와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합니다. 교회의 조직이 커지면서 교리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신학, 철학, 교리, 교회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가 성모님의 부모님을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셨고,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2,000년 전에 나자렛에서 우리처럼 웃고, 울면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지난봄에 심었던 모종에서 가지가 열렸습니다. 고추도 열렸습니다. 호박도 열렸습니다. 오이도 열렸습니다. 그렇게 여리고 작은 모종이었는데 직원들과 함께 먹고도 남을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작은 텃밭이지만 농사의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작은 겨자씨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하십니다. 작은 누룩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하십니다. 농사를 해본 사람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스스로 큰 나무가 되지 않습니다. 누룩은 스스로 부풀지 않습니다. 텃밭은 매일 물을 주어야 하고, 여린 가지가 기댈 수 있는 쫄대를 세워주어야 하고, 잡초를 뽑아 주어야 합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정결, 순명, 청빈이 있어야 합니다. 근심, 걱정, 불안을 떨구어 내야 합니다. 욕망, 시기, 질투를 뽑아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심어진 신앙의 씨앗이 풍성하게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2021 07 26/ 비유로 소통해야 하는 이유: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3vzCKNTHQw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며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겨자씨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그 사람 안에서 나무처럼 자라나 휴식 같은 친구가 되게 합니다. 또 성령은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어진 누룩과 같아서 그 사람을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어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빵이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라고 하신 시편 구절을 인용합니다. 직역하면 “나는 비유로 내 입을 열리라.”입니다. 정말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본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느님은 왜 비유로만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먼저 하느님 삼위일체의 신비스러운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성자’, 그 계시를 완성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하느님 모습을 따라, 영-혼-육으로 되어있는데, 보이지 않는 ‘생각’(혼), 그 생각을 표현하는 ‘말’(육), 그리고 그 말이 생각과 일치하게 만드는 ‘마음’(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나 나무와 소통한다면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언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온전한 소통을 위해서는 같은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생각’과 같은 ‘아버지’, ‘말’과 같은 ‘성자’, ‘마음’과 같은 ‘성령’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담긴 말은 생각과 일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은 생각과 다릅니다.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담긴 표현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할머니가 신부님 쓰시라고 돈 만 원을 비닐봉지에 싸서 몸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었다가 몰래 손에 쥐어 준다면 그것은 단순히 돈 만 원을 주시는 행위일까요? 돈 만 원 안에는 할머니가 사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에게 주는 선물이나, 행위, 혹은 말에 마음이 담겨야 비로소 완전한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담긴 선물은 분명 보이지 않는 생각을 계시하는 비유가 됩니다. 하지만 개에게 그렇게 준다면 그 비유는 무너져 아무 쓸모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 안에 마음이 담겨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어서 당신 생각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당신을 닮은 구조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님이 “요즘 성인들이 저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느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 자매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들어서는 좀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친구와 새벽 5시까지 통화하다 잠든 날이 있었거든요. 그날은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축일이었습니다.
그 전날 딸에게 ‘내일은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 축일이니 천둥이 칠 수 있으니까 잘 들어봐!’라고 했었어요. 그냥 그분들이 이야기할 때 스콜라스티카 성녀가 오빠를 보내기 싫어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며 비가 내려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정말 아침에 딸이 저를 흔들어 깨우면서 ‘엄마 정말 천둥이 치고 비가 왔어!’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참 신기하다 여겼죠. 그런데 손목을 보니 제가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그림이 있는 묵주 팔지를 차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 팔지를 차지는 않거든요. 전 세례명이 마리아인데요. 그래서 친구에게 신기해서 전화했죠. 신기하게도 내가 성녀의 팔지를 차고 있는데 정말 그분들이 표징을 보여주셨다고요. 근데 그 친구가 더 놀라는 거예요. 그 친구는 베데딕도 팔찌를 차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신기하죠, 그쵸? 요즘 성인들 축일을 미리 기억하고 기도하였는데, 정말 그분들이 함께 계심을 느꼈다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정말 성인들이 그 자매님과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처음에 말만 들었을 때는 머리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담기니 그것이 비유가 되는 것이고 그 비유 말씀을 들으면 머리만 건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건들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 인격적인 소통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지 않으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인격적 소통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인과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힘내, 파이팅!”한다고 해서 힘이 날까요? 머리로만 전달하는 정보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건들려면 내 마음을 그 생각과 합하여 비유로 전달해야 합니다.
“게도 탈피하는데 그때는 죽은 것처럼 보여. 하지만 더 강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잖아. 우리도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거 같아. 조금만 더 힘내자!”
이렇게 말해준다면 그 사람은 힘든 상황에서 ‘아,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구나. 그래 힘내자!’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제가 굳이 복음 묵상을 할 때 억지로라도 비유를 끼워 넣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비유를 찾으면서 저의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따지자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온전한 계시가 되지 못하십니다.
만약 우리도 하느님 삼위일체 모습대로 살아간다면 모든 행동과 말에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하나의 비유가 됨을 잊지 맙시다.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보이지 않는 계시 대상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자라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혼과 육이 하나가 된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 나라의 계시가 됩니다. 그리고 그 비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 그 사람은 완전한 소통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2021년 07월 26일 월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요아킴 성인과 안나 성녀는 다윗 가문의 유다 지파에서 태어났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 성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나, 요아킴 성인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뒤 하느님의 섭리로 마리아가 탄생하였다. 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6세기부터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는 서방 교회에도 널리 퍼졌다. 요아킴 성인에 대한 공경은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입당송
집회 44,1.22 참조
마리아를 낳은 요아킴과 안나를 칭송하여라. 주님은 만민에게 내리신 복을 그들 위에 베푸셨다.
본기도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복된 요아킴과 안나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어
성자의 어머니를 그들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으니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저희도 주님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증언판을 들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것을 보고 그 판들을 깨 버리고는, 주님께 돌아가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며 모든 것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32,15-24.30-34
그 무렵 15 모세는 두 증언판을 손에 들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왔다.
그 판들은 양면에, 곧 앞뒤로 글이 쓰여 있었다.
16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며,
그 글씨는 하느님께서 손수 그 판에 새기신 것이었다.
17 여호수아가 백성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진영에서 전투 소리가 들립니다.” 하고 모세에게 말하였다.
18 그러자 모세가 말하였다.
“승리의 노랫소리도 아니고 패전의 노랫소리도 아니다.
내가 듣기에는 그냥 노랫소리일 뿐이다.”
19 모세는 진영에 가까이 와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과 수송아지를 보자 화가 나서,
손에 들었던 돌판들을 산 밑에 내던져 깨 버렸다.
20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그들에게 이렇게 큰 죄악을 끌어들였습니까?”
22 아론이 대답하였다.
“나리, 화내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악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23 그들이 나에게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저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빼서 내시오.’ 하였더니,
그들이 그것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불에 던졌더니 이 수송아지가 나온 것입니다.”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큰 죄를 지었다.
행여 너희의 죄를 갚을 수 있는지, 이제 내가 주님께 올라가 보겠다.”
31 모세가 주님께 돌아가서 아뢰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
3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
34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일러 준 곳으로 백성을 이끌어라.
보아라, 내 천사가 네 앞에 서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내 징벌의 날에 나는 그들의 죄를 징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6(105),19-20.21-22.23(◎ 1ㄴ)
◎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 백성들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금붙이로 만든 우상에 경배하였네. 풀을 뜯는 소의 형상과, 그들의 영광을 맞바꾸었네. ◎
○ 이집트에서 위대한 일을 하신 분,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잊었네. 함족 땅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갈대 바다에서 이루신 두려운 일들을 잊었네. ◎
○ 당신이 뽑은 사람 모세가 아니라면, 그들을 없애 버리겠다 생각하셨네. 모세는 분노하시는 그분 앞을 막아서서, 파멸의 진노를 돌리려 하였네. ◎
복음 환호송
야고 1,18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 아버지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겨자씨는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1-35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31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집회 44,1.10-15)와 복음(마태 13,16-17)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 기도
주님,
저희의 정성 어린 예물을 받으시고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하신 복을
저희도 나누어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4(23),5 참조
그들은 주님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느님께 자비를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놀라운 신비로 저희를 새로 나게 하시려고
성자를 사람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으니
이 천상 양식을 배불리 먹은 자녀들의 효성을 보시어
크신 자비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많은 분들이 저에게 ‘성소’에 대해서 물어보십니다. 어떻게 신부가 되었는지, 어떤 계기로 사제 성소를 택하였는지 ……. 그럴 때 저는 늘 대답합니다. 그저 그 물에서 노는 것이 좋았다고 말입니다. 성당에서 노는 것, 그곳의 친구들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도 여전히 어렵고 힘든 일이 있었지만 동료들과 함께 노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놀다 보니 어느새 개울물은 강물이 되고, 강물은 바다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살에 몸을 맡기고 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감당할 수 없는 바다에까지 와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성소 이야기입니다.
창대한 꿈을 꾸며 많은 것을 이루고자 어떤 일을 시작할 때도 있습니다. 큰 기대를 가지지 않고, 즐겁고 좋아하는 일이라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많은 기대를 걸었던 일은 실망하기 일쑤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즐거운 일을 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일을 하고 있음에 만족하고 즐거워합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새싹을 틔워 내고 꽃을 피우는 그 일을 즐기면 됩니다. 밀가루 반죽을 만들고 누룩을 넣어 빵을 구워 내는 과정이 행복하면 됩니다. 많은 열매를 맺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맛있는 빵을 만들어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면 실망하거나 좌절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지만,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갑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 자리에서 즐겁게 살다 보면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바다에서는 마음 편히 놀지 못합니다. 해야 할 의무가 있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냥 놀기에는 바다라는 곳이 너무도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더 멋진 곳으로 저를 이끌어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기에서 놀아 보렵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