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사(靑龍寺)는 1265년 (고려 원종) 서운산(瑞雲山)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고 불렀다.
1364년 (고려 공민왕 시절)에 나옹선사(懶翁禪師)가 크게 중건하며, 절 이름을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이 이름은 나옹(懶翁)이 이 근처에서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다가 구름을 타고 내려 오는 청룡(靑龍)을 보았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조선 말기에는 교통의 요지이었던 안성장터를 중심으로 전국을 떠돌면서 공연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청룡사 곁의 계곡, 불당골이 이들의 생활터정ㄴ이었으며, 청룡사의 건너편에는 남사당 마을이 지금도 존재한다.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張吉山)에서도 이 곳 청룡사가 등장한다. 장길산의 스승인 운부대사(雲浮大師)가 세상은 민중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혁명사상을 설파하던 장소로 청룡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미륵(彌勒)의 세상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황석영 그도 요즈음 변했다. 이명박에 투항하였다.
이 대웅전은 보물 제 82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364년 고려 공민왕시절, 나옹(懶翁)이 중건한 것으로 다포계의 팔작 지붕으로 고려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조성한 삼층석탑(三層石塔)이 남아 있다.
기둥의 아래부분은 굵고,뚱뚱한데 위로 올라 갈수록 심하게 휘어지고 급격하게 가늘어진다. 그대로 주저 앉지 않고 저 엄청난 대웅전의 무게를 500년 넘게 떠 받치고 있다. 존경스러움을 넘어 차라리 경외의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것이다.
어느 기둥 하나만 집중해서 바라보면, 대웅전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드리 나무를 껍질만 벗겨내고 그냥 사용하였다. 울퉁불퉁... 부자연(不自然)의
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 것을 보기 위해서라도 청룡사는 와 볼 만한 곳이다. 사방 기둥을 구불구불 휘어진 자연목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균형미와 굴곡의 아름다움이 눈을 붙잡는....
그리고 대웅전 기둥의 받침돌이나 축대 등이 모두 자연석 그대로 사용하여 서로 잘 어울린다.
조선시대의 무가(巫歌) 중에 " 성주풀이 "라는 노래가 있다. 성주는 한자로 城主, 星主, 城造로 표기가 되는데 집과 집터를 수호하는 신(神)을 말한다. 그 노랫말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높은 산에 남글 찍고, 낮은 산에 터를 닦아 / 휘여진 남근 굽다듬고, 굽은 남근 휘이게 만들어 /
횡포 대포를 먹여내어, 아흔아홉 궁(宮) 지을 적에 ...." 이 짧은 노랫말 한대목에 한국인이 지닌 선천적인 심성(心性)이 드러나고 있다.
소나무는 자라면서 휘거나 굽기도 한다. 그러나 기둥이나 대들보로 쓰기에 별로 아쉬움이 없다.휜 나무는 굽다듬고, 굽은 나무는 휘이게 다듬어 쓰면 되기 때문이다.
청룡사 대웅전의 기둥이나 대들보가 비정형(非定型)인 것은 목수(木手)가 올 곧게 다듬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그렇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결과이다. 하고자 했으나 미완(未完)으로 남기는 것과 당초부터 할 생각이 없어 하지 않는 것은 의미상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전자(前者)가 인간의 능력과 성실성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後者)는 성정(性情)과 미의식(美意識)과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이 대웅전 건물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능력이나 성실성의 문제를 초월한 한국인의 성정(性情)과 미의식(美意識)이다.
이 곳 청룡사에는 사천왕문(四天王門)이 따로 없다. 그래서 대웅전 처마에 사천왕(四天王)을 그려 놓았다. 어디에 있거나 이 절을 수호하면 되는 것...
이렇게 구불구불한 자연목을 그대로 사용한 이유에는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훌륭한 목재를 구하여 반듯하게 지을 욕심은 있었으나, 경제적인,현실적인 이유로 주위에서 자라는 아무 나무나 베어서 그대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두번째 이유로는 목수(木手)의 기술 수준이 낮다거나, 성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듯한 재목으로 건축하였다면 더욱 쉬었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감로탱(甘露탱)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하여 그린 불교그림이다. 이 그림은 가로 200cm,
세로 238cm 크기이며, 3단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그림의 맨 윗부분에는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 등을 그려 理想世界를 표현하였는데, 특히 보살의 몸부분을 금가루로 칠하였는데 이는 다른 불화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한 예이다.
그림의 가운데 부분은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영혼이 극락으로 인도되기를 기원하는 제사상을 차려 공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아래 부분에는 속세의 여러 장면 등이 생동감있게 묘사되어 당시의 풍속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692년(조선 숙종)에 제작된 이 불화는 명료한 주제와 안정된 구도, 선명한 색채로 조선 후기 불화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중생 제도(濟道)와 유교의 효(孝)사상 강조에 따는 종교적 의의 또한 매우 크다고 한다.
곧기와 굵기가 각양각색인 목재들.. 무게 중심이 제 각각인 기둥으로 지붕의 무게를 고르게 분산시키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할 것이다. 몇 백년의 풍상(風霜)을 거뜬히 버티고 있는 대웅전........
이 것은 수학적 계산이나 정밀한 목공의 연장도구가 이루어 낸 것이라기 보다는 목수들이 오랜 시간과 경험을 통하여 터득한 " 마음의 저울"과 " 마음의 자(尺) "이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수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한다. 대웅전의 앞 기둥은 그래도 반듯하게 다듬은 기둥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인의 성정(性情)과 이를 바탕으로 한 미의식(美意識) 또한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선천적으로 한국인은 인위적으로 조작과 기교를 부리면 부릴수록 그 대상의 본질이 훼손된다고 믿어 왔다. 그리하여 나무를 가공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도, 인공(人工)의 흔적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였다.
노력하였다기 보다는 내면(內面)에 잠재하여 있던 한국적 심성(心性)과 미의식(美意識)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높이가 2.4m로 평면 사각형의 단층 기단(基단)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렸다. 가단은 4장의 돌로 만들었는데, 각 면에 모서리 기둥(隅柱.우주)과 버팀 기둥( 撑柱. 탱주)가 새겨져 있다.
1층 탑신에 비하여 2층과 3층 탑신의 높이가 급격하게 낮아져 비례미(比例美)가 흐트러졌다.
청룡사의 대웅전은 소박하면서도 아름답다. 꾸미지 않고 다듬지 않은 자연적인 건축물.... 이 절을 중창한 나옹선사(懶翁禪師)가 바로 연상된다.
나옹선사는 우리나라 3대 화상의 한 분으로 조선 개국에 도움을 준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다. 그는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면서 여러 신화를 남겼지만 풍류시인(風流詩人)이기도 하였다.
청산(靑山)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네. 창공(蒼空)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 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江) 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때로는 한없는 양보와 배려의 미덕을 .. 때로는 모든 것을 잊고자 하는 해탈(해탈)의 이념을 ..
때로는 자연을 벗 삼고자 하는 많은 유랑인(流浪人)들과 천민(賤民)들... 그리고 한(恨)을 품고 떠도는 이들의 마음을 표현해 주는 시(詩)라고 하겠다.
( 남사당패들이 살던 불당계곡과 바우덕이)
아마도 나옹선사의 바연과 함께 하는 싯귀가 전해지면서 청룡사는 인간의 손댐이 적고, 탐욕됨이 없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대웅전을 가꿀 수 있었던 것이리라..그리고 또한 나옹선사의 선(禪)과 풍류, 청룡사의 자연스러움과 민중성은 사찰의 전통으로 자리 잡아서, 이러한 전통들이 내려 오면서
자연스럽게 바우덕이(金岩德) 등 남사당패를 불러들여,
본거지로 삼아 활동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최고의 예솔혼을 꽃 피울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괘불(掛佛)을 걸 돌지주(支柱)가 남아 있다. 또한 괘불도 그대로 전하여 오고 있는데 보물 12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괘불(靈山會上掛佛)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하여 법당 앞 뜰에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 그림..
이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6대 보살, 10대 제자들이 에워 쌓고 있는 모습인데, 중앙의 석가모니는 머리에서 빛이 나고, 특이하게도 오른손은 어깨 위로 들고, 왼손은 무릎에 올린 시무외인(施無畏人)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모습이다.
이 그림은 1658년 (조선 효종)에 승려화가 명옥(明鈺) 등이 그린 것으로, 본존(本尊)의 크기가 매우 컸던 고려말, 조선초의 그림과는 달리 本尊인 석가모니가 작아져 상대적으로 주변 인물의 크기와 비슷해진 그림으로 17세기 영산회상도를 대표할만 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청룡사의 동종(銅鐘) .. 보물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종은 검은 빛이 감도는 큰 종으로 1674년 종루(鐘樓)의 종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종의 모양을 보면 소리를 좌우하는 음통(音桶)이 맨 위에 있고, 그 옆에는 용모양의 종을 거는 고리(용뉴.龍紐)가 있다. 그리고 종신(鐘身)의 펴면을 보면 위에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을 1줄씩 새기고, 그 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과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이 종은 숙종 대에 활동하였던 승장 사인(思印)이 30대 중반에 지준(智俊), 태행(太行), 도겸(道兼),
담연(淡衍), 청윤(淸允)과 함께 만든 통일신라시대 계열의 종이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후기의 종들 가운데서 우수한 작품으로 17세기 범종 연구에 중요 자료이다.
청룡사의 사적비(事跡碑)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것이다. 이 비(碑)는 청룡사의 중수를 기념하기 위하여 1721년(조선 경종)에 세운 것이다.
비문에 청룡사의 창건 연혁과 나옹(懶翁)이 절을 중창할 때의 일과 그 뒤 조선 숙종 때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을 중건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碑)는 받침돌 위에 비몸(碑身)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인데, 특이하게도 지붕돌 귀퉁이마다 네 마리의 龍이 머리를 들고 서려 있는 모습이다.
10여개에 이르는 부도탑(浮屠塔)들이 천년 고찰 청룡사의 세월을 웅변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