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극
안희연
천사, 영혼, 진심, 비밀······
더는 믿지 않는 단어들을 쌓아놓고
생각한다, 이 미로를 빠져나가는 방법을
나는 아흔아홉 마리 양과 한 마리 늑대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이유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매일 한 마리씩, 양은 늑대로 변한다
내가 아흔여덟 마리 양과 두 마리 늑대였던 날
뜻밖의 출구를 발견했다
그곳은 누가 봐도 명백한 출구였기 때문에
나가는 순간 다시 안이 되었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더는 믿지 않기로 했다
미로는 헤맬 줄 아는 마음에게만 열리는 시간이다
다 알 것 같은 순간의 나를 경계하는 일
하루하루 늑대로 변해가는 양을
불안의 징조라고 여기는 건
너무 쉬운 일
만년설을 녹이기 위해 필요한 건 온기가 아니라 추위 아닐까
안에서부터 스스로 더 얼어붙지 않으면
불 꺼진 창이 어두울 거라는 생각은 밖의 오해일 것이다
이제 내겐 아흔아홉 마리 늑대와 한 마리 양이 남아 있지만
한 마리 양은 백 마리 늑대가 되려 하지 않는다
내 삶을 영원한 미스터리로 만들려고
한 마리 양은 언제고 늑대의 맞은편에 있다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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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루된다는 것, 주체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나누고 그 앎과 모름을 통해 책임의 경중을 논한다. 그러나 다른 이의 삶으로 휘말려 들어갔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앎에 앞서는 과거, “나의 전신이/ 한 생명을 무겁게 짓누르던 바위”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자신이 “파괴를 위해 태어났을까”(「구르는 돌」) 두려워한다. 자신이 무엇이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찾는 여정 속에서 시인은 타인과 연루되어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 순간을 염려하고 있다. 그 염려에는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 역시 자리한다. 타인의 삶을 자신이 알고 있는지, 아니면 알지 못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삶이 담긴 미지의 상자를 열어야만 한다. 하지만 “열어본다는 것은 책임지겠다는 뜻”(「측량」)이기 때문에 타인의 삶에 가해진 폭력과 자신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측량하는 일은 곧 그 폭력의 경험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나 이 휘말림에 의해서 책임져야 할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사슴(「연루」)처럼, 이미 존재했던 관계를 뒤늦게 알아차리는 것에 불과하다. 연루된 삶과 마주했을 때 중요한 것은 앎과 모름이 아니다. 자신이 그와 연루되어 있으므로, 연루된 삶들을 담아낼 수 있도록 자신을 오직 자신만으로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매일 한 마리씩, 양은 늑대로 변한다
내가 아흔여덟 마리 양과 두 마리 늑대였던 날
뜻밖의 출구를 발견했다
그곳은 누가 봐도 명백한 출구였기 때문에
나가는 순간 다시 안이 되었고
(……)
한 마리 양은 백 마리 늑대가 되려 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기 위해 벌이는 추리극의 시간이 하루 또 하루 지나갈수록, 내 안의 양은 늑대로 바뀌어 간다. 내 안의 양이 전부 늑대가 되어버리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담은 너무나 명백해진다. 나를 온전히 나로 채우는 일은 생각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출구처럼 보인다. 하지만 너무나 명백한 출구이기에 그곳을 나오는 순간 다시 미지로 돌아가고 만다. 모든 양이 늑대가 되어버리면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피비린내를 더는 맡을 수 없다. 연루된 타인의 자리를 자신으로 채우는 것은 그가 흘린 핏자국을 은폐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 냄새를 맡을 수 없게 하더라도 늑대가 양을 물어뜯는 폭력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피를 씻어내”도 “무엇으로도 씻기지 않는 것들이 끝내 나”(「생선장수의 노래」)이므로, 모두 지워버린 뒤에도 내가 연루된 폭력은 남는다. 그러므로 한 마리 양이 필요하다. 아흔아홉 마리 늑대가 에워싼 한 마리 양만이 그 폭력의 관계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안희연의 시 속에서 자아는 의심과 침잠, 불확실 속에 불안하게 동요한다. 시인의 마음은 미로를 헤매면서 자신을 지우며 타인을 위한 자리를 남겨 놓는다. 그렇게 자신을 지우다 보니 “나답게 우는 법을 몰라서/ 앵무의 울음을 따라 한다”(「앵무는 앵무의 말을 하고」)는 시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불안하게 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비운 목소리가 상처 입은 이들의 삶을 가득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내가 되지 않는 일이 이리도 굳센 마음임을 여름 언덕에서 배운다.
⸺《현대시》 2020년 10월호, 안희연 시집 서평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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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섭 / 문학평론가. 2015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