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
제나라 수도인 임치는 태산 동쪽 약 15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전국 시대 굴지의 대도시였다. 이 임치성에는 성문이 13개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서문의 하나인 직문(稷門)은 천하의 학자들이 모여 학문이나 사상에 대하여 연구하고 그 결과를 기탄 없이 토론하는 이른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요람지라고 할 수 있었다.
일찍이 위왕(威王)이 즉위하던 해(기원전 357)는 위나라 문후가 죽은 지 30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위나라는 진(晋)으로부터 삼가 분할에 의해 성립한 신흥 국가이면서도 전국 칠웅 가운데 가장 먼저 강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위나라가 강하게 된 원인이 훌륭한 인재를 등용한 데 있었음을 안 위왕은 직문 부근에 호화저택을 짓고 인재를 모아들여 학문 토론의 광장으로 삼았다. 그들에 대한 대우도 차관급 급료를 주어 자유로운 토론과 연구를 하게 하고 일정한 일은 맡기지 않았으므로 이들 학자들은 다른 분야의 학자에게서 무엇인가를 섭취하려고 하였다.
직문의 초대 간부가 순우곤(淳于髡)이었다는 것을 보면 직문의 학자촌 건설이 순우곤의 착상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직문에는 여러 가지 사상과 학술을 연구한 학자들이 여러 나라로부터 모여들었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맹자(孟子)와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荀子)는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맞댄 일은 없었지만 같은 시대 여러 학파의 학자들은 이 직문에 모여 매일 자유로운 토론을 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백가쟁명’이라 불렀다.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리는 각양각색의 사상을 가진 학자들이 다투어 자신의 학문 사상을 주장하고 상대방의 학문 사상을 논평하는 것이다. 백가쟁명은 자유 분위기가 보장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제의 위왕이나 선왕(宣王)은 직문에 관한 한 이러한 자유 분위기를 절대 보장하고 적극적으로 백가쟁명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직문의 백가쟁명기는 중국의 학문·사상의 황금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토론과 논쟁으로 인하여 학문·사상은 더욱 성숙·발전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제의 위왕이나 선왕의 공적은 침략당한 토지를 돌려받거나 제나라의 위엄을 널리 천하에 떨친 것보다는 직문에 학자를 모아 백가쟁명의 분위기를 보장하고 장려했다는 점이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춘추사어(春秋事語)》
춘추·전국 시대 백서
《사기》에 열거된 직문의 학자로는 도가인 전병(田騈)·접여(接予)·신도(愼到)·환연(環淵), 정체 불명의 순우곤, 그리고 음양가인 추연(鄒衍) 등이다.
유능한 인재를 모으려는 것은 당시 여러 제후들의 똑같은 소망이었다. 제후들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부국강병 한 가지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위나라 문후 때 유능한 인재를 모았으며 문후의 손자 혜왕(惠王)도 유능한 인재를 찾고 있었다. 이 혜왕은 제나라 위왕과 거의 같은 시기에 왕을 칭하기는 하였으나 실력면에서는 도저히 제나라를 따를 수가 없었다. 제나라에 대패하여 태자는 포로의 신세가 되었고 상장군 방연을 잃었으며 수도인 안읍(安邑)이 진(秦)나라에 가까워 위협을 느낀 나머지 훨씬 동쪽인 대량(大梁)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다. 대량으로 수도를 옮겼기 때문에 위의 혜왕을 양의 혜왕으로도 부른다.
《맹자(孟子)》의 개권 벽두 제1편 양혜왕편(梁惠王篇)에 맹자와 혜왕과의 문답 내용이 실려 있다.
“선생께서 불원천리하고 이곳까지 오셨으니 장차 어떠한 부국강병책으로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주시겠습니까?” 하고 혜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이 물음에 대하여 맹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왕께서는 하필 이득만을 말하십니까?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부국강병의 패도에만 급급했던 당시의 제후왕들은 이 같은 맹자의 뜻깊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때 제나라 위왕은 이미 죽고 선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때였으나 위왕 때부터 직문에 학자촌을 건설하여 널리 천하의 인재를 구하기 위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맹자가 제나라를 방문한 것은 기원전 318년경이었다.
맹자의 성은 맹(孟)이고, 이름은 가(軻)이다. 그의 자에 관하여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居), 자거(子車)라고도 하여 확실하지 않다. 그의 생존 연대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설은 주의 열왕(烈王) 4년(기원전 372)에 출생하여 난왕(服王) 26년(기원전 287)에 84세로 서거했다고 한다.
맹자
맹자의 어머니가 자애롭고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孟母三遷)과 단기지교(斷機之敎)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맹자의 부모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어떤 역사가는 맹자를 직문의 학자로 취급하기도 하지만 이는 타당하지 않다. 맹자도 자신이 직문의 학자가 아니고 왕사(王師)이며 국빈으로서 제후와 대등한 관계임을 《맹자》에서 피력하고 있다.
맹자의 사상은 첫째, 천명을 중시하는 사상으로 천명에 따라 큰일이 이루어진다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 둘째, 하늘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착한 마음을 주었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고, 셋째, 인의(仁義)의 사상이고, 넷째, 힘으로써 사람을 지배하는 패도(覇道)를 배척하고 덕으로써 인을 행하는 왕도(王道) 정치의 실현을 주장하였다.
맹자는 그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여러 나라 임금에게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그들이 자기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왕도 정치를 펴주기를 바랐으나 당시의 임금들은 패왕이 되기를 원했을 뿐 왕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현실과 먼 어리석은 생각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실망한 맹자는 고향인 추(鄒)로 돌아가 후진들의 교육에 몸을 바쳤다.
[출처] 백가쟁명|작성자 새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