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그 향기
정명숙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을 찾아가기로 한날, 싱그러운 봄바람이 온몸을
간질이며 바람목욕을 시켜주고 있다. 오랜만에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한
시골길을 달린다. 목적지가 어디든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설레고
흥분된다. 나이가 많든 적든 그것은 이심전심인가 보다. 모두가 소년소녀의
해맑은 모습들이다.
인적이 드문 산길로 접어들자 창 밖으로 보이는 숲 속은 순정처럼 피어나는
연초록의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그 순진스러움으로 산골짜기를 이내 장악해
버리는 솜씨는 역동적이기도 하다. 작은 개울가 옆에 내려서서 들뜬 기분으로
행복감에 젖어 바라보는 산 속의 경치는 가히 신의 향연이라고 할만하다.
겨우내 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던 산은 따스한 햇볕과 살랑거리는 바람에 못
견디고 저리도 화사하게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빠져들고 있었고 정말로 황홀한 것은 감상자로 남겨두지 않는 작은
들꽃들의 향기였다. 노란 양지꽃, 보랏빛의 제비꽃, 노란 민들레꽃과 보기
드문 하얀 민들레꽃, 그러나 나를 아련한 유년시절로 유혹하는 것은 오솔길
옆에 지천으로 돋아있는 쑥이였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으로 쑥을 뜯기 시작했다. 줄기는 옅은 갈색
빛이 감돌고 잎의 색깔도 앞면은 짙은 녹색이지만 뒷면에는 흰색의 솜털이
보송보송하다. 들국화나 인진쑥 모두가 비슷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똑같이 식용으로 먹는 쑥으로 보인다. 쑥 한 움큼을 들고 향긋한 냄새를 맡고
있자니 얗게 바랜 광목 앞치마를 허리에 매고 서 있는 새색시 같던
친정어머니의 고운 얼굴이 쑥 위에 겹쳐진다. 해마다 이맘 때 즘이면 어머니는
하얀 앞치마를 매고 동생을 등에 업고 들 로 나가셨다. 들판 한가운데 평평한
곳에 포대기를 깔고 동생을 뉘어놓고 앞치마를 반으로 접어 매고 쑥을 뜯기
시작했다. 한나절을 뜯다보면 배가 불룩해지고 그러면 그것을 끌러 보자기처럼
싸서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신다. 그리고 쑥을 삶아 꼭 짜서 소금과
사카린으로 간을 하고 밀가루로 버무려서 커다란 무쇠 솥에 채반을 얹고
쪄주면 그것은 식구들의 한 끼 식사가 되었다. 날마다 먹어도 질리지도 않고
맛이 있었던 쑥 버무리가 어머니에게는 고단한 삶의 한 단면이었을 테지만
내게는 아련한 추억이다.
일찍 혼자되신 할머니가 삼촌과 고모를 도시로 보내 학비를 대자니 농사만
지어 생활하던 시절이라 항상 궁핍했던 봄날이었다. 쑥은 그 봄날의
상징이었고 부드럽고 어린 쑥은 “애쑥” 또는 “참쑥” 이라 불리며 식구들의
영양 공급원이기도 하였지만 초여름에 뜯어 말린 쑥은 약초로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유별나게 코피를 자주 흘렸던 내게 할머니는 마당 끝에 나있던
쑥을 뜯어 손으로 비벼 코를 막아주면 신기하게도 금방 지혈이 되었고,
복통이나 토사가 날 때도 말린 쑥을 다려 먹이셨다. 위장병이 심했던 아버지는
해마다 겨울이면 말린 쑥으로 조청을 만들어 아주 맛있는 듯이 드셔서 어린
나는 조청을 한 수저 퍼먹고 그 쓴맛에 물을 한도 없이 마셨던 기억이
달콤하다.
지금도 나는 봄 이 되면 냉이보다 쑥을 먼저 뜯는다. 그리고 예전에 어머니가
해주던 쑥 버무리를 만들고 된장을 풀어 팔팔 끓는 국물에 콩가루 솔솔 무친
쑥을 넣어 쑥국을 끓인다. 맛과 향기에 취해 먹기도 하지만 유년의 추억에
젖어 먹을 때가 더 많다. 봄에 생일이 들어있는 내게 어머니는 쑥을 넣어
인절미와 절편을 해주셨다. 여자는 시집가면 생일도 제대로 못 얻어먹는다며
안쓰러운 마음으로 챙겨주시던 것이 오십이 넘은 지금까지 거르지 않고
연례행사처럼 치르시는 봄의 쑥 잔치이다. 햇볕 따스한 날 늙으신
친정어머니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한 끼 식사가 아닌 쑥을 좋아하는 딸의
생일 떡을 만들기 위해 들로 나가실 것이다.
오늘 포근한 봄바람 속에 개울가 오솔길을 걸으며 유년에 맡았던 봄날의 쑥
내 음에 아득하던 동심의 그리움만 밀려온다.
2004/18집
첫댓글 포근한 봄바람 속에 개울가 오솔길을 걸으며 유년에 맡았던 봄날의
쑥내음에 아득하던 동심의 그리움만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