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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54-59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 시대의 징조’>
오늘 복음은 이 시대의 징표를 풀이하고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책망하여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 12,56)
사실 군중들은 자연의 징표나 자신 몸의 징표는 잘 읽고 대처하면서, ‘시대의 징표’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존하면서 책임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그들의 ‘회피’와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복음으로 읽어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 읽으면서, 또한 그러한 눈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 언론에 의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루카 12,58)
'징조'를 잘 읽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엄한 경고입니다.
곧 재판에 붙여지기 전에 화해라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역사의 징조를 읽으셨고, '때가 차자'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시어 빛을 비추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도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해석하고 응답해 왔습니다.
그것은 교회 문헌들, 특별히 사회회칙들에 잘 드러납니다.
곧 교회는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 윤리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에 발표하신 교황 권고 문헌인 <복음의 기쁨>에서,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피도록 권고(51항)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이 우상화 된 ‘신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물질만능의 ‘물신주의의 병폐’와 ‘무관심의 세계화’ 등을 지적하시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하는 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교회’, 곧 함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공빈(共貧)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환경을 주제로 한 첫 번째의 회칙인 <찬미받으소서>에서,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기술만능주의와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통합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찬미받으소서>의 후속 권고 문헌인 <하느님을 찬양하여라>에서는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생태적 회심’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촉구에 응답하며, 이 시대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 할 줄 알면서, ~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 12,56)
주님!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하게 하소서.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말과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 포기자?>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고 하면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삶의 표시로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권고를 들으면서 일치를 보존하려고 애쓰라는 말이 유독 눈에 들어왔는데 왜 이 말이 유독 제 눈에 들어왔을까요?
그것은 아마 전에 비해 요즘 제가 그러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전에는 저뿐 아니라 모두가 일치를 중요하게들 생각했고, 그래서 일치를 이루려고 무던히도 애들을 썼지요.
그러던 것이 요즘 와서 일치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일치를 부르짖으면 ‘왜 꼭 그래야 하나?’ 하는 눈으로 봅니다.
사실 요즘은 일치를 부르짖는 것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려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묵살하고 획일적으로 하나로 만들려는, 그런 시도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치, 하나가 되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그렇게 중요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고 우리가 이루려 애써야 할 일치는 사랑의 일치이고, 이런 일치는 이루기 힘들기에 못하지 할 수 있다면 모두 이루고 싶어 하는 겁니다.
사실 진정한 자유와 다양성은 일치를 지향할 때 그 가치가 있고, 참다운 일치는 개인의 진정한 자유와 다양성을 묵살치 않습니다.
사실 참사랑은 개인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성령의 사랑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성령 안에서 다양한 은사가 주어지고, 성령 안에서 그 많은 다른 것이 일치를 이룹니다.
바오로 사도가 다른 곳에서, 성령의 은사는 각기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성령을 모시고 있다고 했고, 오늘 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6ㄱ)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치의 관건은 성령의 사랑을 우리가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이고, 일치를 이루려고 애쓰지 않는 것도 이 사랑을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은 이유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에페 4,1ㄴ-3)
그렇습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을 수반하는, 또는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이 밑받침되는 사랑이어야 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사랑은 어렵지 않고 달콤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참사랑은 그렇게 할 수 없기에, 하다가 실패하거나 이것을 알고 난 뒤에는 아예 사랑하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니 사랑 포기자들이 많은 요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린 다시 용기를 내며,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를 거듭 상기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견디어 냅니다.”
(코린 13,4-7)
참사랑은 이런 사랑이기에 하루 이틀에 이룰 수 없습니다.
어제 뿌리내리기에 이어 오늘도 사랑은 전 생애적인 것임을 강조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하도록 부르심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런 사랑 도전하시겠습니까?
사랑 포기자가 되시겠습니까?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인 사정에 민감하라>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며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비워낼 때 하느님의 뜻을 만나게 됩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쓰라(루카 12,58)는 것입니다.
화해가 쉽지는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4)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에페 4,26) 하고 권고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 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대는 하느님을 잊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아주 사소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정복하려고 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 영적인 사정에 둔감해지는 시대입니다.”
(함께야)
이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려면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회개할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양심: 원인 모를 불안 해결법>
오늘 예수님은 세상 것들은 예표를 보고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면서도 인간 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작은 잘못이 쌓이는데도 자기 잘못을 바꾸려 하지 않으면 결국 큰일을 벌이고야 만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방치하기 때문에 큰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에게 ‘지금 이대로 계속 간다면~’이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미쳐서 큰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은 구멍이 큰 둑을 허물어뜨리듯이 큰 잘못도 다 작은 것들이 누적되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점점 나빠지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왜 알아채지 못할까요?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조금씩 끓이면 개구리는 온도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죽고 만다고 합니다.
그 변화를 느껴 재빠르게 물 밖으로 뛰어나오면 살 것이지만 작은 변화는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개구리에게 온도를 느끼는 피부가 없을까요?
있습니다.
분명 그것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자동차에는 많은 계기판이 있습니다.
연료 게이지도 있고 알피엠, 또 속도 게이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로 보는 것은 속도 게이지입니다.
다른 것들은 가끔만 보면 됩니다.
그러나 연료 게이지만 보다가는 속도에 무감각해져 큰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이 말씀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사실 우리가 마지막 심판 때 주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도 우리가 천당 갈지, 지옥 갈지 이 세상에서부터 심판해 주는 우리를 ‘고소한 자’가 있습니다.
재판에서 말하자면 구형을 때리는 검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검찰과 협의가 이뤄지면 재판은 하나마나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를 고소하는 검찰이 누구일까요?
그 고발하는 자는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설계도대로 살아가는지 심판하는 측정기구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병이 들어도 아프지 않은 상태와 같습니다.
양심이 심판하는 기준은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심판하시는 기준과 같습니다.
그 심판 기준은 그분의 계명입니다.
곧 이웃 사랑입니다.
사람은 이웃 사랑의 계명과 어긋날 때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심판 때 구원을 못 받는 것으로 확증 받게 됩니다.
얼마 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을 만났습니다.
70세가 넘어서 처음으로 가신 것입니다.
많은 준비를 하였지만, 처음엔 몸도 아프고 40년 이상 껴온 반지는 물론 많은 물건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이 길에서 버리게 되는 것은 결국 ‘불안’이라고 합니다.
가장 혼자가 되는 시간임에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지만, 나중에는 이 길이 끝나는 게 아쉽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평화를 가진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나눔’입니다.
산티아고 성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무언가 쓸모없는 것까지 지고 가는 게 무겁고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숙소마다 그곳에 자고 간 이들이 필요 없는 물건들을 두고 간 것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스님은 빈손으로 와서 버리고 간 물건들만 사용하며 끝까지 완주하였다고 합니다.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의 목적지는 십자가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지옥입니다.
그럴 때 양심에서 불안한 감정을 내보냅니다.
이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양심의 문제와 심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고 유의배 신부의 방 안에 붙여논 글을 다시 상기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베트남의 가경자(시복 전 단계)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감사 기도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 자녀로 선택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교회를 통해 선교 사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당신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주는 여러 형제자매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길을 가로막고 저를 힘들게 하는 이들한테도 감사합니다.
그들은 저를 거룩하게 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이 은총의 독방으로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쓴잔을 제게 나누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러 구절 중에 ‘은총의 독방’이라는 표현이 제 마음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독방은 아파트 안에 나 혼자 쓰는 방이 아니라 교도소 안에서 특별 관리 대상자가 쓰는 독방입니다.
독방! 하니 세상 편하겠네, 생각하시지만, 완전 반대입니다.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되어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추기경님은 그냥 독방이 아니라 은총의 독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그분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 세상을 초월하셨던 분입니다.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 안에 살아가니, 머무는 곳이 어디든지 천국을 사셨던 분입니다.
추기경님의 표현을 우리도 자주 사용해야겠습니다.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은총의 죽음, 나와 죽어도 맞지 않는 은총의 그분...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차가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는 부단히 초대 교회 교우들을 대상으로 편지를 쓰셨는데, 이런 표현이 우리의 눈길을 끌게 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에페 4,1~3)
바오로 사도는 그냥 수인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주님 때문에 수인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수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지금 주님 때문에 갇힌 것을 크게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과 역경이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새벽부터 캄캄해질 때까지 하루 온종일 빡센 하루 일과를 보낸 지금, 별것도 아니지만, 주님을 위한 하루였음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쁘게 잠자리에 들어야 하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과 더불어 일치의 여정 - 시대의 표징을 아는 지혜, 분별력의 지혜>
"말씀의 빛으로
무지의 어둠을 없애시는 하느님!"
새벽 성무일도 본기도 시 서두 말씀은 늘 들어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새삼 '무지의 병'에 대한 처방은 주님 '말씀의 약'뿐임을 깨닫습니다.
기상하여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면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이 하늘과 별이요 다음은 불암산입니다.
아마 세상에서 저만큼 하늘과 산을 많이 바라보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1997.2.>
아주 많이 인용한 무려 27년 전 자작 애송시지만 지금도 하늘과 산을 바라볼 때마다 늘 새롭게 떠오르는 시입니다.
하늘이 상징하는 주님과 산이 상징하는 나와 날로 깊어지는 관계를 희구(希求)하는 시입니다.
새삼 우리의 삶은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옛 어른 ‘다산’의 지혜를 나눕니다.
“말이 말을 하지 않고, 사람이 말하기 위해서는 오직 끊임없는 공부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그릇된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릇된 것을 깨달음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바른 말에서 깨달을 뿐이다.”
바른 말을 깨닫는 공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은 이런 깨달음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아, 그렇구나!” 날로 깨달아가면서 지혜로워지고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역시 값싼 깨달음의 은총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치열한 공부와 노력의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어제 원장수사로부터 부탁한 강의록을 선물받았습니다.
<전례의 상징과 공간>이란 ‘깊고 아름다운’ 제하의 귀하고 풍부한 상징들의 보화로 가득한 아름다운 강의록으로 참보물을 지닌 부자라도 된 듯 행복했습니다.
상징을 찾는 인간, 생래적으로 '종교적 인간'임을 깨닫습니다.
맨먼저 나온 상징이 제대였습니다.
끊임없이 미사가 봉헌되는 ‘희생제단과 식탁’의 주님의 제대야말로 하느님을 믿는 우리 삶의 영원한 중심이 됩니다.
또 믿는 이들 모두가 다 주님 중심의,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여정중의 삶임을 깨닫게 합니다.
참 사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제대를 사랑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부중의 공부가 주 하느님 공부입니다.
이런 공부의 대가가, 공부의 달인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囚人)이 된 바오로 사도이지만 자유롭기는 우주적입니다.
우리 모두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것을 권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단숨에 읽힙니다.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 말씀으로 더욱 주님과 일치를 추구하고픈 의욕을 갖게 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고,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에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평화의 사랑을 다하며, 이런 일치의 중심인 하나를, 한분이신 주님을 향한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때 다양성의 일치에 날로 지혜로워지고 자유로워지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 시대의 표징을 읽는데, 또 분별에 눈밝은 지혜를 지닐 것을 촉구합니다.
“깨어 있어라.”에 이어지는 시대를 알아보고 분별의 지혜로 늦기전에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이 어떤 시대입니까?
어제 “파멸 앞당기는 초가속 시대 AI”(안호기) 이란 칼럼을 읽었습니다.
핵전쟁 위험을 예고하는 종말시계는 90초를 남겨두고 있고, 탄소시계의 한계치는 4년 273일 남았을 뿐이며, 인공지능의 위험을 경고하는 ‘AI 안전시계’는 현재 11시31분으로 고위험상태에 진입했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근대화 이전 과거 삶의 방식을 되찾고,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국가는 성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시민이 서로 돌보고 연대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변화의 속도가 훨씬 느리더라도 공동체의 가치와 삶의 질을 높여야 행복해질 수 있다.”
그 무엇보다도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공동체의 고마움을 깨닫고 섬김과 나눔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각자도생은 모두가 파멸의 지름길입니다.
오늘 주님의 복음은 그대로 이런 위기의 시대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참으로 외적 육적 욕망의 삶에서 내적 영적 삶에로의 혁명적 전환이 절박한 시대입니다.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절체절명의 작금의 시대입니다.
이어 주님은 우리의 무지를 꾸짖으며 분별의 지혜를 발휘할 것을 촉구합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스스로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지체없는 회개와 용서, 화해를 촉구하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깨어 주님과 더불어 일치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시대의 표징을 읽는 지혜의 은총에, 분별력의 지혜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시대의 징표>
‘백분 토론’을 보았습니다.
주제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확전 가능성’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고, 이스라엘과 이란은 멀리 있기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어떤지 알고 싶었습니다.
전문가들은 확전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도움 없이는 이란과 전쟁을 이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란도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하기에 미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결국 문제의 열쇠는 미국에 있다고 합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하지 않으면,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이란과 전쟁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한다고 해도 이란은 큰 나라이기에 타격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합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이기에 타격이 생각보다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이란의 확전 가능성은 적다고 합니다.
1년 넘게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전쟁을 이어가고, 전선을 헤즈볼라를 넘어 이란에까지 넓히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작년 10월 하마스의 공격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1,000명 넘게 사망했다고 합니다.
1년간의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은 40,000명이 넘게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국민도, 국제사회도 이제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전쟁이 길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국내 정치의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면 이스라엘 총리인 네타냐후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형사재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총리는 전쟁을 계속 이어가면서 지지도가 올라가고, 전쟁의 성과로 형사재판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인구가 늘어나고 있고, 산업이 발전하면서 수자원이 더 필요해졌다고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의 물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레바논 남부 지역에 있는 강을 확보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레바논 남부에 있는 헤즈볼라를 몰아내면서 자연스럽게 레바논 남부에 있는 강을 이스라엘의 수자원으로 확보하길 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평화는 가능할 수 있을까요?
중동의 평화는 가능할 수 있을까요?
유엔에서 천명한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는 것이 해법이라고 합니다.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는 1,000년 넘게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유엔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두 개의 국가를 이루고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국제 사회와 미국이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할 수 있도록 요청하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미국의 정치, 경제, 언론에는 유대인의 영향력이 크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욕망과 이기심의 눈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폭력과 전쟁의 방식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방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시인 헤르베르트는 책 읽기의 무용함을 말합니다.
누군가 그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그 책들이 수백만 명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그 책을 읽은 뒤에도 달라진 게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푸념했습니다.
헤르베르트의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요즘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 책을 출판했던 출판사 사장님께서도 요즘 너무 힘들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책을 사서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책값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지요.
도움이 되지 않는 책 읽기인 것 같지만,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가 넓어집니다.
작가의 상상력에 저의 상상력을 더해서 새로운 삶을 떠올려 지금을 다르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작가의 통찰에 공감과 비판을 반복하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나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과거의 일회적 말씀이 아니라, 지금에도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말씀입니다.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묵상을 통한 마음의 변화로 지금도 새롭게 다가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고, 또 어느 성경 말씀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읽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자기 변호일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변화는 예측하여 대비하면서 절박하게 닥친 시대의 변화는 왜 올바로 읽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십니다.
이렇게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위선자들아~”라고 하시지요.
읽을 수 있음에도 읽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각종 전례를 통해 주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이 더 중요하다고, 바빠서 주님을 알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위선적인 모습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분명히 마지막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삶이 영원한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심판자 앞에 섰을 때 과연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될까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모두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단순히 이 세상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 사항이 됩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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