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우수영관광지내에서 왕복 승차권 구입
해남과 진도대교사이에
새로생긴 명량해상 케이불카를
타기위해 입장
새로생겨 승차감이 좋다
해남에서 진도로 가는중
진도타워가 보인다
진도타워에서 건너편이 우수영 관광지가 보인다
해남쪽에 워터파크가 새로생겨
물살의 흐름을 느낄수가 있다
사진을 촬영
정유재란때 13척의 배로133척을 무찔렸던
물소리를 내어 우는 바다 길목이란 울돌목이다
우리말이고 한자어로 명량이다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으면
지금 우리나라도 없었을것 같다
해남쪽을 보고
명량해전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함선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함선 330여 척을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퇴했던 해전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수군은 대부분 패하고 말았으며, 그해 7월 22일 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으나 남아 있던 전선(戰船)은 겨우 12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일본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고 있었으며, 육군의 육상진출과 더불어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하여 이진(利津)ㆍ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수군은 벽파진에 있는 조선수군에 여러 차례 야간 기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우리측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정(敵情)을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을 등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9월 15일 조선수군을 우수영(右水營: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겼다. 다음날인 16일 이른 아침 일본수군은 명량으로 진입하고 있었으며, 망군(望軍)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출전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하였다. 그때 명량의 조류는 거의 정조시기(停潮時期)였으며 일본수군의 전선은 133척으로 확인되었다.
이 해전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협수로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그들의 서해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열세한 병력을 지휘한 이순신은 위장전술로써 피난선 100여척을 전선으로 위장하여 뒤에서 성원하게 하였다는 것과, 철쇄(鐵鎖)를 협수로에 깔아서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일부 전해오고 있다.
1597년 7월의 칠천량전투로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일본 수군은 일거에 경상도와 전라도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였다. 이들은 북진하는 육군과 보조를 맞추어 수륙병진작전을 계획하였는데 해로를 따라 서해안으로 북상하기 위해 경상도 하동 부근에 함선 330여척을 집결시키고 해남 반도 남단 어란포를 거쳐 남해와 서해의 분기점이 되는 명량수로를 통과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 하였다.
운림산방
아짐씨들이
가인이 동네 가보십다고 하니
몰고 왔어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