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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4,7-16
형제 여러분,
7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8 그래서 성경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높은 데로 오르시어 포로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9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0 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14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15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16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1-9
1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니 넘어진 채 넘어진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넘어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 반성’이 아니며, 또한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죄를 용서받았기에 뉘우치는 것’이요,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임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 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비유 속의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또한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한 몸 의식>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에페 4,12-13)
각자가 자기 살 궁리만 하고, 각자가 자기 돈 벌 궁리만 하고, 각자가 자기 이익만 생각하면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요?
공동체는 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 개인은 망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요?
자기 살 궁리만 하는데 자기는 잘 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공멸입니다.
그런데 왜 각자 살 궁리만 합니까?
공멸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인생은 각자도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은 마치 한배를 타고 가면서 각자도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각자가 사는 것을 꾀한다는 뜻이지요.
왜냐면 한배를 탔는데도 한배를 탔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인 것 같지만,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이루는 각각의 지체들이라고.
다만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공동체 의식 곧 한 몸 의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며, 우리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기에 공생하려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고 각자도생하다가 공멸하게 될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외롭고 모두 서서히 혼자 죽어갑니다.
독거노인만 고독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하고 혼자 살 수 있다고 하는 혼술 혼밥의 혼족들이 불쌍하고, 그들의 뻔한 불행을 보고만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한다면 나 혼자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며 살아서는 안 되고, 나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며 살아서도 안 되겠지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살고, 같이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이루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지 않으면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되리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이고 오늘 바오로 서간의 가르침입니다.
부대끼며 살다 보면 혼자 있는 것이 한순간 자유롭고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고 편한 것이 진정 행복이고 생명보다 좋다고 생각한다면 영원히 저 캄캄한 우주에 혼자 떠돌아다닌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혼자 떠돌아다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까?
자유롭고 편하기만 한 것이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입니까?
이것을 성찰하며 자문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라>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다.’, ‘마음이 흔들비쭉이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라거나, ‘똥누러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 ‘마음처럼 간사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본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돌려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하고 말씀하십니다.
에제키엘서에는 “주 하느님의 말이다. 너희는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에제 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라고 말씀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야고 4,8)하고 말씀하십니다.
묵시록은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묵시 2,5)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루카 13,6-9)를 보면, 포도원지기는 3년이나 기다렸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내려는 주인에게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하고 사정합니다.
마지막 가능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무화과나무가 베어질 운명입니다.
이제 ‘올 한 해’ 동안에 결말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죽음이 유보된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올 한 해’가 소중합니다.
아니 유보된 지금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멸망과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잘 써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매를 맺어도 그것이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 주님의 마음에 드는 변화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주인의 마음에 드는 열매가 중요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요,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시고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포도원지기인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아직 참아 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되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고이고 땀입니다.
그분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강력한 경고성 발언은 우리를 향한 강력한 구원 의지의 표현입니다>
젊은 사제 시절, 아이들과 동고동락할 때, 너무 성급했고 미성숙했던 탓에 여린 새싹 같은 그들에게 참 많은 상처를 준 것들, 평생을 두고 반성하게 됩니다.
여차하면 빗나가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으름장을 놓고 강력한 경고성 발언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배경에 그저 아이들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음도 고백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동족 유다인들에게 강력한 경고 말씀을 던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도대체 왜 자비 충만한 주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경고 말씀을 건네시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묵상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강한 경고성 발언조차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고 이면에는 우리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의 타락과 방황을 보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때로 파격적으로 감싸 안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노력이 먹혀들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합니까?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됩니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자식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호적에서 빼버리겠다.’ 등등.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고층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 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 것입니다.
아이가 빨간 신호등인데도 길을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 의지가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칭찬도 해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탈선이나 그릇된 삶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안고 있는 부족함이나 취약점들을 용기 있게 지적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고 이웃을 성장시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남이라면 상처나 고통을 주고받을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기에 상처도 고통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지혜로운 구원의 삶 - 회개, 책임을 다함, 사랑의 공동체 건설>
가을은 국화꽃의 계절입니다.
몇 차례 된서리에도 청초한 들국화꽃 무리들 흡사 회개한 영혼들의 아름다운 공동체 같습니다.
오래전 '들국화꽃'이란 시를 나눕니다.
“작아도 그 청초함과 향기는 비할바 아니다
크기와 자리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작디작은 송이송이 샛노란 들국화꽃 무리들
꼭 노오란 별무리 은하수같다
늦가을 매서운 된서리에 가을꽃들 다 졌어도
홀로 청초하다
그윽한 향기 멀리멀리 퍼진다
꿈꾸듯 피어난 샛노란 사랑이다”
<2000.11.16.>
이어 이런저런 소식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페루 출신 해방신학의 선구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가 지난 화요일 10,22일 향년 96세로 선종했습니다.
교황은 “나는 오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를 생각한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자 교회의 사람이었다.”극찬합니다.
또 어제 교황은 성 보나벤투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선종 750주년을 맞이하여, “두 거룩한 교사들은 크게 영감을 주고 교회를 부요하게 한 영감의 원천이었다”며 두 교회박사를 기립니다.
성 프란치스코회의 성 보나벤투라는 “세라핌 박사(The Seraphic Doctor)”로, 성 도미니코 수도회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천사박사(Angelicus Doctor)”로 불립니다.
교황청을 방문한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에게 주신 교황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고통중인 세상에 하느님 사랑의 희망을 가져다 주십시오’, ‘여기 제가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관상생활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전쟁은 인류의 쓰레기입니다’, ‘사랑이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마리아의 모범’” 순서에 따른 풍요로운 영적 가르침이었습니다.
행복은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부터 행복을 발견하여 행복을 선택하여 사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1티모 2,4)
어제 금요강론 시간 서두 인용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이 소망하시는 바 우리 각자 모두 구원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어제 찾아온 '이 행복에 삽니다'란 짧은 시가 자주 저를 행복하게 할 거란 예감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2024.10.25.>
늘 앞에 있는 주님이 제 행복의 원천입니다.
다음 옛 어른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예술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詩人은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오기 때문에 시를 쓴다.”
<다산>
시가 찾아오기에 시를 쓴다는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고유의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시로써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예로써 바로 서고, 음악으로 완성한다.”
<논어>
‘시삼백, 사무사(詩三百, 思無邪)’란 공자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래서 성서의 시편을 늘 노래로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지혜로운 구원의 축복인지 감동합니다.
지금까지 모두가 풍요로운 영성생활에 좋은 참고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유비무환의 지혜입니다.
언젠가 예기치 못한 일에 앞서 하루하루 충실히 사는 것이 구원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이 왜? 하느님이 왜?...끝없는 물음만 있지 도대체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 하여 인과응보도 단편적일 뿐 모두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불행한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인과응보의 프레임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불행한 일에 담긴 경고를 배우고 깨닫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입니다.
빌라도에 죽임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의 불행을, 실로암탑이 무너져 죽은 사람들의 불행을, 경솔히 죄와 연결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인을 캐기보다는 각자 신속히 회개의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원인 해명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 영역입니다.
원인 해명하다 보면 악순환의 미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니 이 또한 유혹입니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의 결론 말씀이 아주 단호합니다.
결코 회개를 미뤄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예수님의 지혜가 빛납니다.
이어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회개의 절박성을 가르칩니다.
포도밭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겠다는 하느님에게 간곡히 제동을 거는 포도 재배인 예수님입니다.
일단 심판을 유예하고 재기의 기회를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 회개하라 연장되는 날들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회개지 죽으면 회개도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알 수 없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계획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도대체 소모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시작해야만 합니다.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 영역이 아닌 하느님 영역이고 오직 현재만 우리에게 해당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그분과 함께 있는 한, 나는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As long as I am with him now, I have nothing to worry about)’.
그분과 함께 회개의 지금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의 지혜입니다.
회개에 이어지는 지혜로운 구원의 삶은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줍니다.
회개는 끝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각자 받은 은사의 몫에 따라 책임을 다함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여하여 실현해야 할 바오로의 원대한 공동체 이상이 참 아름답습니다.
결코 혼자의 구원은, 혼자서 완성의 구원은 없습니다.
더불어의 공동체를 통한 구원이요 전인으로서의 참나의 실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끊임없이 사랑으로 성장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인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와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각자 지혜로운 구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각자 책임을 다함으로 사랑의 공동체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방향 전환, 돌아섬, 회개>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우리의 회개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루카 13,3)
"더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느냐?"
(루카 13,5)
이스라엘 백성은 천재지변이나 사고, 병고 등이 하느님 진노의 결과라 여겼습니다.
이런 변을 당한 이들이 부정하거나 죄를 지어서 받는 벌이라 믿었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편견에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5)
사고는 누구나 겪을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햇빛과 비가 허락되듯이, 고통도 마찬가지지요.
차이가 있다면 비극적 사고에서 의미를 끌어올리느냐 무너지느냐에 달려 있을 겁니다.
무조건 자신이 옳고 완전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사고나 불운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자기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이런 고통을 겪는 건 부당하다고 여겨 분노의 대상을 찾다 찾다 결국 신에게 증오를 쏟아내기도 합니다.
무너진 육신과 재산의 손실에 더해 영혼까지 휘청거리지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멸망'은 단순히 외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면 끊임없이 회개라는 이들, 즉 스스로 용서받은 죄인임을 인식하는 이들은 고통이 닥쳐올 때 자신을 더 삼가고 살핍니다.
하느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심을 잘 알기에 괜한 분노로 힘을 빼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겪는 고난의 원인을 숙고하고 의미를 찾아나갑니다.
회개한 이들은 외적으로는 타격을 입을망정 영혼은 더 큰 생명력으로 더욱 단단해집니다.
"그럼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루카 13,9)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 버리라는 포도원 주인에게 포도 재배인이 청합니다.
자신이 거름을 주며 돌보겠다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청하면서까지 만류하지요.
그에게서 멸망할 위기에 처한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희생과 사랑의 노력이 나무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리라는 낙관, 그리고 신뢰의 마음을 동시에 봅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 대해 가지고 계신 마음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성장과 완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에페 4,15)
죄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겉으로 불완전하고 지지부진하고 결점투성이처럼 보여도 본질적으로는 이런 목표를 지닙니다.
구성원 각자가 지닌 부족함과 불결함, 죄악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에페 4,13) 다다를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저마다 아무리 큰 죄인이어도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고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아무리 추상같은 진리도 사랑으로 전할 때 진정성이 전달됩니다.
진리는 단호해도 따듯하고, 단순해도 포용적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면에서 자라나"
성장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 육의 생명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이 성장하고 자라며 변화해 가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의 일치와 성숙"(에페 4,13 참조)이 곧 회개의 열매인 성장입니다.
저마다 받은 은총과 역량에 따라 성장의 속도는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끊임없이 쇄신하고 변화하는 회개로 불리움받았습니다.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비록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같은 존재일망정 이 희망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포도 재배인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으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 둘레의 땅을 허물고 거름을 채워 주십니다.
"살아남아라!"(에제 16,6) 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자라나고 있습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루카 13,8)
포도 재배인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 년의 유예를 청하십니다.
그렇다면 딱 일 년이 지났는데 성과가 없으면 뽑혀 버릴까요?
아마도 우리가 회개하여 열매를 맺을 때까지 이 유예는 매년 갱신될 것이고, 어쩌면 마지막 날까지 반복될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열매에 앞서 우리 존재를 더 염려하시고 연민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회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앞당깁니다.
이것이 주님의 자비가 아무리 커도 마냥 회개를 미룰 수 없는 이유입니다.
회개하는 이에게는 그 어떤 고통도 멸망의 빌미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장하고 변화하는 거름이 될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방향 전환, 돌아섬, 회개는 무엇인지 주님께 여쭙고 귀기울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매일 조금씩이라도 성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충만함을 나누시려고 우리에게 말씀과 성체로 거름을 주며 더 애타게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답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
평화신문 홍보를 위해서 뉴욕에서 신부님이 왔습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달라스로 오기 전에 뉴욕의 평화신문에 있었습니다.
평화신문의 사정을 잘 알기에, 신문 홍보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더 마음이 쓰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같은 서울대교구이고, 전임 신부이기에 마음이 편했다고 합니다.
마치 시집간 딸이 힘들면 친정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야기하듯이, 신부님도 아버지의 집에 온 것처럼 편했다고 합니다.
신문사 운영은 제가 5년 동안 있었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직원들은 신문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신문사 홈페이지도 알차게 디자인했습니다.
건물이 100년 가까이 되었기에 고치고, 수리해야 할 곳들이 생겼습니다.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지붕공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신자분이 공사를 맡아서 조금 저렴하게 계약했지만, 신문사가 감당하기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친정 같다는, 아버지의 집 같다는 달라스 성당에서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어서 기쁨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숙한 신앙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직분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소유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회개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바라보는 형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비를 베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죄를 지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못해서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금연을 한다고 말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 진정한 금연이 아닙니다.
회개는 인식의 전환이고, 인식의 전환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 이야기는 ‘자캐오’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가진 것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겠습니다.
제가 빌린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본인의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성인 성녀들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욕심 때문에, 체면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비우는 사람이, 나누는 사람이, 먼 곳을 보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죽기를 바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악인이라고 해도 돌아서서 살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당신이 사랑하시는 신자들과 사제들을 위해서는 더욱 기다려 주시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더욱 바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기준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 악,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돈, 명예, 권력, 욕심’이었다면 내 삶의 중심을 ‘믿음, 사랑,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와 사랑의 응답>
심청전을 잘 알 것입니다.
심청이의 효심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청의 한자어를 보면 마음 심(心)에 맑을 청(淸)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름인 심봉의 한자어를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심청이와 마찬가지로 마음 심(心)에 봉할 봉, 닫힐 봉(封)을 씁니다.
따라서 마음이 맑은 심청이가 마음이 닫힌 심봉사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아버지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닫힌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전적인 투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당수에 풍덩 빠지는 심청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닫힌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셔서 전적인 투신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전적인 투신을 할 수 있는 맑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마음은 남 위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고, 또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마음으로 겸손한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갖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심청이가 아닌 심봉사 쪽에 훨씬 가까운 것 같습니다.
마음이 꽉 닫혀 있어서 전적인 투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만을 주고 있지 않나요?
주님께서는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사건과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은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이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을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더 죄가 많았고, 또 잘못을 더 많이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판단이 잘못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곧바로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이야기하십니다.
이 나무는 하느님의 일에 무심하고 냉담한 우리 모습을 상징합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포도 재배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삼 년은 주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신 공생활 기간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가 바로 우리의 회개와 사랑의 응답입니다.
아무런 고통과 시련 없이 잘 산다고 해서, 죄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죄 많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인 우리는 곧바로 회개하고 사랑의 응답을 해야만 마지막 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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