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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5-8대 대통령 배우자 육영수 陸英修 | Yuk Young-soo | |
출생 | 1925년 11월 29일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교동리 (現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119)[1] | |
사망 | 1974년 8월 15일 (향년 48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대통령묘소 |
활동기간 | 제5대 대통령 배우자 |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 |
제6대 대통령 배우자 | |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 |
제7대 대통령 배우자 | |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 | |
제8대 대통령 배우자 | |
1972년 12월 27일 ~ 1974년 8월 1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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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교동 작은아씨
2.3. 결혼 이후
3.1. 사망하지 않고 대통령 배우자로 계속 있었다면?
4.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의 재발견
4.1. 최태민을 조심하라는 발언
4.2. 김종필 발언에 의한 논란 진위
5. 여담
6. 관련 단체
7. 관련 링크
8. 창작물에서
9. 둘러보기
대한민국의 제5-9대 박정희 대통령의 두 번째 배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배우자라 하면 일반적으로 육영수만을 떠올리는 편이지만, 박정희의 첫 배우자는 김호남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호남 외에 이현란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사실혼)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이현란, 김호남과 이별한 이후 육군 장교 시절에 만난 여인이 육영수다.
박근혜 전 대통령·박근령·박지만 남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언니인 육인순과 여동생 육예수 소생의 자녀들에게는 이모가 된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의 총탄에 피살됐으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피살된 대통령 배우자로 기록되고 있다.
학창시절 육영수 |
1925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대지주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 사이의 1남 3녀 중 셋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 육인순과 오빠 육인수, 아래로 여동생 육예수가 있다. 박정희에게는 각각 처형, 손위처남, 처제다.
충북 옥천군의 육영수 생가 |
친정은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알아주던 지역유지 겸 전형적인 대지주 집안이었으며, 옥천의 2대 부호였던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은 주로 소작농을 착취해 거둬들인 소작료를 통해 부를 쌓아 미곡도매상, 금광, 인삼가공업을 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뒷뜰 역할을 하는 과수원을 합치면 8천 평, 순수 대지가 3천평이나 되는 99칸의 대저택에서 수십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살았다.
이 저택을 구경한 시인 박목월은 조선 상류계급의 건축을 대표하는 비원의 연경당과 맞먹는 건물이라고 평했으며, 육영수가 태어나던 1920년대에 이미 전화기와 자동차까지 있을 정도로 굉장한 부잣집이였다고 한다.
육종관은 본처 이경령 외에도 3명의 첩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는 경기도 개성시 출신의 친자매도 있어서 각각 '큰 개성댁', '작은 개성댁'으로 구분해야 했다. 재력이 있는 남성이 첩을 들이는 것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비교적 흔히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어느 사회학자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부유한 기혼 남성의 5%는 첩을 거느렸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일부일처제는 훗날 육영수의 남편 박정희가 집권 직후 축첩을 금지하고 축첩 공무원들을 해임하고 나서부터야 조금씩 확립되었다.
이렇게 복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육종관은 적자와 서자를 모두 합해 총 12남 10녀를 두었다. 의친왕, 윤영렬과 더불어 동시대에[10] 가장 자녀를 많이 둔 인물로 손꼽힌다. 물론 밝혀진 인물만. 육영수는 적녀로서 아버지의 축첩과 그를 보며 가슴앓이하던 어머니의 설움을 생생히 목격했기 때문에, 결혼 후 남편 박정희의 여성편력에 분노를 표출했다.
육영수는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경성부 배화고등여학교로 진학했다. 공교롭게도 모교 인근에는 훗날 육영수 본인이 직접 입주할 청와대가 세워지게 된다. 지금도 교문을 통과해 언덕을 올라 학교 건물까지 가다 보면 청와대가 보인다. 배화고녀[11]는 1898년 미국인 선교사 조세핀 캠벨이 설립한 개신교(감리회) 미션스쿨로, 전통 깊은 명문 여학교였다.
그런데 배화고등여학교 재학 당시 육영수의 거처는 다름 아닌 '큰 개성댁'의 집이었다. 물론 집주인은 아버지 육종관이었지만, 실세는 서울에 왔을 때나 가끔 머무는 육종관이 아니라 큰 개성댁이었고, 상경과 동시에 육영수는 신데렐라 처지에 놓이게 된다.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서모(庶母)와 적녀(嫡女)의 사이는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고, 실제로 큰 개성댁은 친어머니 이경령이 서울에서 기숙 중인 육영수에게 보낸 물자를 중간에 가로채기도 했다. 하지만 육영수는 배화고녀 재학 4년간 부모에게 불만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육영수가 재학하던 당시 배화고등여학교에서는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육영수는 무척 가고 싶어했지만 육종관이 "과년한 처녀가 여행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또한 육영수는 배화고녀 졸업 후 대학에도 가고 싶어했지만, 졸업 1년 전에 아버지에게 말을 꺼냈을 때 육종관은 "여자애들이 공부하면 건방져진다"면서 딸들의 대학 진학을 반대했고, 아들들만 대학에 보내겠다고 했다. 이때 육영수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육종관은 매우 부자로서 한국에 유일하게, 일본에도 2대가 겨우 남아있는 95식 4륜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 후반기에 군용차를 민간이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때문에 그가 딸의 수학여행과 대학 진학에 반대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워낙 보수적이고 남존여비가 심하던 시절이라, 여자가 집을 떠나 멀리 여행하거나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을 몹시 부정적으로 보던 당대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고등여학교까지 졸업한 것만 해도 당시로서는, 특히 여성으로서는 상당한 고학력이었다.
1942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 졸업 후 육영수는 고향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내려왔는데, 딸의 대학교육을 반대한 것과 별개로 육종관은 육영수를 매우 신임하여 육영수에게 곳간 열쇠를 맡기고 사실상의 비서, 경리로 두었다. 하루는 어머니 이경령이 육영수에게 "급히 돈을 쓸 일이 있으니 곳간을 좀 열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육영수가 "아버지 허락이 없었어요. 제가 아니라 아버지께 부탁드려보세요"라고 끝내 거절한 일이 있어, 육종관이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1945년 10월부터는 옥천여자전수학교에서 1년 3개월간 교사 생활을 했다. 과목은 가사. 이는 학교 서무과장 송재만이 육영수와 이종육촌 간이라서, 육영수를 추천하여 채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남교사들이 육영수에게 성희롱을 한 모양인데, 이때문에 분노한 육영수는 그길로 학교에 사직서를 던지고 나와버렸다. 교장이 직접 찾아와 사과도 했지만, 자존심 강한 육영수는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1950년 8월 이종사촌인 송재천[12]의 소개로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를 만났다. 박정희는 육영수와 만나기전에 집안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 1936년 김호남과 결혼하여 이듬해 박재옥이라는 딸까지 낳은 상태였다.
본래 박정희는 좀 더 나이를 먹은 후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길 원했으나, 집안 어른들, 특히 아버지인 박성빈이 "죽기전에 막내아들이 결혼하는 것을 봐야 한다"며 강권하여 당시 16세의 처녀였던 김호남과 억지로 결혼시켰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던 결혼생활인지라 김호남에게는 그다지 정이 없었다. 박정희는 김호남을 두고 이현란이라는 여대생과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동거하였으나, 박정희가 남로당 소속인 것에 실망한 이현란이 떠나버려 한동안 큰 충격을 받아 방황을 하였다.
시간이 흘러 6.25 전쟁이 터져 군대에 복귀한 이후 육군본부를 따라 대구시와 부산시를 왔다 갔다 하며 근무하고 있던 짝 없는 33살 박정희를 보고 후배들은 "이현란을 잊으라"고 성화를 하였는데, 휘하 장교들 중 하나가 대구사범 1기 후배인 송재천이다. 옥천 출신이던 그가 퍼뜩 떠올린 것은 자기 고향의 큰 부자인 육종관의 딸이었다. 마침 그 영감이 아내와 딸을 거느리고 부산 영도로 피란을 와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육영수와 박정희는 짬을 내 만났다. 정식 맞선은 아니었으나 본인의 표현대로 ‘목이 길고 고상하게 생긴 처녀’에게 박정희는 대번 호감을 느꼈다.
육영수와 박정희의 결혼식 사진 |
1950년 12월 1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나이는 박정희가 33세, 육영수가 25세. 결혼사진을 보면 육영수의 얼굴이 부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전날 육영수가 위경련을 겪어서 생긴 일시적인 후유증이라고 한다.
결혼식 때 주례를 섰던 허억 대구시장이 두 사람의 이름 때문에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이라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일화가 있다. 실제로 '정희'는 여자 이름, '영수'는 남자 이름에 쓰이다 보니 일어난 웃지 못 할 해프닝이었다.[13]
비슷한 예로 방송에서 "육영수 여사"라고 해야 할 것을 "육영사 여수"라고 방송사고를 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방송사고가 난 건, 방송에서 원체 수없이 육영수 여사, 육영수 여사 하다 보니 순간 실수한 거라고 하는데 방송에서 수없이 육영수 여사라는 단어를 부를 시기, 바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벌어진 방송사고였다.[14]
또 결혼식에 쓸 예물 반지를 가지고 있던 육영수의 사촌오빠가 결혼식 날 반지를 잃어버려 부랴부랴 반지를 사 왔다. 아버지 육종관은 당시 군인이었던 박정희가 육영수와 결혼하는 것을 “이 난리판에 군인에게 시집간다는 게 될 법한 소리야?”라며 결사반대하였는데, 반대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1. 일단 둘의 교제 시기가 1950년 8월이었는데, 당시엔 조선인민군이 경상도를 제외한 한반도를 석권하고 있었고 낙동강에서 결사항전 중이었는데, 국군이 승리한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는 요행에 가까웠을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뚫려 적화통일이 달성되면 국군은 제거대상 1호인데, 내 딸이 과부가 될지도 모르는 군인이랑 사귀냐는 점.
2. 신식 교육을 받은 부잣집 아가씨가 자식도 있고 첫 아내와 이혼까지 한[15] 8살 연상의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점.
3. 육종관이 사윗감으로 미리 점 찍어둔 조건 좋은 남자가 있었고 혼담까지 오갔는데, 자신이 정한 남자를 엎어버리고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 간다는 점.[16]
육종관은 자기 자신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도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집권한 뒤에도 청와대에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았다. 일설에는 "박정희랑 결혼하면 육영수가 비명횡사한다"는 예언을 들었다고 한다.
하여튼 이렇게 친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머니 이경령과 육영수 자신의 고집 덕분에 결혼을 밀어붙였다. 이경령이 육영수의 사주를 무속인들에게 보이니, 다들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산다"고 풀이했다고도 한다. 육종관이 들었던 예언은 저기서 더 살이 붙는다. 바로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살기는 하지만, 마지막에는 두 사람 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는 김종필의 회고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61년 어느 날, 식당에 국회의원 당락과 장차관 하마평을 잘 맞히는 것으로 유명했던 백운학이라 불리는 역술인을 초청하였다. 백운학은 "각하, 한 20년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자리가 파하는 자리에 김종필에게만 몰래 "이상한 점괘인데요. 끝에 험하게 돌아가실 것 같아요."라며 넌지시 말했다고. 그런데 이것이 그대로 실현되어 놀랐다고 한다. 결국 육종관은 육영수의 결혼식에도 찾아오지 않고, 이경령·육영수 모녀와도 완전히 갈라섰으며, 경제적 지원도 일절 해주지 않았다.#
육종관이 사위에게 사과한 건 죽음이 임박할 때였다. 죽기 직전 병문안을 온 박정희에게 "내가 부덕하여 큰 인물을 못 알아봤다."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육종관은 1965년 12월 26일 아들 육인수 의원의 창성동 자택에서 숨졌다. 그러나 육종관이 들었던 예언은 끝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딸은 물론 사위마저 정말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아버렸기 때문.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17] |
결혼 직후에는 노량진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군인 남편이 박봉이라 구멍가게도 잠시 운영했다. 부잣집에서 자란 사람이 스스로 어렵게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서는 그런 점에서 육영수를 고평가한다. 식구가 늘다보니 6년 만에 신당동으로 이사했는데, 대문이 작아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던 박정희를 보고, "남자가 고개를 숙이면 기개가 꺾인다"며 대문을 고쳤다고 한다. 혹자는 "이 집에 오시는 분은 다 귀하신 분인데, 어떻게 들어오시면서부터 고개를 숙이게 할 수 있는가"하며 대문을 개조했다는 얘기도 있다.
1952년 2월 2일 박근혜가 태어날 즈음 아직 노량진에 살던 시절, 당시 김종필, 박영옥(박재옥에게는 사촌언니) 내외의 신혼집에 얹혀살며 동덕여자고등학교를 다니던 전처의 딸 박재옥을 데려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양딸 뒷바라지도 해주었다. 훗날 박재옥을 박정희의 부관 한병기와 중매해준 사람도 육영수였다.[18]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에서는 1남 2녀(첫째 박근혜, 둘째 박근령, 셋째 박지만)가 태어났다.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를 표현한 카드섹션 (제3공화국 서울특별시 전국체전) |
무궁화대훈장을 패용한 사진 |
정부에 비교적 비판적 논조이던 'TBC 석간'의 진행자 봉두완의 회고가 있다. 봉두완은 TBC의 간판 뉴스 앵커였는데 언론통폐합 이후 보수 정치인으로 전향해 전두환 정부 때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11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냈지만 노태우 정부 때 눈밖에 난다.
봉두완은 40년 이상 소록도 한센병 환자를 도와왔고, 육영수가 나환자들의 복지와 치료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인연이 있다. 2013년 모 방송 뉴스에서 "육영수가 대중탕에 갈 수 없는 나환자들을 위해 공중목욕탕을 지어줬다"고 증언한 바도 있었다.
회고에 따르면, TBC나 DBS 동아방송이 정부를 비판해 관련자들이 고생할 때마다 육영수가 옆에서 뜯어말리고 중재했다고 한다. 봉두완, 박정희, 육영수가 3자대면한 적도 있다고. 이런 부분은 연합통신/동아일보 출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에서도 교차 검증된다.
이렇게 남편을 다독이다 보니, 그녀에게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
항상 한복 차림과 매우 꼼꼼하고 소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로 들어오는 많은 민원 진정서나 편지들을 처리하면서 통치의 한 축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수는 많지 않지만 청와대 제2부속실의 스태프를 거느리며 민원 접수 등 고유 업무를 챙겼으며, 일부 고위직을 견제하는 등 눈에 안 보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 영친왕의 처인 이방자 여사와 함께 고아원과 보육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많이 신경써 준 인물이다.
전라북도 익산시 나환자 정착촌을 방문한 육영수 |
1973년 한센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다과회를 열고 구호물자를 보냈다고 한다. 또한 1971년 전라남도 나주시의 한센인촌, 1972년 전라북도 익산시의 한센인촌을 방문하는 등 한센인들의 인권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 그리고 의사나 간호사조차 꺼릴 정도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매우 좋지 않았던 인식을 생각해보았을 때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육영수의 행보는 대중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실제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인식 개선에 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후 1974년 소록도 양로원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그 해 8월 15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 날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기도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육영수를 대신하여 2000년대에 김대중 대통령의 아내인 이희호가 대통령 배우자로서 소록도를 방문하게 된다.
환자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한 점은 지금도 소록도에서 잊히지 않으며, 덕분에 지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통적으로 전라도 텃밭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넘어 항상 민주당 우세 지역인 만큼 1,839개의 투표소 중에 1,838개의 투표소가 문재인 후보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였으나, 유일하게 소록도에 있는 도양읍 제7투표소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62.65%의 지지(득표수는 박근혜 270표, 문재인 158표)를 받는 등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전라도 뿐만 아니라 경상도 등 전국 각지에서 온 환자들이 많은 것도 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도 민주정의당 노태우가 평화민주당 김대중보다 표를 많이 얻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박정희에게 맞서 싸웠던 반체제, 민주화 운동가들도 육영수에 대한 비판은 자중하는 모양새다. 장녀인 박근혜가 정계에 들어온 후 박정희에 저항한 정치인이나 관련 단체들은 박정희와 관련하여 정치를 하는 부분에 비판을 쏟아냈지만, 육영수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었다.
과거 민주당에서 영남권 인사들을 영입할 적에 박근혜도 영입 대상에 있었다. 1999년 5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잘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역사 속에서 재평가 받게 해야 할 것. 형식은 민간주도로 하고 예산은 민간 모금과 정부 재정 지원으로 해야 할 것. 기부금 모금을 허가하는 등 정부와 대통령이 앞장서면 국민 호응도 클 것이고 꼭 성공할 것"이라 말한 적도 있었다. 대신 육영수의 아들인 박지만이 1997년 대선때 김대중을 지지했다.
박근혜는 1998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입문하였다. 앞의 김대중의 발언은 이미 박근혜가 정치권에 입문한 직후의 이야기. 김대중은 1994년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시절 온건 보수 성향의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박정희에 대해서 과거와는 다르게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는 식의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고, DJP연합으로 집권한 이후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국가예산으로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또한 1973년 육영수는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듣고,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뜻을 받들어 노동교실을 설립하자 이를 적극 챙겨 지원하는 등, 노동자들의 권익에도 신경을 썼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천정환 교수는 2014년 경향신문에 올린 본인의 글에서 한국행정학회가 조사한 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육영수만 긍정적으로 나타났다고 언급하였다.[19]
불우 청소년들의 직업 보도를 위해 정수직업훈련원을 설치하고 만화잡지 보물섬을 발간한 것으로 유명한 육영재단이나 어린이회관을 짓는 등 아동복지와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20]
이처럼 대통령인 남편을 보좌하며, 때로는 제동을 걸거나 중재를 하기도 하고, 어린아이들과 소외계층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행보로 인해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 중에는 아직도 육영수 여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육영재단은 손기정 전 선수의 메달을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다. # 그러나 정작 손기정 전 선수의 장례식 당시, 장례식을 위해 메달과 상장을 대여해달라는 유족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청와대에 보관되어 있던 다양한 문화재들이 박정희 저격 이후 사라졌는데, 육영재단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안중근 의사의 유묵. 단 이 일들은 모두 육영수의 사망 후에 일어난 일들로, 육영수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문세광의 총탄에 피격되어 쓰러진 영부인 육영수 |
1974년 8월 15일 제4공화국,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기념일이자 광복절 29주년이었던 이 날, 그 작년인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에 격분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목숨을 노렸던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의 저격으로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했던 영부인 육영수가 향년 만 48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사인은 두부관통상이다.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대통령 영부인 고 육영수 여사 국민장 |
당시 육영수 뿐 아니라 합창단원으로 참가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도 총에 맞아 사망했다. 또한 육영수가 사망한 이날은 서울 지하철 1호선(종로선) 개통일기도 했는데, 원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는 광복절 기념식이 끝나고 종로선 개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무산되고, 종로선 개통식은 매우 침울한 분위기에서 개최되었다. 육영수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조문객 수만 200만에 달하는 인파가 몰렸다.
육영수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한국 국민들의 분노는 엄청났고, 문세광이 북한과 관련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의혹 속에 반공주의도 더욱 강해졌다. 또한 문세광이 재일교포였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곧 분노의 방향을 일본으로도 돌리게 되는데 국민적 여론은 물론 대한민국 정부도 문세광에게 일본인 명의 여권을 발급한 일본에도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해명을 요구했다.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일본 총리는 대한민국에 외교 특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일부 책임을 인정하는 사과 표시와 사건 수사에 적극 협조한다는 내용이 담긴 친필을 전했고, 한국의 여론이 심상치 않다고 여긴 미국도 한일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중재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된다.
육영수의 영구차를 보낸 직후의 박정희 대통령 |
육영수 국민장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의 시신이 담긴 영구차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청와대 철문을 붙잡고 눈물을 훔쳤는데, 당시의 모습은 사진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저 시절까지만 해도 전통 장례 예법상 아내가 남편보다 먼저 죽은 경우, 남편은 집 대문 앞에서 아내의 관을 전송만 하고 장지까진 따라가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서 회수된 6발의 총알 중 육영수의 머리에 맞은 총알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넘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탄환이 우뇌 깊은 곳에 박혀서 탄을 꺼내려면 시신 훼손이 심각해지기에 탄을 꺼내지 않고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탄환과 함께 묻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육영수의 집도의에 따르면, 사입구와 사출구가 있어 관통상으로 확인되었고 자신이 관통했음을 증언하였다고 인터뷰했다. 즉, 이 인터뷰에 따르면 1발은 증발된 상태다.
1975년, 제4공화국 박정희 정부에서는 육영수의 추모사진집을 만들어 학교에 배부하기도 했다.
육영수의 모교인 배화여자중학교·배화여자고등학교 교정에는 그녀를 기리기 위한 '육영수 여사 기념관'이 세워졌고, 이어 배화여자실업전문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2/3년제 전문대학인 배화여자대학교로 개편되었고, 기념관은 배화여대의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육영수가 사망한 후, 프랑스에 유학하던 22살의 장녀 박근혜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퍼스트레이디 대행, 즉 대통령 배우자 역할을 대신했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어머니처럼 올림머리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2016년 육영수가 암살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추모공연인 <백목련>이 열렸다. 목련은 육영수가 생전에 좋아하던 꽃이며, 한복을 입고 올림머리를 한 그녀의 모습을 당시 사람들이 목련에 비유했다고 한다. 배화여자대학교의 교화(校花)이기도 하며, 배화여대에는 목련관이라는 이름의 건물도 있다.
3.1. 사망하지 않고 대통령 배우자로 계속 있었다면?[편집]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를 여의고 난 뒤 영세교 교주인 최태민과 최순실 부녀에게 극도로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빠지게 되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탄에 암살당하지 않고 1970년대 후반기까지 더 살아 있었다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육영수는 야당 인사들이나 반대자들에 대해 고문, 납치, 암살 등을 향한 정치 공작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박정희 정부에 대한 여론을 부드럽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한, 박정희의 정치적 감각에는 육영수의 조언이 한 몫했다는 얘기도 있는 만큼 남편 내조를 잘 한 것을 보면, 2인자들의 상호견제를 통한 1인자의 권력을 유지한다는 벼랑 끝 체제를 장기간 유지해온 이면에는 육영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 따르면 박정희는 겉으로는 안 그래보였지만 속으로는 아내에게 내심 굉장히 의지해서 자신을 죽이려던 문세광의 테러로 부인이 사망한 충격 탓에 마음이 극도로 약해졌다고 한다. 인간이 받는 스트레스 중 가장 큰 것이 배우자나 자녀의 사망에 의한 트라우마라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이다.
이는 박정희 경호를 명분으로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여 주변의 원성을 사던 차지철 같은 사람에게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추측은 유신정권 후기 박정희의 행보를 설명하려는 가설에 불과할 뿐, 실제로 당시 박정희의 심리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육영수가 1974년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당시 문세광의 총탄에 사망하지 않고 가벼운 총상만 입은 채 살아남았거나 혹은 1970년대 중, 후반기까지 생존하여 대통령 배우자 자리에 남아 있었다고 해도 이미 1970년대 후반기에 정권의 기반이 흔들렸다는 것을 들어 별로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의견도 있다.[21] 2차 오일쇼크 등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YH 사건 등으로 박정희 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시작되고 있었고, 동시에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했기에 박정희 정권이 언젠가 무너질 가능성은 있었지만, 적어도 김재규의 총탄에 급격하게 붕괴될 정도로 막장스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육영수가 이 사건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하지 않고 남편 박정희가 암살당하던 1970년대 말까지 생존하여 청와대를 나갔다면 대한민국이 민주화된 이후에 딸 박근혜가 아니라 육영수가 남편 박정희의 후광을 앞세워 정치계에 입문해 정치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박정희의 아내이던 육영수도 그 시기까지 살아있었다면 충분히 박정희의 후광을 업고 정계 진출이 가능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