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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열두 사도와 분해 작용
이러한 정세 아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호숫가로 물러나셨습니다 (막 3:7).
이것은 퇴각이 아닙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아직 나라 안의 마을과 고을을 두루 다니며
신(神)의 나라(=영계)의 복음(=영계의 법칙)을 널리 전하셔야 했고,
또 더 많은 병든 자와 죄인과 불행한 사람을 도우셔야 했습니다.
더 깊이 제자들을 가르쳐 두셔야 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적대에 의해
예수의 생애는 원치 않으셨건만 전투의 생애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예수의 측근으로 부름받은 열두 사도 가운데에는
다양한 인물이 있어 민중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열둘이라는 수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온 이스라엘의 구세주이심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주석학자들이 여러 설을 세우고 있습니다만,
예수께서 그러한 것을 의식하시고
열두 명이라는 수를 정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열두 사도의 면면은 사회적으로 대중을 대표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열두 사도를 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곁에 두시고,
또 전도를 위해 파송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도(道)를 위한
예수의 직접적인 조수로 삼으신 것입니다.
곁에 두신다는 것은 단순히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자,
즉 예수의 마음을 아는 자가 곁에 있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격렬한 인생의 전투에 시달리고 지칠 때,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조수이며, 참된 친구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벗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열두 사도는 그 출신이 대단치 않았던 것처럼,
그 인물이나 능력도 대단한 것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오랜 세월 예수 곁에서 날마다
그 언행을 목격하고 훈도를 받았으면서도,
좀처럼 예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번 부르신 열두 사람을,
가리옷 유다처럼 스스로 배반한 자는 별도로 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지켜보시고 사랑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사도들도 몇 번이고 어리석음을 드러냈지만,
스승을 사모하는 한평생 한결같은 진정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을 떠나 열두 사도를 부르시기 위해
산에 오르셨던 예수께서는,
마을로 돌아와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군중이 밀려들었으므로,
가르치고 고쳐 주느라 응대에 바빠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습니다.
그 모습을 전해 들은 예수의 친족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하며 찾아왔습니다.
잡아서 데려가야 한다고,
밥도 먹지 않고 말하고 논하고 때때로 큰소리를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악귀를 쫓아내실 때 예수님은 종종 크게 한 소리 호통을 치셨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의 평판은 갈릴리 시골의 바리새인뿐 아니라
예루살렘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도성 예루살렘에서 정세 시찰을 위해
출장 온 본고장의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악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그는 바알세불에 들렸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막 3:20-22).
바알세불이란 악귀의 우두머리 곧 사탄을 가리킵니다.
이 바리새인의 비평에 대해 예수님은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운운"
하며 강한 반격을 가하시고,
이어 말을 바꾸어 엄숙하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자녀들이 짓는 모든 죄와
무릇 모독하는 모독은 사함을 받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막 3:23-29).
"모독"이란 무례, 불경이라는 뜻이며,
"영원히"라 함은 절대적 의미에서의 세대(aeon, age)의 끝까지라는 뜻입니다.
곧 성령에 대해 불경한 말을 하는 것은
쉽게 사함 받을 수 없는 무거운 죄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한다"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학자들이 예수를
"더러운 영에 들렸다"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마르코복음 저자가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성령에 의해 악귀를 쫓아내시고 계신데,
학자들이 이를 악귀의 영에 의한 것이라고 비평한 것이
곧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군중의 치유, 친족의 제지 소동,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학자들과의 격론 등으로
예수께서는 자기 집에 돌아가실 겨를도 없으셨습니다
(당시 예수 일가는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살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부르러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나의 어머니, 나의 형제가 누구냐"고 말씀하시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보라, 나의 어머니, 나의 형제다.
누구든지 신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3:31-35).
이렇게 보면, 예수의 전도가 진행됨에 따라
그 주위의 사회에 현저한 분해 작용이 일어나
적과 아군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 보면
[도표]
예수
(1) 성령 (2) 제자 (3) 군중 (4) 가족 (5) 바리새인 (6) 악귀
첫째, '성령'은 예수께서 신의 자식이심을 증거하시며,
예수를 믿는 모든 자의 마음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에 대립하는 것이 여섯째의 '악귀'입니다.
악귀라 하더라도 영은 영이므로
예수께서 신의 자식이심을 인정합니다 (막 1:24, 3:11).
인정하되, 복종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둘째, '제자'는 성령에 의해 깨달아
예수를 신의 자식, 구세주로 믿는 자,
예수의 사역을 돕는 자, 예수의 마음을 위로하는 자입니다.
이에 대립하는 것이 다섯째의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의 사역의 적이요 방해자일 뿐 아니라,
예수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자입니다.
그들이 "예수는 귀신의 왕의 영에 빙의되어 있다"고 말한 것은,
곧 그들 자신이야말로 악귀의 영에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군중'은 예수의 긍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막연하나마 예수를 흠모하고,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예수로부터 기적에 의한 구원을 기대했습니다.
물론 군중 속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었지만,
예수를 믿는 자도 그 가운데서 나온 것입니다.
군중 가운데 "신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예수의 가족이며,
"신의 뜻을 행한다"는 것의 첫째 내용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것이요,
성령(수호령, 지도령)의 도우심에 의해
누구든 신을 믿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군중'에 대립하는 것이 넷째의 '가족'입니다.
가족은 예수와 혈연관계가 있고
일상적으로 그와 접하는 자이므로
가장 잘 이해할 만한 이들이지만,
사실은 예수를 미친 사람 취급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성경 연구의 학자이며,
율법을 존중하여 엄격히 지키는 종교 열심가이므로,
예수의 신의 자식 되심을 가장 잘 알아야 할 사회적 위치에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예수의 가장 큰 적이 되었고,
또 가족과 친족은 예수의 혈연이므로
가장 잘 예수를 이해할 수 있는 자연적 관계에 있는데,
그것이 예수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예수님이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고생하니까,
빼 가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
가버나움에서 같이 살고 있고, 식사도 대접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종교적으로 예수에게 속하는 자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군중 속의 누군가이며,
가족적으로 예수에게 속하는 자는 혈연이 아니라
군중 속의 누군가입니다.
물론 군중 중에도 예수를 믿지 않는 자가 있었고,
제자들 중에도 가리옷 유다처럼 예수를 배반한 자도 나왔습니다.
또한 반대로, 가족 중에서도 예수를 신의 자식으로 믿은 사람이 나왔고,
바리새인 학자 중에서도 다소의 바울 같은 걸출한 제자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예수에 대한 예비 지식이 없는 대중이나 제자들 쪽이
오히려 예수를 잘 이해했고,
예수에 대해 발언권이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 학자들이나 가족 친족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인격과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분해 작용이 일어났는가.
그 열쇠가 앞서 말한 "성령을 모독한다"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三 十二使徒と分解作用
3. 열두 사도와 분해 작용
かかる情勢の下に、イエスはその弟子を連れてガリラヤの湖辺に退き給いました(三の七)。これは退却ではありません。まだ時が来ないからです。イエスはまだ国中の町々村々を巡ってあまねく神の国の福音を宣べ伝えねばならず、またもっと多くの病者・罪人・不幸な人を助けねばならない。もっと深く弟子らを教え込んでおかねばならない。パリサイ人の敵対により、イエスの生涯は求めずして戦闘の生涯となったのであります。
이러한 정세 아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호숫가로 물러나셨습니다 (막 3:7). 이것은 퇴각이 아닙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아직 나라 안의 마을과 고을을 두루 다니며 신(神)의 나라(=영계)의 복음(=영계의 법칙)을 널리 전하셔야 했고, 또 더 많은 병든 자와 죄인과 불행한 사람을 도우셔야 했습니다. 더 깊이 제자들을 가르쳐 두셔야 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적대에 의해 예수의 생애는 원치 않으셨건만 전투의 생애가 된 것입니다.
こういう具合に、イエスの側近者として召された十二使徒中にはいろいろの人物がいて、民衆の縮図さながらであります。十二という数はイスラエルの十二支族を代表するもので、イエスは全イスラエルの救主たることの意味を含むのであります。注解学者は説を立てておりますが、イエスがそういうことを意識して十二人という数を定めたものかどうかは知りませんが、ともかく十二使徒の顔ぶれは社会的に大衆を代表した者でありました。
이러한 모습으로, 예수의 측근으로 부름받은 열두 사도 가운데에는 다양한 인물이 있어 민중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열둘이라는 수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온 이스라엘의 구세주이심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주석학자들이 여러 설을 세우고 있습니다만, 예수께서 그러한 것을 의식하시고 열두 명이라는 수를 정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열두 사도의 면면은 사회적으로 대중을 대표하는 이들이었습니다.
2十二使徒を選ばれた目的は彼らをおそばに置き、また伝道のために派遣せられるためであった。すなわち公私とも道のためにイエスの直接の助手とせられたのです。おそばに置くというのは、単に用事をさせるというだけでなく、イエスを愛し、労り、慰める者、すなわちイエスの心のわかる者がおそばにいることを欲せられたのです。激しい人生の戦闘に悩み疲れる時、本当に心の通ずる人にそばにいてもらいたい。それがまことの助手であり、まことの友達です。イエス様だって、そういう友が欲しかったのです。
열두 사도를 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곁에 두시고, 또 전도를 위해 파송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도(道)를 위한 예수의 직접적인 조수로 삼으신 것입니다. 곁에 두신다는 것은 단순히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자, 즉 예수의 마음을 아는 자가 곁에 있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격렬한 인생의 전투에 시달리고 지칠 때,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조수이며, 참된 친구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벗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十二使徒はその出身が大したものなかったように、その人物能力も大したものではなかったらしい。長い月日イエスのおそばに置かれて日常その言動を目撃し、薫陶を受けたにかかわらず、なかなかイエスのことが十分にわからなかった。それにもかかわらずイエス様は一度召された十二人を、イスカリオテのユダのように自分からそむき去った者は別として、終わりまで忍んで見守り、愛し訓え給いました。また使徒たちも幾度も愚鈍を暴露しましたけれども、彼らの師を思慕する生涯一本の真情はどれだけイエス様の慰めとなったかしれません。
열두 사도는 그 출신이 대단치 않았던 것처럼, 그 인물이나 능력도 대단한 것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오랜 세월 예수 곁에서 날마다 그 언행을 목격하고 훈도를 받았으면서도, 좀처럼 예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번 부르신 열두 사람을, 가리옷 유다처럼 스스로 배반한 자는 별도로 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지켜보시고 사랑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사도들도 몇 번이고 어리석음을 드러냈지만, 스승을 사모하는 한평생 한결같은 진정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3湖畔に集うた群集を離れ、十二使徒を召されるため山に登り給うたイエスは、町に帰って家に入られた。しかし待ち構えた群集が押しかけてきたので、教えたり医したり、応接に忙しくて食事の暇もなかった。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을 떠나 열두 사도를 부르시기 위해 산에 오르셨던 예수께서는, 마을로 돌아와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군중이 밀려들었으므로, 가르치고 고쳐 주느라 응대에 바빠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습니다.
その様子を伝え聞いたイエスの親族の者たちは、「イエスは狂気だ」と、やってきました。取り押えて連れ帰さなければと、飯も食わないで語ったり論じたり時々大きな声を出したりしている。悪鬼を追い出す時には、イエス様はしばしば大喝一声せられたのです。
그 모습을 전해 들은 예수의 친족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하며 찾아왔습니다. 잡아서 데려가야 한다고, 밥도 먹지 않고 말하고 논하고 때때로 큰소리를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악귀를 쫓아내실 때 예수님은 종종 크게 한 소리 호통을 치셨던 것입니다.
当時イエスの評判はガリラヤ住まいの田舎パリサイでなく、エルサレムまで届いたため、都エルサレムから情視察のため出張してきた本場の学者たちがいましたが、彼らもイエス様の病人医し悪鬼を逐い出すのを見て、「彼はベルセブルに憑かれている」と、「かしらにより悪鬼を逐い出すのだ」と言いました(三の二〇―二二)。ベルセブルとは悪鬼の首すなわちサタンのことであります。
당시 예수의 평판은 갈릴리 시골의 바리새인뿐 아니라 예루살렘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도성 예루살렘에서 정세 시찰을 위해 출장 온 본고장의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악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그는 바알세불에 들렸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막 3:20-22). 바알세불이란 악귀의 우두머리 곧 사탄을 가리킵니다.
このパリサイ人の批評に対してイエス様は、「サタンはいかでサタンを逐ひ出しえんや云々」と強き反撃を加えられ、さて語を改めて厳粛に、「まことに汝らに告ぐ、人の子らがすべての罪と冒すかぎりの瀆とは赦さるべし。されど聖霊をけがす者は永遠に赦されず、永遠の罪に定めらる」と宣言せられた(三の二三―二九)。「瀆」とは無礼、失敬との意、「永遠に」とあるは絶対的の意味での永遠(aeon, age)の終わりまでとの意。すなわち聖霊に対して失敬なことを言うのは、簡単に赦されることのできない重い罪であるとの意味であります。
이 바리새인의 비평에 대해 예수님은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운운"하며 강한 반격을 가하시고, 이어 말을 바꾸어 엄숙하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자녀들이 짓는 모든 죄와 무릇 모독하는 모독은 사함을 받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막 3:23-29). "모독"이란 무례, 불경이라는 뜻이며, "영원히"라 함은 절대적 의미에서의 세대(aeon, age)의 끝까지라는 뜻입니다. 곧 성령에 대해 불경한 말을 하는 것은 쉽게 사함 받을 수 없는 무거운 죄라는 의미입니다.
しからば「聖霊をけがす」とはいかなることであろうか。それは学者らがイエスを「穢れし霊に憑かれた」と言ったからだ、とマルコ伝記者説明を加えています。つまりイエスは聖霊によって悪鬼を逐い出しているのに、学者らはこれを悪鬼の霊によるのだと批評したことが、聖霊をけがすということなのです。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한다"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학자들이 예수를 "더러운 영에 들렸다"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마르코복음 저자가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성령에 의해 악귀를 쫓아내시고 계신데, 학자들이 이를 악귀의 영에 의한 것이라고 비평한 것이 곧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群衆の治癒、親族の者たちの取り押え騒ぎ、エルサレム下りの学者との激論等で、イエスは御自分の家に帰って暇もなかった(当時イエス一家は故郷ナザレを引き払って、カペナウムに住んでおられたものと見えます)。そこでイエスの母と兄弟とが呼びに来ました。イエスはこれに答えて「わが母、わが兄弟とは誰ぞ」と言い、かくて周囲に坐する人々を見まわして「見よ、これはわが母、わが兄弟なり。誰にても神の御意を行なうものは、これわが兄弟、わが姉妹、わが母なり」と言われた(三の三一―三五)。
군중의 치유, 친족의 제지 소동,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학자들과의 격론 등으로 예수께서는 자기 집에 돌아가실 겨를도 없으셨습니다 (당시 예수 일가는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살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부르러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나의 어머니, 나의 형제가 누구냐"고 말씀하시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보라, 나의 어머니, 나의 형제다. 누구든지 신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3:31-35).
4こうしてみると、イエスの伝道の進むにつれ、彼の周囲の社会に顕著な分解作用が起こって敵味方がハッキリわかってきた。今これを図で示してみれば
이렇게 보면, 예수의 전도가 진행됨에 따라 그 주위의 사회에 현저한 분해 작용이 일어나 적과 아군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 보면
[도표]
예수
(1) 성령 (2) 제자 (3) 군중 (4) 가족 (5) 바리새인 (6) 악귀
第一、『聖霊』はイエスの神の子たることを証し、イエスを信ずるすべての者の心に働いている。これに対するものは第六の『悪鬼』である。悪鬼といえども霊は霊だから、イエスの神の子たることを認める(一の二四、三の一)。認めけれども、信服しないのだ。
첫째, '성령'은 예수께서 신의 자식이심을 증거하시며, 예수를 믿는 모든 자의 마음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에 대립하는 것이 여섯째의 '악귀'입니다. 악귀라 하더라도 영은 영이므로 예수께서 신의 자식이심을 인정합니다 (막 1:24, 3:11). 인정하되, 복종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第二、『弟子』は聖霊により示されてイエスを神の子・救主と信ずる者、イエスの御仕事を助ける者、イエスの御心を慰める者である。これに対するものは第五の『パリサイ人』である。パリサイ人はイエスの御仕事の敵であり妨害者であるだけでなく、イエスの人格を根本的に否定する者である。彼が「イエスは悪鬼の首の霊に憑かれている」と言ったのは、すなわち彼ら自身こそ悪鬼の霊に支配されていたからです。
둘째, '제자'는 성령에 의해 깨달아 예수를 신의 자식, 구세주로 믿는 자, 예수의 사역을 돕는 자, 예수의 마음을 위로하는 자입니다. 이에 대립하는 것이 다섯째의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의 사역의 적이요 방해자일 뿐 아니라, 예수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자입니다. 그들이 "예수는 귀신의 왕의 영에 빙의되어 있다"고 말한 것은, 곧 그들 자신이야말로 악귀의 영에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第三、『群衆』はイエスの憐憫の対象であった。彼らは漠然ながらイエスを思慕し、イエスの言を喜んで聞き、イエスから奇蹟による救いを期待した。もちろん群衆の中にはいろいろの分子がいたが、イエスを信ずる者もその中から出たのです。
셋째, '군중'은 예수의 긍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막연하나마 예수를 흠모하고,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예수로부터 기적에 의한 구원을 기대했습니다. 물론 군중 속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었지만, 예수를 믿는 자도 그 가운데서 나온 것입니다.
群衆中「神の御意を行なう」者は誰でもイエスの家族であり、「神の御意を行なう」ことの第一の内容は、イエスを救主と信ずることであり、聖霊の助けによって誰でも神を信ずる者となれるのです。この『群衆』に対立するものは第四の『家族』です。家族はイエスと血縁関係があり、日常彼に接している者ですから、最もよく彼を理解しそうなものでありますが、事実はイエスを狂気扱いしたのです。
군중 가운데 "신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예수의 가족이며, "신의 뜻을 행한다"는 것의 첫째 내용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것이요, 성령(수호령, 지도령)의 도우심에 의해 누구든 신을 믿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군중'에 대립하는 것이 넷째의 '가족'입니다. 가족은 예수와 혈연관계가 있고 일상적으로 그와 접하는 자이므로 가장 잘 이해할 만한 이들이지만, 사실은 예수를 미친 사람 취급한 것입니다.
パリサイ人は聖書研究の学者であり、律法を尊重して厳格に守る宗教熱心家であるから、イエスの神の子たることをもっともよくわかるべき社会的地位にあるのだが、それがかえっていちばんイエスの敵となり、また家族・親族の者はイエスの血縁であるから最もよくイエスを理解しうべき自然的関係にあるのだが、それがイエスを狂気扱いする。
바리새인은 성경 연구의 학자이며, 율법을 존중하여 엄격히 지키는 종교 열심가이므로, 예수의 신의 자식 되심을 가장 잘 알아야 할 사회적 위치에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예수의 가장 큰 적이 되었고, 또 가족과 친족은 예수의 혈연이므로 가장 잘 예수를 이해할 수 있는 자연적 관계에 있는데, 그것이 예수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것입니다.(가족들은 예수님이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고생하니까, 빼 가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 가버나움에서 같이 살고 있고, 식사도 대접하고 있지 않은가?)
かくて宗教的にイエスに属するものはパリサイ人でなくて群衆の中の誰彼であり、家族的にイエスに属する者は血縁の者ではなくて群衆中の誰彼である。もちろん群衆の中にもイエスを信じない者もいたし、弟子たちの中にもイスカリオテのユダのようにイエスを裏切った者も出ました。また反対に、家族の中にもイエスを神の子と信じた人も出ましたし、パリサイの学者の中からもタルソのパウロのような傑出した弟子も出ました。
이렇게 종교적으로 예수에게 속하는 자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군중 속의 누군가이며, 가족적으로 예수에게 속하는 자는 혈연이 아니라 군중 속의 누군가입니다. 물론 군중 중에도 예수를 믿지 않는 자가 있었고, 제자들 중에도 가리옷 유다처럼 예수를 배반한 자도 나왔습니다. 또한 반대로, 가족 중에서도 예수를 신의 자식으로 믿은 사람이 나왔고, 바리새인 학자 중에서도 다소의 바울 같은 걸출한 제자가 나왔습니다.
しかし一般的に言って、イエスについて予備知識のない大衆や弟子たちの方がかえってよくイエスを理解し、イエスについて発言権を有すると自負するパリサイ人の学者や家族親族らがかえってイエス様の人格と使命とを解しなかった。どうしてこのような分解作用が起こったか。それを解く鍵が、さきほどの「聖霊をけがす」という言葉の中にあるのです。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예수에 대한 예비 지식이 없는 대중이나 제자들 쪽이 오히려 예수를 잘 이해했고, 예수에 대해 발언권이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 학자들이나 가족 친족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인격과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분해 작용이 일어났는가. 그 열쇠가 앞서 말한 "성령을 모독한다"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