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 그냥 이야기를 해보면 예수님은 안 믿는 것 같은데, 그런데 막상 자기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말입니다. 좀 헛갈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에게서 모순이 발견이 된다는 것은, 그것은 상대방이 아닌 자기 내부가 점차 윤곽이 잡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말로 해서 모순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그것은 상대방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그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것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 윤리와 도덕의 차이점은?
오늘은 '신론'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는데,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신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에게 행복이 있을 것인가?" 라고 하는, 즉 자기의 개인적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윤리의 목적이 곧 행복이니 말이다.
그러니 이 윤리와 도덕은 좀 다른데, 이런 것은 상식적으로 알아놓으면 좋은데 말이다. 윤리는 느낌이 강한 것이고, 도덕은 법에 관한 것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외부에서 누군가가 지시를 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수용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즉 "여기 도덕이야"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는 관계라는 말이다.
그런데 윤리라는 것은, "내가 좋아" 라고 하든지, 아니면 "내가 싫어" 라고 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좋다고 하고, 싫은 것은 싫다고 하는 것이 윤리라는 말이다. 그리므로 윤리대로 산다고 하는 것은, 자기 양심에 바르게 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은 "제가 이렇게 살면 됩니까?" 라고 물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알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이런 차이점을 모르면, 물론 살아가는데는 별로 지장이 없는데, 현실에서는 전혀 구별하지 않고 그냥 사용하니 말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면 점차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차이점은?
그건 그렇고, 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행복인데, 그러니 행복만 하면 그것으로 장땡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조치도 가리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행복만 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 운명이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
그런데 이러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이 스토아 학파는 유신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어르신이 수염을 기르고 폼을 잡고 있는 신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유신론이라는 것이다. 이 스토아 학파의 위대하다면 위대한 점이 무엇인고 하니, "운명이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성경의 예를 하나 들어보면, 역대하 14장에 보면, 구스 사람이 세라가 이 유다를 치려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오는데, 여기 군사들도 다 자기 가족이 있는데, 그런데 이들 중에서 유다나라에 감정이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나라에서 모병을 하니 온 것이지 말이다.
◈ 아들아, 이것은 게임이다 !!
그리고 2차 대전 때 나치들이 유대인들을 포로 수용소에서 학살했는데 말이다. 아내가 유대인이고, 그러면 자식도 유대인이 되데, 그러나 자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직업이 교사인데 말이다. 그래서 아내와 자식이 끌려가니 그 사람이 자기도 유대인이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이 끌려가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얘야, 이것은 게임이다. 너 탱크를 좋아하지? 지금 적인 독일군도 같이 게임을 하는데, 그래서 게임이기 때문에 겁을 준단다. 그런데 니가 겁을 먹으면 점수가 없어. 점수를 올리려면 겁을 먹지 말고 잘 참아야 돼. 지금 아빠를 저 놈들이 잡아가지만, 그러나 겁을 먹지 않으면 점수가 올라가는 거야. 이제 드디어 아빠는 1000점이 된단다. 너도 점수를 많이 따서 탱크를 상품으로 가져야 돼"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하고는 잡혀가서는 그만 죽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으면서 끝까지 행복한데, 그러니 그런 행복은 현실에 대해서 해석하기 나름이란 것이다. 즉 이 남자는 현실을 게임으로 해석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보면 너무나 짙은 슬픔인데, 그야말로 참혹하다는 것이다. 행복이 아니고 말이다.
* 질문 - 이태리 영화인 '아름다운 날들' 하는, 그와 비슷한 영화가 있지 않나요? 그 마지막에 장면에 보면, 아이가 무사히 엄마 품에 안겨서 "아빠, 나 1000점을 땄어" 라고 하면서 마치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도 할 수가 있는데, 아무튼 무지무지하게 아름다운데, 그런데 무지무지하게 슬프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독일군 포로 수용소의 그 남자가 끝까지 행복을 조작해내는 것인데,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 행복한 가정을 누가 깨는가?" 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 그것은 운명이고, 사회적 모순 !!
바로 이것을 스토아 학파는 운명이라고 보고, 현대철학에서는 이것을 사회적 모순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 모순은 결국 경제적 모순으로 연결이 된다는 말이다.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19세기 이전에 가난한 것은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었고, 그러나 그 이후에는 경제적인 구조가 가난하도록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서 가난하게 된다는 것이다.
◈ 누가 내 인생을 방해하는가?
우리교회 게시판에 최일규씨가 이런 글을 올려놓았는데, 어떤 사람이 농촌에서 물과 비료를 주고서 고생을 해서 농사를 지어놓아도 사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1톤 트럭에 물건을 실어서 구미시내에 나가서 팔려고 하면, 그런데 곳곳마다 권리금을 주고 자리를 잡고 있는 인간들이 있어서 자기 물건을 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을 비참하게 돌아다니면서 그 농부는 비로소 뭔가를 토해놓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농사를 지어서, 내가 팔려고 하는데, 누가 나를 방해를 하는가?" 라고 말이다. 즉 누가 자기의 삶을 방해하느냐는 것이다.
* 질문 - 역설적으로 본다면, 본인이 사회적 모순을 파헤치고 난 뒤에, 그것을 보고서는 농사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하지만 농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일을 한 것은 선한 것이기에 말이다. 자기의 노동은 선인데, 그런데 결과는 악이라는 것이다.
* 질문 - 저도 그 글을 보았는데, 그 사람은 처음에 자기가 직장생활을 하다가 좌절을 느끼고 시골에 가서 그렇게 농사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러니 그 사람은 계속해서 사회구조를 잘못 파악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회적 책임으로, 즉 결국 사람들은 자기 잘못도 사회적 책임으로 돌려버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 그 글을 읽어보셨나요? 물론 집사님처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자기가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조작한 그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그냥 남의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운명이니, 참아야 하느니라 !!
그런데 아까 제가 말한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가족들과 같이 포로 수용소로 잡혀간 그 남자는 그것을 어떻게 어겼는가? 나치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기보다는 자기의 '운명'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여기에 제가 강의한 것이 모두 들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스토아 학파의 모습이란 말이다. 즉 운명이니 '참자' 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 행복이 있으니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이 스토아 학파는 주어진 사건으로 본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그러한데, 주어진 하나의 게임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통하지 않는데, 왜 그런고 하니, 자기가 아무리 아름답게 해석을 하려고 해도, 그렇게 하면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즉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선인데, 그런데 왜 악한 조건들이 생겨서 자기에서 선을 빼앗아 가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복수심이 생기는데,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지하철에 불을 지르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 선을 자기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두면 간단해지는 것이 아닌가요?
사실 이 선의 문제를 예수님에 넘길 것은 안 되는데, 즉 "나는 적극적으로 악한 놈이다" 라고 보아야 하니 말이다. 자기가 선하지 않다고, 그렇게 너그럽게(?) 볼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악하다는 것은 선함을 바탕에 둔 악함이 아닌가요? 악함에서 악함이 나올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선한 것조차도 악하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항상 대비해서 생각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예수님에게는 그런 선악과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행복의 근원을 파헤치는 순간, 와장창 !!
아무튼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스토아 학파에서 말하는 행복이 결국은 운명으로 갔을 때, 그런데 여기서 참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야, 오늘부터 행복이다. 그러니 내일도 행복이라고 간주해" 라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이것을 나중에 후대의 철학에서 조사를 해보니, 인간이 그렇게 행복을 감정으로 느끼게 되고, 그 감정에는 정서와 의지 등이 있는데, 결국은 욕망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행복의 근원이 무엇인지 파헤치는 순간, 그 행복이 깨어진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부터 행복의 시작이다" 라고 한다고 해서 행복이 계속해서 그렇게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은 결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는데, 그래서 행복이 지금 이 순간뿐만이 아니라 내일까지 계속해서 가려고 하면, 그 행복이 무엇인지, 그 근원을 파헤쳐야 하는데, 그렇게 알아야 계속해서 유지를 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한 이유를 파헤치게 되면, 그만 그 행복이 사라지게 되는데, 즉 어제의 행복은 오늘 이 시점에 와보면 별로 그렇게 행복한 것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에이, 그 정도의 행복은 행복이 아니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욕망이 행복을 가만히 두지 않아 !!
이것을 현대철학에는 '욕망' 이라고 보는데, 사실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말이다. 즉 "나는 행복해지고 싶은데, 나의 욕망이 가만히 두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자기의 욕망이 어제의 것이 아닌, 다른 색깔을 가진 행복을 자기에게 요구하도록 독촉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라는 말이다.
* 질문 - 저는 '행복' 이라는 단어가 좀 웃기는데, 이 행복이라는 것은 사실상 따지고 보면 날아가는 것을 순간적으로 자기 마음속에 잡아두는 것에 불과한데, 그러니 철저히 자기 중심적 생각일 뿐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신적인 관점에서의 행복은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 플로티누스의 삼위일체적 존재론이란?
물론 그러한데, 그래서 이러한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제가 제일 처음에 오늘 강의한다고 한 플로티누스의 '신론'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 그러한 원인을 조사한 사람이 바로 지난번에 한 '플로티누스' 라는 말이다.
◈ 첫째, 모든 것은 자기 존재로 모아진다 !!
이 플로티누스가 왜 신론인고 하니, 모든 존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3가지 요소를 삼위일체적 관계로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을 '삼위일체적 존재론' 이라고 하는데, 먼저 모든 것을 하나되게 하는 '하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1번인데, 즉 "모든 것은 자기 존재를 느끼는 것에 모아지게 되어있다" 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듣게 되면, 이 플로티누스가 정말로 천재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 어떤 존재도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생각을 하지 않을 때가 없다는 말이다. 잠시 야구를 볼 때는 잊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나면 다시 돌아오고 말이다. 언제나 자기에게로 귀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제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불러도, 그리고 목회를 하고 학원을 운영하고 마누라가 어떻고 자식이 어떻고 해도, 결국에 남는 것은 여전히 '나' 라는 존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나'를 말이다.
◈ 둘째, 정신이 다양성을 남긴다 !!
그것이 첫 번째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까, 이렇게 원이 되도록 하나를 항상 펼치도록, 즉 처음에 말한 '하나' 라는 것이 단일성인데, 그런데 그 하나만을 가지고 단일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가지고 단일성을 만들어내는 쪽으로 하는데, 그것을 바로 '정신'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지 않는가? 이것도 역시 플로티누스의 천재적인 모습인데, 그러니 여기에 이렇게 원주가 있으면, 참 원주가 아니라 반지름인데 말이다. 이렇게 원의 반지름이 있으면, 전부가 다 이렇게 여러 군데 퍼져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렇게 여러 군데 퍼지는, 즉 다양성을 남기는 힘인데, 그것이 곧 '정신' 이라는 말이다.
◈ 셋째로, 다양성인데, 곧 영혼이다 !!
그런데 세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그냥 '다양성' 이라는 것이다. 코스모스든지, 코끼리든지, 코알라든지 말이다. 말을 하다가 보니 전부가 다 코씨네 집안인데 말이다. (ㅋㅋ) 그렇게 다양성인데, 즉 모든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을 '영혼' 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물질은 무엇인가? 그것도 역시 영혼인데, 왜냐하면 물질은 그냥 물질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형상이든지 간에 입어야 하니 말이다. 그것이 지우개든지, 책상이든지, 의자든지 말이다. 그렇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결국은 인간도 따지고 보면 그렇고 말이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다양성이 있다는 말인데, 이 다양성은 그 나름대로의 정신에 의해서 '하나', 즉 자기 존재성으로서 집약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맹이나 타일이나 금속과 같은 것은 영원성보다는 질료성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는 예를 들기가 곤란하다는 말이다. 같은 영혼이라고 해도 말이다.
◈ 가장 적합한 예가 바로 '인간' !!
그런데 여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무엇을 생각해도 마지막에는 항상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비롯한 모든 존재가 다 이러하니, 철학은 여기에서 끝났다고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그러니 그것도 역시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비록 차원은 낮을지 몰라도 인간과 유사하다는 말이다.
◈ 철학은 플로티누스에서 끝 ??
그러므로 이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더 이상 자기에게 진리에 대해서, 즉 철학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이 났으니 말이다. 그것이 과장이 아니라, 사실 그의 말이 맞는 면도 있는데, 철학은 그에게서 끝이 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서 초기의 헬라철학이 끝이 나는데, 철학도 나름대로는(?) 플로티누스에 의해서 완성이 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시가가 지나면서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그리스와 로마지역이 기독교 세력에 의해서 점령을 당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플로티누스는 205년에 태어나서 270년에 죽었다는 말이다.
◈ 그런데 헬라철학이 기독교 사상과 !!
그러니 플로티누스를 비롯한 이러한 헬라철학이 모두 기독교 사상에 스며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 약 7세기에서 10세기까지 흘러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흘러가다가 마호멧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해서, 그들이 다시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잃어버렸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회복하면서, 다시 거꾸로(?) 섞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12세기까지 계속되고 말이다.
그러니 이 사이에는(역 3세기에서 10세기?) 기독교 사상과 헬라철학이 혼합된 상태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즉 플로티누스적인 철학과 기독교 사상이 이 시대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좀 알아야 중세철학이나, 기독교에 사상 대해서 이해하기가 훨씬 용이하다는 말이다.
◈ 오늘 강의할 3가지 주제 !!
1. 과연 헬라철학에서 무엇을 신으로 보는가?
2. 초기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현대 신화에서 신은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두 가지를 설명하겠는데, 아니 세 가지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첫째는 "과연 헬라철학에서 무엇을 신으로 보는가?" 라는 것이다. 두 번째가 "초기 기독교에서 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점이고 말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현대 신화에서 신은 어떻게 되는가?"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신화라는 것은,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민중들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인간의 심성을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두 번째의 기독교 신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즉 유대교에서 신을 뭐라고 하는지, 그리고 기독교에서 신을 뭐라고 하는지, 그렇게 또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토탈 4가지가 되는데, 그것을 오늘 한번 해보자는 말이다.
◈ 누메니우스의 삼신론 !!
이러한 헬라 철학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신프로타고라스주의자로 불리우는 '누메니우스' 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양반은 신을 삼위일체적으로 보았는데, 즉 아버지 신과 이 세상을 제조한 제조자, 그리고 피조물로 말이다. 피조물도 역시 신인데, 그렇게 삼위의 신으로, 아니 삼위가 아니라 그냥 삼신(三神)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이 누메니우스가 최초로 삼신론(?)을 주장한 사람인가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이미 플라톤이나 헬라철학에 다 그런 내용들이 있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아버지 신은 '부동자의 동자' 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최초의 신은,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는 신이라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데, 그러니 신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회사 사장이라고 하면 회사의 구석구석을 모두 다 알고 있어야 하듯이 말이다. 물건이 하나 나와도 한 눈에 알아보아야 하고, 또한 그것을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은 피조물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신은 또한 원래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중간에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즉 신의 명령을 받아서 그대로 만드는 신인데, 그것이 제조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이고 말이다. 즉 '삼신론(三神論)'이 되는데, 이렇게 되어야만 신과 움직이는 세상이 제대로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그런 신 개념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요?
물론 당연한데, 나중에 나오지만 신화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다 인간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그 다음에 더 상세한 이론이 '알비누스(?)' 라는 자에 의해서 등장하는데, 신을 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3개의 피조물(?)을 그렇게 피조물이라고 하지를 않고, 3개의 영혼으로 고쳐서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물론 비슷한 내용이지만 말이다.
◈ 필론의 삼신론 !!
그 다음이 유대교의 신 개념인데, 여기서는 A.D. 20년경에 활동한 '필론' 이란 철학자가 있는데, 그는 이 삼신론에서, 아버지 신을 여호와로 보고, 또 제조자를 로고스로 보고, 그 다음에는 피조물로 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람이 삼신론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여기에서 로고스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플로티누스는 200년 이후의 인물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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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론(Philon) -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B.C.15~A.D.45). 유대 사상과 그리스 철학을 융합하여 중간실재로서의 로고스설을 주장하였다. 계시신앙과 철학적 이성을 종합하려고 한 최초의 인물로서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독교 신학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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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리하면, 헬라철학의 신 개념이라는 것은, 즉 신은 모든 것을 포섭해야 하고, 또한 종속시켜야 한다는 개념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스토아 학파에서는 운명이라고 했고 말이다. 즉 신은 모든 것을 다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이다.
◈ 만약에, 신의 존재를 가상하지 않으면?
그렇다면 이러한 신의 존재를 가상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단독 개별자가 자기가 최고라고 자꾸 우기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윤리는 아닐지 몰라도 도덕이 그만 깨어진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남의 차에 불을 질러놓고 하는 말이, "나는 신이다" 라고 하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사람을 때려놓고는, 자기 속에 있는 신이 했다고 하면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신이 되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당해야 하니 그만 피해자가 되고 마는데, 그렇게 되면 당장에 "니만 신이가?" 라고 나올 텐데, 그렇게 되면 신이 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신은 모든 것을 다 포함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다는 말이다.
◈ 우리 모두가 신이지 않는가?
예를 들어서, 여기에 A와 B가 있다고 한다면, A가 신이 되려고 하면 적어도 어떻게 되어야 하는고 하니, B라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신이 되는데, 그런데 인간은 B라는 요소가 없으면서도 자기 신이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상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은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는데, 신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가 신이라고 우기지 말고 "우리가 모두 신이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모두를 다 포함하는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나온 것이 바로 신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그런 포괄적인 신의 개념 안에서 한번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이다.
◈ 신화에서 말하는 'spirit' 개념 !!
기독교적인 신 개념은 조금 있다가 하고, 먼저 신화의 세계에서 말하는 신 개념을 이야기해보면, 먼저 'spirit' 라는 개념이 먼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요괴, 요물, 요정, 정령, 귀신 등등의 영적인 개념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물질과 영적인 세계의 경계선에 있는데, 그러니 양쪽을 다 겸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신화의 세계에서는 'spirit'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신화의 세계에서는 무엇인고 하니까, 자연의 지혜와 비밀은 인간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곰이나 사자와 같은 자연세계에서 힘이 가장 센 최고의 동물들만이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약한(?) 인간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드디어, 인간과 짐승이 교제를 하는데 !!
그러면 자연의 비밀은 어디에 숨어있는가? 엄습한 숲 깊은 곳이나 깊고 깊은 동굴과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안데르탈인이나 크로마뇽인 이후에 3만년에서 1만년 정도가 되면, 인간들과 짐승들이 서로 교제하는(?) 그림들이 제법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들 '애니미즘' 이라고 하는데, 정령숭배나 토테미즘과도 비슷한데 말이다.
이렇게 신화의 세계에서는 신이 도대체 어디에서 생겼는지를 연구하는데, 현대의 과학자들은 그것을 인간의 두뇌에서 나왔다고 보는데, 그러니 상당히 유물론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원시시대의 인간의 두뇌는, 그 두뇌의 뉴런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한 영역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현 인류인 크로마뇽인 시대에 들어오면 그 영역이 깨어지고, 서로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컵과 책상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이것이 이렇게 학원에 있으니, 즉 학원이라는 더 큰 개념 안에서 서로 통용이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컵밖에 모르고, 또 책상밖에 모르는 그런 아이큐가 아주 낮은 상태에 있는, 즉 하나밖에 모른다는 말이다. 사실은 요즘도 아이들을 보면 그러한데, 컴퓨터에서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은 엄청 잘하는데, 실제로 친구들과는 말은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곰이여, 진리를 가르쳐 주세요 !!
바로 이러한 신화의 세계에서 아이큐가 낮은 인간과 짐승이 서로 교류를 했는데, 왜냐하면, 대자연의 비밀을 인간은 모르니, 즉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것은 몰랐다는 말이다. 그러나 위대한 짐승인 곰은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곰이 자연의 비밀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다 퍼져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신화의 세계에서 곰은 자연의 진리를 알고 있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엌, 헛간, 뒤뜰 등의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즉 그런 공간에서 교류가 될 때만, 즉 교류가 되는 접촉점에 의해서만 인간은 비로소 겁이 나서 덜덜 떨면서 겨우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이 교류를 할 수 있는 것이, 곧 'spirit' !!
바로 거기에서 교류를 할 수 있는 것이 'spirit' 인데, 이것을 '요정' 이라고 하면 좋은데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공간에서 말을 잘 듣고 잘 해주면 인간에게 잘 해주는, 그러한 귀여운 'spirit' 이니 말이다. 이러한 것이 유럽 북쪽의 게르만 민족의 전래동화에 보면 굉장히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대칭적 사고이기 때문에, 저쪽의 영적세계와 이쪽의 자연세계를 모두 인정해주는 말이다. 그것이 '뫼비우스의 띠'에 의하면, 처음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그런데 그것을 반으로 자르게 되면, 완전히 앞면과 뒷면으로 갈라져버린다는 것이다. 크라인 병(?)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 그런데 '샤먼'이 등장하면서 !!
그런데 이러한 것이 언제 등장하는고 하니, 대칭이 깨어지게 되는데, 즉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집어삼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추장이나 왕이 등장하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이 세상의 비밀을 누가 아는고 하니, 곰이 아니라 위대한 '샤먼'이, 즉 추장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원래는 이 샤먼은 인간과 곰 사이의 '중매자'에 불과했는데, 즉 '무당' 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그런 중매자의 역할을 하니 점점 더 사람들이 따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추장님, 추장님", "목사님, 목사님", 혹은 "스님, 스님" 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니, 그만 샤먼 자신이 이 우주의 비밀을 독점해버리는데, 즉 샤먼 자신이 이제는 곰의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 왕이여, 성을 지어드릴 테니 재앙을 막아주소서 !!
그렇게 샤먼이, 즉 추장이나 왕이 곰의 역할을 하게 되면, 백성들은 두 가지를 요구하게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일단 샤먼을 과거에 자기들이 곰을 숭배하듯이, 그렇게 자기들과 격리를 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을 담을 아주 높이 쌓아서 성을 만들고, 그 안에 살도록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그 샤먼을, 즉 왕을 영웅으로 만들어주면서, 일종의 영웅주의인데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 백성들은 두 가지를 사항을 요구하게 되는데, 자기들이 그렇게 성을 아주 높이 쌓아서 격리를 시키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무식한 푸줏간 영감과 같은 인간들은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주는 대신에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비가 올 때가 되면 비가 오도록 해주고, 꽃이 필 때가 되면 꽃이 피도록 해주고, 또한 홍수가 기근과 같은 재앙이 닥치지 않도록 막아달라는 것이다. 물론 막아주지 못하면 왕을 바꾸어버리고 말이다. 즉 왕은 마음껏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대신에, 왕은 자기들에게 닥치는 재앙을 막아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신화의 세계가 깨어지면서, 신이 민중들의 머리 위에 있는 아주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 전혀 대중적인 신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수렵시대에는 인간은 짐승과 더불어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 인디언들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 짐승을 사냥할 때 어떻게 하는고 하니, 그들은 짐승을 그냥 짐승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누이고 남편이고 부모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짐승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기를 잡아가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의 어머니가 자식들이 양식이 없는 것을 알고, 야생의 염소가 되어서, 그렇게 자기의 고기를 찢어줌으로 말미암아서, 자기 자식들이 먹고 살아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원래 이 '물질' 이라는 것은 그냥 하나의 고깃덩어리에 불과하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는 그러한 물질에서 벗어나서 영생을 얻어서 좋고, 또한 자식들은 어머니가 남겨준 그 맛있는 고기를 얻어먹고서 배부르게 먹고 살아가니 좋다는 말이다. 즉 그렇게 되어서 후손들이 잘 되면 좋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인디언들은 사냥을 하나 하더라도 그냥 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영적인(?) 교류를 하면서 사냥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냥을 하고 나면, 그 짐승에 대한 고마움으로 반드시 제사를 지내는데, 그것이 바로 '토테미즘' 사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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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테미즘(totemism) - 토템 신앙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체제 및 종교 형태. 토템이라는 말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인 오지브와족(族)이 어떤 종류의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그 동·식물류(독수리·수달·곰·메기·떡갈나무 등)를 토템이라 하여 집단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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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 자체가 포근히 감싸주는 신이기에 !!
이럴 때는 곰이 이미 추상적인 신이 되어있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자면, 자연 자체가 이미 자기들을 포근히 감싸고 않아 주는 신이 되어있기 때문에, 인간이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염소' 라는 자연의 신인 엄마가 친히 고기를 주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고기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대장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가진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기 때문에, 자연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를 믿는데 말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런 화폐라는 형식적인 도구가 없었을 경우에는, 그냥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누이동생이, 또한 어떤 처남이나 매부가 자기를 잡아먹으라고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양이 되어서 온 처남에게 물어보는데, "처남, 지금 잡을까? 아니면 나중에 잡을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처남이 "지금은 조금 곤란하고, 나중에 잡아드세요" 라고 하면 그냥 살려준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죽으면 또 양이 되어서 후손들에게 양식이 되어주고 말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이 곧 인디언들이니, 그들은 이 세상에서 모순됨이 없다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모순이 된다고 하는 것은 자아가 확립이 될 때 이야기이고, 그러니 그러한 자아가 없을 때는 모순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 남산 위에 뛰어 노는 노루새끼들처럼 ??
저희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 일년에 두 번씩, 즉 추석과 설이 되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정지(부엌)에서 뭐라고 주문을 외우면서 종이를 태운다는 것이다. 그러면 호기심이 생겨서 잠도 자지 않고, 그것을 몰래 훔쳐보곤 했는데, 그렇게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면 궁금하고 보고 싶으니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말이다.
아무튼 할머니가 정지에서 주문을 외우면서 종이를 태우는데, 제가 직접 보고 들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비는고 하니까, 바로 그 유명한(?) 삼신 할머니에게 빈다는 것이다. 해마다 그 멘트가 동일한데, 즉 "삼신 할머니, 우리 자식놈들 건강하게 해주시고, 저 남산 위에 뛰어 노는 노루새끼들처럼 잘 뛰게 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 그것이 곧 교류이고, 존중 !!
그런데 그것은 기복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교류' 라는 것이다. 제가 신학을 공부하기 이전에는 그것을 기복신앙으로 보았는데, 그런데 나중에 신화를 공부하면서 살펴보니, 그것은 바로 '존중' 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자연의 운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저희 할머니는 종교도 양쪽을 다 걸치는데, 즉 절에도 걸치고 성당에도 걸치고 말이다. 절에서 뭐라고 하고 성당에서 아무리 무슨 소리를 해도, 할머니에게는 그런 것들은 다 삼신 할머니가 만든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만약에 자식이 성당에 다닌다고 하면, 그 자기 이름을 성당에 걸치는데, 그것은 삼신 할머니가 그렇게 성당에 걸쳐놓으라고 시켰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전혀 모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작 할머니에게는 무지무지 편하다는 것이다.
◈ 정성이 부족한 것이 바로 죄 !!
물론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죄' 라는 개념이 빠져버리고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만, 다만 '부족하다' 라는 개념만 있다는 말이다. 즉 "제가 정성이 부족해서"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저희 할머니에게 죄는 정성이 부족한 것이 바로 죄인데, 그러니 교회에 빠지고 헌금을 적게 한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한국교회와도 너무나 동일한데, 그러니 현재 한국교회의 실상은 전혀 기독교가 아니라 신화라는 말이다. 언제나 정성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목사를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이 죄이고 말이다. 그러니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에 대해서는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 유일신의 등장으로 !!
이렇게 하다가 유일신이 등장하는데, 그런데 이 농경시대에는 제일 급선무가 무엇인고 하니, 노동력의 부족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기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다 해야하니 말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애굽시대에 애굽 사람들이 히브리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메가머신(대형기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예제도이고 노예의식인데, 즉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애굽'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막대한 기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농경시대이니 농사를 짓는 기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한 기계를 구입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려야만 하고, 그런 전쟁을 하려면 명령계통이 제대로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명령계통이 수립이 되라면, 밑에 있는 부하들이 위에 있는 황제의 종교를 따라주어야 황제의 권위가 서고, 명령이 제대로 전달이 된다는 말이다.
◈ 그런데 황제의 신을 따르면, 자연을 정복해야 !!
드라마 '왕건'에 보면 궁예가 나오는데, 뭐라고 하는가? '옴마니밧메흠' 라고 하면서 자기 종교를 강요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부하들이 그 지도자의 종교를 따르지 않으면 나라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번에 현대그룹의 정몽헌 회장이 비자금을 만들라고 한 것과 같은데, 그렇게 회장님이 지시를 했으면 임원진은 그대로 따라야지, 법에 저촉이 된다고 하면서 시비를 걸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완전히 한 통속이 되어서 돈을 챙기는데 일심동체가 되어야 하지 말이다.
아무튼 농경시대가 되면, 결국 신의 차원을 높여서 황제의 신이 신이 되는데, 군사들은 자기들 개인의 신은 모두 다 버리고 이 황제의 신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제 자연의 신은 버리고, 오히려 그러한 자연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정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유일신을 따라가면 말이다.
◈ 가인이 제청한 살인 금지법 !!
바로 이러한 유일신에서 법이 나오는데, 그 최초의 법을 가인의 후예들이 만들었는데,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에 하나님이 그 지역에서 가인을 내쫓으니 뭐라고 하는가? 제발 남들이 자기를 죽이지 않도록 좀 조치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최초의 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살인 금지법' 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이 살인 금지법이 살인한 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되풀이된다는 것을 자기가 아니까 말이다. 즉 자기가 그 짓을 했으면, 남들도 그 짓을 한다는 것을 잘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살인 금지법이 국가형성에 큰 도움이 되는데, 단 황제만 살인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간음 금지법의 경우에도, 황제만 간통을 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 문화 인류학 - 법은 항상 차이성에 의해서 !!
그래서 '문화 인류학' 이라는 그 복잡한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국가가 만든 법은 모두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법을 제정한 자, 법의 최고 정점에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황제 말고 다른 쪽에만 법을 지키도록, 즉 그렇게 이쪽과 저쪽이 서로가 차이가 나도록, 그렇게 차이성에 의해서 제정된다고 하는 것이 그 핵심사항이라는 것이다. 물론 요즘도 동일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일반 사람들이 용납해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먼저 신화의 세계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자연과의 경쟁이 아니라, 그러한 자연에 순응할 때 가장 모순이 없다는 것이다. 즉 행복하다는 말이다. 대통령이 박정희이든, 전두환이든 노태우이든,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데, 그냥 시키는 데로 순응을 하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KBS만 보라고 하면 KBS만 보았고, 또 신문도 서울신문만 보라고 하면 서울신문만 보았다는 것이다. 시골에도 이장이 와서 서울신문을 나누어주면 다 보았다는 말이다. 서울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도 말이다. 심지어 자유당 시절에는, 자식놈이라도 자유당을 찍지 않으면 자식으로 취급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집안을 말아먹는다고 말이다.
◈ 드디어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
바로 그러한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은 대칭적인 구조에서 비대칭적인 구조로서 그 두뇌가 변하면서 무엇이 나왔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두뇌가 그렇게 되니, 즉 핵심엔진이 그렇게 되니 나오는 것은 욕망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비대칭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서 욕망이 튀어나와서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이루는데, 그래서 이유 없는 '증식' 이라는 것이다. 무조건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증식은, 사실 자연은 핑계에 지나지 않고, 자아에 대한 일종의 '병' 이라는 것이다. 무조건 커지는 병인데, 그것을 '거대증' 인가 그렇게 부른다는 말이다.
◈ 현대사회는 무조건 발전해야 !!
신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점을 굉장히 안타까워하는데, 모든 현대인들이, 즉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무슨 병에 걸려있는고 하니, 무조건 발전을 해야 한다는 병에 걸려있다는 것이다. 무조건 커져야 하는데, 그래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많아야 하고 말이다. 즉 더 커지고 더 많이 소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걷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연과의 조화와 순응이 아니라 자연과의 정복 때문인데, 그래서 자연자체가 인간을 그렇게 병들게 만들었다고 신화학자들이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비정상적으로 되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아무튼 신화에서는 그냥 순응인데, 그러니 이런 신화의 세계에서는 '신' 이라는 개념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데, 즉 때리면 그냥 맞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도 운명이고, 자연이 주신 하나의 팔자이니 말이다. 그것이 가장 인간의 기본적인 삶이고, 신화에서의 합당한 삶이고 행복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화의 세계에서는, 신을 좋아하지 않고 불교를 굉장히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질문 - 복음도 그렇게 운명적이지 않나요? 이미 예정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신화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지는 몰라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 질문 - 신화의 입장이 아니라 복음도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요?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으니 말입니다. 즉 인간 중심으로 보면 이미 정해져있는 것이고, 또 예수님 중심으로 보면 완성된 것이고 말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그러한데, 그리고 '아직'이 아니라 '이미' 라는 것은,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운명이 아니라 언약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 언약은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고 저주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렇게 이미 우리가 심판을 받았으니, 즉 이미 정해졌으니 운명론적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미 운명이 내포가 되어있으니까, 스토아 학파에서 말하는 사건으로서의 운명과도 비슷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이슬람 쪽도 그렇고 말입니다.
물론 그런 면에서는 운명론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그런 운명론이 처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같이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그런 스토아 학파와는 전혀 다른데, 나중에 가면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다 나온다는 것이다.
이제 세 번째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해서 살펴보면, 먼저 앞에서 유대교의 경우에는 유대교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필론이 주장한 '로고스'를 언급했는데, 즉 신은 보이지 않으니 하늘로 올려보내고 이제는 로고스만 이야기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로고스가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라는 것이다.
이 기독교의 신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동방 기독교를 살펴보면, 그것은 헬라 철학적이라는 것이다. 둘째가 서방 기독교인데, 그것은 법적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의 신학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기존 철학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존재론' 인데, 즉 "신의 존재가 이미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신의 존재를 닮아 가면 행복하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존재론에서 윤리가 나오는데, 다른 말로는 행복이고 말이다.
◈ 철학이란, 하나인 신을 다양한 인간이 닮는 것 !!
무슨 의미인고 하니, 신의 존재가 있기에, 그 신의 존재는 '하나'이고, 우리는 '다양성' 이라는 것이다. 즉 신은 하나이고 우리 피조물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우리 인간이 행복해지려고 하면, 하나인 신을 닮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철학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금욕적으로 하는 것은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이고, 떠들면서 하는 것은 디오니소스 종교이고 말이다.
◈ 철학과 기독교와의 차이점은?
그런데 여기서 철학과 기독교와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이렇게 철학은 존재론적인데 비해서, 기독교는 은총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동방 기독교는, 그런 은총이 존재론적 은총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존재론적 은총론'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방금 철학은 인간은 신의 존재를 닮아 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행동을 자제하고 윤리적으로 반듯하게 살면 되는데, 즉 운명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면서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방 기독교는 이런 철학과 유사한 점이 무엇인고 하니, 신의 은총을 강조하면서도, 즉 "내가 신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라는 것이다. 자기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신을 닮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동방 기독교라는 것이다. 그러니 신은 '나와 너' 할 것 없이 골고루 은총을 베풀었다는 것이 동방 기독교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 질문 - 기독교에서도 철학에서처럼 닮아간다고 여기나요?
물론 그러한데, 그것이 곧 하나님 '형상론' 이라는 것이다. 즉 형상은 원판이 따로 있고, 또 복사판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원판이 아닌 복사판이기 때문에, 복사가 많이 된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덜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은총이 있기 때문에, 서로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방 기독교는 무엇인고 하니, 그러한 것이 개별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덮어져서 있는데, 그런데 그런 개개인의 인간이 어떤 법을 지키면 죄에서 건짐을 받겠느냐는 말이다. 율법적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인 죄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동방 기독교와 서방 기독교의 차이점 !!
그러니 동방 기독교는 전체 인간에게 주신 은총을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동방 기독교는 인간 개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렇다고 인간의 행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다만 개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즉 동방 기독교는 전체 인간에게 은총을 주신 하나님을 믿을 때, 인간은 그런 신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서 서방 기독교는 무엇인고 하니, 즉 '나'의 하나님을, '내'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내'가 어떤 모습으로 믿어야만,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 개개인에게 관심이 많은데, 물론 동방 기독교는 인간 전체에게 관심이 있지만 말이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아무튼 양 진영에서 다 은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다만 서방 기독교에서는 '법'을 주신 것에 대해서, 그것을 은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설명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서방 기독교의 경우에 !!
서방 기독교의 경우에, 만약에 자기가 지옥에 갈 놈 같으면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주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셔서, 성경을 집어던지지 않고, 자기가 그 말씀을 보고 지킨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앞사람도 뒷사람도 옆에 있는 사람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신 은총으로서, 그래서 주께서 성경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서방 기독교는 무엇인고 하니까, 사람들을 포섭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어떤 자를 우리교회에 넣어주면 안 되는가?" 라는 것을 연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방 기독교는 "누구든지 다 나오너라.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조금은 차이는 나지만 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다 신의 자녀라는 말이다.
* 질문 - 아니 기독교는 서방에서 생겼는데, 왜 그런 차이가 나지요?
여기서 말하는 동방과 서방은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이렇게 지중해가 있다고 하면, 이태리, 그리스, 터키, 안디옥,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등이 이렇게 있는데, 앞에 있는 이태리의 로마를 서방이라고 하고, 그 로마에서 동쪽을 모두 동방이라고,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동방 기독교는 이단과 이단이 아닌 자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게 발달하는 반면에, 서방 기독교는 어떻게 사람들을 포섭할 것인가에 대해서 연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방의 경우에 어떠한가? 서방은 가만히 있어도 신의 자녀지만, 동방은 개인적으로 신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과 기독교의 차이점은 "인간의 행함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인가?" 라는 것이지만, 그러니 인간존재 자체에서 인간의 행함이 나오고, 그런 인간의 행함이 신을 닮아 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곧 철학이라는 것이다.
◈ 윤리박사, '세네카'를 소개합니다 !!
여기에 대해서 스토아 학파의 세네카가 유명한데, 즉 '세네카의 윤리학(에티카?)' 이라고 말이다. (혹시 네로황제의 사부가 아닌지?) 그래서 그의 윤리학에 대해서 칼빈을 비롯해서 후대의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했는데, 왜 그의 윤리가 너무나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위대하기에 말이다. 물론 자기를 부인하는데, 그래서 "아니, 세상에 저런 성자가 있을 수 있는가?" 라고 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거의 완벽한 윤리를 추구했는데, 즉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철저히 연구하고 말이다. 그렇게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따져서, 나쁜 일은 모두 피하고 옳은 일만 골라서 했다는 것이다. 예리하게 찾아내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일일이 기록으로 다 남겨서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네카는 윤리에 관한 한 그야말로 '윤리박사(?)' 라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가 몸소 실행에 옮기고 말이다. 인간의 모든 심리도 파악을 해서 말이다. 그래서 구제를 해도 마음에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구제가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스토아 학파라는 것이다.
◈ 사도바울님, 스토아 학파에게 배웠지요?
그래서 요즘은 스토아 학파를 연구한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보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사도바울이 혹시나 이 스토아 학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닌가?" 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와 유사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에 말이다. 산상설교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마음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라고 이들은 주장했다는 것이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고 말이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배웠나?)
그러나 세네카를 비롯해서 스토아 학파는 전혀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주장이 성경에 있는 내용과 너무나도 비슷한 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도 그런 것들이 마구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세네카는 동방 기독교에 의하면 무엇을 모르는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 은혜, 혹은 은총은 동방과 서방이 둘다 로고스인데, 하지만 이들도 역시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신은 그냥 계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거룩한 신이 촐랑거리면서 이 땅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로고스가 일을 하는데, 이것은 아까 필론의 철학에도 나왔지만 말이다. 그렇게 하급신이 일을 하는데, 이것이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곧 정신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영혼에 해당이 되고 말이다. 그러니 정신이 영혼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어서 하나의 신에게 합일하도록 조치한다는 것이다.
◈ 왜 씰데없이 거대한 신론을 구축하는가?
여기서 잠시 이러한 신을 아까 말한 신화의 세계에 나오는 신과 비교하면 어떻게 되는가? 즉 이것을 신화론적으로 본다면, 이렇게 거대한 신론을 구축한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씨잘데기 없는 짓이라는 말이다. 신화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그렇지 않는가?
다시 말해서, 신을 하나의 개념화를 시켰다는 말은, 신화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제 아무리 신에게 복종하고 무슨 소리를 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인간의 자아가 구축된 이후이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그때는 자아와 대립이 되어서, 그래서 아무리 자기보다 위대하고, 자기보다 전능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신화를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신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더욱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인간의 모습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은 인위적인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동방 기독교든 서방 기독교든, 그런 '이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씀인가요?
물론 그러한데, 하지만 그렇게 이론화가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한 이론이 없으면 남는 것은 오로지 감정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또 신화의 세계로 빠지고 마니까, 그렇게 되면 또 다시 무질서해지고 말이다.
그러면 신화 쪽에서 하는 말이 "그렇게 무질서한 것이 원래의 인간이야" 라고 하는데, 그러면 또 이쪽에서는 뭐라고 하겠는가? "그렇게 무질서하면 왕의 도덕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하는데, 그러면 저쪽에서는 "누가 그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했는데?" 라고 하면, 이쪽에서는 "니는 그렇게 살아라. 나는 내 인생을 이렇게 살게" 라고 한다는 말이다.
◈ 모든 것은 '증식'을 위해서 !!
다시 이야기해보면, 인간이 '증식'을 하려면 힘을 모아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권력이 생기면 질서가 생기고 서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약 역대기를 보면 그렇게 전쟁이 많은데, 왜 인간들이 전쟁을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왜 굳이 전쟁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증식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증식은 왜 하는가? 신화의 세계에서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야붕이 시켰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야붕이 자기 생각을 밑에 부하들에게 세뇌를 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고서 오야붕의 생각을 따라서 "맞습니다. 전쟁을 합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전쟁을 하다가 다 죽어버리는데, 가족이고 뭐고 다 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 아들아, 경마는 좋은 것이란다 ??
예를 들어서, 만약 경마도박에 빠진 아버지가 있다고 하면, 아들이 묻기를 "아빠, 경마를 왜 하지요?" 라고 하면, 아버지는 "응, 경마는 좋은 것이란다" 라고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 혼자서 하면 되는데, 그것을 식구들에게 세뇌를 시켜서 온 식구들이 경마를 하는 것을 옹호하도록 해서, 말아먹을 때는 다같이 몽땅 다 말아먹고 말이다.
◈ 인간은 자꾸만 환경에 모방을 하려고 !!
이것을 두고 신화의 세계에서는 '모방심리' 라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인간은 모방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최초의 인간이 자연에 순응했듯이, 그렇게 그 이후로는 인간은 이상하게도 자기들이 만든 환경에 모방을, 즉 순응하려고 하는 두뇌로 조절을 당했다는 말이다.
◈ 사는 것이 죽는 것이고, 곧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신화의 세계에서는 본래 인간 그 자체를 아예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말이다. 즉 "사는 것이 죽는 것이고, 곧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라는 말인데,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마치 띠가 계속해서 연결이 되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이 자꾸만 "살아보자, 살아보자"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죽음의 세계를 마치 남의 세계인 것처럼 착각을 하니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살아보자는 소리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산 것이 죽은 것이고, 곧 죽은 것이 산 것인데, 그것이 바로 대자연과의 융화이고 말이다. 그렇게 보니 좀 겁이 나지 않는가?
◈ 증식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신'을 !!
그런데 인간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다 꿍꿍이속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그렇게 신을 믿음으로서, 그 신이 자기 속에 들어옴으로서 자기가 곧 신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신이 된다는 것은 타인에게 군림하겠다는 뜻인데, 그것은 곧 자기편을 많이 만들어서, 즉 증식을 하기 위한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래서 '신' 이라는 이름을 자꾸만 들먹인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야기가 구약성경 열왕기와 역대기에 보면 너무나도 생생하게 잘 나와있는데, 그래서 민족들끼리 싸움을 하는데, 반드시 자기 신을 앞장세운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앞장세우고, 적들은 마르둑 신을 앞장세우고 말이다. 그래서 밑에서 전쟁을 하는데, 그렇게 해서 이기면 자기들의 신이 이겼다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자기들의 욕망인데 말이다.
◈ 그래서 자본주의는, 유일신 사상이 발달 !!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신화의 세계에서는 굉장히 개탄을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그대로 이어져서, 이제 현대에 들어와서는 칼이 아니라 돈으로 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 라는 것이다. 사실은 칼보다 돈이 더 무서운데 말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항상 유일신 사상이 굉장히 발달하는데, 그래서 지금 21세기는 이슬람교의 신과 기독교 신밖에 없는데, 즉 이러한 두 가지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특징이 둘 다 타협이 불가능한 '유일신' 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슬람은 왜 자본주의가 흐지부지한가?
그런데 이슬람교의 유일신에서는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들의 유일신인 '알라신'에게는 이런 신화적인 융통성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가운데 무엇이 있는고 하니, '성령'이 있다는 말이다. 그 성령이 바로 'spirit' 라는 것인데, 즉 처음에 이야기한 그 신화적인 요소를 그만 집어넣어 버렸다는 말이다.
그것을 집어넣었다는 의미는,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려고 하는 그런 본능을 기독교에서는 그대로 용납을 해주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알라신은 이러한 성령이 없고 법만 있어서, "이자는 받으면 안 돼" 라고 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자본주의가 발달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 질문 -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그 알라신이 바로 여호와가 맞지요?
물론 그러한데, 그런데 이 이슬람은 율법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튼 동방 기독교과 서방 기독교의 차이점은, 그렇게 은총론에서 나고 있는데, 동방은 전체적이고 서방은 개인적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 주도권을 누가 쥐게 되는가? 정치적으로 로마가 그리스를 지배하게 되니, 즉 서방이 동방으로 서서히 움직인다는 것이다. 항상 권력에 의해서 교류가 바뀌기 때문에 말이다.
◈ 이제 정치적으로 로마가 등장하면서 !!
그렇게 바뀌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까 죄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즉 "개인적인 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말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보라는 것이다. 중요한 부분이니 말이다.
◈ 첫째는, 로고스가 육체를 입었는가?
◈ 둘째는, 로고스가 육체가 되었는가?
첫째는, "로고스가 육체를 입었는가?" 라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둘째는 "로고스가 육체가 되었는가?" 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신학적인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목사님, 무슨 그런 것에 신경을 씁니까? 그것이 그것인데 말입니다" 라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전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만약에,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면?
만약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로고스라는 신이 사람이 되었다는 말인데, 그렇게 신이 사람이 되어버리면,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과는 이제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신이 사람이 되면 유리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의 행함과는 상관이 없이 그분의 덕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 이렇게 인간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늘나라에서 사닥다리가 이만큼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래도 안 되는데, 그래서 다리가 더 많이 내려와서 이제는 폴짝 뛰어서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두고서 "로고스가 육체를 입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로고스가 육체가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 사닥다리가 아예 자기 속에 완전히 들어와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곧 신이 되니 말이다.
◈ 그런데, 예수님도 하나님인데?
그러므로 사람이 신이 되는 방법에 있어서, 신이 사람이 되는 방법만큼 유리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좋은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하나님이다" 라는 것에 대해서는 해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이 사람이 되고 자기가 그 안에 들어가 버린다면, 자기가 바로 예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믿는 것이 되니, 그것은 또 기독교에 있어서 말이 안 된다는 말이다. 혹시 불교라면 몰라도 말이다.
◈ 아하, 그래서 삼위일체 논쟁이 !!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플로티누스의 존재론적 삼위일체 철학체계가 주목을 끌게 되고, 그래서 그런 존재론적 삼위일체 철학체계 안에서, 이러한 기독교의 십자가 사상을 과연 어떤 개념을 가지고 결합시키고, 또 개념을 가지고 풀이할 것인지, 여기에 대한 다툼이 중세시대에 헬라철학이 들어올 때까지 계속해서 진행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삼위일체 논쟁' 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삼위일체 논쟁은 결국 구원론에 관한 것인데, 즉 "어떤 과정과 논리적인 절차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가?" 라는 것의 논쟁이고 싸움이라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신부님, 제가 과연 어떤 정보를 제대로 알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바꾸어 말하면, "여러분은 바로 이러 이러한 지식을 갖추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달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이쪽에서는 이렇게 가르쳐주고, 저쪽에서는 저렇게 가르쳐주니, 당연히 패가 갈라진다는 말이다. 그만 한 쪽은 이단이 되고 말이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단이 왜 생기는가?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의 은총을 골고루 받았다고 한다면 이단이 생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몰라서 무지 목매할 뿐인데, 그러니 돌아온다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니 말이다.
◈ 이단은, 천국과 지옥의 문제 !!
그런데 이단은 무엇인고 하니, 그런 차원이 아니라 뒤에 악마가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즉 천사와 악마의 관계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도저히 섞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단은 개별적으로 다른 지식을 쫓으면 지옥에 가고, 또한 자기들의 가르침을 따르면 천당에 간다고 하는, 바로 그러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게 천당과 지옥이라는 것이, 어느 쪽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냐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그야말로 보통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피가 튀게 박이 터지라고 싸웠다는 말이다. 이 삼위일체의 문제가 바로 이런 이단의 문제와 연결되어서 진행이 되니, 그 당시 분위기가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말이다.
◈ 다시 정리를 하면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철학은 결국 존재론에서 나온 윤리관인데, 그러니 이러한 윤리의 문제는 천국과 지옥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인간이 좀 덜 떨어졌다는 것이지 말이다. 즉 제대로 배우지를 못하고 머리가 좀 나빠서 살아가는데 힘이 들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거지신세가 되어서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본인에게 물어보면 그들 중에서는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영 시원치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본인이 행복하다면 나름대로는 살아갈 맛이 난다는 것이다. 물론 더 많이 배우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못 배우고 수준이 떨어진다고 해서 지옥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철학인데, 그런데 기독교는 처음에 은총론으로 시작해서, 그래서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신의 은총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구원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옥에 갈 놈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신의 자녀가 아니라, 악마의 자녀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궁금하게 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인간이 지옥에 가는가?"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는 지옥에 가기 싫으니 그런 것은 피하고 싶다는 말이다. 당연히 죽어서 천당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윤리가 아닌 선택으로 문제로 !!
그러니 이 문제는 개인이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그러한 윤리관의 문제가 전혀 아니라, 도대체 어떤 이론을 선택할지, 어떤 가르침을 따를지, 즉 본인의 선택문제로 빠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제대로 선택을 받으려고 하면 이론을 제대로 정립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제대로 정립을 하면 정통교회인데, 즉 "바로 이것입니다" 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잘 모르겠는데" 라고 하면, 그런 교회는 비정통 교회이고, 당연히 그런 교회에는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은 구원문제와 관련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철학의 윤리도 사실 구원의 문제가 아닌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교회가 땅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먹고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땅을 누가 주는가? 하나님께서 주시는가? 교인들이 죽을 때 땅을 교회에 바치는데, 그렇게 해야 후손들이 복을 받으니 말이다. 자기도 천국에 가고 말이다.
그렇게 교회가 땅이 많아지면 교회는 당연히 큰 건물을 짓게 되는데, 마치 대형마트처럼 말이다. 좋은 물건이 많은 대형마트에 가지 누가 구멍가게에 찾아가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딱 이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라고 하는, 그런 확실한 이론을 제시하면 된다는 것이다.
◈ 누가 성례를 행할 자격이 되는가?
그런데 삼위일체의 이론 가운데 재미있는 점은, "과연 누가 성례를 행할 자격이 되는가?" 라는 것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즉 "당신이 그런 자격이 되는가? 당신이 과거에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배반하지 않았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또 다른 사람에는 "당신은 얼마 전에 간음을 했잖아? 그런데 무슨 성례식을 거행한다는 말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신부나 목사의 자격이 어떠해야 하는지, 즉 "이러 이러한 경우에는 성직자가 될 수가 없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이것은 교회의 이론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됨됨이 문제로 바뀐다는 것이다. 교회 성직자의 인간 됨됨이가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저 사람은 나의 사제로 인정하노라" 라고 하는, 그런 임명권자가 그만 독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교회의 주교가 결국은 무엇이 되겠는가? 그것은 바로 '교황'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에 교황은 신의 유일한 계시 전달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신의 대리자' 라는 말이다.
◈ 옛날에,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이 살았는데 !!
이렇게 뿌리를 살펴보니, 결국에는 철학과 은총론의 결합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가? 다음 시간에는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에 대해서 하겠는데,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대립이 된다는 것이다. 성직자의 자격문제를 두고서 말이다. 초기 교회사의 아주 유명한 논쟁인데 말이다.
펠라기우스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데, 즉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 혼자서만 타락했지, 우리들은 아니다. 우리는 아담의 그 죄를 물려받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학이라기보다는 철학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철학과 은총론에 있어서, 이런 문제를 종교와 철학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철학이라는 것이다. 이런 철학이 사회의 정치구조와 만날 때, 그것이 어떻게 변질이 되고, 또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모방하고 순응하려고 하는지, 바로 그러한 모습을 그런 논쟁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좀 알아야 근대철학과 현대철학이 이해가 되고 말이다.
◈ 결국은, 누가 뭐라고 해도 'I AM GOD' !!
중세를 지나서 근대철학에 와서 철학이 교회로부터 해방이 되었는데, 즉 "나는 이제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그것은 바로 "내가 곧 신이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자기가 신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적당한 변명거리를 다시금 동원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왜 신일 수밖에는 없는가? 나는 왜 남에게 간섭을 받으면 안 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또 다시 설명하는 철학이 현대철학에서 다시 이어진다는 말이다. 만약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계속해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정말 오늘날 이 시대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어떤 이론이나 감정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이 진리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