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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獺子)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었는가?
○ 난중잡록(亂中雜錄) 4권을 보면, “홀 자 온(忽刺溫)이니, 달자(獺子)”니 하는 이민족(異民族)들의 명칭(名稱)과 조선(朝鮮)과 이들과의 관계(關係)를 기록(記錄)한 내용(內容)이 전(傳)한다. 이런 이족(異族)들이 반도(半島) 북방(北方)에에 정말 존재(存在)했는가? 아니면 역사서(歷史書)를 이용(利用)한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산물(産物)인지, 이들에 대해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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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癸卯 萬曆31年 宣祖36年 (계묘년 만력 31년, 선조 36년(1603년)
癸卯 萬曆31年 宣祖36年 / 《冬十一月.忽剌溫野人.自內府領兵馬.突至江邊.屠殺向化獺子. : 겨울, 11월 홀자온(忽刺溫) 야인(野人)이, 내부(內府)로부터 병마를 이끌고, 강변에 돌격해 와서, 귀화한 달자(獺子)들을 마구 죽였다. 獺子數百.遁越江水.入鍾城鎭.忽賊移兵向我曰.不還遁胡.願交一戰. : 달자 수백 명이, 강을 건너, 종성진(鍾城鎭)으로 들어 왔는데, 홀자온 적(賊) 은 병사를 보내어 우리에게 이르기를, 도망간 자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하였다. 遁胡曰.我等不死.事將不測.出還本土.竝仗劍死.忽賊盡收餘衆而去.自後胡中消息.未得探知. : 도망 온 오랑캐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죽지 않으면, 장차 불측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하고, 본토로 되돌아가, 모두 칼에 엎드려 자살하니, 홀자온 적(賊)은 남은 무리를 다 거둬 몰고 갔다. 이 뒤로 오랑캐 땅의 소식은, 탐지하지를 못하였다.》
● 홀 자 온(忽刺溫) :『여진족(女眞族)』이라고 한다. 홀자온(忽刺溫)은 또 홀라온(忽刺溫)이라고도 하는데, 부족(部族)의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는 여진족(女眞族)의 추장(酋長)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누루하치와 패권(覇權)을 다퉜던 자(者)라고도 한다. 또는 북방 오랑캐의 부족 이름으로, 홀온(忽溫)이라고도 한다. 홀 호【忽胡 : 홀자온(忽刺溫) 부족】라고도 한다.
㉮ 미수기언(眉叟記言) 제30권 / 변새(邊塞) : 《 세종 15년(1433)에 상이 최윤덕(崔潤德)을 보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홀자온(忽剌溫)을 토벌케 하니 포로와 참수(斬首)가 4백여 명이었다. 중략. 4군【郡 무창ㆍ여연ㆍ우예ㆍ자성】의 땅은 동(東)으로 허천(虛川)부터 서(西)쪽으로 독로강 만년군(萬年郡)까지 443리이고, 남과 북은 압록강에서 영흥군(永興郡) 양덕(陽德) 경계까지 5백 리이다. 본래 숙신국(肅愼國) 말갈의 터전으로 조선의 옛 땅이었는데 여진에게 빼앗겼다. 우리 태종과 세종이 북쪽 경계에 6진(鎭)을 설치하고 또 압록강 유역에 4군을 설치하였는데, 홀자온과 올량합(兀良哈) 그리고 파저강 유역의 여러 오랑캐들이 변경을 자주 침략하므로 세종 15년(1433)에 최윤덕을 보내 쳐부수었고 19년(1437)에 또 이천을 보내 토벌하였다. 세조 원년(1455)에 와서는 4군 지역 9백여 리를 버리고 오랑캐와 관계를 끊었다.》고 하였다.
㉯ 상촌집 / 기(記) 11수 / 낙민루기(樂民樓記) : 《선종대왕(宣宗大王)이 즉위한 지 40년 되던 해에 북녘 오랑캐 홀자온(忽刺溫)이 군대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더니, 조금 후에는, 또 서녘 오랑캐 노추(老酋)와 연결하여 날마다 노려보며 우리에게 틈이 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34권 / 설(說) : 을사년에는 홀자온(忽刺溫) 부족 노인이 동관(潼關)을 함락하고 노략하다가 변방 장수에게 격퇴되었다. 이로부터 홀자온 부락이 서로(西虜)인 노아합적(老兒哈赤)과 사이가 좋지 않아, 결국 노추(老酋)에게 먹히고 말았으며, 무릇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번호(藩胡)들을 노추가 하나도 남김없이 데리고 갔는데, 우리나라에 비로소 국경 부근에 사는 자들이 없어지게 되었다.
● 북녘오랑캐 : 홀자온(忽刺溫)
서녁오랑캐 : 노추(누루하치) : 서로(西虜) : 노아합적(누루하치)
● 반도(半島)에 서쪽 오랑캐가 있었다?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별집 제18권 / 변어전고(邊圉典故) / 북쪽 변방 : 《그때에 누르하치가 홀자온보다 강성하여 홀자온을 병합하려고, 그 딸을 홀자온에게 아내로 주었으나, 홀자온이 오히려 복종하지 않고 매양 서로 겨누어 보려는 의사가 있었다. 홀자온이 방원(防垣) 등 여러 곳을 노략질하려고 무리를 거느리고 종성 건너편 문암(門巖)에 이르니, 마침 누르하치도 군사를 일으켜 현성(縣城)을 치고 경원(慶源)을 거쳐 강을 건너 종성의 오갈암(烏碣巖)에 이르렀는데, 건너편에 홀자온이 와서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는 한 부대의 군사로써 맞이하여 치자, 홀자온의 정병(精兵)은 거의 죽고 남은 군사는 그 소굴로 돌아갔다. 누르하치가 다시 무리들을 모두 거느리고 나아가 하질귀(何叱貴) 홀자온의 추장 이름 를 치니, 하질귀가 성에서 나와 싸웠다. 누르하치가 산 속에 복병시켰다가 양편의 진영이 어울려 싸우는 틈을 타서 복병으로 성중으로 달려들어가니, 하질귀가 패하고 돌아가 1백여 기(騎)를 거느리고 여해부락(如海部落)으로 투항했다. 여해부락에서는 하질귀를 지옥(地獄)에 가두어 죽였는데, 여해부락도 누르하치에게 병합되었다. 이에 누르하치는 모든 부락을 다 병합해 버리고 요동을 함락하였다. 《조야첨재》
㉱ 약천집(藥泉集) / 약천집 제4권 / 소차(疏箚) : 《북쪽 변경의 세 가지 일을 아뢰고 이어 지도(地圖)를 올린 소 【계축년(1673, 현종 14) 12월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있을 때이다.】 : 사군(四郡)의 건너편에 있는 올량합(兀良哈)과 홀자온(忽刺溫) 등의 부락이 더욱 강성하여 날뛰어서 아침저녁으로 몰래 나타나서 끊임없이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하였으므로, 이 당시 조정에서는 사람을 기르는 토지를 가지고 전쟁을 일으켜 사람을 살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버리고 소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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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자(者)【여진족(女眞族)】들이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한 “달자(獺子)=달자(達者)=달자(韃子)=달자(㺚子)”들을 마구 죽였다고 한다면, 「여진족(女眞族)과 조선(朝鮮)사이에 달자(獺子)=달자(達者)=달자(韃子)=달자(㺚子)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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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에서는 “달자(㺚子)”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1) 고 정헌대부(正憲大夫) 한성부판윤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지훈련원사(漢城府判尹兼五衛都摠府都摠管知訓鍊院事) 하원군(河源君) 증시공무(贈諡恭武) 장공(張公) 묘지명 : 《임인 년(1542)에 또다시 경상좌도 병사로 나갔다. 이때 명나라에서는 “건주위(建州衛)의 달자(㺚子)”가 변경을 침략하므로 장차 우리나라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토벌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이 부원수가 될 만하다고 하여 병사를 체직하고, 하원군을 그대로 습작하게 하였다.》
(2) 국조보감(國朝寶鑑) / 세조 조 3 / 9년(갑신, 1464) : 《사은사 권기(權技)가 통관(通官)을 먼저 보내어 “달자(㺚子)가 중국 변방 지역을 침범한 상황에 대해 아뢰었다.” 상이 평안도 도절제사 양정(楊汀)에게 하유하기를, 「근래 듣건대, “삼위(三衛)의 달자” 30여 명이 개원(開原) 등지에 들어가 다섯 사람을 탈취해가자, 요동(遼東)이 건주위(建州衛)와 연결해서 난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병사 1000명으로 통원보(通遠堡)와 봉황산(鳳凰山) 등지를 지키게 하였다 한다. 중략. 전에 경으로 하여금 군대를 사열하여 위세를 보이게 한 것은 공격하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이는 남을 치느라고 스스로 수고롭기만 할 뿐이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병사들을 안무(按撫)하고 움직이지 말아 오랑캐를 교만하게 하고 안일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틈이 생기도록 하여 방휼지세(蚌鷸之勢)를 이루게 해야 하겠으니, 이것은 남을 이용하여 남을 치는 법이다.” 하였다.
(3) 기재사초 하(寄齋史草 下) / 임진일록 3(壬辰日錄 三) 선조 25년, 만력 20년 7월부터 8월까지. 다만 날짜는 쓰지 않았음. 아래도 이와 같음. 3개월임 / 7월 : 《7월 초에, 중략. 조 총병(祖 摠兵)이 군대를 인솔하고 압록강을 건너오니, 유성룡ㆍ김명원 등이 말하기를, “비가 내려 길이 질퍽하니 급격히 공격하는 것은 불리하다.” 하니, 조 총병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3만의 기병으로 10만의 달자(㺚子)를 섬멸했었는데, 왜적을 보니 개미나 모기 같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주D-001] 달자(㺚子) : 수달의 새끼. 중국 서북 지방의 종족인 달단(㺚狚)을 말함.
(4) 왕조실록 / 문종 즉위년 경오(1450,경태 1) / 3월26일 (경오) / 평안도·함길도의 감사와 도절제사에게 몽고(蒙古)병의 방비에 해이하지 말도록 유시하다 : 《평안도(平安道)·함길도(咸吉道)의 감사(監司)와 도절제사(都節制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바야흐로 달자(㺚子)의 군사가 횡행(橫行)하고 있으니, 방어에 근신하여 혹시라도 해이(懈弛)하지 말고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게 하라.”하였다.
[주D-001] 달자(㺚子) : 몽고 병(蒙古 兵)
(5) 세조 9년 계미(1463,천순 7) / 2월25일 (갑신) / 함길도 도절제사 강순이 삼위 달자의 침입 시 응변에 대해 방도를 묻다 : 《함길도 도절제사 강순(康純)이 치계(馳啓)하기를, “화라온 올적합(火刺溫兀狄哈) 이린합(伊麟哈)이 와서 말하기를, ‘삼위 달자(三衛達子) 3천여 명이 근경(近境)에 와서 둔(屯)치고, 성언(聲言)하기를, 「북방(北方)의 달자(㺚子)가 내침(來侵)한 까닭으로 와서 둔쳤다.」고 하였다.’ 합니다.》 중략.
[주D-001] 삼위 달자(三衛 達子) : 몽고족과 만주족의 혼혈(混血) 종족인 올량합(兀良哈)족을 말함.
● 본인(本人) 주(注) : 「올 량 합(兀良哈)은 당노오량해부(唐努烏梁海部)」를 말한다. 《청사(淸史)志 53. 地理 25 / 外蒙古 :《唐努烏梁海部:本明時兀良哈部族.至京師八千餘里.清初來附,屬烏裡雅蘇台定邊副將軍轄.(中略).東南至土謝圖汗及賽音諾顏部,札薩克圖汗部,西南至科布多,北至俄羅斯.南:唐努山,延亙千餘里.又有穆遜山.西北:敖蘭烏納瑚山,鄂爾噶漢山,與唐努山相接.阿努河,察罕米哈河,阿穆哈河,皆出其北麓. : 당노오량해부 : 원래 명(明)나라 때의 올 량 합(兀良哈) 부족(部族)이다. 경사(京師)에서 8000여리에 이른다. 청(淸)나라 초에 내부하여, “오 리 아 소 태 정변(定邊)”의 부 장군이 관장하였다. (중략). 동남(東南)으로 “토 사 도 한”과 “새 음 낙 안 부”와 “찰 살 극 도 한 부”에 이르며, 서남(西南)으로는 “과포다”에 이르고, 북쪽에는 아라사(러시아)에 이르며, 남쪽에는 ; “당 노산【唐 努 山 : 당노오랍 산(唐 努 烏 拉 山)】”이 천 여리에 길게 뻗쳐있으며, 또 “목 손 산(穆 遜 山)”이 있다. 서북(西北)에는 ; “오 란 오 납 호 산”, “악 이 갈 한 산”이 “당 노 산(唐努山)”과 함께 서로 이어져 있다. <아 노 하, 찰 한 미 합 하, 아 목 합 하> 모두가 그 산(山)의 북쪽 기슭에서 나온다. 》라 하였다.
이곳은 『신강성과 외몽고와 러시아의 접경지대로, 외몽고 서북(西北)변경』지방이다. 명(明)나라 때, 이곳지방에 있던 부족(部族)이 “올 량 합(兀良哈)”이다. 청(淸)나라의 서울을 현 “북경(北京)”이라고 했을 때 <약 8,000 여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6) 왕조실록 / 단종 1년 계유(1453,경태 4) / 2월22일 (기유) /《이양(李 穰)을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로 삼았다. 이날 이양이 도진무(都鎭撫) 공조 참의(工曹參議) 이효성(李孝誠)과 종사관(從事官) 성균 사예(成均司藝) 김종순(金從舜)과 군사 18인을 거느리고 평안도로 돌아가니, 강맹경(姜孟卿)을 보내어 모화관(慕華館)에서 전송하였다. 그가 가지고 간 사목[賚去事目]은 이러하였다. 중략. 〔1. 야선(也先)이 사람을 보내어, 서장(書狀)을 가지고 국경에 이르면, 중략. 만약에 야선(也先)이 친히 와서 혹 장수를 보내어 강압하여 서울로 직행하려 하면, 그 군세(軍勢)를 보아, 병력의 수가 적어서 화친(和親)할 만하거든 적당한 말로 대하고, 병력의 수가 많아서 침략의 기세가 있거든, 마땅히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며 청야(淸野)하여, 남도(南道)의 군사를 징발하여 방어할 때까지 기다리고, 저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와는 오래 쌓인 혐의도 없는데, 대군을 몰아 멀리 와서 명분 없는 공략(攻掠)을 하니,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서 너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니 어찌 꺼릴 것이 있겠는가?’ 하고, 절대로 말을 낮추어 절조를 굽혀서는 안 되고, 또 강변(强辯)하여 노여움을 사서도 안 된다.〕 〔1. 만약에 삼위 달자(三衛韃子)와 해서 야인(海西野人)·화라온(火剌溫)등이 야선의 공략에 몰리어, 사세(事勢)가 궁(窮)하여 오게 되면, 이들을 맞아들여서 흔단(釁端)을 열어서는 안 된다.〕》하였다.
(7) 송자대전 / 행장(行狀) /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행장 : 《신이 길에서 귀화(歸化)한 달자(韃子)의 부인들도 보았고, 또 진공(進貢)하고 돌아가는 오랑캐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사내아이들과 부인들이 땋거나 쪽진 머리 모양은 그들의 모습과 불행하게도 근사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오래도록 전해 온 습속이기는 하지만, 이야말로 성상께서 한번 혁신시켜 도(道)에 이르게 할 수가 있는 계기입니다. 만약 이런 습속을 계속 답습해 간다면 뒷날 중국의 사관(史官)이 붓대를 잡고, 조선(朝鮮)을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고 쓰겠습니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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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에 기록(記錄)된 “달자(獺子)=달자(㺚子)=달자(韃子)=달자(達子)”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모두 똑같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종족(種族)들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삼위(三衛)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카페 게시판(揭示板)에서 여러 차례 걸쳐 원전(原典)을 근거(根據)로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을 수 없는 이유(理由)와 고증(考證)을 했다. 또 이들은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마지막 관문(關門)인 돈황 주변(周邊)과 또 그 서(西)쪽과 서북(西北)지방에 있었다는 설명(說明)을 하였다.
명사(明史)를 근거(根據)로, 야선(也先)이 「조선(朝鮮)을 협박(脅迫)했다」는 설명(說明)도 하였다. 위의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보면, 「야선(也先)이 직접(直接) 오거나, 또는 장수(將帥)가 온다면」.......하는 기록(記錄)으로 볼 때,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는 야선(也先)의 땅과 연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곳은 대륙(大陸)의 서북(西北)지방일 뿐이다.
※「건주위(建州衛)의 달자(㺚子)와 해서(海西)야인(野人) 또는 삼위(三衛)달자(㺚子)와 해서(海西)야인(野人)」이란 :
《반도(半島) 및 그 북방(北方)에서 해서(海西)란 말은 곧 대륙(大陸) 땅을 지칭(指稱)한다. 반도(半島) 또는 그 북방(北方)의 지세(地勢)로 볼 때, 해서(海西)란 “바다 서쪽”을 말하기 때문이다. 만약(萬若) 이러한 지세(地勢)로 논(論)한다면 요녕성(遼寧省)이나 반도(半島) 북방(北方)은 “해동(海東)야인(野人)”이란 말이 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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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자(獺子)의 “달(獺)은 수달 달”이다. 또 달자(㺚子)의 달(㺚) 역시 “수달 달”이며, 달자(韃子)의 “달(韃)”자는 “종족 이름 달”이다. 곧 달단(韃靼)을 칭하는 말이다. 이는 “달자(獺子)=달자(㺚子)=달자(韃子)”는 똑같은 종족(種族)을 말하는 것으로, 달단(韃靼)을 지칭하며, 곧 몽고족(蒙古族)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달자(韃子)는 「서북(西北)변의 오랑캐(胡)를 말하는 것으로, 특히 명(明)나라 때 몽고(蒙古)족을 “달자(韃子)”라 불렀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달자(獺子)를 몽고의 유종 또는 흑룡강(黑龍江) 북쪽에 살던 이민족(異民族)이라고 했으며, 대비달자(大鼻撻子)=대비달자(大鼻獺子)는 코 큰 러시아인 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달(獺)은 달(㺚), 달(撻), 달(達)과 함께 쓰였으며, 달(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거(證據)한다.】
㉯ 곧 달자(韃子)라고 하는 “달단”은 「명(明)나라 때, 서북(西北) 변경지방의 오랑캐라 했으며, 몽고(蒙古)족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존재(存在)할 이유(理由)가 없는 것이다. 대륙(大陸)의 서북(西北)지방에 있었다는 달단이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을 턱이 없는 것이 아닌가!
㉰ 반도(半島) 땅에 “달자(獺子)”가 귀화(歸化)했다는 말은, 이미 고려(高麗)때부터 수많은 “달자(韃子)”들이 귀화(歸化)하였으며, 이들은 고려(高麗) 땅에서, 다시 조선(朝鮮) 땅에서 무리를 이뤄, 유목(遊牧)생활(生活)을 했다고 하였고, 이들 중에서 “백정(白丁)”의 무리가 생겼으며, 이들 무리에서 기생(妓生)도 생겼다고 전한다.
양수척(楊水尺)은『수척(水尺)· 화 척(禾尺)· 무자리』 라고도 하는데, 이들 무리 중에서 어여쁜 여인(女人)들이, 먹고 살기 위해 춤과 노래를 배운 것이 기생의 유래(由來)라고 하는 설(說)이 있다. 이들은 모두 달단 곧 달자(韃子=獺子=㺚子)들이다.
㉱ 「이들은 대륙(大陸)서북(西北)에 있었던 자(者)들이다. 대륙 사(大陸 史)나 현대(現代)의 백과사전(百科辭典)에서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자(者)들을 일만(一萬)리도 넘게 떨어져 있는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었다고 하는 자체(自體)가 역사왜곡(歷史歪曲)이다.
● 《달자(獺子)=달자(韃子)=달자(㺚子)들을, 당시 고려(高麗) 또는 조선(朝鮮)백성(百姓)들은, 이류【異類 : 다른 무리, 다른 종족】로 보았다는 것인데, 당시(當時) 백성(百姓)들은 이들과의 혼인(婚姻)도 기피(忌避)하였다고 한다. 또 이들을 고려(高麗)시대 농민(農民)의 호칭(呼稱)인 “백정(白丁)”이라고 하였는데, “백정(白丁)”들은 다시 재백정(才白丁)·재인백정·신백정(新 白丁)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다시 노래와 춤을 파는 재인(才人)으로 되돌아갔으며, 생계(生計)유지(維持)의 방편으로 택한 대표적(代表的)인 직업(職業)이 도살 업(屠殺 業)이었다. 그들은 원래 육류(肉類)가 주식(主食)이었으므로, 가축(家畜)을 잡는 데도 능숙하여, 도살(屠殺)자로 전환(轉換)된 것이나, 16세기 이후로는 정착(定着)생활을 하고, 그 직업(職業)도 거의 세습적(世襲的)으로 유지(維持)되어, 고려(高麗)시대의 백정(白丁)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백정(白丁)이 되었다.》고 전한다.
『달자(獺子)=달자(韃子)=달자(㺚子)』는 곧 달단(韃靼 : 타타르)이며, 이들의 본거지(本據地)는 최소한(最小限) 『신 강성(新疆省) 서(西)쪽 지방이다.』
『이러한 자(者)들이 고려(高麗)로 흘러들어왔다면, 고려(高麗)의 영토(領土)는 이들과 근접(近接)한 곳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常識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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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乙巳 萬曆33年 宣祖38年(을사년 만력 33년, 선조 38년(1605년)
《春正月十八日.忽刺溫野人.聚徒入寇.陷潼關堡.殺僉使金伯玉而去. : 1월 18일 홀자온(忽刺溫) 야인이 무리들을 모아 쳐들어와서 동관 보(潼關 堡)를 함락시키고 첨사 전 백옥(全 伯 玉)을 죽이고 물러갔다. 北虞侯成祐吉追擊敗之.收我國擄人而還. : 북우후(北虞侯) 성우길(成祐吉)이 추격하여 무너뜨리고 우리나라의 잡혀간 사람들을 거둬 돌아왔다. 時北兵使李用諄.病遞在途.祐吉追餞于中路.潼關賊警猝至.祐吉馳還營中.率留防軍數千.夜渡江直走初部.乘其未備.突發鏖戰.賊衆敗散. : 이때 북병사(北兵使) 이 용순(李用諄)이, 병으로 체차되어 가므로, 우 길이 뒤좇아 중도에서 전별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동관(潼關)에 적의 경보가 있어, 우길은 급히 병영으로 달려가, 유방군(留防軍)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밤에 강을 건너 곧장 초부(初部)로 달려가, 그들이 아직 방비하지 않은 틈을 타서, 돌격전을 벌이자, 적의 무리는 패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我軍不分老幼男女.厮殺貫槊.盡收被擄男婦而回. : 아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적은 다 죽이고, 포로로 잡혀간 남녀는 모두 거두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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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丁未 萬曆35年 宣祖40年 (정미 년 만력 35년, 선조 40년(1607년)
《建州衛胡酋奴兒哈赤.驅動大軍.將六鎭近境藩胡.搶掠搬移.軍勢日熾. : 건주위(建州衛)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대군을 출동하여 육진(六鎭) 근경의 오랑캐를 거느리고 노략질을 하고, 세간을 실어 이사하니 군세가 날로 치성하였다. 穿過本國鍾城.陣於烏碣嵒下.與忽刺溫大軍相遇.大破之.又從慶源東門外.取路回軍. : 본국의 종성(鐘城)을 뚫고 지나서, 오갈암(烏碣喦) 아래에 진을 치고, 홀자온(忽刺溫)의 대군과 서로 만났는데, 이를 대파시키고, 경원진(慶源鎭) 동문(東門) 밖으로 해서, 회군하였다. 具由咨報撫院總鎭等衙門.以憑轉奏.攷事 : 이 사실들을 무원(撫院)과 총진(總鎭) 등 아문에 보고하여, 간접적으로 명나라에 알리도록 하였다. 고사.》
● 위의 번역(飜譯)된 것을 반도사관=식민사관이 아닌, 원문(原文)대로 새롭게 번역(飜譯)을 해보자. 과연(果然) 어떤 내용(內容)으로 변하는지를 말이다.
《建州衛胡酋奴兒哈赤.驅動大軍.將六鎭近境藩胡.搶掠搬移.軍勢日熾. : 건주위(建州衛)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대군을 출동하여, 육진(六鎭) 근경의 번호(藩胡)들을 거느리고, 노략질을 하고, 세간을 실어 이사하니, 군세가 날로 치성하였다. 穿過本國鍾城.陣於烏碣嵒下.與忽刺溫大軍相遇.大破之.又從慶源東門外.取路回軍. : 본국의 종성(鐘城)을 뚫고 지나서, 오갈암(烏碣喦) 아래에 진을 치고, 홀자온(忽刺溫)의 대군과 서로 우연히 만났는데, 이를 대파시키고, 경원진(慶源鎭) 동문(東門) 밖으로, 길을 골라 회군하였다. 具由咨報撫院總鎭等衙門.以憑轉奏.攷事 : 이 사실들을 무원(撫院)과 총진(總鎭)등 관아에 보고하여, 이를 근거로 간접적으로 알리도록 하였다. 고사.》
㉮ 주(奏)자만 나오면 명(明)나라에 보고(報告)한다는 식(式)의 발상(發想)은?
㉯ 아문(衙門) : 자신이 속해 있는 곳보다 위 곧, 상급(上級) 관청(官廳)을 말하는 것이다.
㉰ 위의 것은, 노아합적 곧 누루하치가 육진(六鎭)의 변경(邊境)에 있었던 조선(朝鮮)의 번호(藩胡)들을 항복시켜, 자신의 수하로 만들고, 홀자온의 대군을 만나 이를 크게 깨뜨리고, 경원진의 동문(東門)밖의 길을 취해 돌아갔는데, 본국(本國) 곧 조선(朝鮮)의 변경(邊境) 관아(官衙)에서 상급관청(上級官廳)인 도호부 또는 병마사(兵馬使) 또는 목사(牧使) 또는 관찰사(觀察使)에게 보고(報告)토록 했다는 이야기다. 관찰사(觀察使)는 곧 제후(諸侯)다. 한 지역(地域)을 다스리는 총(總)책임자(責任者)이자. 황제(皇帝)로부터 봉(封)받은 자(者)이기도 하다.
따라서 「육진(六鎭)의 해당(該當)관청(官廳)에서는, 상급관청(上級官廳)에 보고(報告)하고, 상급관청(上級官廳)에서는 이 보고(報告)한 내용을 가지고, 다시 황제(皇帝)에게 보고(報告)토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것을 「명(明)나라에게 보고(報告)토록 했다.」는 식(式)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역사왜곡(歷史歪曲)이요, 역사(歷史)조작(造作)인 것이다. 또 아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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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丁未 萬曆35年 宣祖40年 (정미 년 만력 35년, 선조 40년(1607년)
《鐵山郡守柳旻彌串僉使康孝業等.領兵下海.遇賊船三隻.互相搏戰.殺傷相當. : 철산 군수(鐵山郡守) 유민(柳旻)·미곶 첨사(彌串僉使) 강효업(康孝業) 등이 군사를 이끌고 바다로 나갔는데, 적의 배 세 척을 만나 서로 육박전을 벌여 상당한 수를 살상하였다. 點看載船物件.則有天朝人衣服文書.似係上國之人. : 그 배에 실린 물건을 살펴보니 명나라 사람의 의복과 문서가 있어 명 나라 사람으로 보였다. 未及卞別.而致此相殺.備由具本.順付陪臣姜綖.奏聞于帝.攷事 : 미처 분별할 사이도 없이 이렇게 살상(殺傷)하게 되었는데 그 사실을 조사하여 배신 강연(姜 綖)에게 주어 중국 황제에게 알렸다. 고사. 》
● 위의 번역(飜譯)된 것을 반도사관=식민사관이 아닌, 원문(原文)대로 새롭게 번역(飜譯)을 해보자. 과연(果然) 어떤 내용(內容)으로 변하는지를 말이다.
《鐵山郡守柳旻彌串僉使康孝業等.領兵下海.遇賊船三隻.互相搏戰.殺傷相當. : 철산 군수(鐵山郡守) 유민(柳旻). 미곶 첨사(彌串僉使) 강 효업(康孝業) 등이, 군사를 이끌고 바다로 나갔는데, 적의 배 세 척을 우연히 만나, 서로 육박전을 벌여, 상당한 수를 살상하였다. 點看載船物件.則有天朝人衣服文書.似係上國之人. : 그 배에 실린 물건을 살펴보니, 천조(天朝 : 천자의 조정) 사람의 의복과 문서가 있어, 신주(神州 : 서울)사람으로 보였다. 未及卞別.而致此相殺.備由具本.順付陪臣姜綖.奏聞于帝.攷事 : 미처 분별할 사이도 없이, 이렇게 살상하게 되었는데, 그 사실을 조사하여, 배신 강연(姜 綖)에게 주어 제(帝)에게 주달(奏達)토록 하였다. 고사. 》
※ 배신(陪臣) : 예전에,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집에 딸려 그들을 섬기는 사람을 이르던 말.
● 철산(鐵山)군수(郡守)는 당연(當然)히 제후(諸侯)가 임명(任命)한 관직(官職)이다. 조선(朝鮮)팔도(八道)는 군주(君主)가 직접(直接) 다스리던 구역(區域)이 아니다. 제후(諸侯)가 다스리던 지방(地方)의 군수(郡守)이므로, 신주【神州 : 서울 : 상국(上國) : 중국(中國)】에게 알려야 함은 당연(當然)한 처사(處事)이다. 이런 것을 「“중국(中國)황제(皇帝)”에게 알렸다.」고 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 여기서 「중국(中國) 황제(皇帝)」란 말은, 곧 「조선(朝鮮) 천자(天子)」를 말하는 것인데,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에서는, 중국(中國)이란 것을 “나라 이름”으로 조작(造作)하여, 조선(朝鮮)의 상국(上國)처럼 만들어 버렸다.
대륙(大陸)에서조차 “중국(中國)”이란 나라이름이 아닌, 황제(皇帝)가 다스리던 지역(地域) 곧 경조(京兆)지방(地方)【경기도(京畿道)=관내도(關內道)=신주(神州)=기전(畿甸)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을 부르던 명칭(名稱)이라고 이야기하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막무가내(莫無可奈)로 조선(朝鮮)의 상국(上國)이었다고, 어디에도 없는, 어이없는 해설(解說)을 한다. 이러한 주장(主張)은 민망(憫惘)할 정도(程度)다.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추종(追從)한다하더라도 이건 너무한 것이다.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식민사학의 몰염치(沒廉恥)는, 공교육(公敎育)이라는 세뇌(洗腦)과정(過程)을 거쳐, 더욱 공고(鞏固)하게, 고착(固着)화되어 가고 있다.
또 이러한 번역(飜譯)의 문제(問題)는, “조선(朝鮮)왕조(王朝)을 제후(諸侯)로 보는 사관(史觀)”과 “황제(皇帝)로 보는 사관(史觀)”의 차이(差異)에서 발생(發生)되는 많은 것 중의 하나인데,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제후(諸侯)로 보는 사관(史觀)은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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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大韓民國)! 5천만(千萬)이 넘는 많은 국민(國民)들 중에서, 또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움직이는 많은 분들이 있다.
문제는 이 분들 중에서 많은(?) 분들이 식민지(植民地)시절(時節), 매국노(賣國奴)였으며, 또 적극적(積極的)인 친일(親日)활동(活動)을 하던 후손(後孫)들이란 점이며,
또 한 부류(部類)는 기독교(基督敎)을 신봉(信奉)하며, 국민(國民)들의 뜻이나 정서(情緖)와는 전혀 다른 막무가내(莫無可奈)식 언행(言行)을 하며, 그것이 전부(全部)인 냥 한다.
○ 이런 자(者)들이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국민(國民)위에 군림(君臨)한다는 것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국민(國民) 각자(各者), 스스로 각성(覺醒)치 않는다면, 이들로부터 더러운, 치사스러움을 감당(堪當)해야만 한다. 그것을 감수(甘受)하겠다면야, 할 말이 없다.
2014년 06월 1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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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34권 / 설(說) ; 을사년에는 홀자온 부족 노인(야인?)이 동관(潼關)을 함락하고....
전에도 한번 동관의 위치에 관하여 이야기 한적이 있읍니다만 동관은 현재 4군데 있습니다. 함경북도 종성 두만강가에 있고, 또 황하강변에 있고, 평양근처에도 있으며, 연행사들의 여정(산해관과 금주위 사이)중에도 있는데 이 모두는 본래의 자리에서 이동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동관은 본래 한군데일 것이며 이 네군데로의 필요에 의하여 이동되었을 것입니다. 본래의 자리에서 네군데의 상황을 다 설명할수 있는 자리가 동관의 본래 자리일것입니다.
연려실기술 별집 18권 ; ~~~여해 부락에서는 하질귀를 지옥(地獄)에 가두어 죽였는데~~~
‘ 여해부락’ 이라는 곳도 요동의 일부이고 하질귀를 지옥에 가두어 죽였다 했는데 여기서 말한 지옥은 어떤곳을 말하는 것일까요.... 혹시 이곳은 아닐까요..?
연행사들은 요동을 거처서 연경을 갔고 요동땅에는 지옥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부(地府)란 곳으로
<연원직지, 1832 12 12>
그 좌우엔 긴 행랑이 있는데, 지부(地府)에서 죄를 주는 형상을 베풀어 놓았다. 시왕[十王]이 차례로 자리에 앉고, 좌우에는 시신(侍臣)들이 모두 관복(冠服)을 갖추고 옹립해 섰다. 그들은 붓과 벼루를 잡거나 혹은 문서를 잡았다. 많은 귀졸(鬼卒)들이 죄수를 앞에 가득하게 잡아다가 가슴을 쪼개서 심장을 꺼내거나 이마에서부터 톱으로 쪼개고, 혹은 혀를 잡아 빼고 혹은 눈알을 뽑는다. 그 밖의 많은 혹형(酷刑)은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 온갖 참벌을 받고서 혈육(血肉)이 낭자한 것을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면 혹 뉘우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다.
연행일기3권 1712.12월
성으로부터 반 리쯤 떨어진 곳에 동악묘(東岳廟)가 있기에 들어가 구경하였다. ~~~중략~~~ 좌우의 낭옥에 지부(地府 곧 명부. 저승의 뜻) 10왕을 만들어 동서로 나눠 앉고, 귀졸들이 죄수를 잡아다가 그 앞을 가득 채웠는데, 가슴을 도려내고 심장을 끄집어내는 것, 정수리를 톱으로 켜는 것, 눈을 쪼는 것, 혀를 빼는 것 등의 갖가지 형벌이 참혹하게 구비되어 있어 살덩이와 피가 낭자하였다. 악을 범한 자가 본다면 뉘우치거나 두려운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하질귀가 죽은곳은 동악묘의 별관(?)에 있는 지부(地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