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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님을 비롯한 몇분이 말씀 하셨습니다...
길다고...ㅎㅎㅎ
뜨락1에 올렸던 글인데...
초록님이 완당평전을 읽으신다기에...ㅎㅎㅎ
1. 평전에 대하여...
‘세상에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고 완당평전은 시작한다.
필자는 기간의 추사에 대한 시, 금석학, 고증학, 경학, 불교학, 서예, 회화 등의 연구가
추사 인간상 전체를 논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며,
문사철과 시서화를 분리시키지 않는 총체적 지식인으로서 추사를 바라보는 방법으로
평전이란 형식을 택했다고 한다.
완당평전은 내 스스로 팬을 자처하는 유홍준교수의 역작일 게다.
내가 미술사학이 전공인 필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건
오히려 문화유산 답사에 대한 폭넓은 인문학적 접근에 대한 호감 때문이다.
그러나 기간의 화인열전 시리즈와 완당평전에서 나는 예상만큼의 감흥을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무얼까? 하는 의문이 지금까지 후감을 미룬 이유이며,
또 소감을 시작하는 첫머리를 평전이란 형식에 대한 검토로 시작하는 이유이다.
형식에도 내용이 있고, 중심이 있어야 한다면,
미학적 안내, 미술사적 영향력, 그리고 역사적 상황에서의 지식인의 역할 등이
개인의 생애에서 재구성되어야 하는 평전을 쓴다는 게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미 미술사학을 뛰어넘어 버린 그의 관심만큼이나
평전이란 형식에 대한 그의 도전과 글쓰기가 내게는 분명 낯설다.
한편으론 작품만으로 화인열전의 인물들과 완당을 대했던 나에게
전문가들의 접근과 불지불식간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문가의 눈으로 정리하는 많은 예술가들에 대한 인생편력의 이해와 개인적 변화의 추이는
예술가들에 대한 애착의 정도만큼이나 접근에 많은 편차가 있을 듯싶다.
왜냐하면 완당평전으로 완결된 필자의 화인열전 시리즈는 문화유산 답사기만큼의 반향이나
폭넓은 인문학적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고 나는 판단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개인에 대한 애착의 정도에 따라
한사람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글 읽기는, 그만한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인 듯하다.
그 이유의 하나를 백화점 나열식이 될 수밖에 없는 평전의 형식과
미학적 검증과 미술사적 평가,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생애의 구성이란 총체적접근에서의
희석화 된 주제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역으로, 평전을 읽는 내 자신에게
한사람에 대한 미학적, 미술사적, 지식인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 잣대가 없다면
평전의 따라보기는
분명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역으로 규정한다는 점을 먼저 밝힐 필요가 있다.
그건 완당평전에서 보이는 다양한 접근으로 인한 희석화 된 주제의식을 지적하는 것보다는
읽는 내 자신이 요구한 지적자극의 강도나 내용이 달랐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내가 완당평전에 대한 후감을 정리하는 이유는
필자의 글쓰기에 호흡을 맞추기보다, 역시 추사 김정희를 내가 좋아한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김홍도, 정선, 신윤복, 장승업 등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여전히
필자는 내게 좋은 안내자라는 점도 충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2. 붓글씨와 김정희
내 개인적인 편력일지는 모르나 붓글씨가 나와 그렇게 무관하지만은 않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처음 등록한 써클이 붓글씨 동아리였다.
어려서 할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울 때도 붓으로 배웠고,
지금도 붓을 드시는 아버지와 형제들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건 어쩌면 지방의 문화색이나, 한문의 영향이 컸던 시기에 자랐고,
거기다 붓글씨를 정신수양의 하나로 강조한 가풍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90년대 중반 사진을 배울 때, 대동산수의 오종은 작가와
글씨가 예술이 될 수 있냐는 다분히 현대적 잣대에 대한 논쟁을 벌인 적도 있지만
여전히 나의 감성에는 붓글씨에 대한 예술적 감상을 존중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를 대하는 나의 바탕은 역시 붓글씨에서 시작한다.
그러면 과연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 대한 평가 혹은 영향력은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흔히 조선시대 4대 명필을
안평대군 이용,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 그리고 추사 김정희를 든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4대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시대의 안평대군과 추사를 거론하며,
마지막 2명의 명필을 김생과 추사, 그중 최고를 추사라고 필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완당의 업적은
‘ 낡은 법첩을 따르는 매너리즘과 향토색에 젖어 있던 어딘지 촌티 나는 조선의 글씨를
비문글씨의 고졸하고 준경한 기품을 간직한 개성적인 서체로 구현하여
국제적 감각의 신풍을 일으켰다 ’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동양 서예사를 통 털어 그의 위치를 규정하는데
‘ 진나라 사람은 운을 숭상하고(왕희지의 글씨는 신운이 감돌고)
당나라 사람은 법을 숭상하고(구양순과 저수량의 글씨는 법도가 있고)
송나라 사람은 의를 숭상하고(소동파와 미불의 글씨에는 작가의 의지가 있고)
원나라 사람은 태를 숭상했다 ’(원의 조맹부와 명의 동기창의 글씨는 자태가 아름다웠다)
이를 이어 청나라 사람은 학을 숭상했고,
추사 김정희는 입고출신(고전에 입각한 감성적인 표현)에 입각한 개성적인 글씨로
청대를 대표한다고 필자는 일본이나 중국의 학자들을 인용하며 주장한다.
한중일 삼국 학자들의 다양한 접근과 평가의 인용은,
그 정도나 시비를 떠나 일세를 풍미했던 완당바람에 대한 충분한 평가를 촉구하는 것이며
또한 그의 비중을 국내에 국한시키지 않게 하려는 배려로 받아들여도 과함이 없을 것이다.
필자는 조선 후기란 시공간을 넘어, 서예사 전체에서
‘ 상하삼천년, 종횡십만리에 완당 외에 누가 있을까? ’ 란 예찬으로 추사체를 평가한다.
3. 추사체와 김정희
처음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서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미술 선생님이 웃는 우리를 보고 한마디 하셨다.
너희도 피카소와 똑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유치원 수준으로...
그러나 그걸 누가 예술작품으로 인정하겠느냐...
지금 생각하면 본말이 전도된 우문일 수 있지만
불계공졸(不計工卒)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과
대교약졸(大巧若卒)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는 노자의 말에서 둘은 통한다.
물론 한참 후에야 피카소에 대한 많은 책들을 보면서
그의 천재성과 깊이를 이해하고 충분히 인정했지만
여전히 그들의 그림과 글씨에 대한 나의 예술적 감흥은 호불호가 분명하다.
특히 김정희가 죽기 3일전에 썼다는 봉은사 ‘판전’ 앞에서는 정말 당혹스러웠다.
나는 처음 이 글씨를 보았을 때도 수십 분을 멍청하게 앉아서 예술적 감흥을 유도했고,
다음 몇 차례 그 글씨를 보면서도 예술적 울림을 기대했지만 역시나 밋밋했다.
결국 햇살이까지 데려가 판전이란 글씨를 보면서 색시에게 했던 말...
“색시 나는 역시 추사체를 이해하지 못하나봐?
대교약졸은 맞는 것 같은데, 저게 예술적이라는 생각은 안 들거든?
한 가지는 인정해... 죽기 3일전에 저렇게 크게 쓸 수 있다는 그 예술가적 열정과 기질...”
이 책에서 다시 판전을 보면서도 나는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판전이란 글씨가 추사체로 쓰였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단지 봉은사에서 가끔 추사 김정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그래서 사람들은 못 쓰면 추사체라고 우기고,
누구나 추사체는 쓸 줄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건가?
그러나 추사체는 그냥 만들어진 것은 분명 아니다.
‘ 나는 70평생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는
끊임없는 수련이 추사체를 만들었다.
또한 고증학과 금석학의 대가란 말처럼 실사구시에 입각한 입고출신이 추사체를 만들었고,
경학,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지식이 추사체를 만들었고,
성공과 실패, 입신과 귀향살이의 인생의 부침에서 추사체는 만들어졌다.
게다가 중국과 조선이란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열린 마음과
왕희지로부터 동기창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넘나드는 진취적 열정이 추사체를 만들었다.
김정희 스스로가 말했듯이 인품과 교양과 지식과 필법, 그리고 끊임없는 수련 속에서
추사체는 만들어졌고, 필자의 말을 덧붙이면
개성과 보편성, 열정과 관용의 미덕이 통일되면서 추사체는 만들어졌다.
김정희는 생동하는 글씨를 위한 아홉 가지 조건을 계율처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生筆(붓), 生紙(종이), 生硯(벼루), 生水(물), 生墨(묵),
生手(근육), 生神(정신), 生目(눈), 生景(빛)
능서불택필을 비웃는 듯한 그의 까다로운 조건은
낭만적, 열정적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스타일리스트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옹방강의 실사구시에 입각한 입고출신의 강조도 동일한 맥락이다.
결국 서법에 충실하면서 또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정통적인 순미, 우미가 아니라 반대로 추, 파격의 아름다움,
개성으로서 괴를 나타낸 것이 추사체의 본질이자 매력이며,
형태의 괴가 아니라 필획과 글씨 구성의 힘에 있는 것이 추사체라고 필자는 정의한다.
그리고 하나를 덧붙여 글씨하나 하나의 구성과 힘을 뛰어넘은 작품전체의
구성과 구상이 추사글씨의 또 다른 예술적 가치임도 아울러 강조한다.
4. 김정희와 문인화
대관령에서 공사할 때 나는 마지막 조경에 세한도를 이미지 메이킹 했다.
처음 세한도를 보면서 이게 과연 국보의 가치가 있을까 머뭇거리던 내가
어느덧 김정희 그림의 추종자가 돼버린 셈이다.
물론 문인화에 대한 나의 변화는 세한도만이 아니었다.
파초도... 그 단순하고 고졸한 그림을 나는 한동안 바라보면서 어리둥절했었다.
언젠가 다시 파초도를 보면서 나는 정조왕의 심정을 느끼며 무릎을 친 적이 있다.
그래... 이런 맛이 있어 소위 문인화에 문자향, 서권기를 평했는지도 몰라... 하면서
물론 나는 정선이나 김홍도, 혜원이나 오원의 그림에 더 친숙하며
그들의 특히 겸재나 단원의 깊이를 존중한다.
그림 구석구석 숨어있는 단원의 장난기나 의도적인 파격이 주는 비논리적인 친근성은
그의 천재성을 감탄하게하고, 겸재의 그림에서는 그 진지함의 깊이에 빠지게 한다.
나를 압도했던 금강전도를 봤을 때의 그 장중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또한 음양오행과 태극 등 도교의 사상적 원리를
호쾌한 화면구성과 묵의 농담, 그리고 53자의 글씨로 구성됨을 알았을 때는
단순한 화쟁이나 진경산수의 완성자가 아닌 내재된 철학을 자신의 재능으로 풀어낸
뛰어난 예술가로 그를 각인시켰다.
엉? 그럼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는 이들보다 한수 위인가?
굳이 겸재의 금강산전도를 새김질 하는 이유는
진경산수나 풍속화가 단순한 데생과 스케치를 넘어서는 철학과 문화의 반영이듯이
문인화에도 그에 걸 맞는
사상과 역사가 베어있다는 공통점을 먼저 지적하기 위함 때문이다.
또한 남종문인화와 북종화(산수화?)의 외형적 비교도 배제하기 위함이다.
북종화 혹은 (진경)산수화의 입장이나 일반적인 접근으로 문인화를 평하면 ;
‘ 남종문인화를 평가하는 데는 조형 외적인 요소가 많이 개입된다.
묘사력이나 데생력 같은 것은 무시하고 오직 필과 묵의 운용,
그리고 인품과 교양 여하를 따지니 평가 기준이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장인적 기교라는 객관적 기준이 없는 셈인데
문인화가들은 그런 것을 찾는 것 자체가 어린애 수준이라고 비웃는다. ’
즉, 남종문인화는 ‘ 인위적 기교를 넘어 손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는 상태에서 나오는
고고한 예술을 원하는 것 ’이며,
이런 문인화의 대가로서 필자는 김정희를 거론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애초 이런 평가나 판단은 카테고리나 범주의 설정이 일방적이다.
사실주의나 낭만주의 입장에서 입체파나 추상화의 경중을 자질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피카소의 위상과 영향력이 르노와르나 밀레와 저울질 될 성질은 애초 아니다.
그 문제의식이 내가 겸재나 단원의 그림과 추사의 세한도나 불이선란을
동격의 예술적 가치로 인정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김정희의 예술세계는
스스로가 배제하고 비판했던 선대의 예술가들의 연속선상에 위치한다.
필자의 정리처럼 ;
‘ 공재 윤두서, 관아재 조용석의 속화들은 부드러운 육산을 오르는 친숙함이 있었고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는 그가 그린 금강산만큼이나 감동적이며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의 문인화는 깊은 계곡의 그윽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호생관 최북이라는 기묘한 봉우리를 돌아
불세출의 화가 단원 김홍도라는 산마루에 올랐을 때는
조선시대 예맥의 정상임을 느끼면서 조선적인 예술세계를 만끽할 수 있었다.
내리막길로 접어든 순간
짙은 안개의 바다 너머로 추사 김정희라는 거봉이 홀연히 나타났다. ’
결국 김정희의 예술세계와 그림은
이런 선대 예술가들과의 작용과 반작용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추사가 그중 한편의 정점에 서서 기간의 예술을 비판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상속자중의 한명이다.
그리고 한 가지, 화가로서 김정희의 그림에 대해 굳이 거론해야 한다면,
김정희는 그림을 손으로 그리지 않고 머리로 그리려했으며,
그런 이유로 그림다운 그림을 많이 혹은 충분히 남길 수 없었다는 점이다.
5. 완당의 생애
지금까지 나는 추사체와 문인화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한 가지 의문이면서 내 스스로 자신감을 갖지 못한 건 김정희의 호에 대한 이야기다.
분명 글씨는 추사체이지만, 그의 생애는 완당으로 재구성된다.
- 늘 시험문제의 정답은 추사였고, 완당은 내게 정말 생소했다. -
그의 생애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평전을 서술 한다.
1)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2)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의 학예 연찬기
3) 관직에 나아가 제주도로 귀양 가는 55세까지의 중년 활동기
4) 63세까지 제주도에서의 9년간 유배기
5)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의 만년기
1786년 태어나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로 요약되는 북학파 박제가의 제자로 성장할 때까지
김정희는 추사란 호를 사용하며,
1809년 청나라 연경에서 평생의 스승이 될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완원에게서 완당이란 호를 받았고,
30대 이후로는 완당이란 호로 많이 불리었다고 한다.
완당평전 1,2권의 표지도 완당선생초상이란 화제의 초상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초상화의 작가인 김정희의 제자 소치 허련도 그를 완당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의 글씨가 뛰어났고 독창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서체와 필법을
추사체라고 말하지, 완당체라고 명명한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사평전이 아닌 완당평전이 된 데는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추사체란 필법으로 김정희를 국한시키고 싶지 않은 필자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김정희의 그릇을 조선에 국한시키지 않고
중국과의 연관성과 영향력을 충분히 확산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지식인으로 재구성하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금석학은 조선반도에 그치지 않았으며, 한반도의 역사에 국한되지 않았다.
중국전역, 중국역사 전체의 비석과 비문은 그의 서체와 필법을 만든 교본이 되었다.
또한 완당은 금석학을 근거로 한 고증학의 지평을 넓혀 가는데
그에 의해서 무장사비, 진흥왕릉, 창림사비 등이 고증되었고,
특히 북한산과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의 발견과 해석은 그의 탁월한 진가중 하나가 되었다.
만약 그의 금석학 연구대상이 중국 것에 만 국한되었다면 그는 필시
사대주의자나 외국의 조류를 떠들고 다니는 뿌리 없는 앵무새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는 청조 고증학 연구의 제일인자이기도 했지만,
한반도 고대사에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고 역사인식을 넓힌 고증학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비문의 고증에만 그치지 않고 한중 교류의 근거가 되는 서찰들에까지 미치는데
그 시기는 삼국시대까지 이르고,
또한 일본의 문물과 동향에 대한 교류를 중국으로까지 연결하는 등 그의 인문세계는
한중일을 넘나드는 국제인으로서 감각과 전문가의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문인들, 경학자들과의 깊이 있고 끈끈한 폭넓은 교류와 연대는
한편으로는 중국에까지 경학 연찬과 문장으로 그의 이름을 떨치게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국내의 많은 지식층들에게 국제적 교류를 활성화시킨 매개체가 되기도 했고,
그리고 개인생애의 부침과 가문의 좌절 등을 맛보게 한 정치적 영역이 되기도 했다.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의 국제동향에 대한 정세감각과 의견교환 등 그의 경륜은
그가 단지 경학자나 글씨 하나로 세상을 살수 없는 지식인이었음을 필자는 강조하고 있다.
일세를 풍미했다는 완당바람은 절대 추사체에 국한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완당은 경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스님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백파비문과 초의선사와이 교류만이 아니라
해인사 중건 상량문, 율봉스님 시적계, 혜장스님 화상찬, 화암사 상량문과
수많은 현판글씨 등은 불교계와의 교류에 대한 그 폭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지적대로 완당의 불교에 대한 교류는 단순한 폭에 있지 않았다.
백파스님과의 논쟁은 불교의 오랜 논쟁인 선과 교에 대한 논증으로
완당은 주자, 퇴계, 율곡, 원효, 보조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논쟁을 하였는데
후일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이 논쟁과정이 추적되고 검증된다.
단적으로 정리하면,
완당은 불교와 유교의 차이를 간명하게 정리할 정도의 식견을 가졌고,
초의스님의 입장인 선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였는데,
자신의 사상적 맥락을 명확히 견지한 완당은,
실학과 실사구시에서 유불교를 논했다.
참고로 그때 백파스님이 화엄종 종장이었고,
완당은 해동의 유마거사라 불리울 정도로 그 깊이를 인정받았다.
지식인으로서의 완당은 금강안, 혹리수의 입장에서 모든 경륜을 펴나갔고,
평생 옹방강의 실사구시를 정리한 내 구절의 게를 간직했다고 정리해도 무방할 것이다.
‘ 사실을 밝히는 것은 책에 있고
이치를 따지는 것은 마음에 있네
옛것을 고찰하여 현재를 증명하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
6. 완당의 일상...
이런 완당을 지켜보면서 그의 성격과 일상을 들여다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에게는 평생 세 친구가 있었다고 하는데,
사대부 문인, 학예의 문인, 그리고 스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폭만큼 포용력을 가지고 있지 못해, 주변의 호불호가 분명했는데
그런 점에서 그는 정치꾼이 아닌 선비,
조직 활동가가 아닌 이론가의 기질이 강하지 않았을까 싶다.
명문가 출신, 신동, 막힘이 없는 정점의 논리,
그리고 열정과 수련 속에서 만들어진 자긍심...
이런 점들이 얽혀서 그의 일상은 이루어진다.
그의 이런 기질은 그의 묘비명에도 나타나 있는데,
‘ 풍채가 뛰어나고 도량이 화평해서
사람과 마주 말할 때면 화기애애하여 모두 모두 기뻐함을 얻었다.
그러나 무릇 의리냐 이욕이냐 하는데 이르러서는
그 논조가 우레나 창끝 같아서 감히 막을 자가 없었다 ’는 내용이
완당의 본모습이었을 것이다.
추사체에 갇혀 있는 김정희를 지식인으로 복원시키고자 하는 필자의 노력인지는 모르나,
필자는 많은 부분을 인용하여 김정희를 완당으로 환생시킨다.
먼저 완당이 주변사람과 만나고 사귀는 원칙은 신분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었다.
이는 완당의 인재양성론에서도 확인되는데, 인재가 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를
‘ 주석이나 외우는 폐쇄적인 교육방식, 과거시험이라는 입시교육, 견문의 부족 ’으로 꼽고
진정한 인재는 자유스러운 상상력과 풍부한 감성으로 자기의 개성을 갖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당시의 교육체계의 비판임과 동시에
신분체계나 훈고학 등 모든 질서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며,
중인이나 서자, 스님 등 신분에 구애받지 않은 그의 행보를 통해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실천한 완당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 대저 없어져가는 것을 보존함은 인이요
희미해져가는 것을 지킴은 의이며
천하에 흩어진 것을 찾아서 간행함은 신이요
세상이 좋아하는 바를 공개하는 것은 혜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식자가 해야 할 사회적인 책무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래서 북한산 순수비에도 그의 이름 석자를 새겼을까?
완당은 ‘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처럼
문사철, 시서화... 선비와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할 모든 부분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고
이점이 매사 호불호가 분명하여 포용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항상 자신만만하고 자신의 공과와 시비에 대해 분명하며 늘 반론을 내뱉을 수 있는
완당의 거만하고 고집스러운 처세는 주변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만 했으며,
완당을 생리적으로 거부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 독선적이며, 잘난 척 잘하는, 요사스런 자식 ’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완당도 제주도 유배이후 만년에는 많은 변화를 가졌다고 하는데,
원교 이광사에 대한 반성, 백파에 대한 동의 등 그 연륜 만큼, 그의 글씨처럼 성숙해진다.
완당에게 만년의 즐거움이란
‘ 공부하는 행복, 제자를 가르치는 즐거움, 예술 하는 열정 ’이었다고 필자는 말한다.
노년의 완당이 말한
‘ 최고가는 좋은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최고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란 말에 나는 하늘을 한참 보았다.
인생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일생의 맛을 이렇게 즐길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그렇게 부럽게 보인 모습을 완당은 참으로 적절하게 표현했다.
인생의 황혼기...
완당에게는 가장 부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7. 완당평전
이래저래 생각해보면 예술가들의 생애에 대한 글들을 잡다하게 주워 보았다.
또 어렸을 적부터 생각해보면 소위 위인전기 형식의 책들도 많이 보았다.
근데, 완당평전을 보면서 문득 문득 대비됐던 책은
예술가들의 전기보다 맑스 평전 이다.
한참 웃으며 즐겁고 가볍게 보았던 책...
엥겔스나 그의 친구나 가족들과의 대화나 편지, 그리고 엥겔스의 맑스 사후의 추도...
완당평전에도 그와 비슷한 내용들이 많다.
특히 그의 제자들, 가족들, 친우들과의 편지를 찬찬히 읽어보면
완당의 인간 됨됨이에 대해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하는 내용들이 많다.
때로는 어린애처럼, 때로는 준엄한 스승처럼, 또 노인네처럼...
하나하나의 일상들을 보면서 나는 김정희와 조금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평전이나 위인전 등의 전기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과 새로움일 것이다.
그중 인간에 대한 그리움과 인간에 애정이 나타난 글만큼 뭉클한 것도 없다.
그가 한 제자에게 말 했던
‘ 그대가 오니 꽉 찬 것 같았는데 그대가 가니 텅 빈 것 같네,
그 가고 옴이 과연 차고 비는 묘리와 서로 통함이 있단 말인가... ... ’란 말만큼
만남과 이별이 잘 나타난 글도 없을 듯싶다.
그러나 완당이 초의에게 보냈던 편지만큼 그의 모든 것을 나타낸 글도 없을 것이다.
‘ 편지를 보냈지만 한 번도 답은 보지 못하니
아마도 산중에는 반드시 바쁜 일이 없을 줄 상상되는데
혹시나 세체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나처럼 간절한 처지인데도 먼저 금강을 내려주는 건가
다만 생각하면 늙어 머리가 하얀 나이에 갑자기 이와 같이 하니 우스운 일이요
달갑게 둘로 갈라진 사람이 되겠다는 건가,
이것이 과연 선에 맞는 일이란 말인가.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보낼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게 좋을 거요 ’
후일 초의선사는 완당사후에 이렇게 말했다.
‘... 정담을 나눌 때면 그대는 실로 봄바람과도 같고 따스한 햇살과도 같았지요... ’
사실 이 글들만큼 완당과 초의선사의 관계를 잘 설명한 내용은 없을 듯싶다.
가끔 유홍준씨의 글에서 이런 친구에 대한 서술에 부러워한 적이 많다.
금란지교? 이런 아름다운 인간관계만큼 사람을 부럽게 만드는 게 있을까?
참으로 복되고 행복하고 부럽게 완당과 초의는 그려져 있다.
완당평전을 보면서 그의 작품들에 대해 실컷 감상할 기회가 즐거웠던 것보다
그들의 우정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필자의 관심사일까?
필자는 전기를 통해
추사체를 만든 신동과 천재에서
열정과 고난을 거듭한 평범한, 그러나 고귀하고 존엄한 인간으로 완당을 그려냈다.
그리고 마지막, 완당에 대한 편견을 정인보 선생의 글로 경고하며
‘ 산숭해심(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
유천희해(遊天戱海)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닌다. ’는 말로 김정희를 정리한다.
이제 나도 후감을 정리할 때가 됐다.
나는 한사람을 볼 때 그 당시의 정세와 변화를 중심으로 놓는다.
당시는 조선후기이며, 정조가 죽고, 외척(안동김씨)가 득세하는 시기이다.
조선후기 안동김씨와 정쟁을 이끈 한축의 정점에 김정희는 위치한다.
그리고 이 정쟁구도는 대원군과 민비, 척사파와 개화파의 정쟁으로까지 연결된다.
그 구도에는 많은 완당사람들이 실세와 주변으로 포진되어 있다.
물론 정치적 입장만이 아닌 문예의 영역까지 이르러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영의정에서부터 대원군, 뿐만 아니라 북학파와 많은 진보적 인사들이 그 주변에 있었으며,
그중 한명의 사우가 다산 정약용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역할은 부각되지 않는다.
그의 안목이나 입장들이 골속골속 미칠듯하면서도 그 꼬리가 쉽게 잡히지도 않는다.
완당 김정희는 이 시기...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언제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우리나라 사상사의 최고봉의 한사람으로 다산을 꼽는다.
그리고 당대 유교의 재해석(실학)의 두 거봉으로 다산과 완당은 위치할 수 있다.
그러나 완당은 사상사나 경륜가로서 충분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완당이 스스로의 저술들을 모두 태워버려 후세에서 잊혀졌는지,
아니면 완당을 추사체로 이름을 떨친 문인으로 후대가 축소시켰는지 모르지만,
김정희에 대한 나의 평가는 여전히 편협하다.
공인화 된(?) 평가에 익숙한 나에게 완당 김정희는
한정된 분야(예술사)로만 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상사를 예술사에 우선시 하거나 주요하게 판단하는 나의 편견 때문일까?
5백년 조선역사에서 마지막 문예를 불사른 완당은 어떤 위치와 평가를 받아야할까?
그의 경륜과 실사구시는 어떤 작용과 영향을 미쳤을까?
당대를 풍미했던 완당바람은 단순히 문예에 그친 미풍이었을까?
이런 의문들이 완당을 안목과 경륜과 열린 마음을 가진 지식인상으로 각인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완당과 다산은 사실 한 뿌리의 두 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경쟁의 상대도 아닌 선배와 사우에 가까운 지인이다.
근데 완당은 사상적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체 그려진다.
원효와 의상, 율곡과 퇴계의 대립과 통일을 생각할 때 완당의 대립항은
다산이 아닌 초의가 아닐까?
초의가 아닌 다산이 그 대립항이었다면 완당의 생애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북학파, 실학의 다른 두 꽃... 완당과 다산은 그런 차이가 있다.
내 책상 옆에는 초의선사에게 주었던 ‘ 명선 ’이란 글자가 걸려있다.
그리고 많은 여자들에게(?) 보여주었던 난맹첩의 난초는 많은 족자들 속에 숨어있고,
‘ 계산무진 ’ 이란 글씨는 거실에 걸려있다.
어쩌면 완당은 꼭 그만큼 내 주변에 남아있다.
유홍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 다산은 귀양살이에서 현실을 발견했다면, 완당은 자아를 재발견했다. ’
이 말이 어쩌면 완당에 대한 나의 모든 우문을 해소하는 현답이 되는 것 같다.
첫댓글 길기도 길지만, ...나또한 김정희 하면 시험지의 답안 추사에 머무르는 그 범주밖에 아니기에..그저 무재님의 평론에대하여 감탄입지요. 이 아침엔 좀더 마음으로 다가가 완당 김정희님을 잠시...
출근해서 책상에 앉자마자 30분동안...^^ <세한도>와 백파선사의 비문, 초의선사와의 교류...지금까지 제가 알고있던 추사의 전부(?) 였는데 사전에 많은 정보를 주셔서...또 바쁘신데 글 올려주셔서 감사하구요~ 좋은글...하루가 즐거울 듯 ^^
주루룩 일단 내려왔습니다. ㅎㅎㅎ 감사. 이거 주루룩 보면 안되는데..^^
초록님... 역시 길지요? ㅎㅎㅎ 송화님, 메이님... 감사...^^ 언젠가 데..님은 몇번으로 끊어서 올려라고 하셨는데...ㅎㅎ 제가 작아서 글이 긴지, 아님 욕심 때문인지...ㅎㅎㅎ 작년 언젠가부터는 이렇게 글쓰는 낙도 없어요...ㅠㅠㅠ
길어두 ......좋타~
ㅎㅎㅎ 스킾님... 일은 잘 되시지요? 요즘은 마라톤의 계절이 아니어서... 봄바람을 기다릴까요? ^^
어제부터 <완당평전> 펼쳤습니다. 사전에 많은 정보를 접해서인지...쉽게...더욱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며칠간 행복한 책읽기가 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