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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 은파에서 열렸던 세노야 축제, 그 마지막 날에 고은 시인의 제막식이 열렸다. 살아 있는 시인의 시비를 세우는 문제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었지만 노벨문학상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시인을 낳은 고장으로서의 군산의 문학적 향기가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 군산 앞바다, 노래섬, 어부들의 혼령을 부르는 노래 같은 세노야란 노래는 군산 앞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어부들이 부르던 노래의 후렴구라고 들었다. 지금은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불꺼진 항구라고 놀려대지만, 째보선창, 그 흥청거리던 항구의 객담이 가득하던 곳이 아니던가.
어제 친구가 말한 시 낭송 방송을 오늘 아침에 봤다. 요즘은 재방송 시스템이 잘 되어서 그런가 보다. 낭독의 발견이란 제목의 방송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별다르게 나이든 표가 나지 않는 시인은 특유의 크고 둥근 뿔테 안경을 쓰고 나와 그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분위기로 시를 읽기도 하고 자신의 시에 붙인 노랫말을 듣기도 하도 다른 사람의 시낭송을 들으면서 감회를 털어놓기도 했다. 특히 가장 많이 인용되는 노랫말은... 세노야와 가을 편지다.
도시 생활의 각박함 속에서 시를 읽는 느낌을 살려간다는 것 뿐만 아니라 산문도 그 진실함을 나눌 때면 포근히 젖어드는 분위기가 마음 깊은곳까지 스며든다.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배우 박광정 황지우 시인과 함께 꾸미는 연기적 낭송, 그리고 송대관이 낭송하는 자신의 노래 네박자까지, 우리네 삶 속에서 낭송을 통해 다시금 감성적인 분위기를 살려내고 눈물까지 쏙 빼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 바로 낭송의 깊이다. 어쩌면 우리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다시금 따뜻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새로운 라디오를 지향하는 프로그램에서는 보이는 라디오를 통해 청취자들의 반응을 더 다양하게 이끌어낸다는 말을 들었다. 새로운 시대의 환경에 맞추어 발빠르게 청취자와 함께 호흡하고 또 서로 주고 받는 방송을 만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이전처럼 여의도 사서함이 바쁘던 시대와는 많이 달라진 풍속도다. 편지와 엽서의 양이 줄어든 반면, 문자와 혹은 인터넷 사연 접수가 늘어나는 추세다. 그런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텔레비전이 다 하지 못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라디오가 더 가슴 깊이 파고든다. 아침 방송뿐 아니라 저녁에 듣는 최유라의 그 생기발랄한 웃음도 그렇다. 진솔한 사람들의 소박한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
모더니티만을 끝없이 찾아오던 사람들이 복고적이고 자연적인 그들의 숨통을 찾아나선 것처럼, 도시 곳곳에서도 사람 사는 이야기들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우리가 글을 쓰고 또 나누려는 건 그런 감성의 훈훈함을 불러오는 일이리라. 자신의 손을 떠나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또 반응을 확인하는 일이란 그런 면에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게 해 주는 일이다. 사실 한 동안 이런 글쓰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소한 그런 글쓰기가 내게는 절실했고 그것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 같이 고민하는 문제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글을 쓰는 일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그건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 양심처럼 그저 진실 앞에 더 자신을 낮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틀에 박힌 일, 그 일상 속에 주고 받는 사소한 감정, 그 사건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임을 안다. 아침 방송에서처럼 집 안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꾸만 바깥으로 도는 남자들이 문득 자신에게 소중한 공간이 바로 가까운 곳에 있음을 발견한다. 가족처럼 우리가 마음을 털어놓아야 하는 곳이 가까이 있음에도 우리는 먼 곳에서 자신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아침 방송의 결론처럼, 남자들은 자신을 인정해줄 곳을 찾아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으려고 하고, 여자들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갈증나 있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에게 짜증을 부리고 남자들은 자신을 무시한다고 반발한다.
일은 항시 있고, 또 그 일을 그리고 바라보는 일 또한 끝이 없다. 그곳이 가정 밖이기도 하고 또 가정 안이기도 하다.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고 이야기 또한 끝이 없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통해 우리는 안도감을 찾아낸다. 아주머니들의 수다 속 한숨처럼, 시장 속 흥정에서 그 팽팽한 삶의 긴장을 느끼듯, 하루하루 밀고 당기며 살아간다. 낭송은 안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평온을 준다. 호소하고 다시금 그 먼 세상의 끝자락, 인생의 뒤안길을 바라보게 한다. 노시인이 시인이란 제목으로 시를 썼다. 한 시인이 있었고 사람들이 그를 시인이라고 불렀고 돼지도 그를 시인으로 인정한다고 꿀꿀꿀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집에는 시가 한 편도 없었다. 그래 그를 위한 시를 한 편 지었는데 그 시도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동서고금 모든 시들이 또한 바람에 휙휙휙 날아가 버렸다. 세상에 시란 없다. 그의 시처럼 시를 없애고서야 시가 존재하는 아이러니처럼, 우리는 그 집착을 벗어버려야만 진솔한 시를 대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팔아 먹는 광고시, 잘난 채 자신을 드러내는 시가 아니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그 간절한 시, 진솔한 시가 그리운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 각박한 익명의 사람들 속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 온 사람들처럼 말이다. |
첫댓글 모든 게 손가락 하나만 있으면 해결될 것 같은 편리한 세상!에 살고있다. 그러면서 잃어가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기다림의미학도 없어지고,흥분 ,떨림...그런게 그립고 아쉽고 했는데 이 곳에 오면서 약간은 해갈된 느낌이다.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그런 아련했던 기분을 느끼고 친구가 바로 옆에 있다는 착각도 든다.글이란 참으로 좋은 것 같다.
탱자나무집 반들거리던 작은 마루, 방 안에 누워 읽는 편지처럼, 아득한 세월을 떠올리면서 또 급박한 인생의 강물을 따라 흐르고 있겠지. 그 안에 마음을 나눌 사람들과 소설!~강 같은 공간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