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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주석/일반자료 스크랩 75강.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70 이레
jtr28114 추천 0 조회 10 15.01.02 14: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75강.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70이레 (요 12:12-16)

 

요 12:12-16=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1부

 

오늘은 70 이레에 대해서 공부를 할까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70 이레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70 이레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70 이레 속에는 인류 역사 전체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인류 역사 전부를 다 훑는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만큼 70 이레는 비밀이 깊어요.

 

신학자들은 70 이레는 늪이라고 해요.

늪이란? 빠지면 못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손을 댔다간 헤매게 되니 섣불리 다루려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괜히 아는 척 다루다가 망신만 당한다는 겁니다.

 

신학자들은 70 이레를 역사성으로만 연구하고 이해를 하였어요.

그러니 해석을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1 이레가 아무리 끼워 맞추어도 역사적으로 해석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70 이레는 역사적인 사실이면서도 그 속엔 묵시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이 두 가지를 다 해석하여야 해요.

이게 이해가 안 되면 신학자들과 같이 늪이라고 하여서 다루지 못하는 겁니다.

 

역사는 묵시에서 나왔어요.

역사는 묵시를 담아내는 그릇과 같아요.

그러므로 70 이레도 역사적인 사실이면서 그 속에 묵시적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은 역사 속에 묵시에 속한 일들을 담아 놓았어요.

마치 율법 속에 십자가의 비밀을 담아 놓은 것과 같아요.

구약 속에 신약을 계시(啓示) 해 놓은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역사를 통하여서 묵시를 읽어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70 이레 속에서 묵시적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해요.

70 이레를 알려면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훑어보아야 해요.

아니 인류 역사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70 이레 속엔 인류 역사의 조감도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쇠붙이가 용광로에서 녹듯이 모든 언약이 70 이레 속에서 녹아진다고 보면 됩니다.

 

그만큼 70 이레가 어렵고 중요한 내용입니다.

엄청 어려운 공부인데 가장 쉬운 말로 풀어야 하니 저도 긴장이 됩니다.

어떻게 풀어야 여러분들이 이해가 될까 고민입니다.

암튼 서로 서로 성령의 도움을 구하고 기도하면서 저는 말하고 여러분은 듣고 합시다.

 

오늘은 긴 여행을 하여야 하는 대하드라마가 될 것 같으니 미리 여유를 갖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법 긴 여행이 될 것입니다.

그만큼 할 말이 많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들어 왔던 이야기가 반복이 되어도 인내하고 정리하세요.

그럼 엄청난 희열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럼 인류역사 전체를 묵시적 관점에서 즉 창세전 언약으로 훑어봅시다.

 

이 세상은 원래 없었어요.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태초(太初)란? 천지가 만들어지기 전을 말해요.

 

그럼 천지가 만들어 지기 전엔 누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계셨지요.

왜냐하면! 천지(天地)를 하나님이 창조 했으니까요.

 

그럼 천지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맞아요.

만물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골로새서를 봅시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 에게 창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그” 로 말미암고!

“그” 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그” 가 원인(原因)이면서 목적(目的)이지요.

 

여기서 “그” 란? 예수님을 말해요.

예수님이 왜? 만물을 만들었다고 합니까?

이는 “그(예수님)” 를 위해서에요.

 

다시 설명합니다.

만물은 예수님이 창조했고!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그러니 만물은 예수님이 없으면 없는 겁니다.

마귀나 천사나 신자나 불신자나 교회나 절간도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이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필요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물 속에는 하늘에 것이나 땅에 것이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어요.

만물 속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지요.

하늘에 것과 땅에 것이 있다고 하잖아요.

말이 헷갈리기 쉬우니 잘 들으세요.

 

우리가 흔히 하늘에 것은 영적(靈的)이라고 하고, 땅에 것은 육적(肉的)이라고 해요.

그런데 우리 눈엔 보이지 않는 하늘에 것은 안 보이고 보이는 땅에 것만 보여요.

즉 육적인 것만 보이고 영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여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어요.

믿음을 받으면 보이는 것을 통하여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요.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나 믿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나 동일해요.

성령이 와야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성령과 같다고 보아도 무방해요.

 

아까 보이는 것은 역사(歷史)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묵시(?示)라고 했지요.

그럼 믿음을 받으면 나타난 역사를 통해서 감지(感知)되지 않는 묵시적인 것을 보게 되겠지요.

그렇잖아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한다고 했으니까요.

70 이레로 말한다면 믿음을 받으면 역사적인 70 이레를 통해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지(感知)되지 않는 묵시적인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왜? 만물을 만들었을까요?

이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창세전에 언약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물은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는 도화지와 같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아들과 언약을 하시고 만물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창조(創造)란 말은 ~ ~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이에요.

그럼 만물의 창조가 무엇으로 비롯되었느냐?

창세전 언약으로 비롯되었어요.

그러니 만물을 있게 한 것이 창세전 언약이지요.

 

창세전 언약이 없었으면 이 세상은 없었어요.

저와 여러분도 없어요.

교회도 없어요.

저와 여러분을 존재케 한 것이 창세전 언약이에요.

저와 여러분도 만물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창세전 언약의 도구로 존재하는 겁니다.

 

창세전 언약을 모르면 신앙을 자기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게 되어요.

자기 존재를 지키는 것으로 나아간단 말입니다.

이 시대 목사들의 설교가 다 이런 패턴이에요.

 

그러니 인간의 행함을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자꾸만 자기 치장하는 쪽으로 흐르는 겁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저렇게 살아야 합니다! 라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열고 창세전 언약을 알면 아~ 나 라는 존재는 언약 때문에 생겨났구나!

그럼 나는 언약의 도구이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식으로 언약의 도구로 사용하실까!

나와 언약은 어떤 관계일까!

 

하나님이 지금 나를 언약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구나! 를 알게 되어요.

이렇게 되면 자기 존재가 가벼워져요.

왜냐하면! 내가 내 인생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언약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다루어 가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창세전 언약을 위한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두가 창세전 언약 안에 놓여 있어요.

그러므로 세상 역사를 창세전 언약 관점에서 보아야지 그냥 세상 관점에서 보면 안 되어요.

 

세상이 언약 때문에 창조가 되었으니까요.

우리 자신도 우리 존재로부터 보면 안 되고 창세전 언약적 관점에서 보아야 해요.

그러니 “어떻게 살까” 생각하지 말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를 생각하고 사세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살고 있어요.

이 모두가 죄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 창조의 본래 목적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으시는 겁니다.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에서와 야곱이 언약을 위해서 존재케 되었듯이 신자와 불신자도 언약을 위해서 존재해요.

절간에 스님도 언약을 위해서 존재하고!

이방종교들도 언약을 위해서 존재하고!

마귀도 언약을 위해서 존재하고!

천사도 언약을 위해서 존재하고!

교회와 신자도 언약을 위해서 존재해요.

 

이 말은 곧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는 어떻게 살까! 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것으로 고민하지 마세요.

이게 믿어져야 살아가는 것에 부담이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 몸을 일평생 끌어안고 어떻게 살까 고민 고민 하게 되는 겁니다.

좌우지간 창세전 언약이 안 믿어지면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 하니 괴로운 인생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게 힘들고 어려워요.

 

반복 반복 말하는 것을 이해하세요.

그만큼 창세전 언약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설교를 창세전 언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이 모든 것을 여는 “마스터 키” 이기 때문입니다.

 

전 창세전 언약을 증거하는데 제 설교와 목회를 올인하고 있어요.

그래서 시간 시간 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는 겁니다.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너를 위해 살지 말고 예수를 위해 살란 말이에요.

나를 위한 내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나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창세전 언약이라는 영화를 찍는데 캐스팅 된 배우들이에요.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파는 역할을 맡았고!

베드로는 예수를 저주하고 부인 했다가 용서받는 역할을 맡았어요.

저와 여러분도 각자 맡은 역할이 있어요.

 

배우는 감독이 맡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 되어요.

감독에게 내가 왜? 이런 역할을 맡아야 합니까?

배역이 싫다고 해서 에이~ 씨! 나 하기 싫어하면 안 되어요.

그럼 그 사람은 퇴출되어요.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런 그릇으로 만들었습니까?

따지면 뭐~ 이런 놈이 있어! 하고 갖다 깨 버려요.

그냥 간장 담는 그릇으로 만들었으면 평생 간장만 담고 살면 되어요.

 

목사로 부름을 받았으면 목사노릇하고!

성도로 부름을 받았으면 성도로 만족하면 되어요.

에이! 나 성도하기 싫어!

목사 할래!

그러지 마세요.

 

제가 복음을 알고 보니 제일 편한 게 성도에요.

목사가 제일 못해먹을 짓이에요.

여러분은 편하게 앉아서 그래 정 목사 오늘 설교 잘하나 못하나 채점을 하는데!

저는 목소리 높여가면서 땀 흘리며 소리 소리쳐야 하잖아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잖아요.

 

똑 같이 개런티 받는데 이게 뭡니까!

설교를 하고 나서도 잘했니! 못했니!

욕이나 뒤지게 먹고 말이에요.

그래서 저도 목사 그만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설교를 하기 싫어도 안에서 자꾸만 어떤 분이 시어머니처럼 채근하니 안 할 수가 없어요.

잘 하지도 못하면서 말이에요.

잘 하면 무슨 고통이겠어요.

 

그럼에도 하는 게 편하지 안 하면 더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욕 먹어가면서 하고 있는 겁니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암튼 우리 모두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자 이제 이것을 세상 역사에 적용해 봅시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구현해 내는 마당과 같아요.

역사라는 것을 통하여서 창세전에 맺은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하나 하나 그리고 있는 겁니다.

세상 역사는 마치 드라마 감독이 시나리오대로 한 씬 한 씬 촬영하는 것과 같아요.

역사가 진행 될 때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가 한 장면 한 장면씩 찍혀지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대하(大河)드라마가 완성 되는 겁니다.

 

그럼 창세전 언약 내용을 알아야겠지요.

하도 들어서 이젠 무슨 말을 할까 줄줄 꿰지요.

에베소서 1장으로 가서 바울이 보았던 창세전 언약 내용을 봅시다.

 

엡 1:4-7=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창세전 언약 내용을 보았어요.

창세전 언약이 뭐라고 했나요?

한마디로 예수님의 피로서 자기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고 하였지요.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다는 말을 다른 말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구원 받는다는 말이에요.

구원받는다는 말은 죄 아래 갇혀 있다는 말이지요.

맞아요.

하나님께서 죄 아래 가두어 놓았어요.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을 예수님이 빼내 주는 겁니다.

 

갈 3:22-23=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죄 아래 가두어 놓았다고 하지요.

우린 가두어졌어요.

누가 가두어 놓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가두어 놓았어요.

이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하나님이 가두어 놓았으면 우린 빠져 나올 재간이 없어요.

하나님이 빼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하나님이 알아서 빼내 주세요.

빼내서 구원하는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알아서 정하세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이 빼내 줄 때 까지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마치 잃은 양이 목자가 찾아 줄 때까지 잃어버려진 대로 살고 있으면 되어요.

 

구원 받고자 노력하지 말란 말입니다.

노력해서 구원 받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어요.

천국은 천국의 주인이 오라고 해야 가지 우리가 마음대로 가는 곳이 아니에요.

구원은 하나님이 시켜 주세요.

그러니 스스로 빠져 나오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빼내 주세요.

 

이방 종교는 스스로 빠져 나오라고 하지만 기독교는 가만있으라고 해요.

이방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스스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과 예수님이 알아서 시켜주는 것의 차이에요.

만약에 교회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교인들로 하여금 열심히 뭔가 하여서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하면 그 교회는 이방 종교에요.

그렇게 가르치는 목사는 절간에 중 이에요.

 

구원은 독자적으로 내가 죄에서 빠져 나오는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빼내 주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가두어진대로 그대로 사세요.

그러면 예수님이 알아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다 빼내 주세요.

한 알갱이도 빼 놓지 않고 다 찾아서 빼내 주세요.

 

베드로처럼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고 있으면 예수님이 찾아 와요.

베드로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찾아와서 야~ 가자 고 그래요.,

아브라함처럼 야~ 가자 그래요.

그러면 따라 가세요.

 

예수님이 가자고 그러면 이상하게 거부하지 못해요.

강아지가 목줄에 끌려가듯이 거부하지 못하고 끌려가요.

이상하게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예~ 한단 말이에요.

 

믿음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마세요.

보세요.

믿음이 오기 전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였다고 하잖아요.

믿음이 오면 자연적으로 율법에서 나오게 되어요.

 

전 과거 이걸 몰랐기 때문에 수십 년을 내가 율법에서 나오려고 했어요.

믿음이 오면 자연적으로 쑥~하고 빠져 나오는데 말이에요.

마치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이 차면 자연히 밀고 나오듯이 믿음을 받으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으라고 해도 못 있어요.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미련 없이 나오듯이 믿음이 오면 율법신앙에서 미련 없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신앙생활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자기가 시나리오를 그렇게 써서 반전 드라마를 만든 것이 아니에요.

 

그냥 자기 일을 하러 가는데 갑자가 예수님이 찾아와서 노선을 바꿔준 겁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전에 걷던 노선과 이제는 원수가 되어서 싸우는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율법신앙에서 십자가 복음 안으로 들어 온 것도 하나님께서 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빼내 준 겁니다.

 

과거 율법 아래서 같이 호형호제하면서 놀던 목사들이 많아요.

그들과 아무런 불편함 없이 어울리고 놀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은혜로 찾아와서 야~ 거기서 나와 그랬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 친구들하고 서로 이단이라고 하면서 살아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원함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하나님이 창세전 언약대로 우리를 다스려 가기 때문이에요.

저와 여러분의 만남도 창세전 언약 때문에 만났어요.

 

노사연이가 그랬잖아요.

 

♪♪~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맞아요.

우리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고 하나님이 만나게 하 주신 바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만남입니까!

옆 사람하고 인사 하세요.

반갑다 친구야!

우린 창세전에 만나기로 작정이 되어 있던 친구라는 것을 알았으니 끝나고 그냥 헤어지지 말고 가다가 교제 하고 가세요.

 

창세전 언약을 알면 전부 놀라운 일들뿐이에요.

하나님이 다 배치를 해 두셨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다 귀한 분들이 되는 겁니다.

물론 악역(惡役)으로 만나는 사람도 있고, 선한 역(善役)으로 만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이 모두가 하나님이 배치해 두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전 언약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담아 두어야 할 말씀이에요.

왜냐하면! 역사의 시작이 창세전 언약 때문에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창세전 언약으로 인하여 태동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창세전 언약은 나를 있게 해 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겁니다.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에 따라서 흘러가고 있어요.

 

하나님은 세상을 즉흥적으로 다스리지 않고 이미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대로 다스려요.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일곱 인(印)으로 봉인된 책을 받습니다.

어린 양이 봉인된 책을 하나씩 뗄 때 마다 세상에선 이상한 일들이 벌어져요.

 

이는 결국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책에 적힌 대로 전개된다는 말입니다.

제국의 흥망성쇠(興亡盛衰)서부터 한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모두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만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큐~ 하면 만나고,

컷트~ 하면 헤어지고 그래요.

 

이처럼 세상 역사는 하나님께서 다 정한 때가 있어요.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듯이 시작한 때가 있으면 끝 날 때가 있어요.

역사가 시작 되었으면 이젠 끝을 행하여 치닫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역사가 창세전 언약으로부터 나왔다고 했으니 역사는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는 도화지와 같겠지요.

창세전 언약이 예수님 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럼 역사라는 마당은 예수님의 피로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일들을 펼쳐내게 되어 있겠지요.

다른 말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일들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여기에 동원된 민족이 이스라엘이에요.

구약은 언약의 자손이 오시기까지 예표 적으로 보여 주셨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해 내는지를 보여주는 시청각 자료와 같아요.

 

이를 일컬어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해요.

기능적이란 말은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기능이냐 하면 성도의 구원을 보여주는 기능이에요.

이스라엘 안에서도 에서와 야곱처럼 누가 구원받고 누가 저주 받는지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두 부류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되어지고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되어져요.

이건 인간의 후천적 삶에서 갈라지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갈라져서 태어나요.

마치 에서와 야곱처럼! 이미 복중에 짓기 전에 결정이 되어서 세상에 나온 것과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을 통하여서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는 겁니다.

에서는 난 왜? 지옥 가야 합니까?

그러면 안 되어요.

지옥 가라고 에서를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잘못해서 지옥 가는게 아니에요.

지옥 가기로 창조가 되어서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럼 야곱이 천국에 가는 것도 자기에게서 근거를 찾으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천국에 가면 놀라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표를 나누어 주었어요.

하나는 천국 가는 표이고!

하나는 지옥 가는 표에요.

에서는 지옥 가는 표를 받고 태어났고, 야곱은 천국 가는 표를 받고 태어났어요.

그러면 에서와 야곱은 자기가 받은 표에 적힌 대로 가면 되어요.

 

송대관 이가 불렀잖아요.

 

♪♪~ 차표 한 장 손에 쥐고 가야만 하네!

예정된 시간표대로 떠나야 하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열차에 몸을 싣고 가야만 하네!~ ♪♪

 

얼마나 복음적인 노래입니까.

예배시간에 이런 노래 좀 부르세요.

 

이처럼 이스라엘 속엔 구원과 심판이라는 두 기능을 가진 자들이 섞여 사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 속에 예수님의 주(主)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로서 자기 백성이 어떻게 죄사함을 받는지 그 예표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겠지요.

이는 이스라엘이 죄사함을 받는 모습 속에 성도가 죄사함 받는 모습이 담겨져 있어야 하니까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우리들의 표본인 겁니다.

모든 성도의 샘플이란 말이에요.

그럼 우린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어 가시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신 솜씨로 우리도 다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해요.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으면 우리도 원망해요.

그들이 실패 했으면 우리도 실패해요.

그들이 용서 받았으면 우리도 용서 받아요.

왜냐하면! 그들이나 우리나 다 동일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구조 즉 영역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모든 인간은 아담이라는 영역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해서 다 똑같아요.

5천 년 전에 인간이니 지금 인간이나 똑같아요.

그 본질이 같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은 우리의 거울인 겁니다.

 

고전 10:11-12=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스라엘은 우리의 자화상이에요.

내 자신을 구약 이스라엘 속에 포함해서 성경을 보시면 훨씬 하나님이 나를 다루어 가신다는 것을 깊이 있게 사실적으로 느끼실 수가 있을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성경이 내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창세전 언약이 나를 위한 언약이 되어지는 거예요.

은혜를 받으면 이스라엘과 나를 한 묶음 속에서 보게 되어요.

 

전 과거 은혜를 모를 땐 이스라엘과 나를 따로 보았어요.

똑 같은 놈인데도 다른 영역에서 관람객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구약을 읽을 때마다 구약 이스라엘을 욕을 엄청 했어요.

 

아니~ 어떻게 생겨 쳐 먹은 인간들이 그렇게 하나님이 기적 가운데서 간섭해 주셨는데도 틈만 나면 불순종하고 우상숭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놈들은 능지처참해야 한다고 핏대를 높였어요.

 

그런데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나니 내가 바로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관람석에서 무대로 밀어 넣었어요.

관람석에서 보지 않고 내가 무대에 서 있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겁니다.

 

내가 무대에 서고 보니 내 자신이나 이스라엘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나는 지금까지 괜찮은 인간인줄 알았는데 내가 바로 이스라엘과 같은 못된 종자라는 것이 보여지는 겁니다.

내 속엔 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예전엔 죄인이라고 하면 그냥 늘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나니 사실로 고백이 되어지는 겁니다.

악당도 이런 악당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란 말이 말장난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틈만 나면 불순종하고 타락한 것을 이해하겠더라고요.

자연히 아버지여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가 나와요.

주여~ 내가 죽을 죄인이군요! 라고 토설하게 되는 겁니다.

옛날 같으면 죽여라! 죽여라 하던 것이 이젠 하나님 용서해 주소서!

그런다구요.

 

제가 은혜를 받기 전과 받고 난 후의 차이라면 사람들을 정죄하지 못하겠어요.

다 이해가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저지르는 죄라는 것은 전부 거기서 거기에요.

큰 죄, 작은 죄 나눌게 없어요.

 

미워하는 것이나 살인하는 것이나 동일해요.

탐내는 것이나 도적질 하는 것이나 똑 같아요.

음욕을 품은 것이나 실제로 간음 하는 것이나 동일해요.

 

하나는 겉으로 드러났고 하나는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에요.

드러나지 않은 것도 환경만 조성 되면 언제든지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다 그 뿌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젠 누가 범죄한 모습들이 드러나면 그 모습이 내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에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겁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이 들어요.

어이쿠~ 저 모습이 내 모습인데 하면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가 된다구요.

옛날 같으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하고 정죄하느라고 게거품을 물었는데 말이죠.

 

사람이 간사스러워서 남의 이야기로 들릴 때에는 법으로 하세요!

그러다가도 그 이야기가 자기 이야기로 변하면 용서해 주세요! 가 되어요.

내가 죄인임을 알 때 죄인이 용서가 되어요.

남을 정죄하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아무리 복음 복음하여도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예수님의 피가 가슴 깊숙이 김치가 양념에 절여지듯이 절여 졌는지 아니면 겉저리 같이 훅 지나갔는지 하는 짓을 보면 알아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에 삼계탕처럼 푹 삶아져서 뼈까지 흐물흐물 해 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모닥불에 닭털만 태워서 먹으려고 하면 익지 않아서 먹을 수가 없어요.

마치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한 쪽은 익고 한 쪽은 익지 않는 전병과 같아요.

 

그만큼 우리는 머리로만 말씀을 받았지 가슴으로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중계방송 하듯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들은 것이 있어서 말은 현란한데 막상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들이 없는 겁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요.

마치 자기는 자기가 잘나서 의인이 된 줄 알아요.

 

공부 잘하는 놈은 공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요.

과부 심정 홀 애비가 알고, 홀 애비 심정을 과부라야 알아요.

맏아들은 탕자의 마음을 어찌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니 바리새인들처럼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정죄만 난무하지 용서하는 것이 없는 겁니다.

스스로는 엄청 은혜를 받고 복음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아닌 겁니다.

 

용서 받은 사람에겐 용서가 나오고 용서 받지 못한 사람에겐 정죄가 나와요.

은혜의 영역에 있는 사람은 은혜를 토해내고 법에 영역에 있는 사람은 법을 토해내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자기 안에 법이 있으면 정죄가 나오고!

자기 안에 은혜가 있으면 주여 긍휼을 베푸시고 용서해 주소서가 나와요.

 

그래서 성경은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는 겁니다.

나 이런 나무야! 하지 말고 그 나무가 맺어내는 열매를 내어 보이세요.

나 십자가 피 안다고 하지 말고 십자가 피로서 용서받은 모습을 보이라구요.

 

예수님이 용서 해 주셨잖아요.

그럼 용서 받은 자 답게 용서하고 사세요.

이건 율법적 행함이 아니고 살아있는 믿음이 토해내게 하는 행함이에요.

이런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복음 안다고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아요.

쏟아내는 열매는 법에 속한 정죄를 쏟아 내면서 나 은혜 아래 있어 그러면 안 되지요.

그 속에 빛이 없는 사람은 속아도 빛이 있는 사람은 안 속아요.

정죄하고 판단하면 너나 잘 하세요.

그런다고요.

 

누가 정죄하면 아~ 저 사람은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한 사람이구나 생각해요.

그런 사람에겐 뭐라고 하면 대들어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무시해야지 너 왜? 그러느냐 라고 하면 욕으로 듣고 물어뜯어요.

어떤 분들은 이런 말을 하면 적개심이 가득해서 잡아먹을 듯이 광포해져요.

 

우린 성경을 통하여서 내가 죄인임을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여야 해요.

그래서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이 실감 되어져야 십자가 앞에서 유구무언이 되는 겁니다.

난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아주 중요한 말을 하나 할게요.

 

자기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천당에 가고!

자기가 예수를 안 죽였다고 하면 지옥에 가요.

구원은 예수를 죽인 자가 받아요.

예수를 죽이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해요.

 

하나님이 너! 예수 죽였지 물으면 예~ 제가 죽였습니다 라고 해야지!

난 안 죽였는데요! 라고 고개 절래 절래 흔들면 큰일 나요.

난 진짜 안 죽였거든요! 하면

하나님이 알았어! 하곤 섭씨 1000도나 되는 따뜻한 곳으로 보내요.

거기서 영원토록 찜질 열심히 하라고 하세요.

 

아주 중요한 말을 했어요.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새기고 또 새겨들으세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죄에 깊이를 많이 알아간다는 겁니다.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아가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더 많이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알아갈수록 할 말이 점점 줄어들어드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나를 위한 복음 이야기로 들려지게 되어요.

그럴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심이 나를 위한 것임이 믿어지고 감사가 되어져요.

 

그럼 구약 이스라엘의 생성부터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에요.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성도의 샘플인 것처럼 아브라함도 이스라엘의 샘플과 같은 겁니다.

샘플이란? 대표성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 속에 이스라엘이 담겨져 있고!

이스라엘 속에 성도(나)의 모습이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모습 속에 성도가 구원받는 모습을 담아 놓은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을 했어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찾아 갔어요.

그리곤 “너 복에 조상 해!” 그랬어요.

 

이건 하나님이 복에 조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너~ 복에 조상 해!”

그러면 아브라함은 꼼짝없이 복에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그렇게 만들어 가요.

 

아브라함에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인한 겁니다.

이렇게 일방적인 부르심을 은혜라고 해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복에 조상이 된 것엔 하나님의 은혜만 담겨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은혜로 구원될 모든 성도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아브라함 후손인 이스라엘도 은혜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까지 적용해서 올라가면 신약의 성도도 은혜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여야겠지요.

은혜란? 인간의 조건(행함)의 반대말이에요.

은혜 속엔 인간의 조건이 담길 자리가 없어요.

 

구원 속엔 내 열심과!

내 충성과!

내 봉사와!

내 노력이 담길 공간이 없어요.

 

아브라함이 잘나서 복에 조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에요.

선택이란? 선택하는 쪽에서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지 선택 당하는 쪽에서 날 선택해 주세요! 라는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선택하면 선택 되는 것이고 안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처럼 이스라엘도 자기에게 복 받을 만한 자질이 있어서 복에 민족이 된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성도 역시 성도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겠지요.

 

그래요.

성도에겐 구원 될 어떤 조건도 없어요.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보시고 선택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인간의 조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하신 선택이 취소되지가 않는 겁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조건보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조건으로 상실 되지 않아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믿어져야 해요.

이걸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이 우리의 행함으로 취소되는 일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자기 꼬라지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요.

이게 안 믿어지면 맨 날 아침엔 천당 저녁엔 지옥으로 가는 롤러코스트를 타야해요.

죄인 주제에 자기를 성찰한다고 난리를 치게 되는 겁니다.

 

성도의 구원 속엔 인간의 행함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담겨져 있어요.

오직 용서!

오직 사랑!

오직 은혜에요.

 

예수 안은 오로지 용서와 사랑과 은혜만 있어요.

너 왜? 그렇게 살았어!

이 나쁜 놈아!

그런게 없어요.

다 내가 해줄게!

내 품에 둥지를 틀어! 만 있어요.

 

그럼 마귀는 이스라엘이나 성도를 어떻게 미혹을 할까요?

즉 어떻게 죄를 짓게 할까요?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은혜 성을 훼손시키는 일을 하겠지요.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는 식으로 미혹하겠지요.

자신의 행위로 신앙을 판단하겠지요.

 

예를 들어서 자신이 말씀대로 살았으면 의롭다 여기고 살지 못했으면 죄인이라 여기겠지요.

이게 죄에요.

자기 지신의 행위로 의다 죄가 판단하는 것이 죄에요.

죄가 주장하면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을 자기 행동으로 판단해요.

저주 받으면 어쩔까! 전전긍긍하는 겁니다.

 

죄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하는 거예요.

구원 받은 것을 자기 조건으로 두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마치 자기가 구원 받을 만 하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공짜로 주었는데!

인간이 자기가 따 낸 것으로 만들어버린단 말입니다.

자기가 따 냈다고 생각하면 자연히 자기 자랑을 하게 되지요.

이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택을 하였는데 자기 영광을 취하게 되는 겁니다.

 

이를 일컬어 죄라고 해요.

죄란? 윤리 도덕적으로 어떤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니 자연히 복음이 기쁘지 않고 구원하심이 감사가 안 되지요.

 

죄란 뭐냐?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의 은혜 성을 훼손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그건 은혜의 반대말을 생각하면 되어요.

은혜의 반대말은 행함이에요.

하나님께 공짜로 받은 복(구원)을 자신의 어떤 조건으로 받은 것처럼 만든단 말입니다.

 

내가 그래도 복 받을 만 하니까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그래도 구원받을 만 하니까 받은 거라고 해요.

내가 그래도 천당 갈만 하니 천당에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는 천당에 갈 놈들이 아니고 지옥에 갈 놈들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일들을 하시는 겁니다.

다른 말로 너희는 저주 받을 죄인이라고 알려주는 일을 하세요.

 

은혜를 알게 하려고 죄를 고발하는 겁니다.

말씀을 지켜서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이런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일을 하세요.

왜냐하면! 자기백성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구원을 하였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아 용서 받게 되었다는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은 일평생 죄를 고발당하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곧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에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고발하는 일들을 하신단 말입니다.

 

전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은혜를 받고 보니 내가 지켜낼 수 있는 말씀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도리어 말씀 앞에서 넌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고발당하고 있어요.

그러니 말씀을 대하면 율법 아래서 전혀 맛보지 못한 상한 심령이 되고 탄식이 나오는 겁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소서가 나온다고요.

 

어느 시대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자가 아니라 불순종하고 사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요.

은혜를 받으면 자기가 죄인 중에도 아주 질이 나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요.

야~ 내가 이렇게 나쁜 놈이구나! 를 알게 된다구요.

아직도 자기가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은혜를 깊이 받지 못하였어요.

 

난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은혜의 깊이에 빠지지 않고 물가에 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조만간 죄를 끄집어내는 일들을 벌리실 겁니다.

넌 아주 인간쓰레기이고!

개차반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기대하세요.

 

자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죄를 끄집어내는지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추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을 선택합니다.

그리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그 말씀을 좇아서 가나안 땅까지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창세기 15장에서 언약하시길 네 후손이 다른 나라에 가서 종살이 하다가 여기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네 후손이 이방에 객이 되어 살다가 4 대(代)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온다고 했어요.

아브람은 지금 당장 줄줄 알았는데 4 대(代)가 지난 후에 주겠대요.

 

그래서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나그네처럼 이리저리 헤매고 살았던 겁니다.

애굽에도 내려갔다가 자기 마누라를 바로에게 빼앗기기도 하고 하였어요.

그러다가 막벨라 굴 하나 달랑 사놓고 죽었어요.

아브라함은 죽어서 가나안 땅에 정착한 겁니다.

 

그 후 아브라함 후손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흘러 흘러 애굽으로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애굽에 바로에게 붙잡혀 430년 동안 종살이하게 되었어요.

430년을 살았다는 말은 애굽 사람이 다 되었다는 말이에요.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서 학교 다니고!

애굽에 학문과 풍습과 신(神)관을 갖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그들 속엔 아브라함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다른 말로 아브라함 언약이 담겨져 있단 말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살았지만 조상들로부터 귀가 따갑게 너희는 하나님 백성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애굽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산 겁니다.

 

애굽식 하나님이란? 나를 위한 하나님이에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하는 하나님이에요.

인과응보(因果應報)하는 하나님이에요.

 

한마디로 인간의 조건으로 복을 주기도 하고 저주를 주기도 하는 하나님이에요.

말 잘 들으면 복을 받고!

말 안 들으면 저주하는 그런 하나님이에요.

그러니 애굽식 신앙은 언약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행동을 뜯어 고치는 일만 되풀이하고 사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애굽에 종살이 하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 때문이잖아요.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모르는 겁니다.

자신들이 잘못해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물론 잘못 했어요.

그러나 그 잘못도 언약을 위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암튼 이렇게 430년 동안 애굽식 하나님을 섬겼어요.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한 기간이 다가오자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서 이스라엘을 더 핍박하게 만들었어요.

그러자 백성들이 이제는 더는 못 참겠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통성기도 했어요.

 

물론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의 때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기도 하게 한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사 구출하기로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 한 때가 되어서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킵니다.

모세도 아브라함 언약을 위하여 동원이 된 겁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것은 그들의 조건 때문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 때문이에요.

그런데 아브람과 언약을 맺을 때 어떻게 맺었는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담보로 언약을 하셨어요.

아브람이 제물로 바친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지나가셨지요.

이는 곧 하나님이 자기의 죽음을 담보로 언약을 맺었다는 말이에요.

 

이러한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하신 겁니다.

창세전 언약이 예수님의 피로서 자기백성이 산다는 거잖아요.

그러니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의 “씨 눈” 과 같아요.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 살고 있는 셈이지요.

이 사실을 알리려고 출애굽을 할 때 어린 양의 피로서 빼내는 겁니다.

죽음의 재앙을 어린 양이 대신 죽어서 피를 바르게 함으로서 넘어가게 만든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죽음을 어린 양이 대신 짊어졌다는 말이에요.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피 안에서 사는 민족이 된 겁니다.

어린 양이 대신 죽어줌으로 죄를 용서받고 살게 된 것입니다.

 

애굽이란? 죄악된 세상을 말하기도 하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라고도 해요.

그러니 어린 양의 죽음을 담보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출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되어요.

 

자신들이 살고 있는 바탕에 어린 양이 대신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언약 백성이 아니고 애굽 백성이에요.

그런 사람은 비록 몸은 출애굽을 하였다 할지라도 마음은 출애굽하지 않은 것과 같아요.

자기가 살고 있는 근본(根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이 왜? 죽었습니까?!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이는 내 죄 때문에 죽은 겁니다.

자기 죄와 어린 양의 죽음은 한 셋트에요.

이걸 잊으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암묵적으로 묻는 겁니다.

너 어떻게 살고 있지!

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린 양이 왜? 죽었지!

그건 내 대신 죽었습니다!

내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옳거니~ 너 항상 그 정신으로 살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디 그런가요.

다 자기가 잘나서 살고 있다고 믿잖아요.

이건 자식새끼 키워 보면 금방 알아요.

다 저 잘나서 산다고 하지 부모의 희생으로 살고 있다고 믿지 않아요.

설령 안다고 하여도 지식이지 가슴으로 아는게 아니에요.

그러니 부모가 뭐라고 하면 덤비고 반항하고 지랄을 떠는 겁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합니다.

출애굽을 시킵니다.

그리곤 광야에서 이 놈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아는지 시험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바라는 모습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를 못살게 구느냐고 불평합니다.

자기 존재로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그러니 육신이 고달프다고 왜? 우리를 애굽에 그대로 두지 않고 빼내 왔느냐고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삶을 바라지 않았어요.

이스라엘이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온 것은 애굽에서 보다 나은 생활을 꿈꾸고 나왔어요.

그런데 막상 나와 보니 애굽에 삶만 못한 겁니다.

그러니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겁니다.

 

이 놈들은 오로지 자기 몸뚱이만 챙기는 겁니다.

자신들이 왜? 출애굽을 하였는지를 몰라요.

자신들이 왜? 선택을 받았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살 가치가 없는 놈이라는 것을 알리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기 위하여 미끼를 던집니다.

모세에게 저 놈들에게 가서 너희들 내 말 잘 들으면 복 받고 잘 살게 해 주겠다고 물어 보라고 합니다.

이건 그들 속에 죄를 끄집어내고 죽이고자 하는 미끼에요.

죽음에 가두고 용서해 주는 방식으로 끌고 가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일방적인 언약을 맺지 않고 쌍무언약(雙務言約)을 맺은 겁니다.

지킬 것을 바라고 맺은 것이 아니고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쌍무언약(雙務言約)을 맺은 겁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이 쌍무언약에 의미를 몰라요.

그러니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이 죄인에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것이라고 했겠어요.

죄인이 뭡니까?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으니 죄인이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이 마귀에게 미혹당해서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요.

 

그래서 너희는 하나님께 순종이 안 되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려고 율법으로 쌍무언약을 맺은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봐라! 하나님하고 쌍방간에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그러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목사들이 공갈을 치잖아요.

하기사 본인들을 그게 공갈인줄도 몰라요.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채 복 받는다고 하니 덥석 받은 겁니다.

율법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으뜸이 되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

이건 이스라엘 백성들 귀에 너무도 솔깃한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준 것인데 이스라엘은 복 받고 잘 산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옳거니 하고선 덥석 물어버린 겁니다.

우리 계약(契約)하자고 했어요.

마치 쥐가 덫에 있는 고기를 먹으려고 덫 속으로 머리를 디 민 겁니다.

 

그래서 모세가 너희들 이제 죽었다 하고 양푼이에 피를 담아서 그들에게 뿌리고 계약을 맺습니다.

히브리서에선 이 피로 맺은 언약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어지는 죄사함을 위한 피뿌림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구약에선 쌍무언약(雙務言約)이기 때문에 책임을 묻게 되어 있어요.

피로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누구든지 계약을 어기면 죽는다는 계약입니다.

이제 모세가 계약서를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갑니다.

40일 동안 계약서 내용을 두 돌 판에다 다 받아 옵니다.

 

그런데 산 아래선 이미 애굽에서 섬기던 그 하나님을 섬기면서 계약을 어기고 말아 버립니다.

이젠 이스라엘을 죽은 목숨입니다.

계약을 어겼으니까요.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뒤집어쓰게 된 겁니다.

 

모세가 계약 파기를 알리는 차원에서 두 돌 판을 깨트려 버립니다.

이제 계약은 깨어졌습니다.

계약 내용이 누구든지 계약을 어길시 죽는다고 했으니 하나님은 계약서대로 이스라엘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3천명이 순식간에 죽어 나가 자빠집니다.

이러다간 이스라엘이 다 죽게 생겼어요.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모세가 하나님 앞을 가로막습니다.

중보자로 자처합니다.

하나님! 이 놈들을 죽으려거든 차라리 날 죽여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렇게 죽이려고 유월절 피를 뿌리고 데리고 나왔습니까?

차라리 날 죽이고 이 놈들을 살려 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이스라엘을 용서해줍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용서 받고 살아난 겁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모세의 수중에 떨어졌어요.

이스라엘은 모세의 생명으로 대신 살고 있는 셈입니다.

이젠 모세의 말을 안 들으면 죽여요.

 

그리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시내산에 올라오라고 해서 계약서를 다시 써줍니다.

내용은 동일하지만 그 의미는 달라요.

처음 계약서는 이스라엘하고 맺은 계약서 이지만!

두 번째 받은 계약서는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맺은 계약서에요.

 

모세가 율법이라는 계약서를 들고 와서 이스라엘에게 줍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율법을 볼 때마다 누구를 기억하여야 하는가 하면 자신들은 죄인인데 모세의 죽음을 담보로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해요.

아~ 우린 율법을 이미 어긴 놈들이지!

죽어 마땅하지!

그럼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살고 있지! 그래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볼 때마다 자신들은 저주 받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율법을 바로 아는 자가 되는 겁니다.

이걸 모르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까불면 그는 율법을 모르는 놈이에요.

바리새인들이 여기에 걸려들어서 저주를 받은 겁니다.

지금도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면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여야 한다고 설쳐요.

 

이제부터 율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고발하고 기능을 발휘합니다.

그러니 율법을 볼 때마다 우린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깨닫고!

이런 저주 받을 놈이 살고 있는 것은 우리 대신 모세가 생명을 내어 놓았기 때문이야 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표(豫表)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살고 있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생명을 담보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수중에 있듯이 성도도 예수님의 수중에 있는 겁니다.

 

암튼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모세가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다시 재교육을 시킵니다.

하나님께 맺은 언약을 다시 가르칩니다.

 

너희가 들어가서 살 땅은 애굽 땅과 다르다!

그 땅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는 그 땅에서 토해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일러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자기 힘으로 농사를 짓지 말고 하나님 약속만 믿고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애굽에 땅은 평지라서 물을 저수지에 가두어서 자기가 필요 할 때에 길어다가 농사를 지으면 되어요.

 

그러나 가나안은 산악 지대라서 물을 저수지에 가둘 수가 없어요.

물을 가두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가나안에선 하나님이 먹여 살려 주겠지 라는 믿음이 있어야 살 수가 있어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따르면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그 땅에서 쫓겨 날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모세가 당부를 하면서도 소귀에 경 읽기란 것을 뻔히 알아요.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가나안에서 쫓겨 날 것을 훤히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배반의 노래를 가르칩니다.

 

그 노래 내용을 신명기에서 살펴봅시다.

 

신 31:16-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보세요.

모세가 그럽니다.

나는 너희가 반드시 언약(言約)을 어길 것을 안다고 하잖아요.

언약을 어기고 그 땅에서 쫓겨나고 유리방황 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속을 훤히 아는데 너희는 반드시 망한다는 겁니다.

 

아니 이제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고 꿈에 부풀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 무슨 망발입니까?

격려는 못해줄망정 저주라니요.

아주 약을 올리듯이 나는 너희가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바를 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배반의 노래를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반드시 배반한다!

그리고 반드시 망한다!

망한다!

망한다!

망해!

이 때부터 랩송이 시작이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모세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이런 배반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사사기에요.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얻어터지는 역사에요.

모세의 예언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사사기에요.

 

사사기 3장을 봅시다.

 

삿 3:1-6=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4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6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모세가 광야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가나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배반한다고 했지요.

언약을 어긴다고 했지요.

 

모세가 이스라엘이 배반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은 누구 말입니까?

하나님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시켜서 말한 거잖아요.

그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배반하여야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배반하게 하기 위해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어요.

뭐하려고 남겨두었나요.

이스라엘을 시험하려고 남겨두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5절에 “마침내” 이스라엘이 언약을 이겼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마침내” 란 말은 “드디어” 란 말과 같아요.

“기어코”

“그래야지”

“그렇고 말고”

“내 그럴 줄 알았다”

“니가 그러면 그렇지”

“니 주제가 그렇지”

“네가 바로 그런 놈이야” 라는 말과 같아요.

 

이건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한 것이 아니고 드디어 그들 속에 감추어진 죄가 터져 나왔다는 말이에요.

본성이 드러난 겁니다.

 

봐라!

“너희들 속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 들어가 있잖아!”

“너희들 원래부터 하나님 말을 듣기 싫어했어!”

“너희들은 그런 종자야”

“너희는 당연히 저주 받아야 할 인간이란 말이야”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백성이니까요.

이스라엘은 착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인간은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리려고 이스라엘을 선택했어요.

왜? 인간은 저주 받을 수밖에 없고!

 

인간은 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지를 말해주고자 했어요.

왜?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아야만 하는지를 알려주고자 했어요.

그래야 창세전 언약이 이루어지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 주제도 모르고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얼마나 모순입니까?

하나님은 저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선택을 했는데!

이스라엘은 복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러니 이 죄를 끄집어내야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망하게 하고선 끄집어내는 역사를 만들어 준 겁니다.

이게 70 이레로 말해주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꼭 이 시대 우리 모습이에요.

우리도 예수 믿으니 고난 없이 잘 살아야 한다고 소망하잖아요.

하나님! 나 복음 아니 잘살게 해 주세요!

그러잖아요.

 

우리교회 복음 전하니 부흥시켜주세요!

십자가 복음을 빙자하여서 뭔가 꼼수를 노리잖아요.

그러고 있잖아요.

그러니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똑같아요.

이런 사고로 살았던 이스라엘이 저주 받았다면 우리도 당연히 저주 받아야 해요.

 

구약 이스라엘은 인간은 저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에요.

그래서 언약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인간은 천국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꺼꾸러 생각해요.

“나는 저주 받아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래야 하는데 우린 도리어 “난 축복을 받아야 해” 그러고 있어요.

“난 지옥가야 마땅해” 그래야 하는데 “난 천당 갈 거야” 라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들 또 헛다리 짚었다고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헛다리 짚게 하는 것이 언약의 성취를 위한 것이에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이에요.

인간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죄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로만 구원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거든요.

이런 사실을 다니엘을 통하여서 알려 주셨어요.

이건 잠시 후에 살펴볼게요.

 

오늘 우리가 살펴 볼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평상시엔 자신이 메시야 됨을 숨겼어요.

드러내 놓고 내가 메시야다 그러지 않았어요.

예전엔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자 쉿~ 조용히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달라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 왕임을 당당히 밝히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있어요.

군중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라고 하여도 말리지 않고 도리어 환영을 받았어요.

이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주인으로서 입성하는 겁니다.

 

그동안 임자 없이 비어 있던 왕도(王都)를 다시 찾은 것과 같아요.

마치 6. 25 사변 때 서울을 북한군에게 빼앗겼다가 9월 28일 날 수복(收復)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군중들도 열렬히 환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구약에 이미 예언을 하였어요.

 

그럼 예수님이 새로운 주인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죄로 잃어버린 것을 어떻게 찾아내는지를 살펴보아야지요.

이스라엘이 사는 땅이 가나안 땅이고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이스라엘의 중심부에요.

 

그런 곳이 지금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어요.

로마의 식민지로 있다 함은 마귀에게 빼앗겼다는 말이에요.

세상 권세는 마귀 권세를 말해요.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로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에겐 왕이 없다는 말이에요.

물론 헤롯왕이 있었어요.

하지만 헤롯왕은 로마의 곡두각시에요.

진정한 왕이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당당히 입성하는 겁니다.

 

이건 세상의 축이 바뀌는 사건이에요.

로마가 버젓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 예수님이 내가 왕이다! 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들어선 것이잖아요.

이스라엘로서는 열광할 일이지만 로마로서는 비상사태에요.

로마는 세상 권세를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 영적으로 보면 단순한 사건이 아니고 온 인류의 역사가 바뀌는 사건이에요.

 

지금부터 무지 무지하게 어렵고 중요한 공부에요.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먼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부터 살펴봅시다.

 

성전이 있는 성지가 이방인에게 유린당하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이건 마치 우리 마음에 마귀가 자리 잡고 있는 것과 같아요.

원래 우리 마음속엔 하나님이 좌정하여야 하는데 마귀가 좌정하고 있잖아요.

이걸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예수님 오셨어요.

 

하나님은 모세와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불순종하면 쫓겨난다고 했어요.

계약 내용이 그래요.

쉽게 말해서 집을 세를 줄 때 술 먹고 주정하면 방을 빼겠다고 계약한 것과 같아요.

 

레위기 26장을 봅시다.

 

레 26:27-33= “너희가 이같이 될찌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찐대 28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 배나 더 징책하리니 29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30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31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32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33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하나님이 언약하시기를 가나안에서 말을 안 들으면 칠 배나 더 징치(懲治) 한다고 했어요.

여기서 “7 배를 더 징치(懲治)” 한다는 말을 기억하세요.

이게 나중에 70년 포로 생활과 70 이레와 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7 배를 더 징치(懲治) 한다는 말은 아주 사정없이 혹독하게 다룬다는 말이에요.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야! 우린 살 자격이 없는 놈이라는 것을 알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집안을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읍이고 성소를 초토화 시켜서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량한 곳으로 만들겠다고 했어요.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약 340년의 사사시대를 거치고 사울 왕을 태조로 하여 왕조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까지 약 460년간을 거쳐서 약 800년 동안 가나안 땅에서 호화롭게 잘 살았어요.

성전도 화려하게 짓고!

궁궐도 화려하게 짓고!

 

다윗이나 솔로몬 시대에는 세계 속에 열강으로 살았어요.

그러다가 국력이 점점 쇠퇴하여 망하게 됩니다.

급기야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사는 지경에까지 이른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가나안에서 쫓아내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한 것은 땅을 안식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마치 술주정뱅이가 시끄럽게 하던 방을 빼고 비워두고 쉬게 한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은 포로로 70년 동안 형벌을 받는데 땅은 70년 동안 안식을 하는 겁니다.

 

레 26:43=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레 26:34-35=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35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보세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안식케 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땅이 인간 같지 않는 놈들을 받아서 산다고 고생 했다고 쉬게 해 주겠대요.

참 이상하지요.

 

레위기 25장에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품꾼이라고 했어요.

가나안 땅을 잘 지키라고 품꾼으로 들여보낸 겁니다.

그런데 개판을 쳐 놓은 겁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쫓아낸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겐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땅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땅을 지키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땅에 합당치 않는 놈들은 다 좇아 내겠다고 하는 거예요.

한마디로 자기 힘을 믿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놈은 그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놈은 그 땅에서 살 자격이 없대요.

 

왜? 그런가 하면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라서 그래요.

천국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살지 은혜를 모르는 놈들은 살수가 없어요.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하는 자들은 못 들어가요.

 

그러니 가나안에서 살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씨를 뿌리면 반드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추수하게 하신다는 믿음 말이에요.

그렇지 않고 조급해서 애굽에서 처럼 자기가 물을 길어다가 농사를 짓는 자는 다 쫓아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 가나안 땅에서 좇아내 버렸어요.

언약대로 좇아낸 겁니다.

그게 바로 바벨론에 70년 동안 포로가 되어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70년 동안 형벌을 받는 기간에 가나안 땅은 안식을 하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깨달은 겁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 예레미야의 서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어요.

 

다니엘 9장을 봅시다.

 

단 9:1-2=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은 바벨론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 갔어요.

그러다가 바벨론이 메대 바사에게 망합니다.

이 때가 주전 538년경이에요.

 

다니엘이 예레미야 서책을 읽다가 이스라엘이 망하고 포로가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런데 이런 포로 생활이 70년이면 끝이 난다는 것을 안 거에요.

아무리 봐도 포로에서 풀려날 기미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 예레미야의 예언은 포로 생활 70년 후면 해방 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다니엘이 금식하면서 온 민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회개를 합니다.

그런데 갑자가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70 이레의 비밀을 말해주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이 차면 이스라엘이 해방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70 이레가 되면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이상과 예언이 응하는 시기” 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예언이 응한다는 것은 창세전 언약이 완성이 된다는 말이에요.

인류 역사의 종말이 온다는 말이에요.

이건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70 이레 속에 담아 놓은 겁니다.

왜냐하면! 70 이레가 되면 모든 이상과 예언이 응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무시 무시하지요.

 

그럼 70 이레의 내용을 봅시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

 

다니엘 9장입니다.

 

단 9:24-27=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70 이레란? 70 주간이란 말입니다.

이레란 말은 7일 곧 한 주간을 말해요.

한 주간이 7일이니 70주간이면 7x70= 490일이 되겠지요.

그런데 예언서의 날짜 계산은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요.

그럼 490년이 되겠지요.

 

아까 레위기서에서 7배나 더 징치(懲治) 한다고 했지요.

70년을 7배 하면 490년이 되지요.

그러니 70 이레는 7배를 징치(懲治) 당하는 기간과 같은 의미인 겁니다.

뭔가 감이 집히는가요.

 

왜? 70년 포로 생활을 하면 포로에서 해방이 되고!

왜? 70 이레가 되면 모든 이상과 예언이 응하여 영원한 의가 이루어진다고 했는지 알겠지요.

70년 포로생활은 곧 70 이레의 축소판인 겁니다.

이건 나중에 다시 설명 할게요.

 

암튼 다니엘이 받은 계시대로라면 앞으로 490년 후면 세상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어 있어요.

금신상의 비유에서 보면 하늘에서 뜨인 돌이 나타나서 세상을 멸망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고 했어요.

이건 엄청난 사건이에요.

70년 후에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것은 사건도 아니에요.

그러니 70 이레가 얼마나 의미가 깊겠어요.

 

그럼 다니엘이 받은 계시를 그대로 풀어 봅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가 되면 여섯 가지 시간이 일어나요.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다고 합니다.

 

70 이레가 되면 한마디로 자기 백성들의 죄가 모두 해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죄로 인하여 고통 받던 시절은 다 지나고 의로운 자가 되어서 하나님과 천국에서 영생하면서 살게 된다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죄사함 받고 구원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어서 통치하는 세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흥분되고 감격스러운 말입니까!

너무 흥분이 되어서 안 되겠습니다.

마음이 진정시키고 해야겠네요.

 

잠시 쉬면서 커피 한잔 하고 2부에서 합시다.

 

 

 

2부

 

그럼 이제부터 70 이레를 살펴봅시다.

 

70 이레는 역사적이면서도 그 속에 묵시적인 것이 담겨져 있다고 하였으니 역사적인 것과 묵시적인 것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70 이레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는지 살펴본 후에 묵시적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70 이레가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시작이 되는지 알아야 겠지요.

역사 속에서 실제 있었던 그 기점을 알아야 끝을 알 수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럼 70 이레의 기점이 언제부터인지 살펴봅시다.

 

단 9: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에게 알려줍니다.

70 이레의 시작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 시작이 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말은 성(城)을 중건 하라는 말이에요.

예루살렘 성(城)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2차 침공 때 완전히 불타서 폐허가 되었어요.

그걸 복구하라는 말입니다.

 

가브리엘이 말하기를 예루살렘 성(城)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일어날 때 까지 7 이레와 62 이레가 지난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7 이레와 62 이레 즉 69 이레를 먼저 말하고 있어요

1 이레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난 후에 시작이 되니 빼고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70 이레를 세 구분으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지요.

 

먼저 “7 이레” 가 있고,

그 다음에 “62 이레” 가 있고,

마지막 “1 이레” 가 있잖아요.

 

3 구분으로 말하고 있지요.

쉽게 말하면 “3 시대”로 구분하고 있는 겁니다.

각 시대마다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세 구분으로 나눈 겁니다.

 

다니엘이 받은 70 이레의 계시의 초점은 거룩한 자에게 맞추어져 있어요.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 것에 있어요.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말해요.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말은 공개적으로 왕으로 등극한단 말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거룩한 자가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왕으로 등극하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왕으로 입성하는 것이 되겠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백성들이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하잖아요.

이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오늘 본문이 7 이레와 62 이레가 지난 69 이레의 정점(頂點)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것은 가브리엘이 70 이레에서 말하는 거룩한 성을 위한 것임이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 9장 24절에서 70 이레는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 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잖아요.

다니엘 9장을 봅시다.

 

단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거룩한 성이란? 예루살렘을 말해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예루살렘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에요.

물론 영적인 말입니다.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로마의 총독에게 지배당하고 있어요.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짓밟히고 있다는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루살렘 거민들을 마귀로부터 빼내시려고 들어간 겁니다.

어떻게 빼내는가 하면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해방시키는 겁니다.

자기 피로 구속하는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城)에 입성 할 때 백성들이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다니엘이 말하는 70 이레 중에서 69 이레 때 나타날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맞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누구 백성과 누구의 거룩한 성(城)이라고 합니까?

 

“네” 백성이라고 하고!

“네” 거룩한 성(城)이라고 하지요.

“내” 가 아니고 “네” 에요.

 

여기서 “네” 란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있는 다니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문자대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70 이레 후에 다니엘을 기름 부어서 왕으로 삼고 그의 나라를 세워 주겠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다니엘이 앞으로 490년을 더 살아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다니엘은 포로생활 70년이 다 차고 난 후 이스라엘이 해방이 되어서 모두가 고향으로 귀환을 하는 데에도 돌아오지 않고 바벨론에서 살다가 죽었어요.

이상하지요.

 

그럼 다니엘은 누구를 상징하고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맞아요.

다니엘은 예수님을 대신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니엘을 일컬어 “인자” 라고 하는 겁니다.

 

인자(人子)란? 문자대로라면 사람의 아들이에요.

다른 말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을 말해요.

인자란? 묵시에 속한 분이에요.

결국 다니엘을 “인자” 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묵시적 존재를 대신하여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묵시적 존재란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를 말해요.

 

그럼 다니엘이 온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회개하고 기도하였다는 것도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다는 말이 되겠지요.

맞아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하고 계세요.

다니엘이 온 민족을 대표 하듯이 예수님이 온 백성을 대표하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城)을 위하여 70 이레의 기한을 정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백성과 예수님의 거룩한 성(城)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69 이레 후면 예수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오실 때 천국을 몰고 오셨어요.

이 땅에 하늘나라가 세워졌어요.

물론 영적인 말이에요.

 

그래서 69 이레가 되면 영적인 일들이 완성이 된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으면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어요.

허물이 마치고,

죄가 끝나고,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고,

이상과 예언이 모두 응하게 되어요.

 

이건 모두가 영적인 일에요.

육으론 몰라요.

69 이레가 되면 영적인 일들이 완성이 되어요.

그리곤 1 이레가 영적으로 시작이 되어요.

영적이란 말은 묵시적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70 이레 중 69 이레는 역사 적으로 나타나지만 69 이레 후에 나타날 마지막 1 이레는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지면서 그와 함께 묵시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70 이레가 기름부음 받은 자를 겨냥하고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이레 언약은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끊어지고 난 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1 이레는 묵시적으로 시작이 되는 겁니다.

잘 이해하세요.

이건 조금 후에 더 상세히 설명할게요.

 

이러한 것들이 어디서 일어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고 하신 것은 다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려주심으로서 자기 백성들의 죄가 끝났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려주심으로서 자기 백성들의 죄악이 영원히 속죄가 되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려주심으로서 자기 백성들에게 영원한 의가 주어졌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려주심으로서 창세전 언약인 이상과 예언이 완성이 되었어요.

 

이는 곧 창세전에 약속한 대로 자기 피로 자기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신 겁니다.

자기 백성을 자기 피로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내서 영원히 의로운 자가 되어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가슴이 쿵쾅거리지 않나요!

전 엄청 흥분되고 설레는데!

 

그러니 70 이레는 어디서 완성이 되는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완성이 된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세상 임금을 쫓겨나고 예수님이 왕이 되셨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를 다스리던 세상 임금이 쫓겨나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것과 같아요.

이렇게 되면 우리 심령이 곧 예루살렘인 셈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영접하면 그 사람은 자기 역사가 사라져요.

역사적 존재에서 묵시적 존재로 바뀌어요.

그 때부터 예수님 역사로 편입이 되어요.

 

마치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완전히 달라졌지요.

사울은 다메섹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어요.

사울에서 바울로!

율법에서 은혜로!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바뀌었어요.

옛 사람은 역사에 속하였지만 새 사람은 묵시에 속하였어요.

 

모든 성도는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이런 변화의 사건이 일어나요.

자기 족보는 날아가고 예수님 족보(族譜)로 편입이 되는 겁니다.

이걸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부인이 안 되어도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세요.

넌 이제 아담의 족보에 있지 않고 예수의 족보에 있다고 해요.

이걸 다른 구조(構造)로 바뀌었다는 말이고 또는 다른 영역(領域)으로 이동하였다고 해요.

한마디로 조상(祖上)이 바뀐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죽으면 전부 열조(烈祖)로 돌아간다고 하지요.

열조로 돌아간다는 말은 조상이 있는 곳으로 간단 말이에요.

그럼 우리 조상이 예수님이 되었으니 성도는 죽으면 전부 예수님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천국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이 나요.

 

이게 깨달아지고 믿어지면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바울은 이게 믿어졌기 때문에 눈만 뜨면 하나님에게 언제 데려 갈 겁니까 라고 물었던 겁니다.

저도 이게 믿어지니 주여 언제 오시렵니까!

늦게 오시려면 저를 빨리 데려가면 안 됩니까! 라고 물어요.

뭔가 감(感)이 잡히세요.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를 믿게 되면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 로 살게 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는 나를 위한 내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나로 살게 되어요.

역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묵시적 영향 아래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묵시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은 역사의 영역이 아니고 묵시의 영역이에요.

죽음에서 벗어난 영생의 세계에요.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영적인 존재라고 하고 영생하는 자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죽음이잖아요.

세상 쪽에서 보면 십자가에 달리면 죽은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십자가 저쪽에서 보면 영생이에요.

그러니 십자가 안은 영생의 세계에요.

 

우리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어요.

그러니 세상에서 보면 성도는 죽은 자이니 세상 역사가 없는 겁니다.

세상적으로는 성도는 죽은 자에요.

 

성도의 소속은 하늘이에요.

하늘에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요.

하늘에 시민이기 때문에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이미 여러분은 천국에 가 있어요.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육신으로 있으면서 몸 밖으로 나가서 보았잖아요.

삼층 천에 가니 자신이 거기 있잖아요.

물론 세상에는 바울이 육신으로 정한 때까지 살고 있지만 실체는 이미 천국에서 예수님 품에서 안식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죽음을 겁내지 않고 세상을 세피하게 여기고 산 겁니다.

 

이게 깨달아져야 세상을 담대하게 이길 수가 있어요.

야~ 인생 별거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인생살이가 가벼워져요.

쉽게 설명 한다고 했는데! 이해되시지요.

 

이제부터 어려워요.

다니엘의 70 이레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정점(頂點)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지요.

그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것을 기준으로 역순(逆順)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62 이레와 7 이레를 계산해 보아야겠지요.

 

아까 70 이레를 세 구분으로 나누었다고 했지요.

다시 봅시다.

 

단 9:24-27=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먼저 성(城)이 중건이 되고 도시 기능이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는 7 이레와,

그 후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나타나는 때의 62 이레와,

기름부음 받은 왕이 죽고 난 후 언약이 맺어질 1 이레로 구분하였지요.

 

7 이레는 예루살렘 성(城)이 중건되는 기간이고!

그 후 62 이레가 되면 메시야가 와서 기름부음을 받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7 이레 + 62 이레 이니까 69 이레가 흐른 후에요.

그리곤 1 이레를 남겨 두고 기름부음 받은 왕이 끊어져요.

 

끊어진다는 것은 타살 당한다는 말이에요.

기름부음 받은 왕이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것을 말해요.

그리고 나서 1 이레 언약이 맺어져서 70 이레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69 이레가 되면 죄가 사해지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고!

이상과 예언이 응한다고 하였잖아요.

이는 창세전 언약이 완성 된다는 말이라 했지요.

그러므로 69 이레의 끝은 곧 역사의 종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70 이레가 시작 되는 기점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이 진짜로 70 이레를 성취하셨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만약 예루살렘 성(城)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난 후 69 이레 즉 69x7년=483년 후에 기름부음을 받아야 다니엘이 예언한 그 기름부음 받은 왕이 맞는 것입니다.

 

만약이 안 맞으면 예수님은 성경이 말하는 메시야가 아니에요.

그럼 우리는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해요.

우리 믿음이 헛 것이 되고 말아요.

예수에게 사기당하고 만 겁니다.

 

그럼 맞을까요?

안 맞을까요?

당연히 맞아야 하겠지요.

그래야 우리 구원도 확실한 것이 되니까요.

 

그럼 먼저 70 이레의 시작인 7 이레부터 살펴봅시다.

 

7 이레는 예루살렘 성(城)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라고 했지요.

반복하더라도 이해하세요.

다니엘 9장을 봅시다.

 

단 9: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城)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城)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70 이레의 시작이 7 이레가 시작되는 예루살렘 성(城)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입니다.

그리고 7 이레(49년) 동안 성(城)이 중건이 되고 거리와 해자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城)이 중건 되고 거리와 해자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폐허가 된 도시가 보수되고 재건이 되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영(令)이 언제이냐를 가지고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는 시기를 따져 보아야 하거든요.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말은 왕(王)으로 추대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王)으로 환호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다니엘이 받은 70 이레 중 7 이레 + 62 이레를 합하여 69 이레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1 이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후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간 이스라엘의 멸망 사건을 살펴보고 갑시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3 차례 침공을 합니다.

1차 침공이 BC 605년에 일어났어요.

이 때 이미 이스라엘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성전에 물건들을 빼앗겼거든요.

성전에 이방인이 들이닥쳤다는 것은 끝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2차 침공은 BC 597년에 일어났는데 이 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갔어요.

성전에 있던 모든 보물들과 왕궁의 보물들을 약탈해 갔어요.

그리고 BC 586년에 예루살렘을 3차 침공을 하면서 예루살렘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어요.

그때 성전도 불타고 예루살렘 성도 완전히 불타버렸어요.

 

이 때 천민들만 남겨두고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대부분을 바벨론으로 이주시켰어요.

왜냐하면! 똑똑한 놈들을 남겨두면 독립운동을 할까봐서에요.

그래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유대인 분산 정책을 편 겁니다.

 

바벨론은 타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식민 민족들에겐 그들의 종교 말살 정책을 썼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금지시켰어요.

느브갓네살이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게 하던 시절들이었어요.

이건 마치 일본 놈들이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국민들을 창시 개명을 하고 신사참배를 하게 한 것과 같아요.

 

그러다가 바벨론이 BC 538년에 고레스에게 망합니다.

고레스는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나라 이름을 메대 바사라고 지었어요.

그런데 고레스는 느브갓네살과 반대 정책을 폈어요.

각 민족의 종교를 인정하였어요.

 

바사 왕 고레스는 정복당한 백성들을 위한 유화정책을 펴서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어요.

BC 537년에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가게 해서 성전을 짓게 합니다.

이 때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하여 약 5만 명이 귀환하여서 BC 516년경에 성전이 재건케 되어요..

이 때 지어진 성전이 바로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하지만 이 때는 아직 예루살렘 도시가 정비되지 않았어요.

성전만 지어졌지 예배는 드려지지 않았어요.

성전 예배는 성전을 짓고 난 후 58년이 지난 BC 457년에 2차 포로 귀환이 되어서 예루살렘 성을 7 이레 동안 재건하고 난 후부터 제대로 드려지게 됩니다.

 

이 때가 바로 70 이레가 시작 되는 기점이에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70 이레의 기점을 설명하고자 함입니다.

70 이레의 기점은 예루살렘 성(城)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이잖아요.

그럼 이 예루살렘 성(城)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언제 나는가 하면 BC 457년에 나요.

이 때 왕이 누구였는가 하면 아닥사스다에요.

아닥사스다 왕이 BC 457년에 예루살렘 성(城)을 중건하라는 영을 내렸어요.

 

성전은 고레스가 지으라고 했고!

성(城)은 아닥사스다가 중건하라고 했어요.

70 이레의 기점은 성전을 지으라는 때가 아니고 성(城)을 중건하라는 칙령이 날 때에요.

그러니 70 이레의 출발점은 BC 457년에 아닥사스다 왕 7년에 발표된 2차 포로 귀환 때가 되는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70 이레의 기점에 대한 학설이 분분하기 때문에 말하는 겁니다.

칼빈은 고레스 칙령을 70 이레의 기점으로 삼았어요.

그래서 70 이레를 영적으로만 보았어요.

많은 목사들이 칼빈의 주장을 따라서 70 이레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만큼 기점을 아는 것이 70 이레의 해석이 좌우되기 때문에 말하는 겁니다.

 

그럼 기점이 되는 예루살렘 중건 영(令)을 봅시다.

에스라 7장입니다.

 

에스라 7:7-13= “아닥사스다 왕 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년 오월이라 9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11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의 학사인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12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13 조서하노니 우리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저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찌어다

 

아닥사스다 왕 재위 7년 때에 학사 에스라가 조서를 받게 됩니다.

에스라가 아닥사스다에게 신임을 받은 모양이에요.

어느 날 에스라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있으니 왕이 물은 겁니다.

야~ 에스라야!

너 왜? 얼굴에 그렇게 수심이 가득한데!

 

그러자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졌지만 도시가 정비되지 않고 성전에서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속이 상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만 지었지 예배를 집전할 제사장들이 없고 성전에서 수종들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온전하게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에스라가 이 말을 하자 아닥사스다 왕이 온 나라에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예루살렘 도시를 축성(築城)할 재료들과 기술자들과 성전에 예배할 제사장들과 수종들 레위인들을 보내라고 합니다.

 

그 후 13년 후인 BC 444년에 3차로 느헤미야를 위시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보냅니다.

1진(陣)으로 간 에스라와 2진(陣)으로 간 느헤미야가 합심하여서 7 이레 즉 49년 동안 예루살렘 성을 재건을 합니다.

이 때 엄청난 부흥운동이 일어났어요.

이 때의 내용을 증거하는 성경이 바로 ‘느헤미야’와 ‘에스라’에요.

 

그러니 에스라에게 2차 포로 귀환을 허락 한 때가 BC 457년인 겁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영(令)이 난 후 에스라의 주도하에 7 이레가 지난 즉 49년 후인 408년에 예루살렘 성(城)이 완전히 중건이 됩니다.

이 때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7 이레 동안 부흥운동을 일으켜서 무너졌던 성전 예배를 부활시키고 율법신앙을 회복합니다.

이렇게 되어 70 이레 중 첫 구분에 속한 7 이레는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어요.

 

그럼 이젠 70 이레 중 두 번째 구분인 62 이레를 살펴봅시다.

 

예루살렘 성이 중건이 되고 난 후 62 이레가 흐른다고 했지요.

62 이레가 흐르고 나면 가름부음 받은 왕이 나타난다고 했잖아요.

그럼 예루살렘 성(城)이 중건이 된 BC 408년부터 62 이레 즉 434년이 흐르겠지요.

이 시기에 제국들이 메대 바사에서 헬라로 헬라에서 로마로 바뀌어요.

 

로마가 세워지면서 BC에서 AD로 기원(紀元)이 바뀌어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公認)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하여 기원(紀元)을 바꿔버린 겁니다.

기원(紀元)이 바뀌었다는 말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이에요.

이건 마치 예수 믿기 전에는 땅 사람이었는데 예수 믿고 난 후 하늘 사람이 된 것과 같아요.

 

바뀐 기원을 서력기원(西曆紀元)이라고 해요.

과거엔 태음력(太陰曆)을 사용하였는데 기원이 바뀌면서 태양력(太陽曆)을 쓰게 되었어요.

우리가 흔히 음력(陰曆)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식 연호고 양력(陽曆)은 신약식 연호에요.

 

음력은 달의 주기를 쓰고, 양력은 태양의 주기를 써요.

성경에선 해는 하늘을 상징하고, 달은 땅을 상징해요.

영적인 의미에서 달은 육을 상징하고, 태양은 영을 상징해요.

달은 땅(육)에 역사를 말하고, 태양은 하늘(영)에 역사를 말해요.

그래서 달은 세상이라고 하고, 태양은 묵시라고 해요.

 

BC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고!

AD는 예수님이 오신 후이에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구약이라고 하고!

예수님이 오신 후를 신약이라고 해요.

이는 예수님을 기준으로 세상이 둘로 나누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시대를 완전히 뒤 바뀌게 만들었어요.

이게 엄청난 사건이에요.

이 때부터 구약은 땅의 역사(歷史)라고 하고, 신약은 하늘에 묵시(?示)라고 해요.

예수님이 오심으로 역사는 끝나고 묵시로 접어든 겁니다.

묵시(?示)란? 감추어진 세계란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 하나 말할까요.

구약은 시간을 삭제하면서 가요.

예를 들어서 1000에서 500으로 ~ 500에서 100으로 ~ 100에서 0으로 까먹어요.

그러나 신약은 시간을 첨가하면서 가요.

1에서 100으로~ 100에서 1000으로~ 1000에서 5000으로 갈수록 불어나요.

 

구약은 빼는 역사고 신약은 더하는 역사에요.

삭제 당한다는 것은 죽음 곧 소멸을 말하고

더한다는 것은 영생으로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이건 진리가 아니고 의미로 말하는 것이 참고하세요.

전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그러니 구약 신앙은 끝이 죽음이에요.

망하는 역사에요.

그래서 구약에선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었더라! 죽었더라! 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 신앙은 영생이에요.

다 주 안에서 살았더라고 해요.

 

구약을 옛 언약이라고 하잖아요.

옛 언약은 율법신앙이에요.

이렇게 되면 율법 신앙은 반드시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신약은 새 언약이잖아요.

새 언약은 반드시 영생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나요.

옛 언약인 율법신앙은 갈수록 심령이 황폐해져요.

하지만 새 언약인 은혜신앙은 갈수록 심령이 살아나고 황홀해져요.

 

율법 신앙은 자기 행함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쇠함에 따라서 점점 더 의욕이 상실 되어가고 신앙이 짐스러워져요.

젊어서 근력이 있을 땐 열심과 충성도 내고 하였지만 기운이 빠져 보세요.

그럼 자기 몸뚱이 하나 챙기기 바빠요.

그러니 자기 몸으로 행하여야 하는 율법 신앙은 점점 골골해져서 마지막엔 소망이 없고 죽음에 가두어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은혜 신앙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거저 주어지는 용서로 살기 때문에 살아갈수록 기쁘고 행복해져요.

자기 근력이 떨어질수록 예수님 품에 안 길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이게 예수 안과 예수 밖의 차이에요.

다른 말로 역사에 속한 사람과 묵시에 속한 사람의 차이란 말입니다.

묵시와 역사에 대하여서는 잠시 뒤 70 이레의 끝을 살펴 볼 때 더 살펴볼 것입니다.

 

다시 62 이레를 추적해 봅시다.

 

7 이레가 BC 408년에 끝이 났다고 했지요.

그럼 BC 408년부터는 62 이레가 시작 되겠지요.

62 이레란 62 주간이라고 했지요.

그럼 62x7=434년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7 이레의 끝인 408년에서 62 이레가 지나면 434년이 되잖아요.

그럼 408년에서 434년을 빼면 마이너스 -26이 되잖아요.

62 이레 기간 중에 기원이 바뀌었다고 했지요.

그래서 62 이레의 끝은 AD 26년이 되는 겁니다.

 

마이너스 -26은 기원후 년도에요.

그래서 62 이레의 끝인 434년은 AD 26년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오신지 26년이란 말입니다.

이 년도가 왜? 중요한가 하면 이 때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는 사건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AD 26년은 예수님이 공생애가 시작 하는 때에요.

이 때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아 오실 때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면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하실 때에요.

 

성경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 할 때를 예수님이 30세 때라고 했어요.

그럼 세상의 서력기원(西曆紀元)으로 보면 예수님이 주후 26년에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30세 때 요단강에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럼 4년이 틀리지요.

이는 서력기원(西曆紀元)을 예수님 탄생 기점으로 맞추지 않고 로마시 창건 기념일에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紀元前)과 기원후(紀元後)를 나누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前)과 오시고 난 후(後)로 나누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4년의 오차를 두고 나누어졌어요.

원칙적으로 하면 예수님이 탄생 했을 때를 기준으로 서력기원(西曆紀元)을 잡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4년 후를 서력기원의 시작으로 삼은 것은 로마시 창립 기념일을 기준으로 잡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어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 된 후 526년에 로마 황제 유스틴이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을 바꾸라고 했어요.

그런데 디오니스우스 엑시구우스가 로마시 창건일을 기원이 바뀐 기점으로 삼아 버린 겁니다.

 

로마시 창건일이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난 다음 4년 후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 탄생을 기준하지 않고 4년이 지난 로마시 창립 기념일을 기준으로 서력기원을 시작점으로 잡아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기원은 예수님의 탄생시기보다 4년이 늦어요.

 

지금이 주후 2010년이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하면 2014년이에요.

4년이 늦게 되었으니까요.

이렇게 계산을 하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때가 정확히 30세 때가 맞고 70 이레 중 69 이레가 되는 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니엘이 계시를 받을 때 예루살렘 성(城)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를 기점으로 7 이레와 62 이레가 지나서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다고 하였잖아요.

그 예언이 지금 예수님이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서 이루어진 겁니다.

놀랍지요.

 

그럼 의문이 생기겠지요.

아니 아까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入城)을 정점으로 한다고 하였잖아요.,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30세 때이고 예루살렘 입성하는 때는 33세 때이니 3년의 차이가 생기잖아요.

어느 것을 가름부음 받은 것으로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지요.

 

다니엘이 예언한 것은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는 것을 말해요.

예수님은 왕으로 두 번 인정받아요.

한 번은 하나님께로 받고 또 한 번은 사람으로부터 받아요.

왕으로 인정받는 것을 기름부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왕이란 것을 인정을 받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69 이레의 기점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 맞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럼 예루살렘 입성 때엔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의문을 품을수 있겠지요.

 

이는 역사(歷史)와 묵시(?示)의 차이 때문이에요.

묵시세계는 흐름이 없어요.

시간이 정지 되어 있어요.

항상 오늘이에요.

 

예수님은 30세 때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서 공생애가 시작이 되었잖아요.

성령의 가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묵시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묵시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은 것은 죽음을 상징해요.

왜냐하면! 세례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음으로서 이미 역사 속에 예수는 죽은 것이 되는 겁니다.

 

그리곤 물에서 올라오니 하늘로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였어요.

이는 성령으로 살아났다는 말이에요.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 났다는 말이에요.

이제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새로운 사람인 묵시적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성령으로 가름부음을 받은 후로는 역사 속에 있던 목수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매시야로서의 예수님이에요.

이스라엘의 왕이란 말입니다.

이젠 예수님은 묵시에 속한 분이 된 겁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난 이후의 예수님이 살았던 역사적인 세월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3년을 살아도 하루이고 십년을 살아도 하루에요.

왜냐하면! 묵시의 세계는 영생의 세계라서 시간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저와 여러분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잖아요.

이는 묵시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생 안에 들어와 있어요.

나중에 죽어서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으로 이미 거듭났어요.

오늘 죽어도 천당에 가고 20년 후에 죽어도 천당에 가요.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의미 없다는 말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역사에 속한 몸뚱이는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굴리란 말이 아니에요.

 

바울이 삼층 천에 올라가서 자기를 보았지요.

이미 자신은 천국에 가 있어요.

그러니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 안이기 때문에 묵시적인 존재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서 묵시적인 존재가 되었어요.

묵시적 존재에겐 시간이 진행되지 않고 항상 오늘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은 구분할 필요가 없어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역사적으로 죽었어요.

세례란 죽음을 말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 속에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3년 후에 일어나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요단강에서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마치 죄수가 사형 언도를 받으면 이미 죽은 목숨인 것과 같아요.

집행만 남아 있을 뿐이에요.

이와 같아요.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이미 사형 언도를 받았고!

동시에 물에서 올라오실 때 기름부음을 받아 이미 왕이 된 것입니다.

 

이걸 성도에게 적용하면 우리도 예수를 믿음으로서 이미 영생을 받았어요.

성도는 이미 영생하는 자에요.

그러나 현실은 죽어야 할 육신이라는 몸뚱이를 가지고 정한 때까지 살고 있어요.

하지만 이미 영생을 품고 있기 때문에 죽어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우린 이미 영생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세요.

 

중요한 것은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 때부터 묵시적인 존재가 되어요.

묵시적 존재란 역사 밖에 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잖아요.

이는 묵시적인 존재란 말입니다.

 

묵시적 존재가 되면 역사에 의미는 사라져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물리적인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이미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70년을 살다가 죽든지 지금 죽든지 상관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순간 예수님은 역사에 속한 생애는 끝이 나고 역사와 상관없는 묵시적 생애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3년 공생애는 시간적인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공생애 3년 후에 예루살렘 성(城)을 입성하는 것은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가름부음을 받는 시간과 한 묶음 속에 있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나요.

제발 이해가 되어야 할 텐데!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야 됨을 인정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루살렘 입성은 백성들로부터 메시야 됨을 인정받는 것이라고 보면 되어요.

동일한 의미로 보아도 되어요.

 

그럼 이제 70 이레 중에 마지막 구분인 1 이레를 살펴봅시다.

 

마지막 1 이레 입니다.

7 이레는 예루살렘 성(城)이 중건되는 것으로 성취가 되었고!

62 이레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으로 성취가 되었잖아요.

 

이렇게 되면 69 이레가 성취가 된 것이지요.

이제 70 이레 중 마지막 1 이레가 남았지요.

그럼 마지막 1 이레는 언제 시작이 됩니까?

 

다시 다니엘서 9장을 봅시다.

 

단 9:26-27=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62 이레가 지나면 기름부음 받은 자가 일어났다가 갑자기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진다고 했지요.

그리곤 한 왕이 와서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고 제사와 예물을 금하고 많은 사람으로 1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한다고 하였지요.

 

기름부음 받은 자란 예수님이라고 했지요.

그럼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말이 되겠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나자 성읍과 성소가 훼파되고 끝까지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지요.

그리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1 이레의 언약을 굳게 정한다고 합니다.

1 이레의 언약이 세워지면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고 합니다.

제사와 예물은 율법으로 드려지는 겁니다.

옛 언약에 속한 것이에요.

 

알다시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키 위함이에요.

율법을 완성키 위함이잖아요.

그럼 1 이레 기간부터는 율법 신앙이 폐하여 지겠지요.

제사와 예물이 금지 되겠지요.

만약 1 이레 기간에 율법적인 제사와 예물을 드리는 자는 진노를 면치 못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새 언약을 세우지요.

새 언약은 율법을 폐한 언약이잖아요.

그럼 새 언약 안엔 율법에 속한 성전도 없고 제사도 없고 예물도 없어지겠지요.

그래서 율법 예배가 드려지던 성전이 파괴된 겁니다.

 

그러므로 1 이레에 맺은 언약이란? 새 언약을 말하는 겁니다.

 

새 언약은 묵시에 속한 언약이에요.

흔히 영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1 이레 언약은 역사에 속한 언약이 아니고 묵시에 속한 언약인 겁니다.

역사에 속한 옛 언약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끝이 났어요.

 

더 이상 구약 식으로 예배드리면 안 되어요.

큰일 나요.

구약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에겐 진노가 쏟아져요.

예수님이 그런 놈들은 쓸어버리겠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 이레 언약을 맺는 왕은 포학한 왕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심판하는 예수님이니까요.

자기 행함으로 나아오고자 하는 자들은 마치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서 쓸어버리는 심정으로 쓸어버릴 겁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하게 자라가야 한다고 하는 성화주의자들이나 개혁하자고 외치는 자들을 죽여 버린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영적으로 죽었어요.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머리 위에 머물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불안하고 두려운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5 가지가 성취가 되었어요.

5 가지가 뭐라고 했나요?

 

첫째로, 허물이 마치며

둘째로, 죄가 끝나며

셋째로, 죄악이 영속되며

넷째로,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다섯째로, 이상과 예언이 응한다고 했잖아요.

 

위 5 가지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완성 하셨어요.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영원한 의(義)를 받았어요.

예수님 피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나아간다구요.

이게 믿어져야 1 이레의 언약을 받은 자에요.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지요.

새로운 피조물은 율법으로 제사와 예물을 드릴 필요가 없어요.

 

이런 것 안한다고 해서 정죄 당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로서 모든 것을 사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허물이 마치고!

죄악이 영속되고!

영원한 의(義)를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영원한 의(義)는 인간의 종교적 열심과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의 피로 주어져요.

그러므로 예수의 피로 구속을 받은 성도는 자기 행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를 않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로 용서 받은 것을 들고 나아가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은 새 언약적 제사로 나아가지 옛 언약적 제사로 나아가지 않아요.

새 언약적 제사란?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1 이레의 언약을 받은 묵시적인 존재가 되겠지요.

예수님이 묵시에 속하였으니까요.

묵시에 속한 성도는 죄가 있나요? 없나요?

없지요.

왜냐하면! 허물이 마치고, 죄가 끝나고, 죄악이 영원히 속죄가 되었고, 영원한 의를 받았잖아요.

 

창세전 언약으로 말하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었어요.

창세전 언약대로 예수님 피로 의롭게 되었잖아요.

그럼 창세선 언약인 이상과 예언이 응한 것이지요.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지구의 종말이 언제가 되든지 간에 세상 역사는 이미 69 이레로 끝이 났어요.

지금은 1 이레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지 2010년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1 이레에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 1 이레는 역사가 아니고 묵시인 겁니다.

묵시적으로 2010년이라는 세월은 1 이레에요.

 

주께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지요.

이게 다 묵시적 의미에요.

예수님 안에서 천년도 하루 같고, 하루도 천년 같은 겁니다.

 

여기서 천년이란? 묵시적 기간을 말하니 창세전이란 말과도 같아요.

이렇게 되면 나 라는 존재는 비록 역사 속에서 201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살고 있지만 묵시적으로는 이미 창세전에 있었던 것이 되어요.

 

이처럼 1 이레 속에는 인류 역사가 다 담겨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1 이레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지고 부활한 후에 맺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십자가에서 끊어지면서 마귀의 머리를 깨트렸어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렸단 말입니다.

 

아담 이래로 죽음이 지배하던 죄인의 역사는 십자가 안에선 없는 역사에요.

그러므로 1 이레의 언약인 새 언약은 역사적인 언약이 아니고 묵시적인 언약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70 이레로 정한 세상의 역사는 69 이레로 마감이 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어떻게 하든지 쉽게 쉽게 설명을 한다고 하지만 어렵네요.

 

자! 그럼 하나님은 왜? 70 이레를 역사의 정점으로 말씀하셨을까요?

또 왜? 70 이레를 3 구분으로 분리하여서 말씀하실까요?

이는 70 이레가 담고 있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먼저 왜? 70 이레로 역사 전체를 말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봅시다.

 

먼저 성경이 말하는 7이라는 숫자에 의미부터 알아봅시다.

하나님은 천지 창조를 7일 만에 했지요.

하나님의 시간은 7일 이후엔 없어요.

 

그래서 7일이란 창조의 완성을 말해요.

7일을 주기(週期)로 역사가 순환(順換)되는 것은 아무리 많은 세월과 시간도 결국은 7일 속에 포함 된 것이란 말이에요.

 

이는 이 세상을 이 세상을 창조한 틀인 7일 속에 담아 놓았기 때문이에요.

주기(週期)가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7일 주기(週期)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선 7일이란 말이에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는 식으로 전개가 되지요.

그런데 7일 째는 진행이 되지 않고 스톱이 되어요.

 

왜? 진행이 안 됩니까?

다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더 만들 것이 없기 때문에 다 만들고 쉬는 안식(安息)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을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누구의 안식일인가 하면 여호와의 안식일이에요.

하나님이 모든 일을 마치고 쉬세요.

이걸 예수님의 구속사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엔 역사가 없어지는 것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은 쉬는 안식하는 세계이지 일하는 세계가 아니에요.

 

예수 믿은 후에 뭘 하여야 합니까 라고 묻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꾸만 자기 쪽에서 뭔가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성화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하였어요.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이 안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이루어가고 거룩해져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아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뭘 해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까? 묻기를!

안 믿어지니 안식하지 못하고 계속하여 종처럼 일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냥 믿어지는 것으로 살면 되는데!

그게 안 되니 자꾸만 목사님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그냥 성령이 인도하는 데로 사세요.

 

성령이 인도하는게 없습니까?

그럼 신자 아니에요.

성령이 없으면 예수 믿지 마세요.

 

성도는 반드시 성령이 인도를 하세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해요.

성도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교회 오란 소리도 하지 마세요.

충성하란 말도 하지 마세요.

원리가 그렇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세요.

 

이런 말을 하면 꼭 그럼 내 마음대로 살아야지 하는 민한 사람들이 있어요.

성도는 내가 없어요.

내 주인이 예수님이세요.

 

예수님이 나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하세요.

자꾸만 어떤 사건 속으로 밀어 넣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증인으로 살도록 밀어 넣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어요.

안 살아져요.

 

흔히들 자기 마음대로 산다고 하는 것은 자기 육신이 편한 대로 살겠다는 말이거든요.

한마디로 함축적(含蓄的)으로 말해서 교회도 안 다니고 놀러 다니겠다는 말이에요.

그럼 놀러 다니는 것이 예수님 증인으로 사는 겁니까?

아니지요.

 

놀러 다니라고 구원 시킨 것은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증인 되라고 구원시켰어요.

놀러 다니는 것은 그건 자기를 위한 구원이 되지요.

그런 구원은 없어요.

우린 애초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생겨났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아요.

 

아니 사도행전 1장 8절에 그러잖아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된다고 하잖아요.

예수님 증인시키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그럼 아무 것도 안하고 놀러 다니는 사람은 그 안에 성령이 없는 사람이지요.

성령이 없으니 자기 육신이 편한대로 살고자 하는 겁니다.

성도는 자기 육신이 편한 대로 사는 자가 아니에요.

성령이 그렇게 인도하지 않아요.

 

성령은 성도를 예수님이 당한 사건 속으로 몰고 가요.

그게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이에요.

믿음이 이 사람들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했어요.

그래서 그들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묵시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이나 내일이 없어요.

오늘만 있어요.

이게 묵시에요.

묵시는 안식의 세계에요.

 

안식이 되려면 모든 일에 마침이 되어야하지요.

우리에게 적용하면 죄악이 영속되고, 영원한 의를 받아서, 영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으로 사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거룩해지거나 의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더 이상 말씀에 순종하여야 하는 법이 없어야 안식을 하는 겁니다.

 

모든 일이 마침이 되려면 창세전 언약이 완성 되어야 해요.

왜냐하면! 역사라는 무대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 창세전 언약이 뭐라고 했나요?

자기 백성을 예수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는 것이지요.

 

다니엘이 받은 70 이레의 끝나면 주어지는 것처럼 되어야지요.

70 이레가 끝나면 어찌 된다고 했나요.

 

허물이 마치고,

죄가 끝나고,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고,

이상과 예언이 모두 응하게 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어떤 처지에 놓였습니까?

남의 나라 밑에 포로로 잡혀 가 있잖아요.

왜? 포로로 잡혀 가 있습니까?

죄 때문이지요.

 

그럼 포로에서 해방이 되는 것은 곧 죄가 사해진다는 뜻이 되겠지요.

성경에선 이렇게 죄가 사해지고 포로(종)에서 해방 되는 것을 희년(禧年)이라고 해요.

희년(禧年)이 되면 전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요.

 

이스라엘은 원래 종(從)이라는 제도가 없었어요.

가나안 땅은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를 해 주었어요.

그러니 공평하게 각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에서 농사짓고 살면 되어요.

그러면 남에게 종(從)이 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 중에서 노름을 하거나!

아니면 게으르거나!

사업에 실패해서 빚을 지거나!

병이 들어서 가산을 저당 잡힌다거나 해서 부득불 남의 집에 팔려가는 일들이 생겨난 겁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처음에 주신 원칙과 어긋나지요.

하나님은 공평하게 해 주었는데 인간들이 잘못해서 주인과 종이라는 신분의 벽이 생겼잖아요.

이렇게 죄로 인하여 형성된 불합리한 관계를 청산 해 주는 것이 희년(禧年)제도에요.

 

희년(禧年)이 되면 무조건 종에서 자유를 주어야 해요.

땅도 돌려주고!

사람도 풀어 주어야 해요.

 

희년(禧年)이란? 인간에게 있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쉬는 안식의 세계와 같아요.

그 희년(禧年)이 7년 안식년을 7번 한 후에 주어져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7 단위로 계속하여서 안식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모두가 창조 7일째 안식을 하신 것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 7 단위로 쉬는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7 일은 “안식일”로 쉬게 하고!

7 년이 되면 “안식년”이라고 해서 쉬게 하고!

7 안식년을 7번째는 “희년”으로 쉬게 했어요.

 

7에 속한 날에 일하면 죽어요.

안식일(安息日)이나,

안식년(安息年)이나,

희년(禧年)에 일하면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져요.

 

왜? 그런가 하면 7에 속한 날은 여호와의 안식에 속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지키게 함으로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이 아니고 여호와를 위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품꾼이라고 하는 겁니다.

품꾼은 주인이 쉬면 같이 쉬어야 해요.

그러니 여호와가 안식하는 절기엔 일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7일 안식일(安息日)엔 인간을 쉬게 하고!

7년 안식년(安息年)에는 땅을 쉬게 하세요.

그래서 안식년이 되면 땅에 씨를 파종하지 못하게 했어요.

 

안식일에는 일하지 못하게 하고!

안식년에는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한 것은!

너희는 너희의 수고와 노력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초두에 가나안은 어떤 땅이라고 했나요?

은혜의 땅이라고 했지요.

가나안 땅에선 자기 노력으로 살고자 하는 자는 다 쫓겨난다고 했지요.

그런 자는 땅이 토해 낸다고 했잖아요.

쫓아내서 땅을 안식하게 만들어요.

 

아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품꾼이라고 했지요.

품꾼은 욕심 부리면 안 되어요.

그냥 주인이 주는 대로 먹고 살아야 해요.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인이에요.

품꾼이 자기 노력으로 살고자 하면 안 되어요.

그건 자기 탐욕이에요.

그래서 가나안은 자기 노력으로 살고자 하는 놈들은 다 쫓아내는 겁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를 머금고 있는 곳이에요.

은혜로 사는 곳이에요.

이런 은혜의 정신을 모르는 자가 살면 땅이 탄식을 해요.

 

예수님이 그러시지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한마디로 먹고 살아갈 염려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까?

주인이 알아서 먹여 살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준대요.

우린 품꾼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믿어지면 편한데 안 믿어지면 복잡해요.

 

신약에선 가나안 땅이란? 예수 안을 말해요.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해주세요.

이게 믿어지면 염려근심 안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 육신은 이걸 못 믿고 자기 노력으로 모으고자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모은 것을 힘을 삼지 못하도록 자꾸만 흔드는 겁니다.

돈을 좀 모으려고 하면 자꾸만 어떤 사건들이 터져서 모으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래도 우리는 미련하고 고집이 세서 또 모읍니다.

그럼 하나님이 또 터지게 하고!

이런 악순환 속에서 살면서 야! 내가 참으로 지독하게 하나님 말 안 듣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요.

 

은혜로 마음을 붙잡아 두지 않으면 우리 마음은 안식이 사라지고 근심걱정에 사로잡혀요.

결국 이스라엘이 탐욕을 부리다가 가나안에서 쫓겨 난 것처럼 우리 마음도 안식을 빼앗기고 세상에 각종 염려근심들이 자리하여서 괴롭힘 당하는 겁니다.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고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유리방황하였듯이 우리 마음도 근심걱정에 포로가 되어서 육신에 종살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암튼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고 땅을 안식케 하세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 것도 다 이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안식케 하신 것입니다.

 

대하 36:20-21=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 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레 26:43k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보세요.

이스라엘이 형벌을 받는 동안 땅은 안식을 누리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땅이 안식을 하는 안식년은 원칙적으로 하면 7년마다 돌아오잖아요.

왜냐하면! 안식년은 7년마다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건 이스라엘이 범죄치 않고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을 때 이야기에요.

그러나 지금은 범죄해서 70년 동안 포로로 이방의 객이 되어서 가나안 땅이 비어 있어요.

그러니 땅 입장에선 매년 안식년이 되는 겁니다.

그 땅에 농사지을 사람이 없으니 매년 안식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쫓겨나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였으니 원칙적으로는 7년마다 쉬게 하던 땅을 매년 70년 동안 쉬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은 안식년을 70번 맞이 한 것과 같지요.

 

그럼 70년 동안 땅이 안식한 것은 70 이레와 같지요.

왜냐하면! 70번은 원칙적으로 안식을 하려면 7년마다 돌아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7년마다 돌아올 것을 매년 70년 동안 하였으니까 70년 동안 7년 텀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70년 만에 다 해치웠으니까 70 이레가 되는 거지요..

 

가나안 땅은 70년 동안 매년 안식년과 같이 비어 있었으니 70 이레 동안 비어있는 것과 같지요.

7년 단위로 안식해야 할 것은 매년 70번을 했으니 70 이레를 한 것과 같잖아요.

이해가 되시는가요.

숫자 계산하는 것은 딱 질색인데 저도 머리가 아파요.

 

그럼 죄로부터 영원히 속죄 되는 것을 왜? 70 이레로 작정 하셨는지를 살펴봅시다.

아까 레위기에서 범죄하면 7배나 징치(懲治) 한다고 했지요.

이스라엘이 범죄해서 바벨론에서 70년 포로로 잡혀있었지요.

 

그럼 70년 포로를 7배를 가하면 490년이 되지요.

490년은 이레로 계산하면 70 이레에요.

70년을 7배 징치(懲治)를 하니 70 이레가 되는 겁니다.

 

그럼 70 이레가 되면 죄악이 영속된다고 했지요.

즉 포로 생활이 끝난다는 말과 같아요.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을 통하여서 성도가 죄와 사망 가운데 갇힌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겁니다.

육적 이스라엘은 70년이 지나면 포로에서 회복이 되지만!

영적 이스라엘은 70 이레가 되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회복이 되어요.

 

그러므로 70 이레 속에는 창세전 언약이 성취가 되는 온 세상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서 장차 세상에 일어나는 제국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기점을 하는 제국까지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 속에는 로마 제국이 끝이에요.

 

다니엘이 말하는 제국을 봅시다.

다니엘 2장입니다.

 

단 2:27-45=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물으신바 은밀한 것은 박사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장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29 왕이여 왕이 침상에 나아가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30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36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 37 왕이여 왕은 열 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38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 39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세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40 네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같으리니 철은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며 41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42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만 할 것이며 43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44 이 열 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느브갓네살 왕이 꿈을 꿉니다

느브갓네살이 꿈에서 큰 신상(神像)을 보았어요.

머리는 정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발은 얼마는 철이고 얼마는 진흙인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뜨인 돌이 나타나더니 그 신상(神像)을 박살내는 겁니다.

그리곤 하나님이 영원히 망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세우는 겁니다.

느브갓네살은 자신이 꿈을 꾸고서도 해석을 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이고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브갓네살이 온 나라에 조서를 내려서 박사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들에게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하라고 합니다.

요즘 말로 목사나 신학자나 교수들에게 해석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누구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 겁니다.

 

육에 속한 자들이 어찌 하늘에 속한 일들을 해석 하겠어요.

당연히 못하지요.

이 때 다니엘이 느브갓네살 왕에게 나아가서 해석을 해 줍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본 우상은 장차 이 세상에 나타날 큰 국가(國家)라고 합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게 할 나라들인데 곧 장래에 될 일이란 겁니다.

이는 곧 예언이고 계시인 겁니다.

 

그래서 이건 아무나 해석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사람만이 해석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다니엘이 해석한 신상(神像)의 비밀을 봅시다.

 

먼저 금(金)으로 된 나라가 망하면, 은(銀)으로 된 나라가 세워지고!

은(銀)으로 된 나라가 망하면, 놋으로 된 나라가 세워지고!

놋으로 된 나라가 세워지면, 철로 된 나라가 세워지고!

철로 된 나라 속에서 철과 진흙으로 부스러기 같은 나라들이 세워진다고 합니다.

 

그럼 그 나라들을 살펴봅시다.

정금으로 된 머리의 나라는 느브갓네살 왕이 다스리는 “바벨론”을 말하고!

은으로 된 가슴과 팔의 나라는 “메대 바사”를 말하고!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의 나라는 “헬라”를 말하고!

철로 된 종아리의 나라는 “로마”를 말해요.

 

그리고 철과 진흙으로 섞인 발의 나라들은 로마에서 파생된 나라이므로 로마와 같은 의미에요.

로마 이후는 모두가 로마의 연속선상에 있어요.

하나님은 1 이레 후에 나타날 나라들은 모두가 로마라는 하나의 나라로 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타날 제국들을 신상의 금속성을 가지고 그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갈수록 가치가 떨어지지요.

가치가 떨어지는 대신 성질이 더 강해지지요.

이는 세상 역사는 갈수록 강퍅해진다는 말입니다.

마치 노아 시대처럼 죄악이 관영해 진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 제국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끝이 난다는 겁니다.

70 이레적인 의미로 본다면 로마가 세상의 마지막 제국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세상 역사는 사실상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느브갓네살의 꿈대로 바벨론은 고레스에게 무너집니다.

고레스는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메대와 바사(페르시아) 제국을 세웠어요.

그러다가 이 메대와 바사 제국도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하였어요.

알렉산더는 메대 바사를 무너뜨리고 이름을 헬라(그리스)라고 했어요.

이 헬라도 로마에게 무너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로마 시대 때 오셨어요.

그리곤 1 이레의 새 언약을 맺었어요.

새 언약은 묵시에 속하였다고 했지요.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세상 역사는 종말을 맞은 것이니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로마는 세상 끝에 국가와 같아지는 겁니다.

이 시대 국가는 모두가 로마에게 속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잖아요.

다니엘의 말대로 예수님이 뜨인 돌로 오신 겁니다.

다니엘에서 뜨인 돌이 금신상을 박살낸다고 했지요.

금신상은 이 땅에 나타날 제국들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뜨인 돌로 오신 것은 세상의 제국은 종말이란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세상은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미 심판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나타나는 세상 국가들은 로마에서 나타나는 조무래기들과 같아요.

있으나 마나 한 것들이에요.

 

하지만 예수님이 뜨인 돌이 되셔서 세운 나라는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해요.

예수님이 세운 나라는 하나님 나라에요.

하나님 나라는 무너지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운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 나라가 아니고 묵시 속에 나라에요.

천국이에요.

그러니 1 이레는 묵시의 세계인 겁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70 이레가 7 이레와 69 이레는 역사적으로 진행되어 왔어요.

그럼 1 이레도 역사적으로 진행이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라고 물을 수 있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잖아요.

 

그런데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끊어지는 것 까진 역사적으로 딱 맞았는데!

그만 나머지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할 1 이레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겁니다.

그러니 개혁신학회 학자들이 해석을 못하는 겁니다.

 

69 이레까지는 역사적으로 쭉 흘러가다가 1 이레가 공중으로 붕 떠버렸으니까요.

만약 1 이레가 69 이레처럼 역사적으로 쭉 연속적으로 이어져 갔으면 지금 이 세상은 없어야 하잖아요.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예수님이 죽고 난 후 7년 만에 끝장이 났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2010년이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모르겠다!

손대지 말자!

서로 암묵적으로 야합해서 우리 70 이레는 건들지 말고 가만히 놔두자고 하는 겁니다.

 

이는 모두가 1 이레를 몰라서 그래요.

1 이레는 새 언약에 속한 것인데 자꾸만 옛 언약에서 찾고자 하니 안 보이는 겁니다.

비 역사(묵시)에 속한 것인데 역사에서 찾고자 하니 안 찾아지는 거지요.

1 이레는 육에겐 꽁꽁 숨었어요.

영에게만 열렸어요.

 

마치 금 신상의 비밀을 육에 속한 술객들이 풀지 못하고 영에 속한 다니엘이 풀었듯이 지금도 묵시에 속한 1 이레는 영에 속한 성도만이 풀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영에 속한 성도는 다 이해가 되어져요.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영에 속한 성도는 1 이레를 묵시적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69 이레까지가 역사 속의 나라이고!

1 이레는 묵시 속에서의 예수님의 나라인 겁니다.

하나님은 1 이레를 통하여서 창조 7일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창조 7일 동안처럼 일하고 계세요.

자기백성들을 흑암에서 빛으로 불러내고 있어요.

창세기 1장의 일을 하시고 계신 겁니다.

이제 엿새가 차면 7일 안식의 세계가 오고 그러면 1 이레가 완성이 되어 이 세상은 불타버리고 하늘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와서 영원한 천국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이 세상의 제국을 로마로 끝으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면 세상 임금은 쫓겨나기 때문입니다.

이걸 우리 성도에게 적용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세상 임금인 마귀는 쫓겨 가요.

 

지금까지 우리를 장악하고 죄와 사망으로 괴롭히던 마귀는 떠나가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보좌로 임하셔서 나를 다스리게 되는 겁니다.

이제 성도 안에 영원한 나라가 세워진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하늘에 뜨인 돌처럼 오셔서 나를 장악하고 있던 금 신상과 같은 우상의 나라를 멸하신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마지막으로 왜? 70 이레를 세 묶음으로 구분해서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첫째 묶음은 7 이레 입니다.

7 이레는 포로로 잡혀 갔던 이스라엘이 해방하는 시기에요.

이는 죄악이 사해졌다는 말입니다.

원래 상태를 회복하였어요.

그래서 7 이레 때는 불타버린 성이 중건되고 성전 신앙이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건 이스라엘의 역사를 7 이레 속에 담아 놓은 겁니다.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정착하면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800년 역사를 7 이레 속에 축소시켜 놓은 겁니다.

그래서 불탔던 성전도 새로 짓게 하고 포로생활로 드려지지 않던 성전 예배도 부활한 겁니다.

제 2의 출애굽과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7 이레 속에는 역사적 의미와 묵시적 의미 두 가지가 담겨져 있어요.

 

묵시적 의미에선 하나님께선 반드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서 건져 내고 용서해 준다는 말입니다.

잃어버렸던 신앙을 회복시켜준다는 뜻에서 불타 버렸던 성전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예배도 부활시켜 주는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해방시켜서 성전 신앙을 회복케 하신 것입니다.

이건 묵시적인 의미에서의 좋은 회복이에요.

 

그리고 역사적인 의미에선 율법신앙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이건 62 이레 속으로 흡수가 되어서 나타나요.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되어 회복한 신앙이 율법 신앙이에요.

 

에스라 느헤미야서를 보면 신앙부흥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때 성전신앙을 부활했어요.

이 때 부활된 성전 예배는 율법신앙이에요.

알다시피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거잖아요.

한마디로 율법신앙은 망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역사 속에서 보여주어야 해요.

그래서 율법 신앙을 회복시킨 겁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영적으로는 바벨론에서 70년 만에 해방 된 것으로 끝이 난 것과 같아요.

그 이후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의 행함을 바탕으로 하는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역사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끝난 7 이레가 62 이레 속으로 흡수가 되어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율법 신앙으로 지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신앙이 나중에 예수님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율법 신앙이 세상 권세와 결탁하여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임으로서 율법과 세상이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진노 받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도 축소판으로 짓게 한 겁니다.

스룹바벨이 지은 성전은 과거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어요.

그래서 스룹바벨이 성전을 지을 때 과거 솔로몬 성전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통곡을 했어요.

너무도 초라하기 때문에 억장이 무너진 겁니다.

초라하게 짓게 한 것은 어차피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에요.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샘플로 짓게 한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을 다 쓸어버리지요.

실제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솔로몬 성전이 불타버렸듯이 완전히 불타버렸어요.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예언했잖아요.

돌 위에 돌 하나 덧놓이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했는데 그대로 되었어요.

 

이는 곧 솔로몬 성전이 불탄 것과 같은 의미에요.

그러니 스룹바벨이 지은 성전은 망할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은 겁니다.

다니엘이 이걸 알았기 때문에 포로들이 귀환 할 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겁니다.

 

이젠 성전 신앙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나 바벨론에 있으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70 이레가 되면 역사는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태여 예루살렘으로 귀한 하여서 성전 예배에 동참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귀환하지 않고 바벨론에 남아서 여생을 맞이 한 겁니다.

다니엘은 70 이레를 통하여서 이미 역사의 종말을 내다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것을 알았어요.

예수님이 맺을 1 이레의 새 언약 시대가 열리면 성전은 무너진다는 것을 안 겁니다.

제사와 예물로 드려지던 성전 예배 시대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 예배를 드릴 이유가 없지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때가 온다고 했지요.

언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성령이 임하면 되어요.

다니엘은 미리 성령 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살았던 겁니다.

 

그럼 두 번째 묶음인 62 이레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7 이레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축소시킨 것이라고 한다면!

62 이레는 세상을 축소시켜 놓은 겁니다.

62 이레 속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어요.

이 시대를 일컬어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 단절 시대라고 해요.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400년 동안 선지자를 보내지 않았어요.

선지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단절 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적 암흑기란 말입니다.

마치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처럼 땅이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과 같아요.

 

70 이레 중 첫 묶음인 7 이레가 408년에 끝났다고 했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계시가 단절 되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62 이레는 영적으로 암흑기인 겁니다.

그래서 62 이레 끝에 예수님이 오시는 겁니다.

 

이 때 예수님이 빛으로 오세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면서 흑암에 사는 백성들에게 빛이 비치기 시작 한 것입니다.

죽었던 자들에게 생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겁니다.

 

이를 누가복음에서 희년(禧年)의 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눅 4:18-2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난후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하자 희년(禧年)이 선포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지요.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고 하잖아요.

 

은혜의 해란? 희년(禧年)을 말해요.

이제 모두가 원 상태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내가 바로 너희를 모든 억압과 고통에서 자유케 할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억압과 고통이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가 언제 주어지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 새 언약이 시작 될 때에요.

그래서 1 이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후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전 언약에서 예수님의 피로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게 하여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는 내용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안에서 70 이레가 종결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시대는 물리적으로 흐르는 역사는 의미가 없어요.

이건 마치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전이 끝나고 동네 축구하는 것과 같아요.

메인 이벤트는 끝나고 뒤풀이 하는 것과 같아요.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게임이 끝났다는 말이에요.

 

물론 성도에게 국한된 이야기에요.

성도는 이미 메인 게임을 다 치르고 묵시 세계로 살고 있어요.

그러니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나 죽으나 의미가 없어요.

살아도 이미 영생 안에서 살고 죽어도 영생 안에서 죽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의미가 없지요.

 

아까 세상에 일어날 제국은 로마로 끝이 났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세상을 일컬어 종말론적 세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종말론적이란 말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난 후 감옥에서 사는 것과 같아요.

집행 날자만 남아 있어요.

사형 선고와 함께 그 사람은 죽은 목숨인 겁니다.

이처럼 로마시대 이후의 세상은 역사적인 의미로 본다면 멸망을 기다리는 역사라고 할 수가 있어요.

물론 이 시대는 묵시에 속한 1 이레의 시기로서 온 세상에 흩어진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시기이기도 해요.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일은 1 이레에 속한 묵시적인 사건이에요.

그러니 1 이레를 역사라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끊어지고 난 후 1 이레가 이어진다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시대가 1 이레에 속한 것이 되는 겁니다.

지금이 바로 1 이레 기간이에요.

1 이레는 예수님께서 영적 이스라엘을 완전히 회복하는 시기로 둔 것입니다.

 

그가 굳게 한 이레의 약속을 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제사와 예물을 폐한다고 하잖아요.

이는 율법 신앙을 폐하였다는 말입니다.

 

이제 율법으로 나아오는 자는 진멸 대상이에요.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자에겐 황폐케 할 진노가 쏟아져요.

이런 놈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전쟁을 벌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초토화 시켰듯이 율법 신앙은 예수님이 적으로 간주하고 진멸하시는 겁니다.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한 자들에게 쏟아져요.

한 마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믿지 않는 자에겐 저주를 끌어 붓겠다는 겁니다.

 

성도는 이미 1 이레의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 행함으로부터 자유하였어요.

결코 정죄 당하지 않는 영역으로 옮겨졌어요.

그러니 누가 성화 안한다고 지랄하여도 흔들리지 마세요.

왜냐하면! 성도는 자기 몸으로 살아가는 역사에 속한 자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묵시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육신으로서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나머지 인생은 별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바울이 삼층 천에서 자기를 보고 난 후 살아가는 삶과 같아요.

 

바울은 삼층 천을 보고 난 후 자신은 세상사람 아닌 것으로 살았어요.

그러니 세상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산 겁니다.

삼층 천에 가 있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그날 그날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면서 감사하고 살았던 겁니다.

 

우리의 삶도 그래야 해요.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언약 안에서 자신을 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염려치 않는 겁니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신경 안 써요.

죽으면 어쩔까 겁내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이미 영생이라는 묵시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소리칠 문제가 아니에요.

성령이 임한 성도는 믿어져요.

자신은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믿어져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 하나만 하고 마칠게요.

 

신앙생활은 어느 영역 안에서 살아가느냐의 싸움이지 내가 어떻게 사느냐의 싸움이 아니에요.

예수 안에서 묵시적으로 죄악이 영원히 속함 받은 자로 살고 있느냐!

아니면 아직도 역사 속에서 형벌을 당하고 사느냐! 에요.

 

묵시 안에 있는 사람은 아들처럼 안식하고 살지만!

역사 속에 있는 사람은 종처럼 열심히 일을 하고 안식을 얻고자 할 것입니다.

 

오늘 공부는 너무도 어려운 공부입니다.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또 읽기를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들에게도 1 이레 안에서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로서 사시길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어진 70 이레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안에서 1 이레가 주는 안식을 누리면서 남은 삶들을 담대하고 여유롭게 세상을 이기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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