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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발상지는 한국이다(2)
Ⅳ.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는 제주도 한라산이다
1.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는 파라날 녹야원이다.
석가세존은 원래 한국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고행성도하였다. 그렇다면 석가세존이 먼 인도에까지 가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에서 법을 설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를 중인도 베나레스시(Benares市)의 사르나드(Sarnath)라고 생각해 왔다. 여기에서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가 우리나라인가? 아니면 인도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고 그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중아함경} 라마경을 보면, 석가세존이 성도한 후 파라날(波羅捺) 선인(仙人)이 사는 녹야원 가시도읍(加尸都邑)에서 교진녀(?陳女) 등 다섯 비구들을 제일 먼저 만나고 거기에서 사제(四諦)의 법을 설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즉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이를 흔히 初轉法輪地라 표현함)는 파라날(波羅捺) 녹야원(鹿野園)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녹야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으로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 제183권을 보면 녹야원은 예로부터 선인이 사는 곳이라 하여 선인주처(仙人住處)라 하며, 예로부터 선인이 법을 설하던 곳이라 하여 선인논처(仙人論處)라 하고, 500 선인이 공중을 비행하던 중에 인연을 잃고 그곳에 떨어졌다 하여 선인타처(仙人墮處)라 하며, 뭇 사슴이 서식한다 하여 녹림(鹿林) 또는 녹원(鹿園)이라 하고, 보리수가 많다 하여 보리수처(菩提樹處)라 하였다. 또한 수양대군의 저술인 {석보상절}에 의하면 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판단기준으로서 녹야원의 성립요건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녹야원은 산악이다.
- 녹야원은 녹림 내지 녹원이다.
- 녹야원은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이다.
- 녹야원은 선인타처이다.
- 녹야원은 보리수처이다.
- 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다.
-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다.
이상의 일곱 가지 요건이 녹야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성립요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의 일곱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면 그곳이 곧 녹야원으로서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라 할 수 있으며, 만약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곳은 녹야원도 아니고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파라날 녹야원은 인도의 사르나드가 아니다.
그러면 인도 당국이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라고 주장하는 인도 중부의 사르나드가 녹야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부터 먼저 따져 보기로 한다. {불교사전}의 기록을 보면 "바라날은 중인도 마갈타국의 서북쪽에 있는 나라로서 별명을 가시라 하고 지금의 오우드 지방, 베나레스시(Benares市)에 해당하며, 석가세존이 성도한지 三七日후에 이 나라의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여 교진녀 등 다섯 비구를 제도하고, 그후 2백년이 지나서 아육왕(아쇼카왕)이 그 영지를 표시하기 위하여 두 개의 석주를 세웠다"고 하였다. 또한 다른 기록을 보면 "최초 설법의 땅은 현재 사르나드라고 불리며 베나레스시 북동쪽 약 7km되는 지점에 있다. 이는 '사랑가 나타(사슴의 왕)'를 생략한 말에서 유래한다. 이 지역은 경전에 '사슴동산이나 선인이 사는 곳'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과 현지답사를 근거로 인도의 사르나드를 녹야원의 성립요건에 대입시켜 보기로 한다.
- 녹야원은 산악인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약 2천평 정도의 평지였고 산악이 아니었다.
- 녹야원은 녹림 내지 녹원인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산악이 아닌 자그마한 들판으로서 사슴이 살만한 곳도 못되었고, 사르나드에 사슴이 살았다는 기록도 본 바 없다.
- 녹야원은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인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평지로서 근본적으로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가 될 수 없는 곳이었다.
- 녹야원은 거기에 500 선인이 떨어졌다는 선인타처인데, 인도의 사르나드에서 5백신선에 대한 어떠한 물증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에 대한 전설도 기록도 본 바 없다. 따라서 인도의 사르나드는 선인타처가 아니었다.
- 녹야원은 보리수처인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보리수처가 아니었다.
보리수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인도(東印度)에서 자라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키가 30m쯤 되고, 잎은 염통꼴로 끝이 뾰족하며 가죽바탕으로 윤이 나고, 꽃은 은두화로 무화과와 같은 열매가 열린다. 이 나무를 인도에서 보리수라 한다.
또 하나는 보리수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제주방언으로는 '볼레낭'이라 한다. 키는 3m 정도이고, 잎은 타원형이며, 흰 비늘이 덮이고 어긋나게 나는데 빨간 물렁 열매가 가을에 붉게 무르 익는데 그 열매를 먹는다. 이 나무는 줄기를 잘라버려도 좀처럼 죽지 않고 새싹이 돋아난다. 이를 평하면 전자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원래의 이름은 보리수가 아닌 것이다. 단지 인도에서 보리수라 부르므로 보리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후자는 보리수과에 속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볼 때 진짜 보리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후자의 보리수과에 속하는 나무 즉 제주 방언으로 볼레낭이라 불리우는 보리수는 인도의 사르나드에는 한 그루도 없었다. 따라서 인도의 사르나드는 보리수처가 아닌 것이다.
- 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도의 사르나드에 석가세존의 불탑이 없었다.
불탑은 거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사람이 고의적으로 없애버리지 않는 한 몇 천년이고 그대로 남을 수 있다. 그런데 인도의 사르나드에 석가세존이 입멸하자 조성하였다는 불탑이 없었고, 있었다는 기록도 본 바 없다. 아육왕이 그 영지를 표시하기 위하여 두 개의 석주를 세운 것도 석가세존이 초전법륜한 지 약 2백년 후라 하였다. 그밖에 스투파·불상·승원 등이 사르나드에 있으나 그것은 모두 B.C. 3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었다.
-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었다. 그런데 인도의 사르나드에 가시도읍이 없었다.
{중아함경}에 의하면 파라날에 녹야원이 있고,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다. 그런데 녹야원이라는 사르나드 자체가 약 2천평 정도로서 그 속에 가시라는 도읍지가 존재할 수 없었고, 베나레스시의 별명을 가시라 하여 불서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인도의 사르나드는 판단기준인 녹야원의 성립요건에 어느 하나도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도의 사르나드는 녹야원이라 할 수 없고,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라 할 수도 없다. 더욱이 대성자이시며 대각자인 부처님이 초전법륜한 곳을 입멸하여 2백년 후까지 그대로 방치하였다는 것이나, 1794년 베나레스왕의 대신이 사르나드의 유적을 파괴한 것도 이유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르나드를 녹야원이라 한 것은 석가세존 당시 또는 입멸 후 비유적으로 불리던 것이 후세에 이르러 인도인의 긍지를 높이고 찾아오는 외국의 불자들에게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비유를 사실같이 조성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3. 파라날 녹야원은 제주도 한라산이다.
글자의 뜻으로 볼 때 파라날은 물결치는 나라 곧 섬나라를 의미하는데, 제주도(濟州島)가 바로 물결치는 나라 곧 섬나라이며, 녹야원이란 사슴이 서식하는 산악을 의미하는데 제주도 한라산에 사슴이 살았고, 정상의 연못에서 흰사슴이 물을 먹었으므로 그 연못을 백록담(白鹿潭)이라 한다. 그 동쪽은 녹산장(鹿山場)으로서 사슴이 놀던 들판이다. 또한 제주도 한라산에는 우거진 숲도 많고 공기도 맑으며 생수도 많다. 이러한 것만 보아도 제주도 한라산이 녹야원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과학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제 제주도 한라산이 녹야원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녹야원의 성립요건에 대입시켜 보기로 한다.
첫째, 녹야원은 산악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산악이다. 제주도 한라산은 1950m의 한국 제2의 명산이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로서 설명이 필요없다고 본다.
둘째, 녹야원은 녹림 내지 녹원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녹림 내지 녹원이다. 한라산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로서 선산(仙山)이다. 선산이란 선인이 거처하는 산을 의미하는데, 선인은 동물 중에서 그 품행이 고결하고 장생한다는 사슴과 벗을 한다.
조관빈의 {한라산기}를 보면 "한라산에 본시 사슴이 많았는데 매양 새벽과 저녁이면 사슴들이 백록담에 나와 물을 마신다. 어느 때 한 사냥꾼이 활을 들고 못가의 바위 뒤에 숨어앉아 기다리다가 문득보니 사슴의 떼가 몰려 나오는데 100인지 1000인지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중에 가장 큰 사슴의 몸 빛은 희고 광채가 났다. 어이한 백발 노옹이 그 등 위에 올라탔었다. 사냥꾼은 활을 들러 쏘기는 커녕 그만 놀라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윽고 맨 끝으로 따라가는 작은 사슴 하나를 쏘았더니, 또 사슴을 타고 오는 신선이 있어 손가락으로 사슴을 헤아리는 듯하므로 엽사는 가슴을 두근거리다가 다시 문득 보니 그들은 간 곳이 없었다"하여 한라산에 신선과 함께 사슴이 살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한라산 동쪽 허리에 사슴이 논다는 녹산장(鹿山場)과 아울러 소록봉(小鹿峯)과 대록봉(大鹿峯)이 있다. 한라산 서남쪽 중문동에도 겨울이면 사슴이 내려와 서식한다는 녹하악(鹿下岳)이 있다. 이를 보면 제주도 한라산은 녹림 내지 녹원이었고, 동시에 선인녹원(仙人鹿園)이었다.
셋째, 녹야원은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이다.
앞에서 한라산의 백록담에 신선이 나타났었다는 기록을 소개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정의·김녕·함덕에 신선이 많다 하였고, 한라산은 원산(圓山)이니 곧 바다 가운데 있다는 원교산(圓矯山)이고 그 동은 동무소협(東巫小峽)인데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였다. {법주기}에도 박가범(薄伽梵) 부처 당시에 16존자의 한 사람인 발타라존자께서 한라산 영실(靈室)에 있었다고 하였다. 영실에서 수양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영실은 10평 전후의 신령스러운 자연동굴인데 거기에는 자연석으로 된 불상이 있고, 봄·여름·가을·겨울 언제나 온도의 변화가 없으며, 지금도 계절따라 선인들이 영실에 와서 수도한다고 한다. 따라서 제주도 한라산은 예로부터 신선이 살았다는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인 것이다.
넷째, 녹야원은 선인타처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선인타처이다. 선인타처란 신화적인 이야기이지만 녹야원에 500선인과 관련된 어떤 물증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라산 서쪽 기슭에 부처님이 왔었다는 불래악(佛來嶽)이 있고, 불래악 맞은 편에 500개의 자연석이 우뚝 서 있다. 이 500개의 자연석이 마치 도(道)를 닦는 수도승 같아서 이를 500나한(羅漢)이라 부르고, 그 일대를 수행동(修行洞)이라 한다. 그러므로 한라산 불래악 수행동에 있는 500개의 자연석이 곧 500신선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니, 제주도 한라산은 선인타처인 것이다.
다섯째, 녹야원은 보리수처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보리수처이다. 인도에서는 뽕나무의 일종을 보리수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보리수과에 속하지 않으며 단지 인도인들이 보리수라 부를 따름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에는 부리수과에 속하는 볼래나무가 많다. 그러므로 제주도 한라산은 보리수처라 할 수 있다.
여섯째, 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진신사리탑이 있다. 그런데 한라산 존자암의 터에 상고시대의 부도가 있다. 존자암(尊者庵)은 한라산 정상에서 서쪽 수행동(修行洞, 속칭 靈室) 불래악에 있는데, 김상헌의 {남사록}에 의하면 고량부(高梁夫) 삼성이 처음 일어날 때부터 (정의·대정·목안)삼읍(三邑)이 정립될 때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존자암(尊者庵)이 탐라국 건국초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탐라국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한단고기} 마한세가(상)을 보면, 단군 을아(乙阿) 을유(B.C. 1596년)에 탐몰라인(탐라인)이 마한왕에게 말 30필을 바치었다고 하였다. 이는 탐라국이 B.C. 1596년 전부터 존재하였다는 것으로 존자암은 석가세존의 출생하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석가세존이 존자암에 올 수도 있었고, 석가세존이 왔었기에 존자암의 산등성이를 불래악(佛來嶽)이라 부르고, 영실에 석가세존의 석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제주의 민담(民譚)이나 무가(巫歌)에도 부처가 바다에서 제주로 왔다는 설화도 있다. 바다란 수미세계 곧 고조선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존자암의 터에 그 조성년대를 알 수 없고,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부도(불탑)가 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이 부도는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불탑(眞身舍利佛塔)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에 가시리(加尸里;加時里)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에 한라산 동쪽은 동무소협(東巫小峽)으로서 신선들이 살았다고 하였는데 그곳에 가시리가 있다. 가시리에 상가시리와 하가시리가 있고, 상가시리에는 노폭(路幅)이 7-8m되는 넓은 길이 있다. 이 길은 너무나 오래되어 그 길이 만들어진 년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를 생각하면 가시리는 그 역사가 극히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고, 탐라국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상과 같이 제주도 한라산은 녹야원의 성립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 때, 파라날은 제주도를 의미하고, 제주도 한라산은 녹야원이며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를 부정하면 인도의 사르나드도 녹야원이 아니니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는 허무맹랑한 전설이 되고 만다. 증거가 부족하면 독자들이 협력해 주기 바란다. 협력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흠만 잡으려는 사람은 아마도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닌지 자문자답해 보기 바란다. 이것이 또한 남의 일이 아님을 자각해 주기 바란다.
Ⅴ. 석가세존의 고조선 행적과 유적
{삼국유사}를 보면 부처님이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예컨대 어산불영(魚山佛影)편에 따르면 "대정 12년 경자(1180) 즉 명종 11년에 처음으로 만어사(萬魚寺)를 지었는데 동량보림(棟梁寶林)의 장주(狀奏)에 이르기를 이 산 중에 기이한 자취가 세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부처영상의 서북쪽에 반석이 있어 항상 물이 괴어 끊어지지 않는데 이곳은 부처가 가사를 빨던 곳이라"하여 부처가 우리나라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만어산(萬魚山)에 이르러 거기에서 가사를 빨았다고 하였다. 또한 동편에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제7권을 인용하여 "부처가 야건가락국 고선산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고선산의 고선(古仙)은 한인·한웅·한검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곧 고선산은 삼신산을 의미한다. 삼신산은 백두산을 지칭하므로 부처가 고선산에 이르렀다 함은 곧 부처가 백두산에 왔었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동서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 편을 보면 황용사의 터는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하던 곳이라 하였고, 그밖에도 경상남도 남해 금산 쌍홍문(雙紅門)의 안내간판에 석가세존이 그곳에 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의미심장하게 숙고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돌이켜 생각하면 석가세존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땅에서 고행하고 성도한 후 만리 길도 멀다 않고 인도로 건너가 혹심한 빈곤과 차별대우에 시달리는 서민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구걸행각을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고 생각할 때, 인도 사람이라면 누구든 석가세존의 조국인 우리나라를 은인의 나라로 받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신앙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무척이나 동경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통일교 외국신자들이 우리나라를 신앙의 조국 곧 아버지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가 바다 건너 우리나라에 와서 가락국의 김수로왕의 비(妃)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금관성 파사석탑기를 보면 금관성 호계사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김수로왕의 비 아유타국의 공주가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만여리가 넘는 인도에서 공주의 몸으로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것은 굳건한 신앙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고, 석탑을 싣고 온 것은 신앙의 조국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금불상 53구가 서역으로부터 바다 건너 한(漢)나라 평제 원시 4년(서기4년) 갑자에 금강산에 보내졌고, 이로 인하여 절(유점사)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때는 중국에도 석가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이므로 인도인들이 우리나라를 숭모하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보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삼국유사} 황룡사장육 편을 보면 신라 진흥왕이 황룡사를 지으려 할 때, 서천축의 아육왕이 황철과 황금 및 일불이보살상(一佛二菩薩像)의 모형까지 보내와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였다고 하였는데, 황룡사의 터는 석가불과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하던 곳으로 거룩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이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아니한 그 때에 만여리가 넘는 인도에서 바다 건너 우리나라로 공주가 오고 불상과 불탑까지 보내왔다는 것은 예사일이 아닌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를 신앙의 성지, 신앙의 조국, 부처님이 나신 나라로 믿는 굳건한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조선을 가리켜 아득한 옛날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는 등불이었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이제야 그 시(詩)의 의미를 알게 된다.
Ⅵ. 대승경은 우리나라에서 기원되었다.
본항에서는 대승경이 우리나라 고조선에서 인도로 전승되었다는 문제를 논증하려한다. 본 문제의 논증방법은 3단논법이다. 즉 A=B, B=C, 그러므로 A=C라는 논법이다. 이에 대하여 유의하기 바란다.
불교사상의 자료에는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의 3장이 있다. 이 중에서 경장과 율장은 불타께서 직접 설하신 법을 의미하고, 논장은 논사들의 저술을 의미한다. 또한 불교경전은 소승경(북방불교에는 장아함·중아함·잡아함·증일아함 등 四部阿含經이 있고, 남방불교의 파리어 대장경에는 장아함·중아함·승육다아함·앙굴다아함·굴타가아함의 五阿含經이 있다)과 대승경(소승경을 제외한 팔만대장경)으로 크게 둘로 나뉘어지는데, 대소승 경전에 경율론(經律論) 3장이 따로 있고, 특히 소승경만이 석가세존이 35세에 성도해서 80세에 입멸할 때까지 45년 동안 직접 설하신 경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승경에도 논사들의 저술인 논장이 따로 있고, 불타께서 직접 설하신 경장과 율장이 따로 있으니, 이는 누구의 설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래서 김동화는 "서기 565년 전에 탄강해서 그후 35년후에 성도하고 45년간의 설법이 원시경전(소승경)이고, 80세에 입멸하신 것으로 되어있으니, 도대체 이 대승의 경율 2장은 어느 때에 설하였단 말인가? 만약 시대적으로 본다면 소승논부(小乘論部) 이후의 설이라 하여야 정당한데, 사실상 모든 대승경전은 불설로 되어있으니, 이 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장탄식을 한다.
일반상식으로 생각해도 석가세존이 대성자이시고 부처님이라 해도 8만 대장경을 혼자서 모두 설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고, 또한 아난(阿難)의 기억력이 신통하였다 하더라도 8만 대장경을 모두 암송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무조건 대승불교 측에서는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대승경도 석가세존이 직접 설하신 경전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소승불교 측에서는 대승경을 마구니의 조작이니 조달(調達)의 조작이니 하면서 석가불설이 아니라고 공박한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어느 개인이 탁불(托佛)하여 대승경을 위작한 것 처럼 주장하는 고승도 있다. 이와 같이 대승경의 출처는 지금까지 오리무중에 빠져 그 동안 유명한 보살과 조사, 대덕(大德)과 대지(大智)에 의해서도 해결하지 못하고 내려오는 난해한 문제이다.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지금부터 하나 하나 풀어나가기로 한다.
1. 대승경의 출처는 바다이다.
그러면 대승경의 출처는 어디인가? {용수보살전}에 의하면, 용수(龍樹)는 출가후 입산하여 불탑(佛塔)에 이르렀던 바, 출가계(出家戒)를 받아 90일에 3장을 모두 암송하고 깊은 뜻을 통하여 다시 다른 경을 구하였으나 도무지 얻지 못하다가 설산(雪山) 중의 한 늙은 비구니로부터 마하연경(摩訶衍經)을 얻고 통리하지 못하여 여러 나라를 주류하면서 다른 경을 구하던 차에 수정방(水精房) 중의 대룡보살(大龍菩薩)을 만나 바다 속의 궁전에 들어가 칠보장(七寶藏)을 열어 위없는 묘법인 방등심오의 경전을 주니 그것을 받고 90일에 통해한 후 염부제(염부주) 중의 무량한 경전 가운데 한 상자를 얻고 남천축(南天竺 곧 인도)에 돌아가 불교를 크게 유포시킨 것으로 기록은 밝혀주고 있다.
용수는 대승불교를 일으킨 제1인자인데, 그에 의하여 대승경을 설산과 염부주 바다궁전에서 인도로 전하여 대승불교를 크게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용수가 대승불교를 일으켰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공인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설산과 염부주와 바다의 문제가 풀리지 않음으로써 대승경의 출처가 모호해지고 오리무중에 빠졌던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 보면 옛날의 인도인들이 우리나라를 부처님이 탄생한 나라라 하여 우리나라로 시집을 오고, 불상과 불탑을 보내오듯, 지금 우리나라의 불자들이 인도만을 우러러 보고, 인도의 역사·철학·종교·사상을 연구하고 잘 알면서도, 제 나라의 역사·철학·종교·사상을 모르는 데서 천축 또는 염부주라면 무조건 인도로 착각하고, 설산이라면 무조건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중의 어느 산으로 추정하며, 부처라면 무조건 석가세존으로 오인한 데서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우리나라의 국조인 한인·한웅·한검이 고불(古佛)임을 밝혔고,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며, 염부주도 좁게는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이고, 넓게는 고조선 강역 전체임을 밝혔다. 이것만 보아도 대승경의 출처가 상고시대의 우리나라 고조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다'가 어디를 가리키느냐의 문제가 남아있다. 이 문제가 지금까지 풀리지 않음으로써 '바다'라면 무조건 태평양이나 대서양 같은 짠물바다로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용(龍)이라면 무조건 비를 내리는 바다의 용으로, 용궁이라면 바다속의 궁전으로, 용왕이라면 바다 속의 용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용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인도에서는 용같은 코브라로 용을 대신하는가 하면, 용과 같은 종류의 물고기로 변형되고 있다. 이래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불교가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허무맹랑한 미신같이 곡해되어 서구인들에게 불신당하고 있는가 하면, 대승경의 출처도 수천년 동안 안개 속에 가리워졌던 것이다.
2. 바다는 수미세계이다.
그러면 불교에서 바다는 어디를 가리키는가? 사해동포(四海同胞)라 할 때의 해(海)와 고해중생(苦海衆生)이라 할 때의 해(海)도 태평양·대서양·인도양 같은 짠물바다(소금물바다)를 가리키는가? 불교철학이 심오하다는 것을 누구나 다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의 바다를 무조건 짠물바다·소금물바다로만 수천년 동안 이해하여 왔으니 참으로 이상하다 아니할 수 없다.
먼저 바다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바다는 깊고 무한하여 전 대륙을 포용하고 있는가 하면, 생명의 원천이며, 지혜와 재화의 보고이고 무차별의 세계이다. 무섭기는 폭군 같기도 하고 인자하기는 어머니 같기도 하다. 곧 바다는 원융무애하고 대승적 성격을 지니어 크고 작은 것, 좋고 나쁜 것, 희고 검은 것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불교에서 바다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첫째, 불교에서 바다는 원융무애의 정신세계를 의미한다. 예컨대, 대원해(大願海) 여래공덕해(如來功德海)·무량삼매해(無量三昧海)·법문해(法門海)·생사해(生死海)·지혜해(智慧海)니 하는 경우 등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의 바다는 태평양·인도양·대서양 같은 짠물바다·소금물바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원융무애의 정신세계를 의미한다.
둘째, 불교에서의 바다는 수미세계(須彌世界)를 의미한다. 불교의 세계설에 의하면 이 세상 중앙에 수미산이 높이 솟아 있고, 수미산 정상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살며 중턱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산다. 금·은·유리·파리의 4보(四寶)로 이루어져 북쪽은 황금, 동쪽은 백은, 남쪽은 유리, 서쪽은 파리인데, 해와 달이 그 주위를 회전하면 보광을 발산하여 4방의 허공을 물들인다. 수미산 둘레에는 일곱 겹의 금산(金山)으로 둘러있고, 수미산과 금산, 금산과 금산 사이에는 7개의 바다(七海)가 있다. 마지막 금산 밖에는 짠물바다(鹹海)로 둘러있고, 짠물바다 건너에 철위산이 둘러있어 수미세계의 외곽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태평양·대서양·인도양 같은 진짜바다는 이를 짠물바다(鹹海)라 이르고, 바다는 수미산과 금산, 금산과 금산 사이의 수미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바다는 문명의 중심지, 종교적 메카라는 뜻의 비유로 쓰인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바다는 수미세계를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수미세계는 어떠한 세계를 의미하는가? 수미세계는 최상의 위치에 제석천과 같은 종교지도자가 있고, 중간에 사천왕과 같은 법왕이 있어 해와 달이 자연적으로 돌아가듯, 사회질서도 법이 있으나 없으나 순리대로 돌아가며, 사방에서 금·은·유리·파리의 4보가 보광을 발하듯, 사민(四民)의 기풍도 홍익인간 광명이세하여 태평가를 부르는 평화세계로서 종교의 메카, 종교의 발상지, 종교의 요람, 최고의 종교사회 곧 불국토 내지 신선지국을 의미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경상남도에 김해(金海)·남해(南海) 등의 지역이 있으나 이들 지역이 바다가 아니라 과거에 종교의 요람이었던 것과 같은 격이다.
그러면 용수보살이 대승경을 가져갔다는 바다는 어디를 가리키는가? 태평양·인도양·대서양 같은 짠물바다인가? 대원해니 무량삼매해니 하는 원융무애한 정신세계인가? 아니면 종교의 요람인 수미세계인가? 바다에 궁전과 칠보장과 경전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이 경우의 바다는 원융무애의 정신세계도 아니고, 태평양·인도양·대서양 같은 짠물바다라고도 할 수 없으며, 종교의 요람인 수미세계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신세계나 짠물바다 속에 실제의 궁전도, 칠보장도, 경전도 있을 수 없고, 수미세계에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수보살이 대승경을 남천축으로 가져갔다는 바다는 수미세계인 것이다. 즉 대승경의 출처는 수미세계라는 것이다.
3. 수미세계는 환국과 고조선을 의미한다.
수미세계는 종교의 메카, 종교의 발상지, 종교의 요람, 불국토, 신선의 나라를 의미한다면 과거에 그러한 나라가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첫째, 수미세계는 중앙아시아의 환국을 의미한다. 제1편에서 밝혔듯이 고불교인 신선도는 태고시대 중앙 아시아의 환국 즉 알타이 사회에서 비롯됐으니 고불인 한인이 천산에 살면서 득도하여 삼신하나님에게 제사하고 7세나 계승하면서 무위자연적 신교국가를 이룬다. 따라서 태고시대 중앙 아시아의 환국 즉 알타이 사회는 수미세계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수미세계는 우리나라 고조선(古朝鮮)을 의미한다. 환국에 이어 한웅천황이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에서 천도를 크게 깨치고 지금으로부터 5894년 전 10월 3일 신선도를 설파하였으며, 그후 1565년이 지나 다시 단군성조에 의하여 고등종교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배달국과 고조선은 부처님이 세운 나라로서 수미세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상고시대의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 또는 신선지국(神仙之國)이라 하였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도 고조선을 가리켜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는 등불이라 하였다.
불교에 관한 기록에서 천독(天毒) 또는 천축(天竺)이라 함은 수미세계를 의미하는데, {산해경} 해내경에 조선을 천독이라 하였다. 이는 고조선이 수미세계임을 확인하여 주는 것이다. 또한 인도를 남천축(南天竺)이라 하고, "월지국(月支國)을 북천축(北天竺)이라" 하는데, 월지국은 고조선의 진왕이 직접 다스리던 수도를 지칭한다. 이래서 고조선은 수미세계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4. 대승경의 출처인 수미세계는 고조선이다.
그러면 대승경의 출처는 중앙 아시아의 환국인가? 아니면 우리나라 고조선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용수보살이 설산 염부주 바다궁전에서 대승경을 남천축 인도로 가져갔다고 했다. 그런데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가리키고, 염부주는 백두산 천지 또는 고조선 강역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용수보살이 대승경을 인도로 가져갔다는 바다 곧 수미세계는 중앙 아시아의 환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대승경의 출처는 고조선인 것이다.
다음은 우리나라를 바다로 표현한 실례를 직접 들어보기로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이는 "해중유삼신산(海中有三神山)"이나, "동지우해등환산(東至于海登丸山)"의 삼신산과 환산은 백두산을 의미하는데, 백두산은 우리나라에 있다. 그러므로 바다(海中)는 우리나라를 의미한다. 또한 학자들 역시 이 경우의 해(海)를 발해(渤海)로 해석한다. 발해는 흔히 대조영이 세운 국명으로 알고 있으나, 그 나라의 처음 이름은 대진국(大震國)이며, 발해는 대진국 건국 이전 춘추전국 시대의 저술인 {열자(列子)}에도 보이는 상고시대 우리나라의 이칭이다. {화엄경} 제보살주처품에도 "해중에 금강산이 있는데 예로부터 법기(法起)보살이 1200권속과 더불어 법을 설하였다"는 구절이 있는데, 금강산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산으로서 해중은 곧 우리나라를 의미한다. 그런데 중국의 청량국사의 소(疏)에도 해중을 우리나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화엄경} 입법계품에 "마니산 기세계 해중 유불 출현(摩尼山 其世界 海中 有佛 出現)"이라 하였는데, 마니산은 인도나 중국에는 없고 우리나라 경기도 강화에 있는 산이다. 더욱이 부처님이 출현했다고 했으므로 해중 곧 바다는 우리나라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바다와 용궁"은 우리나라 고조선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와 같이 바다는 짠물바다 외에 상고시대의 우리나라 고조선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이상의 소론을 요약하면, 대승경의 출처는 설산 염부주 바다궁전인데,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의미하고, 염부주는 백두산의 천지주변 또는 고조선의 강역전체를 의미하며, 바다는 우리나라 고조선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승경의 출처는 우리나라 고조선으로서 대승경은 원래 우리민족의 경전이라는 사실이 이론적으로 성립된다. 즉 방대한 불교의 대승경이 인도소산이 아니고 원래 우리민족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원래부터 우리민족의 사상인데 지금까지 인도사상이라 오해하여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을 거의 찾은 기분이 든다.
또한 원시 대승경이 용수보살에 의해서만 인도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석가세존이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우리나라에서 수도고행하였고, 백두산(설산) 총림방 중의 진귀조사로부터 종지를 받았다고 하였으므로 석가세존에 의하여 가장 기본적인 경전이 인도에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대승경은 범어로 쓰여 있는데, 후술하는 바와 같이 범자는 지금부터 약 5200여년 전에 배달국 시대의 복희에 의하여 창제되었고, 지금부터 약 3500년 전에 성립되었다고 보여지는 인도의 리그베다(Rigveda)도 범자로 쓰여 있으므로 대승경은 리그베다 성립이전, 적어도 지금부터 3500년 전, 범어의 인도이입과 더불어 인도로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래서 대승경은 용수보살 이전에 이미 인도로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5. 지나에 대승경을 전한 월지국은 고조선의 수도이다.
대승경이 고조선에서 먼 인도에까지 전승되었다면 인접한 지나에는 그보다 먼저 직접 전수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대승경의 중국전승에 대한 기록을 보면,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B.C. 1001∼B.C. 947)에 문수와 목련이 서역에서 건너와 목왕을 교화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진시황 4년(B.C. 243)에 불경을 중국에 전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에 대하여 일반적인 통설은 부정한다. 왜냐하면 주나라 목왕 때는 석가세존마저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며, 진시황 때는 대승불교가 성립되기 전이다. 따라서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였다고 할 경우, 그때에 문수와 목련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목왕을 교화하였다거나 불경이 중국에 전래되었다 함은 있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월지국(月支國) 아니면 안식국(安息國)에서 대승경이 중국으로 전승되었다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고, 이들 국가를 인도 가까이에 있는 대월씨국(大月氏國)에 결부시키려 한다.
여기에서 안식국은 논외로 하고 월지국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을 옛 진국(辰國)이라 하고, 진왕(辰王)이 월지국을 통치하였다고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월지국은 진주(辰主)의 치소(治所)라 했다. 곧 월지국은 진국의 도읍지라는 것이다. 그외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와 최동(崔棟)의 {조선상고민족사}를 보아도 한결같이 월지국이 고대의 우리나라 고조선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국어대사전}을 보아도 월지국을 목지국(目支國)이라 하고 목지국은 옛 진국의 한 부족국가라 하였다. 옛 진국이란 고조선을 지칭한다.
그러나 {불교사전}에 "월지(月支)는 월씨(月氏)라고도 하며, 서역에 있던 큰 왕국"이라 하여 월지국(月支國)을 서역에 있던 대월씨(大月氏)에 결부시키고 있다. 만약 불경이 터키계통의 대월씨국에서 중국에 전승되었다면, 대월씨국은 중국보다도 먼저 불교가 보급되었다는 것으로 지금쯤은 서구사회에 불교가 일반화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구사회에는 이제야 겨우 불교가 발을 붙일까 말까 할 정도인 것을 보아도 중국에 불경을 전한 월지국은 대월씨국이 아닌 것이다.
근세에도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불경이 전승되었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경북대학교 허흥식(許興植) 교수는 "고려에 남긴 철산경(鐵山瓊)의 행적"에서 {고려국대장이안기(高麗國大藏移安記)}는 아직까지 국내 학계에 소개된 바 없는데, 거기에 중국 남송(南宋) 임제종(臨濟宗) 양지파(楊枝派)의 고승 철산경이 1304년 고려에 와서 3년 동안 머물다가 6천권의 대장경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한다.
Ⅶ. 대승경의 범서는 우리민족의 범서이다.
원시 대승경의 출처가 우리나라 고조선이었다. 그렇다면 원시 대승경에 쓰여 있는 범서는 당연히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언어와 문자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인 귀결이고 실재적 증명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증명해야 할 것인가?
첫째, 범어는 어떠한 언어인가를 밝혀야 한다.
둘째, 범서가 인도 문자도 아니고 언어도 아님을 밝혀야 한다.
셋째, 상대의 우리나라에 범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넷째, 우리민족의 범서가 대승경의 범서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상을 순서에 따라 밝혀 나가기로 한다.
1. 범어는 어떤 언어인가?
운허용하의 {불교사전}을 보면 범어는 B.C. 800년 경에 인도로 전래된 셈계통의 외래어라 하여 간략히 소개되고 있으나, 컬러판 {교육세계백과대사전}을 보면 {대영백과사전}의 기록을 인용하여 자세히 밝혀주고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범어》범어는 산스크리트어(語)라고도 하는데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인도에 쓰이는 고급 문장어이다. 산스크리트는 <완성된 언어>라는 뜻으로 속어에 대한 아어(雅語)를 의미한다. 범어라고 한 까닭은 이 언어를 범천소설(梵天所說)의 언어라고 믿는 데에 있다.
《특질》범어는 명사·대명사 및 형용사의 성·수·격(性·數·格)의 어미변화로 주어·목적어 등을 나타내며, 또한 인칭·수·시상·법·태(人稱·數·時相·法·態)를 주로 동사의 어미변화로 나타낸다.
《문자》범어의 서사 인쇄에 쓰이는 문자를 데바나가리(Devan?gar?)라 부른다. 이 문자는 47자의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지며, 자음은 33자로서 언제나 모음(a)를 동반한다. 이 문자의 기원은 멀리 북셈계(Sham系) 문자로서 가장 오래된 페니키아 문자에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쓰는 셈문자의 특징을 보존하고 있다. 둘 이상의 연속자음을 나타내려면 그 자음문자를 연합하여 하나의 결합문자를 만드는 따위가 이 문자의 특징이다.
《문법》문의 구조에 있어서 주어가 선두에 오고 동사가 끝에 오며, 수식어는 피수식어에 선행한다.
2. 범어는 인도어도 북셈계어도 아니다.
이상의 설명을 보면 산스크리트나 범어라는 어의에 인도나 그 민족을 나타내는 의미가 전혀 없다. 고급 문장어라 함은 고급문장에만 쓰이는 언어로서 생활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수억이 되는 인도인 가운데 오늘날 범어를 쓰는 인구수는 겨우 1,000여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범어는 인도의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라는 사전의 기록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범어를 데바나가리라 하는데, '데바'는 천신(天神)이란 뜻이며, '나가'는 용(龍)이란 뜻으로서 데바나가리에도 인도를 상징하는 뜻이 전혀 없다. 더욱이 인도에는 천신이란 개념과 용이란 개념이 없으므로 천신 대신 제사를 뜻하는 브라흐만(Brahman), 또는 진아(眞我)를 뜻하는 아트만(Atman)을 종교적 최고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용 대신 뱀의 일종인 코브라 또는 물고기를 등장시킨다. 이를 보아도 범어는 원래 인도어가 아니라 외래어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범자는 북셈계의 페니키아 문자인가?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페니키아 문자의 자음이 22자인데" 범자는 자모가 47자, 자음이 33자로서 오히려 선대문자(先代文字)라고 하는 페니키아 문자보다 그 자모가 더 많다. 문자는 후대에 제작된 것일 수록 간소화되어 자모가 적은데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는 것도 북셈계 페니키아 문자만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고대 필순(筆順)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기 때문이다. {사전}에 대승경의 범자를 북셈계 페니키아 문자에서 기원되었다고 함은 서구인에 의한 서구중심적 발상을 그대로 기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범서가 있었다.
다음은 우리민족에게도 범서가 있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현재에도 원시사회가 있고 문명사회가 있듯이 상고시대에도 원시사회가 있는 반면, 문명사회가 있을 수 있다. 더욱이 그러한 사회에 합리적 성립종교가 있었고 경전이 있었다면, 당연히 문자가 있어야 한다. {태백일사}를 보면 "신시에 녹서(鹿書)가 있었고, 자부에 우서(雨書)가 있었으며, 치우에 화서(花書)가 있었다. 투전문속(鬪佃文束)은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도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에 신전(神篆)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글자와 글이 백산·흑수·청구 등 구려(九黎)에 널리 쓰여졌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문자와 글이 있었으며, 여기에 보이는 복희의 용서가 곧 범서인 것이다. 왜냐하면 범서는 이를 데바나가리라 하는데, 데바나가리는 용서(龍書)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복희의 용서는 곧 범서라 추정할 수 있고, 범서는 곧 복희의 용서라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기에도 고구려 동명성왕이 요동을 순례하던 중에 삼중토탑(三重土塔)을 발견하였는데, 그 밑에 묻혀 있던 명(銘)에도 범서가 쓰여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명에 쓰인 범서를 일연 승은 그 해설에서 서역문자라 함으로써 그 범서가 상고시대의 우리나라 문자인가, 아니면 인도에서 전래된 문자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시켰다. 삼중토탑을 발견한 때는 고구려 동명성왕 때로서 B.C.1세기 후반이다. 그때는 인도와 가까운 중국에도 석가불교가 전래되기 전이며, 우리나라에도 전래되기 전이다. 더욱이 그때는 대승불교마저 성립되기 전이다. 그러므로 삼중토탑을 석가불교의 불탑이라 할 수 없고, 명에 쓰인 범서도 인도에서 전래된 문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단기고사} 제12세 단제 편에 "지금 황해도 구월산의 마한촌에 고대의 국문비 (國文碑) 한 개가 존재하니 범문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이는 범어를 모르는 사람이 범서를 보고 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범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원시 대승경이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서 인도로 전승되었다고 할 경우, 원시 대승경에 쓰여진 범서는 당연히 우리민족의 범서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범어는 인도의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이고, 북셈계 문자도 아님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4. 범어는 우리민족의 언어와 동일하다.
그러나 실제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어의(語義)·어법(語法)·문자의 동일성 등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첫째, 범어의 어의가 우리말의 어의와 동일한 경우가 많다. 대승불교가 성립된 이래 대승경이 수차에 걸쳐 결집되면서 대승경에 쓰여진 범어의 용어가 인도어로 바뀌어 질 수도 있고, 우리민족의 어의도 2천여년 전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한문를 일상어에 병용하면서 변질에 변질을 거듭하였다. 그러므로 대승경 범서의 어의와 우리말의 동일성을 증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단어의 동일성을 몇 개 지적하면
- 석가세존의 열반지인 구시국(拘尸國)을 구시나라(拘尸那羅)라 하는데, '나라(那羅)'는 곧 국가를 의미한다. 우리말에서도 국가를 '나라'라고 한다.
- '차마(叉摩)'는 '참다(忍)'는 뜻인데 우리말의 '참다'와 같다.
- 파라사화(波羅奢華)는 '파란 잎'을, 파라니밀(波羅尼蜜)은 '파란 하늘'을 의미한다. 이를 보면 '파라'는 우리말의 '파랗다(靑)'와 같은 의미이다.
이와 같이 범어의 어의와 우리말의 어의가 동일하다. 이것 하나만을 보아도 대승경의 범어는 우리민족의 범어임을 추정할 수 있다.
둘째, 범어의 어법이 우리말의 어법과 동일하다.
- 범서는 그 문장구조에 있어서 감탄문을 제외하면 어떤 경우에도 주어가 선두에 오고 동사가 끝에 오며 수식어는 피수식어에 선행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우리말의 어법과 그대로 일치된다.
- 범서는 명사·대명사·형용사의 성·수·격이 그 어미 변화로 주어·목적어 등을 나타내며, 또한 인칭·수·시상·법·태를 주로 동사의 어미변화로 나타낸다. 우리의 언어도 범어와 같이 명사·대명사·형용사의 어미변화 즉 조사의 변화에 의해 주어·목적어 등을 나타내며(예컨대, 명사 또는 대명사에 "는·은·가·이"를 붙이면 주어가 되고, "을·를"를 붙이면 목적어가 된다), 또한 동사의 어미변화로 인칭·수·시상·법·태를 나타낸다(예컨대, 하였다·하다·할 것이다·하겠다·하라·하겠습니다·하자·합시다·하시오·되었다·되다·될 것이다·되겠다·되라·되겠습니다·되자·됩시다·되시오 등으로 변해서 인칭·수·시상·법·태를 나타낸다). 이 문제는 하나의 상식으로서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 범서는 자음마다 언제나 모음과 주로 (a)를 동반하는데, 우리의 언어를 표기하는 한글도 자음마다 언제나 모음을 동반한다. 그러나 모음 (葡)를 특별히 동반하지는 않는다. 이는 역사의 변천에 따른 음운의 변화 때문이라 할 수 있다.
- 고대의 범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는데, 우리민족의 고대 필순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다.
이상과 같이 범서의 어법도 우리민족의 어법과 그대로 일치한다. 여기에서 더욱 대승경의 범서는 우리민족의 범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셋째, 대승경 범자의 자형이 우리민족의 범자와 유사하다고 추정된다.
일연 승은 우리민족의 범자를 서역문자라 하였다. 이는 우리민족의 범자의 자형이 대승경의 범자와 동일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범자를 용서라 하여 그 글자 모형이 용 같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대승경의 범자가 일률적으로 용의 형상을 띠고 있다. 또한 "범자와 한글이 그 자형이나 자음에 있어서 서로 유사한 점이 많아 한글이 범자에서 기원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지금까지의 소론을 간략히 정리하면
- 대승경의 범어(범서)는 인도의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였다.
- 대승경 범자의 기원이 북셈계 페니키아 문자와 무관하였다.
-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범서가 있었다.
- 대승경 범어의 어의가 우리말의 어의와 같은 경우가 많았다.
- 대승경 범어의 어법이 우리말의 어법과 그대로 일치되었다.
- 대승경 범자의 자형이 우리민족의 범자와 동일하다고 추정되었다.
이상과 같으므로 원시 대승경의 범서는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범서라고 결론을 내려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더욱이 범어는 이를 천축어(天竺語)라고도 한다. 그런데 석가세존 이전의 천축은 우리나라 고조선인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범어는 당연히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언어라 할 수 있다.
Ⅷ. 인도에 우리민족의 문자와 언어가 있다.
1.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한글이 있었다.
종교란 위대한 성인이나 부처님이 불변적 진리에 입각해서 일반대중을 위하여 설하신 교육의 기본지침이요 인생이 나아갈 바를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곧 경장과 율장으로써 난해한 문자와 용어로 쓰여 있게 마련이고, 이를 서민대중을 위하여 간이한 문자와 평상어로 누구나 알기 쉽게 해설한 것이 논장이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위대한 성인이 설하신 종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함축적 의미의 종교문자와 간이한 상용문자가 있게 마련이다. 즉 한자나 범자와 같은 종교문자가 있는가 하면, 한글과 같은 상용문자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상고시대에도 한글과 같이 간이한 문자가 있어야 한다.
신채호에 의하면 단군조선 시대에 국문(한글)이 있었다 하고, {단기고사}에도 제3세 단군 가륵 2년 봄에 박사 을보륵에게 명하여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정선하였다고 하였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태백일사}에도 단군신전(檀君神篆)이 있었다 하고, {단군세기} 제3세 단군 가륵 2년조를 보면 고대 한글을 원형 그대로 밝혀주고 있다. 그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자 2년(B.C.2181) 시속(時俗)이 같지 아니하고 방언이 달랐다. 상형표의(象形表意)의 진서(眞書;漢字)가 있었으나 10가(十家)의 고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못하는 일이 많고 100리의 국가에서는 글자를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을 내려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니 이를 가림토라 한다(그 글에는 현대 한글에 없는 문자가 있고, 또한 콤퓨터에 없기 때문에 실치못했음. {한단고기} 단군세기 제3세 단군 가륵제조와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원문에 실려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람).
이와 같이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과 같은 가림토가 있었다. 또한 가림토의 모어로 보이는 최고형의 문자가 최근 만주와 경상남도 산청군 단속사터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현재의 한글은 어떻게 된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2. 한글은 세종대왕의 창제가 아니다.
세종어제훈민정음서문(世宗御製訓民正音序文)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신제(新製)하였다고 하였다. 신제란 구제(舊製)의 반대말로서 구제에 근거하여 새로 제작하였다는 뜻이다. 당시 집현전 학자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에도 고전(古篆)을 모방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하였고, 최만리의 상소에도 언문은 본래 옛 문자로서 새로운 문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세종 23년 갑자에 반포한 {세종실록} 103권에도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전 조선시대에 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하였으며, 또 계해 25년 12월조에도 "10월 초 친히 말글 28자를 만드시니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세종실록}에도 한글은 고조선(전조선)시대의 문자를 모방했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신선도는 三神五帝의 원리 곧 天地人 三才와 木火土金水의 五行을 발생원리로 한다. 그런데 훈민정음도 天地人 三才와 木火土金水의 五行을 발생원리로 하여 제작되었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도 신선도와 같은 원리에서 제작되었으므로 고조선의 가림토문자(단군신전)를 더욱 발전시킨 문자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새로이 만들기 이전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승경이 우리나라에서 인도로 전승되었다면 인도에도 고대 한글이 있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3. 인도에 우리민족의 한글이 있다.
그런데 남인도 구자라트주(州)의 간판에서 한글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신왕오천축국전(新往五天竺國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구자라트주의 간판에서 기이하게도 한글과 비슷한 글자를 발견하고 놀랐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글과 너무나 비슷하여 한글식대로 읽어나갈 수가 있었다. 독일의 어느 학자가 옛날에 한글이 인도의 드라비디안어와 닮은 데가 있다는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드라비디안어(語)가 아니라 구자라트어(語)를 잘못 알고 쓴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구자라트어에 한글의 모양과 많이 닮은 것은 자음 가운데 ? 遁 ? ? ? 걁 둁 등이고, 모음은 葡 蒡 ? ? ? ? ? ? ? ?의 열자가 꼭 같았다. 종자음(終子音) 즉 받침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다. 우리들은 구자라트에 있는 동안 소리를 내어 간판을 한글식으로 읽으며 다녔다.
이상과 같이 고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이 있었고, 남인도 구자라트주에 한글과 비슷한 문자를 쓰고 있다니, 그 문자는 고조선 시대의 한글이라 할 수 밖에 없으며, 신선도의 경전이 남인도에 전해짐으로써 고대 한글도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 외에 일본에도 가림토문자가 전해져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 문자가 되었는데, 이는 지금 일본 대마도(對馬島) 이즈하라(嚴原)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伊勢神宮) 등에 아직도 보관되어있다. 그 밖에도 2300년 전에 지은 스리랑카의 캔디시(市) 부근 패엽경사(貝葉經寺) 바위에도 사찰건립 당시에 쓴 것으로 보이는 가림토문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으며, 남미의 볼리비아 글자도 가림토와 비슷하다고 한다.
4. 남인도에 우리민족의 언어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전이 남인도에 전하여졌다면, 경전은 곧 문자화된 언어로서 우리민족의 언어도 남인도에 전해질 수 있다. 프랑스의 선교사 달레(1874년, 조선교회사:朝鮮敎會史)와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1906년, 한국어와 드라비다 제어의 비교문법)는 한국어와 드라비다어가 동계임을 주장하면서 지금도 드라비다어 가운데 우리말과 같은 말이 1300여개나 된다고 하였다. 예컨대, 우리말의 아버지는 드라비다어로 아바지(appacchi), 엄마는 암마(amma), 도령은 도렌(toren), 얼(정신)은 얼(ul), 꽁지는 꼰티(konti), 눈은 눈이(nuni), 목은 막(mak), 남(他人)은 남(nam), 님은 님(nim), 골(谷)은 골리(kolli), 도랑은 두라이(turai), 나라는 날(nar), 바람은 발리(vali), 그물은 굼(kum), 풀은 풀(pul) 등이다. 미국의 언어학자 클리핀저(Clippinger)도 인도 고대어인 드라비다어종(語種) 속에서 한국어의 수 많은 단어들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예컨대, 우리말의 쌀(米)은 드라비다어의 '살', 벼(禾)는 '비야', 풀(草)은 '풀', 알(粒)은 '아리' 등이다. 이런 유사한 단어들을 이 미국학자는 100개나 찾아내었다. 이는 조선일보의 보도내용이다.
Ⅸ. 불교는 신선도와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석가세존이 우리민족으로서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6년간 고행하고 성도한 후, 종지(宗旨)까지 받고 인도로 건너 갔다면, 그리고 불교의 대승경이 우리민족의 경전이라면, 석가불교의 원류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신선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선도와 석가불교에 있어서 그 기본사상이 서로 불가분적 동일성을 지녀야 하고, 그밖에 고유명사·전문용어·종교의식 등이 서로 같거나 유사하게 마련이다.
1. 기본사상이 동일하다.
우선 기본사상의 동일성을 지적한다.
첫째,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우주의 진여이법(眞如理法)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즉, 신선도는 천일(한늘님)·지일(한울님)·인일(한얼님) 삼신일체(三神一體)의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고, 불교에서는 법신불·보신불·응신불의 삼불일체(三佛一體)를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이는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에 해당하는 대우주의 진여이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 응신불에 석가불을 대응시키고 있으나, 응신불 역시 원래는 진여이법의 한 쓰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인간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지 않고, 우주운행의 근본원인 즉 진여이법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둘째,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3원론적 1원론이다.
신선도의 기본사상은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사상이며, 불교의 기본사상은 법신(法身)·보신(輔身)·응신(應身)의 삼불일체(三佛一體)사상이다. 곧 3원론적 1원론인 것이다.
셋째,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조화사상이다.
삼원론적 일원론은 일방의 중재에 의해 자타일여(自他一如)·물심불이(物心不二)·선악일체(善惡一體)·성속일체(聖俗一體)·개전일체(個全一體) 등 조화사상이 된다.
넷째,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순환론(윤회사상)이다.
윤회사상 역시 불교의 기본사상으로서 사계의 모든 학자들이 공인한다. 신선도의 삼신일체 사상도 공간과 시간에 있어서 시작도 끝도 없다는 순환론인데, {천부경}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과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및 만왕만래(萬往萬來)가 순환론으로써 신선도 역시 윤회사상인 것이다.
다섯째, 신선도는 곧 신선사상인데 불교 역시 신선사상이다.
신선이란 늙지 않고 오래 살며 자유자재로 몸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특이한 사람을 지칭한다. 그런데 불교의 비바시불은 8만4천세, 시기불은 7만세, 비사부불은 6만세를 살았다 하여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신선이라 하고, 아미타불은 무량수(無量壽)라는 뜻으로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이라 하며, 불(佛)은 신선 가운데 최고라는 뜻으로 대선(大仙)을 지칭한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을 교화함에 있어 신변자재하는데 33신(三十三身)이 있다고 한다. 지장보살은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몸을 6도(六道)에 나타낸다고 한다. 이래서 불경에 신선이니 선인이니 하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불교를 대선도(大仙道)라 칭한다.
이상과 같이 신선도와 불교는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서로 일치한다. 더욱이 고대 인도의 정통사상과 불교사상을 비교하여 보면, 고대 인도의 정통사상은 다신론적 일신론(多神論的 一神論)으로서 창조론(創造論)인데, 불교는 범신론적 무신론이며 윤회사상이다. 불교와 인도 사람들의 사유를 비교하여 보아도 불교는 생명평등 내지 인간평등 사상인데, 인도 사람들은 바라문·찰제리·바이샤·수드라의 불평등한 4성계급(四姓階級)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불교는 원래 대승적이어서 관대하면서도 강경하고 온유하면서도 엄격하다. 그래서 정의에는 순응하고 불의에는 항거하는데, 인도 사람들은 대체로 만사에 순응하고 무저항적이다. 또한 불교가 인도 사람들의 사유나 성격적 욕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어떤 위기에 부닥쳐 일시 쇠퇴하였다 하더라도 기회가 호전되면 다시 소생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교의 침입에 의하여 불교와 힌두교가 다 같이 박해를 받고 멸망하게 되었지만 힌두교는 다시 부활되어 현재 인도 전체 인구의 태반(83%)을 신자로 하고 있는데, 불교는 인도 전역에서 거의 그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외국 사람들이 근래에 이르러 세운 사찰만이 몇 곳에 있을 뿐이다.
이를 보아도 불교는 원래 인도사상이 아니며, 석가세존의 독창도 아니라, 우리민족의 신선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의 기독교가 유태교에 바탕을 두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 고대 그리스의 밀교인 orpheus교를 배경으로 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는 것이다.
2. 고유명사와 전문용어가 동일하다.
대승경이 인도에 전승된 이래 몇 번에 걸쳐 결집되면서 경전의 용어가 인도화되었다 하더라도 어쩌면 산명(山名)과 지명(地名) 등 고유명사는 발음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다. 이러한 착안에 따라 불경에서 우리의 고유명사와 전문용어를 찾아보기로 한다. 그러나 필자의 고어지식(古語知識)의 부족으로 한계가 있고, 참고문헌은 {화엄경} 일부와 우리말 사전임을 밝혀둔다.
첫째, {화엄경}에서 발견된 우리의 고유명사를 예시하면, 단군조선 시대부터 천신제를 지내던 강화도의 마니산(摩尼山), 신라의 네 신선이 유오(遊娛)하던 강원도의 금강산, 인삼의 고장을 지칭하는 진단(震旦), 신라의 옛 이름인 시라(尸羅), 유리이사금 때에 지었다고 하는 도솔가의 도솔(兜率), 그밖에 오대산(五臺山)·우두산(牛頭山)·가야(伽倻) 등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본서의 소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할 경우, 우리나라의 지명이나 산명이 불교가 전래된 이후 그 영향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니냐 하고 반문할 수 있다. 불교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되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서기 372년인데, 위의 산명과 지명들은 그 이전부터 있었거나, 아니면 자연적인 지형이나 지리적 조건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예컨대, 금강산은 개울에 사금(沙金)이 흐르고 멀리서 보면 금빛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써 그 시원을 알 수 없고, 시라(尸羅)는 B.C. 57년 신라 건국초의 옛 이름이며, 가야는 {신교총화(神敎總話)}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승려들의 수도생활에서 유래된 이름으로써 김수로왕의 금관 가락국 건국 이전 즉 서기 42년 이전부터 있던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이름이다. 마니산은 경기도 강화에 있는 산으로서 '마니'는 산의 돌이 탄탄하여 그 빛을 멀리서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할마니·어마니·심마니·어인마니"의 마니로서 수호신 같은 의미를 지닌 우리민족의 고어이다. 진단은 한자로 震旦·震檀·震丹·振旦·眞丹 등 여러가지로 표기되는데, 인삼의 고장을 상징하는 우리나라의 이칭이다.
이렇게 볼 때, 상기의 산명과 지명이 불교의 영향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볼 수 없다. 또한 산명이나 지명 등 고유명사는 어느 책이나 경전을 보아도 원래의 이름을 그대로 기재하고 임의로 번역하여 기재하지 아니한다. 더욱이 가야를 제외하면 그러한 산명이나 지명이 인도에 없으니 절대 불교의 영향이라 볼 수 없다.
둘째, 신선도에 한웅천황 이전 칠세(七世) 한인이 있었는데, 불교에도 석가불 이전 칠불(七佛)이 있었으며, 칠세 한인 가운데 한분의 명호가 석제임한인(釋提壬桓因)인데, 불교에서 33천의 주신을 석제한인(釋提桓因)이라 한다. {삼국유사} 황룡사장육편을 보면 우리나라에 가섭불(迦葉佛)이 있었는데, 불교에도 가섭불이 있다.
셋째, 신선도의 본당 명칭이 대웅전인데, 불교의 본당 명칭도 대웅전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1편에서 상설하였다.
넷째, 신선도는 단군조선에 와서 특히 발전되었으므로 단(檀)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 신도를 단도(檀徒)라, 신도의 집을 단가(檀家)라, 시주(施主)를 단월(檀越) 또는 단나(檀那)라, 가장 큰 목향을 전단(?檀)이라 한다. 전단과 백단(白檀)으로 만든 불상을 단상(檀像)이라, 석가세존이 입산수도한 산을 단특산(檀特山)이라 한다. 이와 같이 불교용어에 단(檀)자를 많이 쓰고 있다.
다섯째, 신선도에 '三'수가 가장 기본수여서 '三'으로 된 전문용어가 많다. 예컨대, 삼신일체(三神一體)·삼극일체(三極一體)·회삼귀일(會三歸一)·집일함삼(執一含三)·삼일신고(三一神誥)·삼륜(三倫)·삼강(三綱)·삼진(三眞)·삼문(三門)·삼관(三關)·삼방(三房) 등이 있다. 불교에도 삼불일체(三佛一體)·삼승즉일승(三乘卽一乘)·회삼귀일(會三歸一)·집일함삼(執一含三)·삼계일체(三界一體)·삼각(三覺)·삼관(三觀)·삼론(三論)·삼보(三寶)·삼장(三藏)·삼혼(三魂) 등 많다. 이외에도 유사한 전문용어가 많으나 번잡하므로 생략한다.
여섯째, 불교에서 출가교도를 승(僧)이라 하는데, 신선도에서도 출가교도를 화랑(花郞) 또는 조의(?衣)라 하는 외에 승(僧)이라 한다.
일곱째, 대체로 고유명사와 전문용어의 발음을 보면, 우리의 발음이 지나족의 발음보다 원어(범어)에 더 가깝다. 예컨대, 석가모니(釋迦牟尼)를 예로 들면, 범어로 "샥까무니(Sakga-Muni)", 지나어로 "씨지아모우니(Shigia-Mouni)", 우리말로는 "석가모니"이다. 불타(佛陀)는 범어로 "붇다(Budda)", 지나어로 "호뚜오(Fotuo)", 우리말로는 "불타"이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의 발음이 원어(범어)에 더 가깝고, 지나족의 발음은 원어(범어)와 거리가 멀다. 그 이유를 지나족의 발음이 시대에 따라 변화한 때문이라 할지 모르나, 한자의 발음기호(반절음;反切音)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고유명사와 전문용어의 발음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발음이 지나족의 발음보다 원어에 더 가깝다는 것은 대승경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 아니라, 인도에서 우리나라로 직접 전래됐거나,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인도로 직접 전승됐음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대승경의 고유명사와 전문용어가 우리민족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것 역시 불교의 원류가 신선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신선도의 천산과
불교의 수미산이 동일하다
신선도가 우리나라 백두산에서 한웅천황과 단군왕검에 의하여 설해지고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그 시원을 찾아 올라가면 그 최초의 발상지는 중앙 아시아의 천산(天山)이다. 또한 석가불교는 이 세상 중앙에 높이 솟아있다고 하는 수미산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천산에 대한 중앙 아시아 칼마크인(Kalmuck人)의 전설과 수미산에 대한 불교의 전설을 비교해 보면 두 개의 산이 그 특수성에 있어서 서로 동일하다.
- 중앙 아시아 칼마크인의 전설에 천산이 물(淡水) 밑으로 8만 리그(league) 뻗어있고, 물 위로 8만 리그 솟아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물(바다) 밑으로 8만 유순 뻗어있고, 물 위로 8만 유순 솟아있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의 높이가 물의 밑과 위로 8만 유순(리그)이라 함이 동일하다.
- 칼마크인의 전설에 천산의 남면은 청(靑), 서면은 적(赤), 북면은 금(金), 동면은 은(銀)의 광채를 발산한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사보(四寶)로 이루어져 남면은 유리, 서면은 파리, 북면은 황금, 동면은 백은으로 이루어져 해와 달이 그 주위를 회전하면 보광을 발산한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이 모두 그 동서남북에서 금은주옥의 보광을 발산한다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의 주위를 7개의 산이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그 주위를 7개의 금산(金山)이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즉 7개의 산이라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의 주위를 둘러싼 7개의 산 사이에 7개의 물(淡水)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그 주위를 둘러싼 7개의 금산 사이에 7개의 물(바다)이 있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이 모두 7개의 물로 둘러 싸여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을 둘러싼 마지막 산맥 밖을 소금물 바다(大洋)이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마지막 금산 밖을 짠물바다(鹹海)가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천산과 수미산의 외곽이 모두 소금물바다 곧 짠물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을 둘러싼 소금물 바다 주위를 철위산(鐵圍山)이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짠물바다 밖을 철위산이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의 짠물바다(대양) 밖을 모두 철위산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의 4방에는 소금물 바다 위에 하나씩의 땅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을 둘러싼 짠물바다 위에도 4대주가 있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의 주위에 4대주(四大州)가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이상과 같이 천산과 수미산은 서로 동일하다. 이는 곧 천산이 수미산이고 수미산이 천산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신선도와 불교의 발상지가 동일함을 의미한다. 이를 보아도 불교는 신선도의 한 유파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상해에서 간행된 {산해경} 해내경 원본을 보아도 여러 전거를 들면서 조선을 천독(天毒) 즉 천축(天竺)이라 하고, 불도(佛道)가 그 나라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Ⅹ. 결 론
이상 논한 본편의 소론을 요약 정리하면
1) 석가세존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우리나라에서 고행성도한 단군족으로서 근본적으로 한국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석가세존은 인도 사람이 아니다.
2) 석가세존이 고행성도한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으로서 인도의 부다가야는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아니다.
3) 석가세존이 초전법륜지인 녹야원은 인도 중부의 사르나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제주도 한라산이다.
4) 대승경의 출처는 바다로서 우리나라 고조선이다.
5) 대승경의 범서는 인도의 문자도 언어도 아니라, 상고시대 우리나라의 글자와 언어이다.
6) 남인도에 우리나라의 고대 한글과 언어가 있다.
7) 신선도와 불교의 기본사상이 전적으로 일치되고, 의식도 유사하다. 그밖에 대승경에 있는 산명과 지명이 인도에 없고, 우리나라에는 있다.
8) 불교의 수미산과 신선도의 천산이 동일하다.
이상을 근거로 결론을 내리면 석가불교의 원류는 전적으로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배달사상인 신선도라 할 수 있다. 이를 대소승불교로 나누어 말하면, 소승불교는 신선도를 바탕으로 성립된 신선도의 지류라 할 수 있고, 대승불교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신선도와 동일한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우리나라에 있는 대승불교는 비록 외래종교라 하더라도 역수입된 고유종교라 할 수 있고, 불교인들은 실재에 있어서 외래종교 신자가 아니라 고유종교 신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이란 백지에 글을 쓴 격이니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신심(信心)이 두터우면 두터울 수록 제 신앙만을 고집하고, 조국도 민족도 부모형제도 신앙 다음으로 친다. 냉정히 자신의 신심을 반성하여 보자. 석가모니는 따지고 보면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다른 나라 사람 곧 인도 사람이라 믿어왔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인 석가모니를 절의 가장 중앙 대웅전에 안치하여 조석으로 공양하면서도, 제 민족의 국조이시고 대성인이신 한인·한웅·한검을 모시고 있는 절도 얼마 없거니와 모시고 있다 하더라도 대웅전 밖 어느 한쪽 모퉁이에 방치하고 있다. 이는 주인을 내쫓고 손님을 안방에 안치한 격이며, 선배를 무시하고 후배를 높이는 격이 아닌가? 제 조상을 옆에 두고 남의 조상에게 의지하는 격이며, 제 부모를 박절하고 남의 부모에게 매달리는 격이 아닌가? 그것이 과연 윤리도덕에 부합되는 일인가? 애국적인 행동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 땅에서 한국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살면서 외국을 동경하고 외국종교를 믿고 외국 사람을 신봉하는 것이 과연 이치에 합당한 일인가? 그것이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요는 석가세존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석가세존이 단군족의 후예라는 사실과 불교가 원래부터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 제 민족의 국조이시고 성인이신 한인·한웅·한검을 대웅전에 석가세존과 함께 모시고 섬기라는 것이다.
깊이 자성하고 신심이 원시반본(原始返本)될 때, 비로소 외래종교 신자라는 허탈감에서 해방되어 참다운 신앙을 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참다운 신앙을 할 때, 자신과 가정에 기쁨과 행복이 오고, 견성성불할 수 있으며, 국가적으로는 1천 2백만 애국동포를 얻는 것이 된다. 또한 그리 될 때, 불교계도 자연적으로 의식개혁을 하게 되어 부처님의 자비가 내리고 7천만이 하나가 될 수 있고, 아울러 국토통일만이 아니라 사상통일까지 이루게 되어 민족의 전도가 밝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불교계의 각성과 공식적인 수용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