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군(丹城君) 우공(禹貢)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상례(常例)와 같이 하였다. 우공은 자(字)를 현규(玄圭)라 하며, 고려(高麗)의 시중(侍中) 우현보(禹玄寶)의 후손이고, 증 우찬성(贈右贊成) 우수로(禹秀老)의 아들인데, 젊었을 때에 효용(驍勇)으로 일컬었었다. 정통(正統) 계해년에 내금위에 소속되고, 갑자년에 무과 제 2인으로 급제하고, 정묘년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축두포 만호(丑頭浦萬戶)에 제수되고, 경태(景泰) 계유년에 제위 진무(諸衛鎭撫)에 제수되었다가 곧 경원 판관(慶源判官)에 제수되고, 병자년에 갈려서 군기 판관(軍器判官)이 되고, 천순(天順) 정축년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제수되고, 경진년에 갈려서 훈련원사(訓鍊院使)에 제수되었다. 그때 북쪽 변방에 경급(警急)이 있었는데, 세조(世祖)가 우공의 무용(武勇)을 인정하고 당상관(堂上官)에 초승(超陞)시켜 갑산(甲山)의 요해지(要害地)에 보내어 방수(防戍)하게 하였다. 계미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자(陞資)되고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상(喪)을 당했는데, 상기(喪期)가 끝나기 전에 기복(起復)하여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자되고 의주 목사에 도로 제수되었다. 성화(成化) 정해년 여름에 죄로 불려와 하옥(下獄)되었는데, 마침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특별히 명하여 공을 세워서 죄를 속(贖)하게 하고, 따라서 화차(火車) 쓰는 법을 묻고서 화차장(火車將)으로 삼아 그날로 길을 떠나 정벌하러 가게 하였다. 이시애가 주살(誅殺)되니, 정충 적개 공신(精忠敵愾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자하고 단성군(丹城君)을 봉(封)하였다. 또 건주(建州)의 적(賊)을 토벌하였으므로, 장획(臧獲)을 내리고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를 제수하였다. 경인년에 갈려서 상호군 겸 도총부 도총관(上護軍兼都摠府都摠管)에 제수되고, 신묘년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그대로 단성군을 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9세였다. 양장(襄莊)이라고 시호(諡號)하니, 갑주(甲胄)에 공로가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하고, 적에게 이기고 뜻이 굳센 것을 장(莊)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