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광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매니아중의 매니아. 그래서 내 직업은 시나리오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난 이 직업이 내 천직이라 생각하고 또 사랑한다. 그리고 이 직업에 충실하게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이 내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이다. 내가 오늘 이렇게나 기쁜
이유는 바로 그 구하기 힘들고 힘들다던 경의의 영화 [큐브]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어디
에서 누구로부터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고, 또 그 본판은 대부분 사라져 데모 테입 몇 몇 개
만 남아있는 환상의 영화. 굉장히 오래됐다는 것과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만이 전부
인 필름을 내가 오늘 손에 쥐었다.
"이거 기대되는걸?"
난 그러면서 비디오 재생기에 테입을 넣었다. 지금은 서기 4530년도. 아마갯돈 한 차례를 인
류의 과학으로 멋지게 이겨낸 뒤 500년이 지난 시대이다. 따라서 이런 구형 비디오테입은
더 이상 쓰지 않지만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내가 준비해둔 재생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공중에 화면이 부유하고...
난 그 장면 하나하나를 천천히 감상하였다.
끔찍한 영화였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뇌리에 강하게 박힐 만치 인상깊은 영화였다. 인간들
이 하나하나 죽어 가는 그런 상황을 묘사해놓은 것. 그 절묘한 인간들의 심리묘사와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하나 하나의 장치들은 완벽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건 인간들이 깨어난 시점에서 영화가 시작됐다. 한 명 한 명씩 눈을 뜨고 그들은 모두 이
상한 방안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닫는다. 정육면체 방에 갇힌 그들은 면마다 나있는 문을 통
해 또 다른 정육면체의 방으로 옮겨갈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정육면체의 방으로 가도 또 다
른 정육면체의 방이 있기 때문에 그 미로 같은 곳에서 빠져나가기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
다.
게다가 단순히 그런 것이라면 내가 이리 감탄하지도 않는다. 또 하나의 무대장치는 바로 함
정이었다. 그냥 무작정 방을 넘나들다가는 그만 함정에 걸려 죽기 십상이게 설정해 놓았고
함정도 별의 별 가지가 다 있어 왠만해선 그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
다. 체온을 감지하여 황산을 뿌리는 장치라든지 가느다란 보이지 않는 실로 사람을 완벽하
게 조각 내는 것이라든지... 또는 소리를 이용하여 수많은 가시가 나오게 하는 방이라든지...
어쨌든 그 무섭고 끔찍한 방들을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던 천연한 주인공 몇 명이 현실의
공포감에 떨면서 헤쳐나간다. 어떤 것이 이루어질지 모르는 공포감. 그걸 절실히 표현한 배
경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우선적으로 몇몇의 주인공들이 한 방에 모인다.
아니 필연이라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아주 절묘하게 꾸며진 무대와 그에 어울리게 캐스팅된 주인공.
하나하나 역할을 다해가면서 그 공간의 정체를 파악해가는 절차.
그 우연과 사소한 갈등 그리고 심리적 불안감은 영화의 재미를 더욱 증폭시키고 상상도 못
할 반전과 또 그러한 것들을 꾸며나가는 타당성은 심히 입을 다물지 못하는 힘을 가지고 있
었다. 적어도 단순한 나에겐 아주 효과적이었다. 손에 땀이 마구 날 정도로...
"와우..."
보호와 애정을 상징하고 인간 존중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 같은 여의사와 침착하고 합리적이
지만 그 아픈 상처를 감추려고 강한 모습을 지니는 형사. 그 둘간의 싸움에서 서로의 불합
리한 모습이 적절하게 표출되고 나중에 그것은 형사의 퇴폐성을 드러나게하는 결정적 계기
이자 요인이 되고...
여의사의 목숨이 형사의 손에 좌우되는 순간. 형사는 자신이 사람을 구했다는 사실에 엄청
난 동지감과 자부심과 또 순수한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불과 몇 초 사이에 악마성이 눈뜨
고 비밀리에 하면 된다라는 거짓된 타당성을 바쳐 여의사를 떨어뜨리게 된다.
난 그것을 그 형사의 도덕적인 요소를 손을 놓아 떨어뜨림으로 인하여 인간으로써의 자신을
버렸다는 의미도 된다고 나름대로 정의 내렸다.
더욱 대단한 것은 선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
아니 그 영화 자체.
처음에는 가장 침착성을 자랑하던 형사 역할의 인간이 나중에는 힘에 대한 과신과 그 믿음
그리고 온갖 의심과 커져 가는 횡포 그리고 억측으로 폭군이 되어 파멸해 가는 그 실체를
폭로하였고, 처음에는 약하디 약해 보이며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은 점차 그 두려움 속에 떨
면서도 그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민주주의적 원칙을 중시하고 인간 존중 사상을 지켜가는 강
인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누구든지 파괴적 요소와 자비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파멸보다는 자비의 요소를 갖추어야만 우연이라도 아주 큰 일생의 요
소(저능아를 살려줌으로 인해 안전한 방으로 옮겨갈 수 있는 계산 방법을 찾아냄.)를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려주고 있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삶의 추구심정은 악이나 선이나 다를 바가 없으며 그것이 나쁘다는 것
은 아니지만 거기에 도덕적인 마음을 갖추면서 추구하느냐에 따라 현실이라는 존재가 판단
해주는 선악이 구분된다.
"그런 거로군..."
영화를 보다가 가끔 중얼거리는 건 내 버릇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아주 자연스
런 버릇. 어릴 때 가끔 디즈니 만화를 보면서 고개를 끄떡이는데 이 버릇은 시작된걸로 기
억한다.
그 현실에서 동떨어진 가운데 업치락 뒷치락 벌어지는 인간 관계들은 놀라울 다름이었다.
난 정말 까무라칠 정도였다.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이제 한 발작만 나가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 처음부터 삶
에 대한 포기를 하고 있는 남자와 삶에 대한 열망 아닌 열정을 간직하며 헤어나오려는 여자
와의 미묘한 사랑이 표출되고... 나가기를 거부하려던 남자를 설득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여
자는 형사(폭군의 부활) 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앗!"
이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의성어를 내질르고야 말았다.
이 것은 삶을 포기함으로 인해 악의 부활 기회를 주어줌이요.
그 사소한 실수로 인해 삶의 의지가 상실됨을 나타냄이요.
또 그 삶의 의지를 죽이는 악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현함이요.
삶의 현실을 거부하던 영혼의 반대적인 마음과 또 남을 위하는 마지막 손길이였다.
그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내포하는 클라이막스 부분은 영화제작을 추구하는 나로 인하여
그야말로 경외의 마음을 심어주었다. 특히 가장 인상적인 영화 마지막 몇 초. 유일하게 그
공간에서 살아나간 것은 선악의 구분이 아예 없는 저능아 중의 저능아.
하지만 머리는 천재인... 세상을 모르는 중립의 자만이 세상을 잡는 장면.
끝은 거기서 나기에 그 저능아가 과연 현실에 제대로 적응했는지 유무는 알 수 없다. 하지
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내 추측이다. 현실을 잡았지만 현실이 응할 것인가는 알수가 없다
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나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이건 정말 멋진 영화야."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뭔데 그래?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아아 별건 아닌데..."
어느센가 내 절친한 민우가 들어와 앉아있었다.
"영화? 이런 영화광... 또 재미있는 거 하나 잡은 모양이구나."
"응... 놀라운걸? 정말 마음에 들었어. 아이 씨... 나는 왜 이런 걸 상상 못하지?"
"뭔데 그래."
그는 나의 이런 선망 섞인 중얼거림에 흥미를 느끼는 듯 내 뒤로 다가섰다.
"아니 이게 원래 아주 귀한 영화거든.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모를 만큼 까마득한 옛날에 만
들어진거래. 정말 희귀한거야. 그래도 무리해서 입수한 보람이 있어."
내가 그렇게 넌지시 말했다. 그리고선 살며시 민우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나도 봐도 되냐?"
라고 그가 물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억누를수 없
는 본능이 있음을 나는 잘 안다. 때문에 나는 거기에 걸고선 이 대답을 유도해 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묻지 않아도 보여줄 생각이었다. 아니 보겠다고 하지 않으면 내가 억지로라
도 보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 한번 보여줄게. 돈드는 것도 아니니..."
난 그렇게 말하고선 테잎을 감았다. 그리고 그 처음과 끝까지를 아무런 설명 없이 조용히
보여주었다. 내가 느낀 바를 내 친구 역시 느꼈으면 하는 바램과 그 기대 때문이었다. 나와
는 아주 잘 맞는 친구였고 또 그렇기에 내 친구였다. 그라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
인지를 알아 줄 것만 같았다.
이윽고 대략 두시간 가량이 흘렀다. 이제 마지막 부분이다. 악은 소멸되고 그리고 선또한 종
결을 얻었다. 저능아가 하얀 빛을 통과해 나가며 영화 화면은 순간에 암흑으로 변하였다.
두 번을 봐도 환상적인 영화.
난 두손을 불끈 쥐며 말했다. 세상은 온통 흥분으로 휩싸여있었다.
"어때?"
난 어른답지 못하게 그만 묻고야 말았다. 그것도 영화가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내
가 생각해도 쫌 부끄러웠지만 우선 대답을 듣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와 대화를 통해 이 환
상적인 심리를 적극적으로 토론해 보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내 욕구를 충족시키
고 싶었던 거다.
"글쎄..."
하지만 내 죽마고우 민우의 말은 쫌 예상 밖이었다. 내가 처음 들을 거라 생각했던 말은
[훌륭해!] [놀랍군!] [완벽해!] 뭐 이런 감탄사 정도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빗나가
서 글쎄라는 애매한 대답만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끝머리가 현저히 흐려지는 걸로 말이
다. 실망이 컸다.
"왜?"
"아니 그게..."
그는 나에게 실망감을 안겨줘서 미안하다는 듯 살며시 내 눈치를 살폈다. 내 모습이 어땠는
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 당시 흥분을 했었다는 건 확실했다. 민우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
다.
"아니... 정말 훌륭해 심리적이라면 나무랄 것이 없을 것 같아."
"근데 왜?"
"근데.............. 왜 하필 인간이었을까? 인간이라는게 이해가 안돼. 재미가 반감되잖아."
"그렇긴 해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인간이 죽어봤자 소나 돼지들의 절망을 그린 것과 마찬가지. 인간
을 넣지 말고 우리 어용족(魚容族)들을 넣었다면 훨씬 재미있고 끔찍했을 거야. 리메이크해
보면 어떨까?"
민우는 어금니를 갈면서 말했다.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긴 했지만 고지식한 그로썬 용납이
안된다는 의미였다. 안타까운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도 아가미가 다 벌어질 정도로 크게
한숨을 쉬고선 말했다.
"나도 그 부분에선 아쉬워.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만약 인간이 이 세상을 지배
하고 있다면 인간이 죽는게 가장 끔찍한 행위였겠지."
민우는 내 그런 관용적인 말을 미끄러운 꼬리로 가로막았다. 긴 손톱과 꼬리를 동시에 움직
이면서 그건 말도 안되는 것이라는 제스쳐를 취하였다.
"야야. 그건 가정하잖아. 인간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식량일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안된
다고. 만물의 영장인 우리 어용족과 하등한 인간과는 엄연히 다른 거라고. "
"하지만... 인간들도 저리 고통스러워하는데...이 영화만 봐도... 그리고 도살장을 가보면 울음
소리가 넘친다잖아. 그들과 우리가 다른게 뭐가 있을까?"
"이 자식이 아직도 ...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결국 멍청하다는게 가장 큰 죄악이라고...
그리고 그 죄악을 지고 사는게 동물들이고. 그리고 말이지 우리가 동물 정도 죽는 것에 일
일이 죄책감을 가질 수도 없는 거야. 그래가지고 어떻게 살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