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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61호 불기 2569년(2025년) 6월 29일 정기법회
일요법회를 위한 배너가 출입문에 세워졌고, 법회보를 나누며 형제들을 맞이하고 데스크 안내 봉사, 사무국에서도 백중입재 접수로 바쁘다,
엘리베이터 안내 봉사 하시는 보살님, 불편하신 형제분의 휠체어를 밀어 엘리베이터 안으로 도와드리고 계신 혜안 거사님. 수고 하셨습니다.
떡과 생수는 송파 18구, 19구, 20구, 21구에서 보시하시고 임원들이 나눔 봉사도 하고 계십니다..
법당안내팀 여러분도 봉사 준비하시고 데스크에 자리하고 계십니다.
법회 참석차 혜담스님께서 도착해 계시고, 천수경을 독경하시고 다도팀은 차를 내리고, 합창단 선생님들께서도 아침 연습 후 법회 준비 중.
법회 시작 전에 현진 거사님께서 천수경 독송을 하여 법당을 맑히니 특별하게 오늘은 방송으로 울림있는 종소리로 타종을 대신하였습니다.혜안 거사님의 사회로 부처님 전에 헌향, 헌다를 올리며 법회가 시작 되었습니다.
일요법회에 참석하신 불광 형제들이 법회를 보고 계신 모습입니다.
금주의 법사 : 전 건국대 철학과 성태용 교수
금주의 법어 : 부처님 회상의 수많은 보살은 누구인가?
제가 청법가를 받고 나면 얘기를 못하겠더라구요. 거룩한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아이구 저는 어디 가서도 받아본 적이 없고 늘 불교계에서 활동하다 보니 이렇게 가끔 제가 법석에 앉기도 하는데 제가 법사라고 자부해본 적은 없어요. 늘 도반으로서 철학공부한 것을 같이 나눈다는 생각이지 법사라고 자부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님들께 그런 위의는 바쳐야된다고 늘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유마경을 소재로 해서 얘기해드리려고 왔는데 유마경은 저하고 좀 독특한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가장 제 생애에서 불교의 지남, 나침판이라고 할까하는 어떤 좌표를 정해준 것이 유마경 같습니다. 예전에 불교회 활동할 때 도반들과 유마경을 윤독으로 서너 번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중심이 되어서 윤독을 했는데 제가 가장 큰 도움을 받고 계속 아마도 유마경의 가르침 연장선 위에서 제가 불교를 이해하고 활동을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청법가와 연관되어서 하나 생각나는 게 있네요. 유마경을 윤독하면서 제가 아주 감명 깊었던 대목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듯이 유마경은 아주 독특한 경전입니다. 유마거사가 중심이 되어서 경의 첫머리부터 부처님의 10대 제자가 전부 유마거사한테 법으로, 부처님의 진리 문제에 관해서 야단을 맞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전이 유마경입니다. 그런 경전을 읽으면서 제가 놀랐던 것이 유마거사가 그렇게 당당하게 스님들과 법을 거량하고 다투는데 한 번도 스님들께 행하는 위의를 소홀히 한 적이 없습니다. 스님을 만나는 대목에서 스님 발에 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거기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 유마거사가 그렇게 당당하게 진리 문제를 다투더라도 스님 발에 절하는 위의를, 말하자면 삼보라고 할 때 스님, 출가자에 하는 위의를 전혀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감명을 받았죠.
나중에 법보신문에서 연두에 특집으로 ‘불교 내에서의 평등’이라는 제목으로 저한테 글을 써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어서 꽤 큰 분량이라 그게 생각이 나서 유마경을 다시 봤어요. 그랬더니 ‘스님 발에 절하고’가 없어요. 내가 분명히 읽었는데 왜 없는가 했더니 본이 달라요. 지금 우리가 읽는 유마경은 구마라집 스님이 번역한 본입니다. 현장 스님이 번역한 유마경에는 ‘발에 절하고’가 나오고, 구마라집 본에는 안 나옵니다. 저는 현장 본을 믿습니다. 구마라집 스님은 거의 외어서 죽 얘기한 거라 우리에게 아주 쉽게 들어와서 구마라집 스님 번역이 많이 읽힙니다. 금강경도 대개 읽는 것이 구마라집 삼장스님이 한 것이죠. 현장스님은 오히려 축자번역이 많아서 오히려 쉽게 들어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정확하게 번역을 했다는 데에 저는 동의를 합니다. 구마라집 본에 없는 아주 귀중한 단서도 현장 본에서 발견되는데 저는 현장 본이 ‘발에 절하고’라는 위의를 갖춘 대목을 존중합니다. 스님들을 그렇게 존중하면서도 스님들에 아주 당당한 두 개의 자세, 어떤 위의를 갖추는 것과 평등의 문제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가 저는 유마경에서 상당히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면서 유마경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마경은 여러분이 아시듯이 지금 얘기했듯이 거사가 중심이 된 경전입니다. 그리고 유마경을 한 번 읽고 난 분들은 좀 죄송한 얘기지만 다른 경전은 심심합니다. 재미가 별로 없습니다. 유마경처럼 드라마틱하고 아주 휘황한 경전은 없습니다. 딴 세계를 몇 번 오가고 딴 세계에서 사자좌를 빌어오기도 하고 밥을 가져오기도 하고 딴 세계를 하다못해 이 세계에 겹쳐놓기도 합니다. 무대의 전환 자체가 아주 찬란해서 하나의 대서사시, 희곡을 보는 것 같아요.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장대한 구도가 있고 또 유마경은 정말로 여러분이 유마경을 읽으면 놀랄 정도로 칼칼한 경전입니다.
유마경은 어떤 성격의 경전이냐? 소승과 대승이 막 나와서 갈등이 벌어지죠. 부처님의 가르침을 두고 새로운 견해가 제출되었을 때 그것을 기존의 불자들이 쉽게 받아들였을까요?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대승과 소승 사이에는 굉장히 큰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갈등이 벌어졌을 거라 생각하고 기성의 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주 날카로운 비판이 대승에 있고 기성의 불자들이 그것을 쉽게 순응하지 못할 때 얼마나 큰 갈등이 있을까를 여러분은 생각하셔야 합니다. 경전을 읽을 때 너무 경건하게 읽어서 경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걸 저는 싫어합니다.
제가 유마경을 얘기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어떡하다 보니 유마경에 대한 책을 하나 썼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깨닫는 유마경 강의’라는 연재물을 정리한 책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누누이 강조한 것이 경전을, 불경을 좀 불경스럽게 다루었다고 얘기합니다. 너무 경건주의에 빠지지 않고 좀 자유로운 해석을 해보자는 시각에서 저는 글을 썼습니다.
여러분이 경건하게 가장 많이 읽으시는 경전 가운데 하나가 금강경이죠. 금강경을 한 번 예로 들겠습니다. 경 그대로 일자도 옮길 수 없다. 대승경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승경전은 우리가 존중하지만 굉장히 융통성 있게 읽어야 할 대목들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장아함경을 읽다가 어떤 가르침을 얘기하면서 이게 진리로 자명하다는 얘기에서 이 자명함은 어느 정도냐 하면 ‘손으로 손을 씻고 발로 발을 씻는 것처럼 자명하다’는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듣기에 어떠십니까? 손으로 손을 씻고 발로 발을 씻는 게 아주 자명합니까? 손으로 발 닦으신 적 없으세요? 있으시잖아요. 이게 어떻게 자명해요? 디가 니까야라는 범어 완역본을 읽다가 의심이 바짝 들어서 한문 장아함경에서 그 대목을 읽었더니 그 말이 없습니다. 빠져 있어서 불교학자들에게 물었더니 두 가지 견해가 가능하대요. 번역자가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적당치 않다고 해서 뺏을 수도 있고 본이 달랐을 수도 있는데 그 학자는 번역자가 약간 재량을 발휘해서 뺏을 수도 있다고 얘기를 했어요.
여러분이 읽는 금강경, 범어본 금강경은 어떤 줄 아세요. 부처님이 사위성 중에서 탁발하고 돌아와서, 환지본처하셔서 부좌이좌하시고 밥을 드셨다고 하죠. 범어본 금강경에는 밥을 드시고 돌아옵니다. 그러면 어떤 게 옳으냐고 이걸로 다툴 일이 아니에요. 금강경 읽으시면서 제가 가끔 금강경에 대해 여러분에게 얘기할 경우가 있습니다. 금강경 첫머리에 보면 어떻게 마음을 항복 받느냐고 하죠. 운하항복기심 云何降伏其心 그렇죠? 어떻게 마음을 항복 받는다고 나왔어요? 태란습화, 모든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한다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한 중생도 멸도된 중생이 없다 이렇게 두 가지죠. 한 가지가 아닙니다. 첫 번째 모든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겠다. 두 번째 그러면서도 한 중생도 멸도에 든 바가 없다며 그 상에 매달리지 않는 상을 갖지 않겠다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첫 번째가 모든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겠다는 대서원, 그러면서도 한 중생도 멸도된 바가 없다는 상을 떨어내는 이 두 가지인데 첫 번째를 너무 무시해요. 모든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지도 않고 상만 벗어나면 어떻게 돼요? 그러면 망합니다. 대서원을 세우고 그러면서도 상에 매달리지 않는 두 가지를 갖추지 않은 채 대서원은 가볍게 넘어가고 뒤를 강조하면 불교가 망한다는 거죠.
금강경 16분에 보면 이 금강경을 보고 수지독송하는데도 세인들이 가볍게, 천하게 여기는 경우에 어떻게 하라고 했죠? 이 사람은 전세 업장이 많아서 다른 사람이 가볍게 여김으로서 그것을 면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읽으시면 안 됩니다. 금강경을 전파하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엄청나게 구박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그렇게 읽습니다. 그만큼 어떤 세상이든 간에 불법, 부처님의 바른 정신을 올바로 선양한다는 것이 늘 찬양을 받고 세상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사람들이 ‘쟤는 무슨 소릴 하는가’ 하며 구박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거 이해하시고 자기 신심을 올바로 정립하는 데 늘 힘을 쏟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충격적인 얘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달마 조사가 암살되셨다는 얘기가 거의 사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몇 가지 전등록 중에 달마 조사가 스스로 암살을 예언한 얘기가 나옵니다. 누가 나를 암살할 것이라는 것까지 나옵니다. 전등록 같은 데에 적힌다면 자랑스런 얘기를 많이 적겠죠. 암살당했다, 독살당했다는 얘기가 자랑스런 얘기일까요? 그런 얘기가 거기 실렸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이라고 저는 봅니다. 거기에 나오는 독살한 주체가 누구냐 하면 그 당시에 가장 잘 나가던 스님이었습니다. 이름까지 나옵니다. 아마도 달마 조사가 선법, 부처님의 가르침이 뭔가 흐트러졌을 때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가르침을 들고 등장했을 때 정말 찬탄을 받으면서 등장하셨을까요? 저는 그 당시에 구태의연하게 옛날 기독교의 부흥목사처럼 사람들을 현혹하듯 하면서 하는 스님들의 입장에서는 달마 조사는 용서할 수 없는 인물로 보였을 겁니다. 두 사람은 바로 그런 사이입니다.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올바른 가르침을 우리가 지켜나간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저는 달마 조사 얘기를 읽고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양무제한테 구박받았다는 거 아시죠. 양무제가 그렇게 얘기하는데 ‘공덕 없소’라고 했으니 누가 좋다 하겠어요. 그래서 쫓겨나듯이 남쪽으로 밀려난 거죠. 굉장히 고통을 받고 고생하고 구박 많이 받으셨습니다. 결국은 끝까지도 그렇게 당하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나 세상에서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 대승의 가르침을 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냐 하면 그렇게 만만하고 찬양받고 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유마경은 그렇게 대승과 소승의 갈등이 첨예하게 부딪힐 때 소승을 정말로 용서 없이 비판한 경전입니다. 나중에 대승이 좀 더 발전하면서 화엄경도 나오고 반야부 경전도 나오는 때가 되면 대승에서 소승을 포용합니다. 금강경을 다시 볼까요? 수보리는 성문, 연각, 보살 중에 어디에 들어가죠?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삼승이라 하는데 성문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 깨닫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성문승이 부처님의 10대 제자들인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연각은 독각이라고도 하는데 세상의 이치를 관조하고 연기를 깨달았고, 보살은 자리이타를 함께 수행하는데 수보리는 성문입니다. 성문인 수보리의 입에서 금강경의 첫머리가 나옵니다. 보살은 어떻게 항복받느냐고 성문인 수보리가 보살도를 물어요. 그건 굉장한 얘기입니다. 여러분이 경전을 쉽게 읽으시면 안 됩니다. 벌써 거기에서 보살과 성문이 화해를 했습니다.
유마경은 어떤가요? 제가 나눠드린 법회보에 나와 있지만 성문은 그렇게 나가면 성불 못한다고 합니다. 아주 독한 말이 나오죠. 왜 그렇게 독한 말이 나오느냐? 성문승의 단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정말로 성불 못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 유마경에서는 성문승들이 못난이 역할로 나옵니다. 성문승의 대표가 10대 제자인데 유마 거사한테 전부 혼나면서 소승의 잘못된 점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유마경은 용서 없이 불교의 잘못된 양태를 비판합니다. 나중에 법화경에 오면 회삼귀일이라고 해서 성문 연각 보살을 다 함께 한 수레에 태워간다, 일불승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문 연각 보살이 다 화합이 되지만 유마경은 절대로 아닙니다. 보살승과 성문승을 철저히 구분하고 성문에게 그렇게 수행하면 성불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유마경입니다. 그러면 왜 유마경이 가치가 있을까? 성문승은 성불하지 못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유마경을 읽는 이유는 어디에 있느냐? 정말로 부처님의 정신이 오해되고 어느 것이 부처님의 정신인지 헷갈릴 때 유마경을 읽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 시대의 불교가 얼마나 잘못 되어 있는가를 아주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대야말로 유마경을 읽어야 될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 현실의 불교가 부처님의 정신을 제대로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대승이 아닌 소승적인 불교가 되어 있는 이 현실에서 유마경 만큼 우리 불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부처님의 참 정신을 되찾을 수 있게 하는 지남이 될 수 있는 경전이라고 생각해서 유마경을 정말로 좋아합니다.
유마경 첫머리부터 아주 충격적인 얘기가 나옵니다. 굉장히 다른 얘기들이 있어요. 부처님 회상에 모였는데 어떻게 모였는지 아세요? 불경을 읽을 때 ‘부처님 나라’를 보면 딱 나옵니다. 바이샬리 성에 계셨는데 8천 명의 비구스님이 오시고 3만2천 명의 보살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보살님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요? 경전 읽을 때 그냥 구름 잡기로 읽으면 안 됩니다. 3만2천 보살을 어떻게 이해하시렵니까? 부처님 회상이니까 시방 삼세에서 보살님들이 구름 타고 3만2천이 오셨구나. 저는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그런 신비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비구 스님보다 엄청나게 많은 보살들이 모였다는데 우리가 보통 보살할 때 말하는 관세음보살 문수사리보살하는 분들은 10지 보살로 부처님 되기 바로 직전이에요. 그런 10지 보살이 아니고 대승의 이념, 부처님의 참 정신을 바르게 세우겠다는 대승의 이념에 동참하는 대승불교 운동가들을 보살이라고 했습니다. 그걸 보살이라고 하는 굉장히 중요한 전거가 되는데 유마경이 바로 그 전거가 됩니다. 구마라집 본을 보면 처음에 비야리 성에서 장자의 아들 보적이 오백 명의 릿차비족 장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일산을 받힌다고 나와요. 장자의 아들 보적이라고 나옵니다. 현장 본은 보적 보살이라고 다르게 나옵니다. 보성 보살도 같습니다.
구마라집 본에 보면 비야리 성에 유마 거사가 있었다고 나옵니다. 현장 본에는 비야리 성에 대보살이 있었는데 이름이 유마입니다. 유마 거사가 보살이고 장자의 아들 보적도 보살입니다. 그러니까 대승불교를 받들고 그를 선양하는 동지들이 전부 보살이었습니다. 저는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보살 구성들을 보면 스님보다 재가자들이 많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왜냐하면 대승불교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스님 중심의 불교를 뛰어 넘어서 재가자도. 그 이전에는 스님과 재가자가 위계가 있어서 재가자는 스님이 되어야 다음에 성불한다고 생각했어요. 이것을 넘어서서 모든 재가자를 부처님의 세계에 함께 동참시키는 것이 대승운동이어서 그런지 재가자가 훨씬 많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증거를 제시하죠. 절에 가서 보살상을 보면 스님상이에요 재가자상이에요? 잘 보세요. 스님들은 화려한 옷이나 관을 절대로 못 씁니다. 계율로. 화려한 관 쓰고 계시는 보살님들 많죠. 아주 이쁜 옷도 입으셨죠. 스님이 아닙니다. 전부 재가자입니다. 지장보살님 한 분만 스님 비슷한 옷을 입고 있어요. 수많은 10지 보살 전부 재가자 복장입니다. 그건 아마도 대승불교의 중심 축들이 재가자가 아니었을까 저는 조심스럽게 추측합니다.
어쨌든 이런 유마경이야말로 대승불교의 정신을 가장 뚜렷하게 선명하게 드러내면서 소승불교의 문제점을 아주 날카롭게 용서 없이 비판하는 경전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 대목 중에서 저는 오늘 특별한 한 가지 주제로 말씀드립니다. 법회보 제목을 제가 잘못 달았는데 ’연꽃은 진흙 속에서만 피어난다.‘ 제 말의 특징이 뭐죠?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보통 연꽃에 대한 찬탄이 이렇게 나오죠. 이제 그걸 바꾸십시오. 연꽃은 진흙이라야만 피어나고 진흙 속에서만 피어난다는 것이 오늘 제가 강조드리고 싶은 유마경에서 얘기하는 사자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수사리보살의 입을 통해서 나옵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유마거사가 얘기했을 때 문수사리가 얘기한 것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여래가 될 성품은 무엇인가? ’무명과 삶에 대한 애착이 바로 여래가 될 성품이요. 탐진치 삼독심의 종성이 바로 여래의 종성이며, 온갖 잘못된 견해와 악한 법 착하지 못한 법들이 가진 종성이 바로 부처가 될 씨앗이다‘고 하는 아주 충격적인 얘기가 나오죠. 사실은 이걸 충격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데 충격인 이유가 늘 입으로만 외면서 이게 실감이 안 되는 얘기들이 있어요. 여러분 다 아시죠? 번뇌 즉 보리란 말 아시죠? 번뇌가 바로 보리란 말 익히 들으셨죠? 바로 그 얘기입니다. 생사가 바로 열반이란 말인데 유마경에 이것이 아주 선명하게 나온 겁니다. 우리가 그만큼 늘 들어온 얘기를 쉽게 들어왔다는 거죠. 이것을’ 연꽃은 진흙이라야 피어난다‘고 압축한 것이 유마경입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불교에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저는 유마경의 가르침인데 핵심은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불법인가 비불법인가 의심스러울 때 몇 가지 중요한 잣대를 저는 제시합니다. 첫 번째 잣대가 연기적인 기준인데 연기라는 건 어느 하나를 절대적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와 중생이 딱 고정화되어서 딱 둘로 나누는 건 불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법 수행하는 분들이 가끔 있거든요. 비 오는 날 먼지 나듯이 패주고 싶은 분들이죠. 어떤 분들이냐 하면 ’내가 아직 깨닫지도 못하는데 뭘 실천한다고 나서겠어? 깨달은 다음에 실천해야지.‘ 그 문제가 뭐냐 하면 못 깨달아요. 왜? 깨달음과 깨닫지 않음을 딱 두 쪽으로 나눴으니 어떻게 깨닫습니까? 나는 깨닫지 못한 존재라고 못을 자기 가슴에 탕탕 치고 있는 겁니다. 정말 큰 일입니다. 이게 깨달음 병입니다. 깨달음 병 벗어나지 못하면 못 깨달아요. 왜? 그 사람은 모든 것을 깨달음에다 초점을 맞추고 깨닫지 못함과 두 쪽으로 나눠서 깨닫기 전에는 실천도 안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집착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불교계에 많습니다. 계속 선방 돌아다니면서 참선을 죽어라 하는데 어떻게 자비심은 한 톨도 안 우러나는지 모르겠어요.(보리광 보살님 녹취)
제가 제일 겁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세요? 선방 오래 다녔다는 사람들이에요. 이건 정말 벽창호야 깨달았다는 증표가 어디에 있느냐. 누구는 도력이 높다 법력이 높다. 그런 말 안 믿습니다. 그 사람 자비심이 얼마나 있냐. 개인적으로 자기가 공부가 얼마나 되었나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돌아봐서 고수 락수 불고불락수에요.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세 가지 밖에 없어요. 깨달음의 증표는 락수가 많은 사람 즉 괴롭고 불안할 때가 더 많은 사람은 절대 수행 안 된 사람이에요. 편안하고 즐거울 때가 많은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에요. 불교를 믿으면 그날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해야 되는 거에요. 불교를 ‘고(苦)’라고 했지마는
고(苦)는 바로 보는 것이지 고(苦)를 껴안고 뒹구는 것은 불교 아니에요. 불교를 믿었더니 일체개고라고 했더니, 찡그리고 세상의 고통을 다 안고 뒹구는 사람, 이건 절대 불자가 아닙니다.
불교를 믿는 순간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는 순간, 그날부터 전날보다 행복해야 됩니다.
같은 얘기 계속 반복하게 되는데, 왜 그러냐? 여러분 베토벤 교향곡 들어 보셨죠? 운명 교향곡 첫 대목이 어때요? 문 열어줘 문 열어줘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이 계속 이어지는 이 노랫말 선율처럼 제가 계속 강조하고 다니는 것이 있어요. 현실 불교, 불교가 엄숙주의 경건주의에 빠져 가지고 부처님을 맞이하는 환희심이 없다. 부처님은 가장 괴로움을 벗어남을 설파하신 분인데 그 가르침 만나는 순간부터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제보다 더 즐거워져야 되고 더 행복해져야 돼요.
부처님 10대 명호 가운데 우리가 친숙하지 않은 하나가 있어요. 10대 명호가 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이 부르는 명호가 ‘항상 웃으시오’ 어떤 사람이 직접 그 당시 부처님 교단을 방문해서 남긴 기록이 있어요. 다른 교단을 방문해 보면 어딘가 찝찝하고 회색의 분위기가 넘치는데 부처님 교단은 명랑하고 밝고 자신감에 넘치는 긍정적인 요소가 참 많다. 그리고 마지막에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날랜 영양(사슴)처럼 가볍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간다.
여러분은 불법을 믿는 그 순간부터 날랜 사슴처럼 어제보다 더 행복하게 가볍게 이 세상을 걸어 나가는 사람, 그렇게 될 때 부처님을 올바르게 모십니다. 부처님 법을 만났다는 환희를 느끼게 됩니다. 내가 부처님의 법을 만났기에 이렇게 내가 달라지고 행복해지고 기쁨을 느낄 때 참된 불자가 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게 되면서 내가 조금 더 행복한 존재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감사를 느낄 때,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시는 환희로 맞아드리는 그런 사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 첫 번째 출발점이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고 나는 깨끗한 데로 갈 거야. 번뇌는 버리고 깨달음으로 갈 거야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거기에 딱 부딪히게 되면 되지를 않아요.
제가 절에 와서 가장 듣기 싫은 법문 중 하나가 ‘법수(法手)’라는 '욕망을 버려라'. '벗어나라 떠나라' 속으로 의문을 던집니다. 욕망을 버리고 어떻게 사는데요? 무슨 힘으로 사실래요? 저는 욕망을 버리면 두 가지 경우가 생겨요. 욕망을 버리면 힘이 없어지고 서양말로 Cynical하고 냉소적이 되어가지고 아! 꿈같은 세상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삐들삐들 말라가는 불자가 되기도 하고 세속에서는 욕망을 채우고 절에 와서는 욕망을 버리는 이중생활 불자, 이거 정말 큰일입니다. 욕망은 추하다 더럽다 이 세상은 오탁악세다 더럽다 버리고 다른 데로 가겠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가 딱 거기 있는 거예요. 욕망을 버리면 안돼요. 욕망의 에너지가 따로 있고 어떤 불법을 믿으면 어떤 새로운 에너지가 왕창 생기느냐 사람의 에너지는 그렇게 두 가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불법 문중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딱 접하고 나면 어떻게 되느냐, 눈이 열려요.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이 열리면서 어떻게 되느냐. 본래 근원이 자비심에 충만한 거 에요. 조금 눈이 열리는 순간 자비심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자비심이 없는 사람은 깨닫지 않았다는 거 에요 불성이라는 것이 한 측면은 지혜, 한 측면은 자비에요.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 왜 그러냐? 우리의 본래 면목이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존재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깨달음이에요. 그런대 어떻게 한쪽만 실현하나요? 지혜는 나오는데 자비는 안 나오나요? 서원이 없이 바로 마음의 문이 열리는 만큼 자비가 쏟아지는 에너지가 두 개가 아니라 욕망을 버리고 지혜의 눈이 뜨이고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순간 어떻게 되느냐 나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걸 그 안에 끌어다 붙이려고 하듯 극악스러운 욕망, 이것이 자연스럽게 줄어요 나라는 알맹이가 따로 똑 떨어져 있지 않다는 걸 차츰 알게 돼요.
불광법회에 오신 분들은 뛰어난 어떤 것이 있다고 봐요. 광덕스님이 애쓰신 면모가 보여요. 불광법회의 광덕스님의 뿌리가 그런 것이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는 것이 고정된 알맹이가 없고 딱 떨어진 남과 관계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돼요. 알게되는 순간 어떻게 되느냐 나만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 모든 걸 끌어다 붙이려는 시도가 자연스럽게 줄어요. 내 앞에 내 옆에 있는 사람, 여러분 혼자만을 바꿔 보세요 자기 혼자 수행 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은 어떤 길인가요. 여러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맞는 사람이 되는 길은 뭐냐 여러분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혼자인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집에 들어가면 가정이 있고 법회에 오면 도반이 있고, 훌륭한 사람은 가정에 일원이 되는 것이고 사회에 일원이 되는 그것 빼고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자기 존재를 똑 떨어지게 찾으려고 하는 그런 불교 수행법은 없어요.
부처님이 여신 가장 위대한 물고는 ‘사랑하면서도 행복한 길’이에요. 부처님이 알라와칼라 우타카아나룻다 두 뛰어난 스승에게 명상 수행법을 배웠어요. 그 스승들이 이끄는 교단에서 부처님께 말 하기를 같이 교단을 이끌어 나가자고 했는데 부처님은 교단을 나왔어요. 거기에서 선정에 들어있으면 행복하지만 부처님은 사람들을 위해 그곳에서 나오셨어요. 부처님은 우리 불자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 그 길을 열어 주신 거예요.그게 바로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으면 불교가 제대로 설 수 없어요.욕망을 버리고 서원을 열리는 게 아니고 여러분의 욕망이 자연스럽게 서원으로 정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서원 문을 읽으셨지만 욕망의 에너지가 서원의 에너지로 어느 정도 정화된 분들입니다. 혼자 닦는다 그건 불가능해요. 여러분들이 상당히 오랜 기간 저를 괴롭혔습니다. 불광법회에 가서 무슨 얘기를 할까? 여러분들이 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와 저와 함께 있었어요. 한 중생도 성불하지 않으면 내가 성불하지 않겠다는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원론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차이가 있겠지만 정확하게 내 머리 속에 각인되느냐 안 되느냐 불교수행의 대종이라고 할까? 대종이 틀리면 절대 안 됩니다. 번뇌하고 싸우는 사람은 절대 번뇌를 못 이깁니다. 번뇌는 싸울 대상이 아니라 번뇌가 잃을 때 큰 병 걸려요.
예전 구산스님이 저에게 네 마음을 도둑맞으면 안 된다. 안 이 비 설 신 의 여섯 도둑 거기에 도둑맞으면 안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옆방에서 으악 하는 큰 고함소리가 나서 가 보니 어떤 스님이 앉은 채로 도둑이야 하며 물소리 바람소리에 마음을 안 빼앗기려고 큰 고함으로, 화두를 들고 있으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인데 마찬가지에요. 똑같은 것이 욕망을 서원으로 전환 시키는 이 수행법을 불법의 올바른 눈을 뜨면 자연스레 욕망이 서원으로 전환된다는 말입니다.
사홍서원부터 열심히 지켜 나가면 됩니다. 불자들이 이중생활, 끝날 때 사홍서원하지요. 사홍서원은 너무 거룩해 그건 안 될 것 같으니 불단에 모셔 놓고 나가. 세속 나가면 사홍서원 다 잊어버리고 절에 오면 또,욕망과 서원을 둘로 보면 안 되고 욕망을 서원으로 전환하는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야 돼요.
'중생을 다 건지리라' 거룩한 서원을 현실에서 내 주변에 가장 내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일까?
'번뇌를 끊으리라' 불법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해결하는 그 길을 모색해 나가는 가까운 번뇌를 법문을 다 배우리라 법회 나오는 분들은 행복한 분이에요. 일 년이 지나도 법회에 한 번도 안 나오는 불자도 있어요.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불자도 있어요. 자기 수행의 방편 하나 가지고 끊임없이 생활 속에서 수행 방편에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는 삶, 이렇게 구체화 되지 않으면 사홍서원 아무리 외워도 소용없어요.
부처 될 길이 막혀요. 둘로 나누는 순간에 이렇게 대중이 많이 모인 법회에 가서 부처되고 싶은 사람 손들어보세요 했더니 반에 반도 안돼요. 웬일인가? 첫째 부처되는 순간에 너무 버려야 할 것이 많아 아까워서 두 번째 부처님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
여러분은 지금부터 부처되는 길을 사홍서원을 현실화하는 것에서부터 오늘보다 조금 더 멋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보다 조금 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오늘보다 좀 더 사회에 일원이 되고 이게 바로 부처되는 길이에요. 내 모습에 부처되는 모습을 옮겨 와야 돼요. 그렇게 내가 부처 되는 사람으로 살아서 주변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들고 가는 길이 바로 불 세계를 건설할 길이다라고 생각해요. 불 세계가 어디서 뚝 떨어지나요? 여러분은 어떤 세상에 살고 싶으세요? 자꾸 물어야 돼요. 현실 문제에 관심이 없으시면 안 돼요.
나는 어떤 세상에 살고 싶지?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상적인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하면서 그런 세상에 맞는 존재로 살려고 하고 그런 존재로 활동을 하려고 하는 순간에 여러분들이 바로 참된 불자고 여기가 마하반야바라밀의 참된 세계에요. 거기에 다 나와요.
바로 이 세계가 여러분들이 성불할 그 세계, 진흙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진흙이라고 얘기했던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성불을 보는. 보게 되는 그런 연화세계가 여기 펼쳐지고 여러분들이 참된 불자로, 부처 되는 길을 하루하루 걸어가는 참된 불자가 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유마경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 바로 이 세상이 성불할 것이고 이 세상 아니면 불초 됩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가 아니라 진흙이라야만 연꽃으로 피어난다.이 말을 명심하시고 두 쪽이 아닌 불교 정말로 그 현실을 올바르게 바꿔 나가고 자기 삶을 나날이 부처와 닮은 존재로 가꿔 나가는 그런 삶을 하나 가진 불자 되시기를 서원 드립니다.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월광화 보살님 녹취)
♬ 찬탄곡 : 보리심 ( 지성스님 작사. 김회경 작곡 , 김회경 지휘) 마하보디 합창단 ♬
나는 나는 보리 마음 내기가 원입니다. 모든 윤회 끊어지고 온갖 고통 벗어나서
현실생활 태평하고 안락국토 바로 가서 고해중생 도우면서 불국낙원 이루어
연꽃 피는 자비동산 불회상에 모으기를 엎드려서 비옵니다. 두손 모아 비옵니다.
나무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 나무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 보살
나는 나는 깨달아서 이 세상 빛이 되어 외롭고 슬픈 중생 인로왕 보살 되어
부처님의 넓으신 품 정토세계 이끌어서 복은 지어 열매 되고 마음닦아 해탈하여
고해중생 모두 같이 저 고향에 건너가길 엎드려서 비옵니다. 마음으로 비옵니다.
나무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 나무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 보살
발원문 낭독 : 송파 20구 명등 여심행 보살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오늘 법회에도첫 걸음 하신 새 법우 환영식이 있었습니다. 불법인연 오래오래 이어가시길 발원합니다. 회장님과 사진도 남겼습니다.
법회 후에 각 구 법회 법등모임이 보광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각자 마련해 오신 점심을 함께 드시며 담소하는 모습입니다.
법당 봉사팀 보살님들의 공손한 인사를 뒤로 하시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불광형제들 안녕히 가시고 다음 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대
일요법회 후, 대웅전에서 금강경 독송을 이어가고 계신 불광 형제들의 힘찬 목소리는 방방곡곡 울려퍼지어 빠른 정상화가 이루어지길_()_
법회 후 1시 30분에 보광당에서 제 2차 선학 워크샵이 진행되었습니다. 1차에 참석하지 못하신 114명의 선학보살님들이 참석하셨습니다.
무아 부회장님의 사회로 2차 워크샵 강사님들
1. 본자운 합창단장 : '구법회에서 선학의 역할'
2. 현 진 법회장님 : '불광법회 현안의 바른 이해'
3.소프라노 김양희님 : '불교와의 인연', '우리도 부처님 같이(찬불가)'
2차 워크샵을 준비하신 부회장님들이 선물로 마련한 떡을 나누고, 수박을 잘라 휴식 시간에 제공해주십니다.
일요 법회 후 쓰레기 처리까지 정확하고 깔끔하게 마무리 하시는 보살님들.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청정팀 4조 보현행자 여러분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또한 오늘도 함께 수고해 주신 현수거사님과 현철거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4조는 마하보디합창단원들이 마음을 모아 음성공양과 보현행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장맛비로 인해 조계사 1인 정진 시위는 쉬었고, 날이 맑은 날, 봉은사에서는 1인 시위정진을 하고 계신 불광 형제들.
토요집회에 참석하신 보살님, 거사님들은 메가폰도 없이 조용조용 구호만 외치는 시위정진 중입니다.
|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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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사람 덕분에 법(法) 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참 좋습니다.
재가자만의 포교사단설립자
현산김봉현 합장ㅅㅎㅅ
[二法]
우주법계중생 지구촌사람 모두함께
■눈으로보고, 가슴으로읽어서. 귀로듣는 공부를 일념으로 하시면
우주에너지[報身]氣法,으로
번뇌망상을 녹이는 공부가 됩니다■
"번뇌줄이고 끊는 욕계의욕망을 녹이는 아라한 수다원예류과에 드는 아닛짜 둑카 아낫따 공부방식 입니다"
나모 로케 사먁 가타남 사먘 프라티 판다남.
세간에서 바르게 성과聖果로 걸어가고있는 4과四果의 수행자와 4향四向의 여러수행자 분들께 귀의 합니다.
정상화.재정투명화로 재가자만의 포교사단설립인가 발원합니다.
포교 전법예정자.
현산김봉현합장ㅅㅎㅅ
을사년
불기2569년 2025.06.30. 월요일.
이법 [二法]
실라, 사마디, 빤야지혜로
코끝아래 위입술 삼각속안에서 들숨날숨 알아차리고 평정심으로 우주법계중생 지구촌사람 모두함께 모든 경전의 팔만대장경을 집약시켜 놓은 5233만자를
눈으로보고, 가슴으로읽어서. 귀로듣는 공부를 일념으로 하시면
우주에너지[報身]氣法,으로
번뇌망상을 녹이고 뿌리체 말려죽이는 공부가 됩니다.
불기2569년 2025.06.30. 월요일.
재자"만"의 포교전법예정자.
현산김봉현 합장 ㅅㅎㅅ
수고 많으십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역사적인 자료가 되겠습니다. 카페지기님 화이팅!
언제나 밝음 유지하는 불광법회의 본모습 알려주신 교수님 감사합니다_()()()_
일지 편집에 애쓰신 마음님, 수많은 법회 사진 찍고 정리하신 보현화님, 법문 녹취에 애쓰신 월광화님 모두 감사합니다_()()()_
자성인보살님!
본자운보살님!
선학 대표로써 경험담을 좋은 말씀
잘 듣고 수고도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