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명기 15:12-18, 고린도전서 7:17-24
구약성경 신명기에는 팔려온 유대인 출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는 법이 나옵니다. 6년간 노예로 살고 나면 해방시켜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안식년이나 희년법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이후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이 법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노예사냥과 노예거래 그리고 근세까지 이어진 미국의 노예제도 등등을 생각한다면, 반성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반상(班常)의 제도로 양반과 평민 그리고 천민을 구분한 우리의 역사에서 신분제도가 사라진 것은 근세 이후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성씨에 따라서 양반가문임을 자랑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양반집의 노비들은 인간이 아닌 소유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극 드라마를 접할 때는 참 마음이 불편합니다. 양반으로 태어나 권력을 가진 자의 횡포도 불편하지만, 권세가의 노비도 다른 집의 노비들을 함부로 대하는 내용을 보면, 인간은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에서 벗어나기가 정말 힘든 가 봅니다.
“자유”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 또는 “법률의 범위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가 자유라고 해설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란 정말 자유롭기도 하지만, 자유에도 법적인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자유롭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의미라는 점에서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언제나 충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을 속박하려고 하면 안 되며, 자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해서도 안 됩니다.
빚 때문에 팔려온 노예는 그 빚을 다 갚은 만큼 일한 후에는 돌려보내라는 신명기 법은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노비의 자녀로 태어났다고, 그 또한 노비가 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일입니다. 주인 자신에게는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지만, 노비에게는 한 없이 서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방영된 드라마 <옥씨부인전>은 도망 노비가 양반신분을 취하여 외지부(조선의 변호사)로 눌린 자들의 인권을 찾아주며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을 하다가 결국 신분이 발각되어 다시 노비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그녀의 공로가 인정되어 마지막에 임금으로부터 면천을 받고 다시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외지부로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퓨전사극이기에 오늘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노예가 자유를 찾는 것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현재의 상태에서도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노예상태에 있으면서 어떻게 자유를 누리라고 하는 것일까요? 지금 자신은 자유인의 입장이니 어쩌면 노예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몸의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여 육신의 자유를 얻는 것은 바울에게 이차적인 문제였습니다.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개신교 국가인 북아메리카에서도 그리스도교는 노예제도를 유지하자는 교회와 폐지하자는 교회로 갈려서 싸웠습니다. 노예제도 자체가 남북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남부에서는 노예제도를 신적인 법으로 확신했고, 북쪽에서는 노예해방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남북의 교회가 분열했습니다. 어쩌면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교의 자유는 육신의 자유 보다는, 내면의 자유를 더 근본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내면의 자유가 성숙하여 결과적으로는 육신의 속박 상태에서 해방되게 만든다는 전제 아래에서 말입니다.
“자유”를 말 할 때에 등장하는 단어가 “방종”(放縱)입니다. 하지만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는 “남용”(濫用)입니다.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자기에게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 방종인 것에 비하여, 자유가 힘을 등에 업고 남용되면 그 결과 타인을 해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이런 문제를 초월합니다. 2000년 전 신분예속의 시대에서 말하는 자유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육신의 자유를 얻을 수 없으니, 그 속에서라도 찾아야하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바울은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육신과 정신이 자유로운 우리가 법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도 내 마음대로 다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관습의 제약을 스스로 받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가 하는 일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심리적인 제약도 따라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더 자유로운 사람과 덜 자유로운 사람이 존재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자유란 여전히 자신이 정한 굴레 속에 갇힌 자유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 굴레를 자유롭게 정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자유롭게 종이 되라는 것이지요. 즉, 남을 섬기는 일을 억지로(종의 심정으로) 하지 말고, 정말로 자유롭게 스스로 (자유인의 심정, 주인의 심정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Luther)의 옛 이름은 루터(Luder)였습니다. 그가 그리스어를 배운 후에 오늘 성경본문에도 나오는 자유(eleuthria)라는 단어에서 자신의 이름 철자를 바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루터(Luther)라는 이름으로 대학 등록지에 서명을 하였습니다. 그가 1520년 종교개혁의 한 복판에서 쓴 글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논문입니다. 이글은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자유로운 주인이며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충실한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라는 명제로 유명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인 동시에 노예라는 말입니다. 해설하면, 육신적 노예인 동시에 영적인 자유인입니다. 여전히 신분사회의 그늘에 속한 말이지만, 바울의 뒤를 이어서 영적인 자유를 정의한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자유의 개념은 정말 중요합니다. 자유는 그 어떤 힘에 의하여 속박당해도 안되지만, 반대로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쳐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소극적인 자유를 의미한다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적극적인 자유는 스스로 섬기는 종이 될 자유입니다. 과거에 종이나 하던 일을 자유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섬기는 자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자신만 자유로우면 된다고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말은 “섬기는 자유”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자유입니다. 더 성숙한 자유로운 세상은 자신의 자유가 세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유”로 세상이 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비난받는 현실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으로 반성하며 드리는 말씀입니다.
2025년 2월 9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