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도정신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중국의 다도정신을 고찰하는 방식처럼 중국의 유명한 다서를 중심하여 다서 중에 표현된 정신-- 음유적 표현 또는 직설적 표현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는 방법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다도정신을 구명할 만한 다서가 초의선사의 다서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한국의 시대별 다도정신의 구명은 다인들의 茶詩 또는 다생활을 중심으로 고찰해야 된다는 점이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한국다도정신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정상구의 『한국다문화학』에서는 한국의 다도정신은 이미 신라시대에서부터 형성되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다도정신의 기원은 화랑도에서 엿볼 수 있으며 한국다도정신의 뿌리는 원효의 화쟁지화(和諍之和)정신과 그의 적지적(寂之寂)정신 즉 靜정신에서 일어 났다고 논의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의 다도정신은 원효성사의 화정(和靜)정신을 기조로 하여 고려시대의 이규보(李奎報)의 다시, 정몽주(鄭夢周)의 다시를 비롯하여 조선조시대의 서산대사의 다시 그리고 초의선사의 다시 및 다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 다고 하겠다.
<신라시대의 다도정신 -- 화(和). 정(靜). 청(淸)>
신라의 화랑들과 다도와는 깊은 관계가 있다. 삼국유사의 충담(忠談)과 차관계에 관한 것에서 이미 충담은 미륵세존에게 차 공양을 올리고 남산의 오솔길을 내려 오면서 지난날 화랑 기파랑(耆婆郞)의 인격을 기리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구름 쫓아 떠가는 어디에
새파란 냇물속에 기랑의 모습 잠겼세라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이
랑의 지나신 마음갓(際)을 쫓고자
아 잦(栢)가지 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차는 이미 선덕여왕 시대부터이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 바에 의하면 흥덕왕 2년에 입당회사인 김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차씨를 화개동에 심었다 하여 점점 퍼지게 된 것이다. 경덕왕은 충담사를 궁중에까지 맞아서 차를 마신 기록이 있다. 왕은 「차의 기미가 신기하여 입안에 이상한 향기가 가득차다.」(茶之氣味異常 中異香郁烈)고 하였다. 이것만 봐도 왕이 차를 얼마나 좋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신라 화랑과 다도와의 관계는 고려 중엽의 문인 이곡의 기행문 동유기(東遊記)에서도 엿볼 수 있고 그의 다시 가운데에도 엿볼 수 있다. 그의 다시 「강릉동헌의 운을 잇다.」(次江陵東軒韻) 또는 「한송정(寒松亭)」등에서 엿볼 수 있다. 뿐아니라 김극기의 화랑 「차부뚜막」을 읊은 시 등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대학자 이규보(李奎報)의 「원효방(元曉房)」을 심방하고 원효와 사복(蛇福)간의 차생활 기록 등에서도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러면 화랑도정신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세속오계를 드나 이는 합당치 않으며 또 어떤 사람은 미덕을 들기도 하나 미덕이란 지나치게 개연적인 것이어서 이를 취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그럼 과연 화랑정신이란 무엇일까 ? 이에 관해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풍류라 이른다. 그 교의 기원은 선사에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실로 이는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집에 들어오면 효도를 다하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의 뜻 그대로이며, 그 한없는 일을 당하여 말없는 교를 행하는 것은 주주사의 종지를 다함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행함은 축건태자의 교화 그대로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랑도는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했으며, 충효신의를 지켜 유교를 무의무언지교 화광동진(和光同塵) 충기이위화 하는 선교를 또 자비덕행하는 석가의 불도를 다 같이 수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랑의 기상은 유. 불. 선의 장점을 산천에의 주유와 더불어 심신을 단련하여 또 차와 더불어 체득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라시대의 화랑정신은 이를 「화합(和合). 충절(忠節). 숭경(崇敬). 청결(淸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랑의 다정신도 화(和). 충(忠). 경(敬). 청(淸)이라고 하겠다.
정영선의 『다도철학』에서는 화랑의 다문화를 논의하면서 6세기 이전의 인물로 추정되는 신라 사선이 경포대와 한송정에서 「석지조(石池爬)」라는 돌못화덕을 사용하여 차를 끓여 마셨다는 기록이 흔히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선은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으로 선인이자 초기 화랑으로 이러한 특수한 다구를 써서 야외의 특정장소에서 차를 끓어 마셨다.
맨 처음 사선의 다조를 글로 남긴 사람은 김극기(金克己,1148-1209)로서 그는 <한송정>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아래와 같이 읊고 있다.
여기가 네 신선이 자유로이 완상하던 곳
지금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구나
주대는 기울어 푸른 풀 속에 잠겼고
다조는 내버려져 이끼 끼었네
또한 이곡(이곡,1298-1351)이 동해안지방을 여행하고 쓴 『동유기』를 보면 경포대와 한송정에 있는 사선의 전다구(煎茶具)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날이 아직 기울기 전에 경포대에 올랐다. 옛날에는 대에 집이 없었는데 요즈음 호사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옛날 선인의 석조가 있으니 대개 차를 달이는 도구이다. 동쪽에 사선비가 있었으니 호종단이 물 속에 넣어 버리고 오직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송정에서 송별연을 했다. 이 정자 또한 사선이 유람하던 곳인데, 고을 사람은 구경꾼들이 많은 것을 귀찮게 여겨 집을 헐어 버렸고 소나무도 들불에 타버렸다. 오직 서리내리는 밤의 달이 맑을 뿐이다. 다만 석조 석지와 두 개의 석정(돌우물)이 그 곁에 남아 있는데 역시 사선의 다구이다.
위의 글을 살펴 보면 한송정 뿐만 아니라 경포대에도 화랑들이 차를 마셨고, 그 자리에 석조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송정에도 석지와 두 개의 석정이 있음도 적고 있다. 우물이 두 개인 이유는 하나는 제사장용이거나 차끓이는 물을 쓰기 위한 신성한 샘이고, 다른 하나는 낭도들이 쓰거나 허드렛물을 쓰기 위해 파놓은 우물이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서에 남아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신라의 음다풍속을 살펴 볼 때, 주류를 이루는 계층은 화랑이었다고 하겠다. 대표적 인물로는 6세기 이전의 초기 화랑인 사선과 후기의 화랑승인 충담, 월명, 보천과 효명 등이라고 하겠다. 사선이 경포와 한송정에서 차를 끓인 이유는 이곡이 쓴 『동유기』에서의 내용과 여지승람을 참고하면 아마 차를 끓여 누군가에게 바치고 기도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차를 바친 대상은 사선과 선인들이 떠받들었던 삼신혹은 셋을 하나로 본 시조삼신(始祖三神)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용운은 사선랑의 행다법을 재구성하면서 그 의의는 풍류도를 닦은 선인들이 한송정이나 경포대에서 차를 달여 마시며 심신수련을 하는 선가의 다풍을 알 수 있는 독특한 행다법에 있다고 보았다. 선랑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심신수련을 하였는데 그들의 수련장에는 차를 달이는 돌절구와 돌부뚜막, 돌우물과 다구들이 있었다. 항상 차를 달여 마시기 때문에 깨지지 않는 돌로 만든 다구들을 준비해 두고 사용했으며 산수간에 노닐면서 오악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또 낭도들이 차를 나누어 마시기 편리하도록 그 자리에 고정시킨 다구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헌다순서로 차를 마셨다고 보고 있다.
1. 한송정에서 석지조를 이용하여 차 끓일 준비를 한다.
2. 석조는 찻물을 끓이며 차 달이는 부뚜막이고, 석지는 찻물을보관하는 기구이다.
3. 석지에 찻물을 길어다 놓고 석조에 불을 피워서 찻물을 끓인다.
4. 석조 옆에 물을 채워서 물이 데워지도록 하고 연료는 숯이나 백탄을 쓰되 솔방울을 주워 다 쓰기도 한다.
5. 다구를 깨끗이 씻어서 준비하고 찻물이 끓기를 기다려 물이 끓으면 약간의 탕수를 떠내 찻잔을 데운다.
6. 떡차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돌솥에 넣어 끓인다.
7. 차의 양은 손님의 수에 따라 가감을 한다.
8. 찻잔에 물을 버리고 잘 달여진 차를 떠내서 찻잔에 나누어 따른다.
9. 낭도 한명이 찻잔을 받쳐 들고 정자 안에 계시는 사선에게 차를 날라다 드린다.
10. 사선에게 차 대접을 마치고 나면 다른 낭도들이 마실 차를 달인다.
11. 전과 같은 순서로 차를 달여 낭도들에게 차례로 나누어 준다.
12. 낭도들은 자기의 찻잔은 각자가 휴대하며 차 마실 때 꺼내어 차를 받아서 마신다.
13. 사선은 정자 안에서 마시고 낭도들은 밖에서 아무 곳이나 편리한 속에서 차를 마신다.
14. 사선이 차를 다 마시고 나면 찻잔을 거두어 가지고 나와 석조의 데워진 물에 씻어서 보관 한다.
15. 석조에 설거지하는 통이 함께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출처-사이버 전통 다도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