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치 및 지형
여주의 남쪽 북성산에서 가운데로 내려온 산맥은 여주-이천간 42번 국도를 지나 산과 들판을 건너서 북쪽으로 올라와 단아한 봉우리를 일으켜 세운데, 봉우리는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동족으로 기복과 과협을 하면서 영릉의 뒤편에서 봉우리가 뾰족한 탐랑 목성산을 솟구친다. 여기서 중심맥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려가다가 물이 앞에 있고 산이 멈추는 곳인 용진처에서 북성산을 바라보고 혈을 만들었다, 이를 회룡고조혈이라고 한다.
2. 유적 현황
조선 제4대 왕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1395∼1446)를 합장한 무덤이다. 녕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이자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를 따랐다.
1446년(세종 28)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죽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의 서쪽 산줄기에 쌍실을 갖춘 능이 조성되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이고, 서쪽 방은 세종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하여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 때 영릉의 터가 좋지 않다 하여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나왔고, 1469년(예종 1)현 위치로 옮겼다. 옛 영릉에 있던 상석·장명등·망주석·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나 1973년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하였다.
영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설치되었으며, 봉분 내부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으며, 난간석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대신 12지를 문자로 표현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다.
3. 수릉과 영릉
세종은 살아 생전에 자신이 묻힐 터. 즉 수릉을 헌릉 옆에 정하였다. 서울 강남구 대모산에 위치한 헌릉은 세종의 부모인 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쌍분이다. 세종에 앞서 왕비인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풍수에 능한 관리(지관)들은 수릉은 길지가 아니라며 터를 다른 곳으로 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세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대로 시행하였다
다른 곳에 복지를 얻는 것이 선영에 장사지내는 것만 하겠는가? 화복의 설은 근심할 것이 아니다. 나도 나중에 마땅히 같이 장사하되 무덤은 같이 하고 내부의 실은 다르게 만드는 것이 좋다. |
하지만 예종 때 세종의 능을 여주로 이장하려고 땅을 팠더니 시체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 장사 지낸지 19년이 흘렀으나 육탈이 전혀 진행되지 않았고 수의도 썩지 않았다. 여기서 세종 승하 후 영릉이 여주로 이장되기까지 조선왕실에는 비극이 끊이질 않았다. 문종은 재위 2년만에 건강이 악화되어 39세에 승하햇고, 단종은 계유정난으로 폐위되어 17세에 사사되었으며, 세조는 52세에 승하했고 뒤를 이은 예종은 쇠약해 20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수릉을 여주로 옮기자 이장한 능지가 명당이라 그 덕택으로 조선의 국운이 백년이나 더 이어졌다는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흔히 천하의 명당을 구경하고 싶다면 영릉을 찾아 가보라고 한다.
4. 답사포인트
- 조선왕조를 100년 연장시킨 명당이라고 하는데 어디에서 그런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는가?
- 왕릉과 문화유산, 왕릉 이장배경과 역사
- 무덤의 의미, 조선왕릉의 문화적 가치, 풍수적 관점에서 스토리 전개
5. 풍수적 설명
①물형론적 관점
.목단반개형:산봉우리와 산줄기가 마치 꽃잎모양으로 혈을 감싸고 있음
.비룡승천형:용이 마치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나는 모습
.군신조회형;혈이 군왕, 주변의 산들이 신하, 마치 왕이 신하들과 조회하는 모습
.회룡고조형:산이 돌아와 할아버지 산을 돌아보는 혈
②파구와 좌향
. 손사파(물이 나가는 수구, 청룡과 백호가 교차하는 지점)
. 좌향은 계좌정향, 향법으로는 정양향
(좌향은 실록에 자좌오향이라고 함)
③용혈사수향
.북성산에서 이어진 주산, 내청룡 내백호, 외청룡 외백호, 백호 위안산 등 사신사가 잘 갖추어진 곳으로 내명당과 외명당 등 풍수적 요건이 합당한 곳, 풍수의 기본인 용혈사수향을 잘 대입하여 보고 명당의 핵심인자를 도출하여 보자.
결인속기, 이위, 기복굴곡 등 용혈사수향의 제반요건을 점검할 수가 있는 곳이다.
명당이 되는 조건은 1.땅속의 기운을 멈추어 시신이 있는 곳에 뭉치게 하는 곳이고 2.땅속에 뭉쳐져 있는 기운을 바람에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고 3.하늘의 기운인 천기를 잘 받아 땅속의 기운을 잘 보존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1. 물로써 기운을 멈추게 하고 2.좌청룡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으로 사방의 바람을 잘 갈무리하는 것이며 3.무덤의 방향을 잘 잡아 따뜻한 하늘의 기운을 잘 받을 수 있게 하는 곳이다.
朝鮮王陵의 10가지 秘密
조선왕릉은 중국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과 구조를 띠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조선왕릉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10가지를 들여다본다.
① 조선왕릉은 왜 서울 경기에 몰려 있을까?
강원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왕릉 39 기는 서울 경기 일대에 모여 있다. 왕릉을 한양의 궁궐에서 10리(4km)∼100리(40km) 떨어진 곳에 조성했기 때문이다. 왕이 왕릉에서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 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② 어느 쪽 봉분이 왕이고 어느 쪽이 왕비일까?
태종과 비 원경왕후가 나란히 묻힌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태종 능 위치는 봉분 뒤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다. 조선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으로 왕이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의 경릉(경기 고양시)만은 덕종이 왼쪽에, 비인 소혜왕후가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은 왕세자로 죽었고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해 왕대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③ 조선왕릉 은 왜 거의 도굴이 안 됐을까?
임진왜란 때 훼손된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을 빼고 도굴된 적 이 없다. 세종의 영릉(경기 여주군) 석실 부재들의 이음매는 대형 철제 고리로 고정했 고 입구에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석실 사방은 석회 모래 자갈 반죽을 두껍게 채웠 다. 부장품을 의궤에 상세히 남겼는데 부장품으로 모조품을 넣은 것도 도굴을 막은 한 요인이다.
④ 왕과 왕비가 항상 함께 묻히지 못한 까닭은?
왕릉은 당대 정치권력의 향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됐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로 명종을 수렴청정한 '여걸'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고 싶어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옆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삼성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문정왕후 사후 정릉에 물이 찬다는 이유로 결국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외로이 묻혔다. 태릉이다.
⑤ 봉분 앞 혼유석의 정체는?
봉분 앞 돌상인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노니는 돌이라는 뜻. 북을 닮은 고석(鼓石) 4개가 혼유석을 받치고 있다. 이 큰 돌은 제사 지내는 상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혼유석 밑에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숨어 있다 혼유석은 '지하의 밀실'을 봉인한 문 인 셈. 실제로 고석에 새겨진 귀면(鬼面)은 문고리를 물었다.
⑥ 최장신 문·무석인은 어디에 있을까?
문석인(문관)과 무석인(무관)은 대체로 사람 키를 훌쩍 넘어 권위를 뽐낸다.
가장 큰 문·무석인은 철종의 예릉(고양시), 장경왕후의 희릉에 있다. 3m 이상이다.
중종 시대 (16세기)는 석물의 장엄미가 최고조였던 때다. 철종은 19세기의 왕이 아닌가. 전문가들은 흥선대원군이 왕권강화를 꿈꾸며 예릉을 위엄있게 꾸몄다고 말한다.
⑦ 정자각의 계단은 왜 측면에 있을까?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 한 것. 동쪽 계단은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 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⑧ 봉분 뒤에는 왜 소나무가 많을까?
왕릉에 우거진 숲을 계획적으로 조성했다. 봉분 뒤 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 으뜸을 뜻했다. 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는 역할을 했다. 낮은 홍살문(왕릉 입구)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 태조의 건원릉(경기 구리시) 봉분에 는 억새풀을 심었는데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한 태조를 위해 태종이 함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⑨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은 황제릉?
고종은 1897년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대한제국)라고 선포했다. 경기 남양주시 홍 릉과 유릉은 황제릉으로 조성됐다. 홍·유릉은 정자각(평면이 '丁'자 모양) 대신 중국 의 황제릉처럼 '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능의 석물도 코끼리, 낙타 같은 낯 선 동물을 배치했다. 왕릉의 석물이 왕을 호위하는 상징인 반면 홍·유릉의 석물은 황 제의 위용을 드러낸다.
⑩ 서삼릉에는 왕족의 공동묘지가 있다?
세 왕릉이 있는 서삼릉(고양시)에는 왕자, 공주, 후궁의 작은 묘 46기가 모여 있어 공동묘지를 연상시킨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뒤 도시화 과정에서 자리를 잃은 묘와 원(왕 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들이 서삼릉으로 쫓겨 왔다. '공동묘지' 옆에는 왕족의 탯줄 을 보관하는 태실 54기도 있다. 원래 태실은 전국의 명소에 묻었는데 일제가 서삼릉으로 몰아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