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단계 레슨을 마치고 크리아요가를 신청하기에 앞서 최선의 수행 방법이 무엇일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근 불교의 교리를 조금 공부하며 12연기법, 사성제, 팔정도 등 이론이 참으로 논리적이고 무명에 헤매는 중생들을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 해탈로 인도하는 바른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석가나 여러 보살들의 강한 원력에 감동을 받고 삶을 의지할 분들이라 느낍니다. 아직 절에 다니거나 염불이나 참선을 제대로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한편 불교의 가르침과 SRF의 가르침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크리아요가는 모르지만 에너지강화운동과 홍쏘 그리고 옴 명상이 잘 되면 참으로 편안하고 정화되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런데 크리아요가가 왜 과학적이고 가장 효율적인 수행 방법이라고 하는지를 아직 체험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이제 50이 넘은 나이에 이 생을 마칠때까지 또 다음 생에서 이어갈 수행을 하나 정해야겠는데 SRF의 크리아요가가 불교의 염불, 참선 등 수행과 비교하여 어떤 점에서 수월한 점이 있는지 조언을 들을 수 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제가 경험이 일천하여 뭐라고 말쓰드리지 못하겠지만.,
단다님께서 안계시니 제 경험에 비추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이란 어차피 이중성을 지니기 때문에 습관의 경향성에 따라 흐름이 좌우됩니다.,
진리를 향하거나 아니면 속세를 향하거나 항상 마음은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감각의 접촉으로 마음은 항상 외부를 향해 흐르면서 현상계의 무지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오랜시간 기도와 묵상등으로 마음의 습관이 형성된다면 마음은 천천히 내부를 향해 흐르면서 진리를 향해 상승하게 됩니다.
하지만 크리야는 강제적으로 마음을 감각과 차단하게 합니다,
비유하자면, 명상시에 전화가 올 때
전화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것이 일반적인 기도나 명상이라면
크리야 요가는 전화코드를 뽑아버리는 것에 비유됩니다.
양극을 가진 기류가 스스로 磁化되면서 중심을 형성하여
중심을 형성하여 끊임없이 마음이 외부로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흩어지는 철가루들이 자석을 향해 모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기계적인 크리야의 수련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크리야 수행에 따라 헌신이 진보하여야 올바른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죠(라히리 마하사야)
어떤 수행이라도 이러한 마음의 강력한 경향성을 활용할 수만 있다면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불가의 여러수행들, 10종 까시나 안나반나, 부정관 특히 염불수행은
마음에 강렬한 중심을 형성하여 모든 외부의 흩어짐을 거두어들이죠.
이런 상태가 진행되면서 제감이 이루어지고 삼매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라히리 마하사야의 아드님인 팅코리 라히리께서도
크리야는 수많은 길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열정과 헌신 같습니다. 송아지가 어미소를 찾듯이-아이가 엄마를 찾는듯한 간절함 말입니다.
제가 시간을 되돌린다면 홍소테크닉에 아마 더 많은 시간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축복을_()_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크리아를 시작하게 되면 홍쏘테크닉은 할 수 없게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홍쏘테크닉이 왜 크리아와는 별도로 중요한지도 궁금합니다.
홍소는 항상 수행합니다.
크리야를 전수받아도 홍소와 옴 에너지강화운동은 계속해야 됩니다.
크리야는 아침 저녁 두번으로 정해져 있지만 홍소는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홍소를 베이비 크리야라고 하는데...시간에 관계없이 많이 수행할 수록 효과가 커집니다.
그렇군요. 일단 홍소를 시간이 되는대로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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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염불, 위빠사나, 화두등으로도 쿤달리니가 각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전 아무것도 모를 당시에도 쿤달리니의 일부분이 풀려나는 것을 여러번 느꼈지요. 그저 단순한 염불과 독경을 통해서 였습니다.
의식의 진보와 상승에 따라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거울이 맑아지면 만상이 비추는 것처럼, 마음을 보면 그림자가 몸을 따르는 것처럼 쿤달리니가 저절로 각성되지요. 참회와 헌신과 소박함을 떠난다면 아무리 고도의 행법도 그저 꿈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