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DuOnag1lbrM
본문 마가복음 1:40-44 제목 : 예수님의 자유하심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제가 철이 없었던 목회 초년의 젊은 시기에 제 목회에 실망했던 적이 있습니다. 설교를 감동적으로 잘해서 저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은 게 분명한데 사람이 전혀 변하지 않는 겁니다. 이런 경우를 몇차례 경험하면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하는데 왜 나의 말씀사역을 통해서는 전혀 변화가 되지 않는걸까? 나는 과연 정말 필요한 존재이며, 이런 무능한 목회를 앞으로도 계속 해야하나? 아마도 저는 제가 대단히 능력이 많은 목회자인 줄 착각했었나 봅니다.
그러다가 구약의 소선지서인 호세아서를 강해할 기회가 주어졌고, 그 호세아서를 강해해 가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고멜이라는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서 정말 고통스러운 가정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호세아의 조국인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고멜이란 여인처럼 음란하고, 타락하고, 죄악되고, 불순종한 모습이었던 겁니다. 호세아는 가정생활의 고통 속에서 북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했고, 그래서 정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또 외쳤지요. 그래서 호세아가 외치는 말씀을 듣고 회개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물론 몇 사람은 있었겠지만 이미 죄악과 타락으로 기울어져 버린 나라의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호세아 뿐이었겠습니까?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그랬지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아모스 미가 등등 여러 선지자들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최선을 다해 외쳤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는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지요.
그래서 이 때의 선지자들은 다 실패자들일까요? 나라를 구하지도 못했고 변화시키지도 못했으니까 무능하고 쓸데없는 선지자들이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들이 외쳤던 말씀들이 이렇게 성경에 기록될 리가 없을 겁니다. 이들이 외쳤던 말씀들이 이렇게 성경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의 말씀사역이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말씀사역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거죠.
종종 교회를 위해 일하고 봉사하다가 분노에 휩싸이고 상처를 받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가 내 신앙양심에 근거해서 바르고 참된 의견과 충고를 말하는데도 전혀 듣지 않고 개선되지 않는 현실에 실망하기도 하고,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는데도 나의 수고를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를 받거나 비난을 당하기까지 할 때에 엄청나게 분노하기도 하지요. 아마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은 심정일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라는 선지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에스겔 2:5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3: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이 듣지도 않을 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들이 변화되고 말고에 매달리지 말고 최소한 여호와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만은 알게 하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듣든지 아니 듣든지라는 것은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는 거죠. 사람들이 나를 대접하고 인정해 주는 것에도 연연하지 말고 내가 방해받고 비난받는 것에도 흔들림 없이 오늘 나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겸손히 맡기라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말이 있는데 자유에도 수준이 있지요. 내 하고싶은대로, 내 욕망대로만 하려는 자유는 사실 가장 낮은 수준의 자유입니다. 반면 높은 수준의 자유도 있지요. 높은 수준의 자유라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선하고 정의로운 일이라면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듣든지, 내가 그 일로 인해 인정을 받던 무시를 당하던, 나를 돕던 아니면 나를 방해하던, 나를 칭찬하던 나를 욕하던 상관없이 묵묵히 그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자유, 바로 이런 자유가 성숙한 자유이고, 수준 높은 자유이고, 아름답고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는 소중한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 맘대로 살려는 자유로는 절대로 아름다워질 수 없지요. 오히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부딪치면서 다툼과 힘겨루기를 가져올 뿐입니다. 하지만 성숙한 자유함을 함께 추구해 갈 때에 세상은 더 아름답고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상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런 참된 자유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41절에서 이렇게 반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그 당시나 지금이나 나병환자가 곁에 있다면 어떤 마음이 먼저들까요? 온 몸에 고름이 흐르고, 손가락 발가락이 썩어 문드러져 있고, 눈과 코와 귀가 잘리거나 비틀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 느낌이 먼저 드실 것 같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러움이 느껴지지요. 그 사람이 다가오는 게 싫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장 먼저 드시는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셨지요. 모두가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에 얽매여 있을 때 예수님에게는 그 흉측한 모습에 대해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는 자유함이 있으셨던 겁니다. 모든 사람들은 혐오하고 싫어하는데 나는 불쌍히 여기면서 그를 품어안을 수 있느는 자유, 이런 게 수준 높은 자유인 겁니다.
사람들은 나병환자이 겪는 고통과 무관심과 외면당하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알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나병환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혐오하고 싫어하는 거죠. 북한 공산 정권을 미워하다가 북한에서 고통 당하는 백성들의 아픔과 눈물마저 불쌍히 여기지 못하기도 합니다. 윤락 여성, 노숙자, 문제 청소년, 범죄자들을 대할 때에도 사회적인 편견과 저들은 실패자라는 선입관에 얽매여서 자유롭게 불쌍히 여기지 못하기도 하지요. 예수께서 우리가 거의 실천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 것이 있는데 바로 네 원수가 오른빰을 때리면 왼빰도 돌려대라는 말씀입니다. 내 빰을 때린 저 놈은 분명 나쁜 놈이고, 못된 놈이고, 잘못된 놈인데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저런 놈까지 불쌍히 여기거나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라고 하신 거죠. 예수님은 그런 자유가 있으셨고, 그 자유함으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자리까지도 가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손길은 죄악되고 허물 많은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미움과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자유함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거죠.
예수님은 이렇게 불쌍히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고 본문 41절은 말씀합니다. 웬만한 사람은 나병환자의 몸에 손대지 못합니다. 전염될까봐 두렵기 때문이지요. 자기보호본능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유평등시대라고 하지만 여전히 상류계층과 하류계층의 구분이 존재하지요. 상류계층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은 하류계층의 사람과 쉽게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과거처럼 신분과 계급이 뚜렷하게 구분되던 시대에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손잡고 어울린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들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자유롭게 오셨고, 이런저런 죄악과 타락과 어둠을 지닌 죄인된 우리들과도 아무 거리낌 없이 어울리셨지요. 예수님은 병든 자, 가난한 자, 범죄자, 무식한 자, 그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는 것에 자유로우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까지 붙으실 정도였지요. 남의 시선과 이목, 사회적인 체면과 위신, 손해볼까 해를 입을까 눈치 볼 것 없이 예수님은 자유롭게 모든 사람들을 만나시고 어울리시고 그들에게 참 생명과 삶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는데 이 나병환자에게 엄하게 경고하신 게 있지요. 43절과 44절을 보면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능력을 행하셨으면 그 능력을 선전해서 인정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왜 침묵하라고 명령하실까요? 지금 이 시대는 없는 경력에 가짜학위까지 교묘하게 만들어서 자신을 과시하고 선전하기도 하고, 홍보전략은 회사이든 단체이든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명예와 인정과 찬사와 더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는 증거가 있는데도 왜 숨기시는 걸까요?
예수님은 세상에서의 인정과 칭찬과 명예를 얻는 것에도 자유로우셨습니다. 자리와 직위와 직책에 연연하고 매달리는 우리들 같지 않으셨지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도 구제하면서 받게 되는 찬사와 칭찬 같은 것에 얽매이지 말고 아무 인정이나 댓가도 못받는다 해도 그것이 옳고 좋은 일이니까 자유롭게 행하라는 의미의 말씀 아니겠습니까? 봉사도 헌신도 그렇게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것은 많은 소유나 권세나 명예나 인정을 받는 것에 있지 않지요.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참된 자유함에서 진정한 행복은 주어집니다. 이런 자유함은 어떻게 주어질까요? 고린도후서 3: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도 요8: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바로 주의 영이 계신 곳,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바르게 아는 것,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지요. 즉 참된 자유의 근원은 세상에서의 힘과 능력과 재물과 세상 권세와 많은 지식에 있는 게 아니라 주의 영, 즉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의 생명과 사랑과 평화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에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가시면서 예수님의 이런 자유함을 배워가시기 바랍니다. 이 자유함이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참된 믿음과 선함과 흔들림없이 평온함을 지켜가는 삶이 되게 할 것입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늘 성령의 임재와 충만함을 위해 기도하시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진리를 잘 배워서 우리의 참된 자유의 범위와 영역을 계속 넓혀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