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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강화
선우 휘
눈은 저녁녘이 되어서야 멎었다.
산과 골짜구니에는 반 길이나 눈이 깔리고 소나무와 떡갈나무는 가지와 잎새에 눈을 그득히 얹고 힘에 겨운 듯 서 있었다.
간밤의 포격으로 무너지고 파인 산허리나 골짜구니의 상처도 온통 흰 눈에 덮여버리고 말았다.
간밤엔 전투가 있었다.
그 뒤에 종일토록 눈이 내렸다.
저물어가는 흐린 하늘보다 눈에 뒤싸인 땅이 오히려 희다.
어슬어슬 어두워갈 무렵.
어디선가 비행기의 폭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더니 회색 하늘을 등진 희디흰 서녘 산마루를 넘어 한 대의 수송기가 그 육중한 자태를 드러냈다.
한참 시원스러이 동쪽으로 날고 있던 수송기는 옆구리에서 검고 조그만 덩어리 하나를 떨어뜨렸다. 덩어리는 세차게 낙하하여 산비탈에 싸인 눈 속에 처박히며 그 둘레에 비말 같은 눈가루를 뿌려놓았다.
그러자마자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골짜구니의 이쪽과 저쪽의 웅덩이 속에서 동시에 두 그림자가 튕겨 나오더니 검은 덩어리가 처박힌 지점을 향해 무릎까지 오는 눈 속을 허우적거리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간신히 떨어진 지점 가까이 이른 두 그림자는 서로를 인식하자 더욱 기를 쓰며 다투듯 그리로 기어 올라갔다.
거의 동시나 다름없이 검은 덩어리에 달겨든 둘은 덩어리를 얼싸안고는 한참동안 말없이 어깨를 들먹이며 세차게 숨을 몰아쉬었다.
옷차림을 보아 둘이 다 병사 같았다. 그중 한 명이 문득 비탈 윗켠을 보았다. 가까이 시선이 가는 곳, 거기 움푹 패인 동굴 같은 것이 있었다.
그는 아직도 씨걱씨걱 숨을 가누지 못하는 다른 한 명의 병사에게 말을 건넸다.
“여 기운 내 저까지 끌어올려.”
“어 어덴데?”
그도 비탈 위를 올려보았다.
“그래, 그럭 허지.”
둘은 덩어리의 양쪽을 마주 붙들고 낑낑거리며 끌어올려 갔다.
한참만에 간신히 동굴까지 끌어올려 놓은 둘은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동안 헐떡거렸다.
“자―, 풀어 보자.”
키 큰 병사가 기운을 차린 듯 어깨에 메었던 총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보자 다른 한 명의 가냘픈 병사도 어깨에 늘였던 총을 내려놓았다.
삽시에 풀어 헤쳐진 짐짝 안에서 여러 개의 씨 레이션이 굴러나왔다.
“야 됐어, 씨 레이션이다.”
“머? 씨 머라구?”
“임마, 씨 레이션도 몰라?”
“뭔데?”
“촌놈의 새끼, 양키들 먹는 것 말야, 초콜릿 비스킷 통조림 과일통조림 도 있을걸.”
키 큰 편은 퍽이나 익은 솜씨로 손 닿는 대로 통조림 깡통을 따갔다.
“흥, 이건 닭고기야.”
“닭고기 가 있어?”
가냘픈 편이 신기하다는 듯이 받아들어 코에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흐음, 흐음.”
“머 흐음야, 이건 비스킷, 잼도 들어 있군.”
“잼?”
어느새 예닐곱 개의 깡통이 따졌다.
“자아 뜻밖의 생일잔치다. 어, 숟갈 받아.”
“숟갈?”
키 큰 편은 합성수지로 만들어진 조그만 숟갈을 통조림 속에 찌르더니 솜씨로 한 숟갈을 퍼서 입 안에 넣고 음미하듯이 먹는다.
키 큰 편이 하는 양을 본받아 한 숟갈을 입 속에 처넣은 가냘픈 편은 단김 에 꿀꺽 소리를 내며 삼키더니 부리나케 퍼넣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키 큰 편이 입가에 엷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역시 굶었었군.”
불시에 한 통을 비운 가냘픈 편은 이번에는 나꿔채듯 비스킷을 집어들어 우적우적 씹었다.
“동무 이거 굴러떨어진 호박인데, 이 새끼들 잘도 먹지?”
그 소리에 키 큰 편이 언듯 숟갈을 쓰던 손을 멈췄다.
“머? 뭐라구.”
“이 새끼들 잘 먹는단 말야.”
“나보고 뭐라 했어.”
“뭐 말야 동무.”
“동무?”
순간 키 큰 편은 손에 들었던 깡통을 집어던지고 몸을 일으키며 허리에 찬 대검을 쑤욱 뽑아들었다.
“너 괴뢰구나.”
“괴뢰?”
“괴뢰지! 꼼짝 마라 손들어.”
가냘픈 편의 손에서 깡통이 떨어져 땅바닥에 굴렀다.
“너 괴뢰지?”
“아, 아냐 난 인민군야.”
“역시 괴뢰군.”
“너, 넌 뭐가?”
가냘픈 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 난 국군이다.”
“국방군! 괴괴뢰구나.”
“자식이, 꼼짝 마.”
국군 병사는 인민군 병사의 가슴에 총검을 겨눈 채 그의 옆으로 다가가며 거기 놓여진 총을 힘껏 구둣발로 걷어찼다.
“어쩔 테야?”
인민군 병사가 높이 팔을 든 채 국군 병사에게 물었다.
“어쩔 테야라구? 손을 모아 뒷덜미에다 얹어!”
“어쩔 테야?”
“어쩔 것 같애?”
대답이 없었다.
“네가 선수를 썼더면 어떡허지?”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죽이겠지?”
역시 대답이 없었다.
“들어봐, 넌 벌써 죽은 셈야.”
그러곤 국군 병사는 잠깐 말을 못 잇고 그대로 거기 버티고 서 있었다.
“여기서 널, 지금 죽인다? 어디 시체하구야 한밤을 새울 수 있나. 살려두자니 잘못하면 내가 죽을 거구 어떡할까.”
국군 병사는 오히려 인민군 병사에게 반문하는 조로 중얼거렸다.
“어떡허면 좋지?”
인민군 병사는 그저 먹먹하니 앉아 있었다.
“별수 없군. 묶어야겠어.”
국군 병사는 결심한 듯 뇌까렸다.
“어때?”
인민 병사는 대답이 없었다. 국군 병사는 그러고도 한참동안 힘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묶어놓고 내 손으로 먹일 수 없구. 여, 손 내려, 우선 제 손으로 먹고 싶은 대루 처먹어.”
인민군 병사는 손을 내려놓고도 그대로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왜 그래? 못 먹겠나?”
대답이 없었다.
“먹어! 안 먹으면 별수 있어?”
국군 병사는 발밑에 있는 따진 통조림 하나를 들어 인민군 병사의 턱 밑에 내밀었다.
“이건 쇠고기야, 먹어봐.”
인민군 병사는 느릿느릿 손을 내밀었다. 깡통을 받아들고도 좀처럼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서향한 탓으로 동굴 안은 아직 희미하게나마 빛이 있었다.
“여, 그 대신 너, 아예 그 깡통을 들어 나한테 내던질 생각은 마.”
인민군 병사는 반 통도 못 먹고 나서 깡통을 땅바닥에다 놓았다.
“더 먹지그래.”
“……”
“그럼 이젠 묶는다아, 돌아앉어, 팔을 뒤로 돌려.”
인민군 병사는 맥없이 시키는 대로 돌아앉더니 뒤로 두 팔을 돌렸다.
국군 병사는 야전잠바 한가운데를 조이는 노끈을 풀어내어 인민군 병사의 팔목을 묶기 시작했다.
“너 장갑도 없구나?”
“……”
묶고 난 국군 병사는 인민군의 어깨에 손을 가져가 그의 몸을 자기 편으로 돌렸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통조림 하나를 골라가지고 먹기 시작했다.
인민군 병사는 가만히 밑으로 눈을 깔았다.
“어려 보이는군. 너 몇 살이가?”
대답이 없었다.
“너 몇 살이지? 왜 대답을 안 해? 스물하나? 스물둘, 셋, 넷, 뭐야, 그럼 열아홉, 열여덟, 열일곱, 여섯, 다섯, 일곱, 여덟? 어 너 우냐?”
인민군 병사가 코를 훑어 올리는 듯하더니 어깨를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자식이 울긴.”
인민군 병사는 그 소리에 더욱 코를 훑어 올렸다.
“왜 울어? 분해 그러나? 묶인 게 분한가? 하는 수 없잖아?”
인민눈 병사는 어린애처럼 설레설레 머리를 가로저어 도리질을 했다.
“그럼 죽을까 싶어서?”
인민군 병사는 역시 도리질을 했다.
“그럼 왜 울어?”
“배, 배가.”
“배가?”
“갑자기, 배가 아파.”
국군 병사는 빙긋이 웃었다.
“뭐? 배가 아파서라, 정말야?”
인민군 병사는 고개를 주억주억했다.
“너 엄살하는 게 아냐?”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국군 병사는 먹던 손을 쉬고 하나의 깡통을 따고 그 속에서 물을 소독하는 알약을 꺼내서 그의 입에다 몇 알을 넣어주었다.
“이것을 삼켜.”
인민군 병사는 시키는 대로 알약을 입으로 받아 잠시 볼을 우물우물하더니 꿀꺽 삼켜버렸다.
“좀 나을 게다. 몇 끼 끼니를 굶었어?”
“이틀째야.”
“음, 빈속에 갑자기 퍼넣어 그렇지, 그런데 너 몇 살이가?”
“열여덟야.”
“열여덟!”
“응!”
“고향은 어딘데?”
“가평.”
“가평이라, 난 춘천이지, 어떻게 나왔어?”
“끌려 나왔어.”
“뭘 높이 들자구 앞장서 나온 게 아냐?”
“아냐.”
“집에서 뭘 했어?”
“농사졌지.”
국군 병사는 한참동안 말없이 인민군 병사의 이모저모를 뜯어보았다.
“너 국군 몇 죽였어?”
“아냐, 그저 따라다녔어.”
“거짓말 마.”
인민군 병사는 국군 병사의 튕기는 언성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다시 눈을 깔았다.
“너, 내가 널 죽이면 어떡허지?”
“……”
“죽는 건 싫지?”
“……”
“나도 죽는 건 싫어.”
국군 병사는 바싹 그에게 다가앉았다.
“난 스물넷이다. 너보담 여섯 살이나 위야. 너한테 나 같은 형이 있을는지도 모르고 나한테 너 같은 동생이 있을 수도 있어. 그렇다고 서로 죽일 수 없다는 건 아냐, 얼마든지 죽일 순 있지. 그런데 여기선 내가 널 죽여봐야 소용이 없고 네가 날 죽인대도 별 것이 없어. 나도 죽기 싫고 너도 죽기가 싫다면 어때, 너와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할까?”
인민군 병사는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무슨 약속인가 하면 너와 내가 여기서 하룻밤 서로를 해치지 않고 지내고 나서, 내일 아침 서로 갈 길을 찾아 헤어지잔 말야. 약속을 할 수 있다면 팔목을 맨 노끈을 풀어주지.”
인민군 병사는 못 믿겠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놀리는 건 아냐, 어때?”
인민군 병사는 한참 있다 떠보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국군 병사는 인민군 병사의 등 뒤로 돌아가 팔목을 동인 노끈을 풀기 시작했다.
“너 성이 뭐지?”
“장가예요.”
말투가 아까와 달라졌다.
“장가라, 난 양이다. 그런데 한마디 일러두지만 아예 딴 맘은 먹지 마. 난 학생 때 권투를 배운 일이 있어. 그리구 동무 소리는 집어치라우, 너 손이 얼었구나.”
인민군 병사 장은 노끈이 풀어지자 손바닥으로 팔목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너의 장총과 나의 엠원은 함께 이 노끈으로 묶어둔다. 재워둔 총알을 끄집어내고 탄창과 함께 내 호주머니에 넣어둘 테야. 자, 그럼 너 저 레이션 곽을 모아 깡통에 든 성냥으로 불을 지펴 봐.”
한참 후 둘은 레이션 곽의 모닥불을 가운데 하고 마주 앉았다. 장이 모자를 벗었다. 까까중이 머리가 더욱 앳되었다.
“너 참 어리구나. 배고프면 더 먹어라, 이전 밴 안 아프지? 이 과자두 먹구, 자 초콜릿.”
“동무.”
“내 동무 소리 말랬지, 그저 양이라 부르든, 양형이라 부르든 해.”
“양형!”
“그렇지, 내가 위니까.”
“여기가 어디죠?”
“나두 모르겠는걸.”
“어느 편 진지에 더 가까워요?”
“아마 중간쯤 되겠지.”
“한복판이군요.”
“그럴 테지, 그러니 내일 아침엔 어떻든 너는 북쪽으로 가고 나는 남쪽으로 떠나면 되는 거야.”
“동무, 아뇨 저 양형.”
장은 한참 동안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나?”
“제가, 제가 맏일 국군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죠?”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가게 되지.”
“죽이진 않나요?”
“전투가 아닌 담에야 어디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나.”
“꼭 포로가 돼야 하나요?”
“그럼 포로가 아니면 뭐, 있어?”
“수용소로 안 가고, 그 자기 발로 걸어간다는 걸로 말이죠.”
“귀순 말인가?”
“이곳에 국군이 온다면 그런 걸루 어떻게 안 돼요?”
“글쎄.”
“그 대신 양형, 만약 인민군이 온다면 그땐…….”
“뭐라구?”
양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너 한다는 소리가―.”
장은 한길을 뛰듯 놀라며 뒤로 몸을 젖혔다.
“너어 다시, 그런 소릴.”
올릉해진 장의 두 눈을 보고 양은 언성을 좀 떨구었다.
“장!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냐. 전투에선 죽든지, 하는 수 없으면 포로가 되든지 둘뿐야. 배반은 안 돼. 그야 어디 전투뿐인가? 사람이 사는 게 모두 그렇지, 한 군데 마음을 두었으면 그대로 버티고 나가는 거야. 운이 진하면 의젓이 망하는 거지 데데한 짓은 말아야 해 장.”
장은 모닥불의 작은 불길에 눈을 주었다.
“난 그걸 너한테 원하지 않아, 그러기에 장도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할 생각을 말어, 아침이 되면 등을 돌리고 헤어질 뿐야.”
“미안합니다. 양형, 전 나이가 어려서 잘 분간이 안 가요.”
“자네뿐인가. 누구나가 그렇지 .”
“저 말이죠 ―”
“뭔가?”
장은 눈길을 들어 말끔히 양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리고 무엇을 마음에 다진 듯이 입을 열었다.
“얘기해도 돼요?”
“뭐든 해봐.”
“가난한 사람도 잘살아야죠?”
“그럼.”
“일하는 사람이 먹을 수 있어야죠?”
“그렇구말구.”
“농사짓는 사람에겐 땅이 있어야죠?”
“물론.”
“그러면 그것을 왜 마다해요?”
“누가?”
장은 대답을 안 하고 다시 모닥불의 불길에 눈을 주었다.
“이남에서란 말이지?”
“……”
“그래 이북에선 잘되든가?”
“한다구는 하는데 그렇게 되는 것 같지도 않어요.”
“말은 많지만 말대로 되는 일은 적지.”
“그럼 이 세상엔 말대로 되는 일이 그렇게 드문가요?”
“퍽이나 드물지. 나도 오랫동안 그런 것을 여러 번 생각해봤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 잘 모르겠어.”
“……”
“내 생각으로 분명한 건 하나 있지.”
“뭔데요?”
“이 세상엔 똑똑하다는 놈이 너무 많다는 거야. 그런 놈들이 비단결 같은 말만 늘어놓고 남의 일에 뛰어들어 말썽을 일으키지.”
“그럼 바보가 많아야 하나요?”
“나는 바보올시다, 이런 사람이 되려 낫지.”
“어떻든 너무 이치를 따지는 건 안 좋아.”
“그럼, 그저 들어넘기나요?”
“어떻든 지금은 따질 때가 아냐. 다만 오늘 밤은 여기서 새우고 해서 아침이 되면 너는 북으로 가고 나는 남으로 가는 것뿐이지.”
“……”
“지금은 무엇보다 그것이 제일 분명하단 말야.”
“……”
“그러나 그것도 꼭 그렇게 된다고 다짐할 수는 없어, 가령 一”
장은 어느덧 깜박깜박 졸고 있었다. 양은 그것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 장, 자세.”
장은 흠칫 놀라며 두 눈을 크게 했다.
“하하, 장, 큰일 날려구 그레, 자 난 너의 적이 아냐?”
장은 히뭇이 웃었다.
“약속을 했잖아요.”
“그렇지 약속은 했지, 그러나 장, 난 아직 그렇게까지 믿고 있진 않아, 자네도 그렇게 믿지는 말게.”
양은 장총과 엠원의 묶음을 동굴의 돌벽에 기대놓았다.
“자 이것을 등지고 자야 해. 이리 가까이 오지.”
둘은 총 묶음을 기대고 어깨와 어깨를 비볐다. 레이션의 모닥불은 거의 꺼져가고 있는데 동굴 밖 설경은 어스름 달밤 속에 고요히 잠들고 있었다.
장의 가느다란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반잠을 자고 있던 양은 깜박 떨어진 지 얼마가 되었을까 갑자기 확! 세차게 가슴을 윽박지르는 충격에 소스라쳐 일어나자 가슴을 쥐어 잡은 장의 두 손을 날쌔게 뿌리쳤다.
“이 자식이.”
그의 주먹이 기우는 장의 얼굴에서 터졌다.
“우악!”
하고 장은 땅바닥에 쓰러졌다.
“너 이 새끼.”
장은 쓰러진 채 우우우 신음하면서 손으로 땅바닥을 더듬었다.
“너 죽인다.”
전신에 돋았던 소름이 걷히며 양은 어느 만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장은 신음 소리를 내며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했다. 양은 조심성 있게 성냥을 그어 레이션 곽의 조각에 불을 붙였다. 그는 그 불길을 땅바닥을 더듬고 있는 장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갔다. 장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길을 의식한 장은 힘없이 두 눈을 뜨고 조금 부신 듯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어어어 하고 헛소리를 틀어냈다.
“이 새끼야 너!”
그 소리에 장은 ‘예’ 하고 정신을 거두었다. 양은 장의 멱살을 잡아 치켜올렸다.
“이 죽일 놈의 새끼.”
“예?”
장은 언뜻 흩어진 시선을 모두며 양의 노여움에 찬 얼굴을 건너보았다.
“요 쥐 같은 새끼 날 죽여볼려구?”
“예? 무어요?”
“너 고런 수작을…….”
양은 장의 몸을 힘껏 밀어젖히며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장은 뒤로 쓰러지며 넋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양은 그것을 한번 노려보고 레이션 껍데기를 긁어보아 모닥불을 만들기 시작했다. 흥분이 가라앉으며 으스스 몸이 떨렸다.
“장 이리 가까이 와.”
장은 흐르는 코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황급히 모닥불 가까이로 다가왔다.
“너 그런 짓이 되리라 여겼나?”
“예?”
“예라니 내 목을 조르려 했지?”
“아뇨, 무슨 말씀예요?”
“왜, 가슴을 쥐어박았어?”
“아뇨, 전 그저 꿈을, 꿈을 꾸었을 뿐예요.”
“꿈?”
“예, 무슨 꿈인지 잊었는데 아주 무서운 꿈을 꾸고 그만 놀래서…….”
순간 양의 전신은 쭉 소름이 스쳤다. 소름은 연거푸 파상적으로 그의 전신을 스쳐갔다. 가슴에서 풍클 하고 어떤 커다란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올랐다.
“장!”
양은 그 덩어리를 간신히 목구멍에서 삼켜버렸다.
양은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가누며 장한테로 가까이 가서 손으로 그의 얼굴을 젖히고 장갑을 뒤집어 그것으로 코피를 닦아주었다.
“장, 난 그것을 모르고 자네가 날…….”
“아뇨, 제 잘못이죠, 퍽 놀라셨겠어요.”
“아냐, 장.”
양은 깡통 속에서 휴지를 꺼내 그것을 조그맣게 말아 그의 콧구멍에 찔러주었다.
“장, 좀더 가까이 다가앉아 불을 쪼여, 좀 있으면 날이 밝겠지.”
장은 모닥불 옆에 다가와서 다리를 꺾으며 쪼그리고 앉았다.
양은 한참 동안 종이가 타는 조그만 불길을 넋 잃은 사람처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음성은 신음에 가까웠다.
“정말 그들을 죽이고 싶네.”
“예?”
“전쟁을 일으킨 놈들을 말야.”
양은 일어서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희뿌연 하늘을 올려보고 또 흰 눈이 깔린 골짜구니를 굽어보았다.
한 번 크게 숨을 내어 쉬었다.
날이 밝자 뜬눈으로 드새운 양이 레이션의 모닥불을 피우고 반합에 눈을 넣어 물이 끓도록 장은 총 묶음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볼과 인중에는 아직 여기저기 코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양이 가만히 그의 어깨를 두드려 깨웠을 때 장은 멋쩍은 듯이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둘은 눈으로 얼굴을 닦고 나서 아침을 먹었다. 장은 따뜻이 데운 통조림과 양이 끓여낸 커피를 먹으며 퍽이나 즐겨했다.
“장, 너 저 레이션을 모두 가져.”
“아 저걸 다 어떻게요.”
“난 한 통이면 돼, 집어넣을 수 있는 대루 가져가지 그래.”
장이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이전 헤어지게 됐군요?”
“안 만났던 것만 못하군, 코 언저리가 아프지?”
“아뇨, 괜찮아요.”
식사를 끝낸 둘은 저마다 짐을 꾸렸다.
“자 탄환을 받아.”
양은 레이션 한 통을 꾸려 들고, 장은 두 통을 꾸려 메었다. 둘은 함께 동굴을 나섰다.
“장!”
“예?”
“잘 가라니 못 가라니 인사를 말기로 해. 자네는 저리로 가고 난 이리로 갈 뿐이야, 뒤도 돌아보지 마.”
양은 동굴을 내려서서 눈을 헤치며 골짜구니를 향해 비탈을 더듬었다.
장은 그것을 한참 보고 섰더니 저편 골짜구니로 발을 옮겼다.
눈을 헤치며 비탈을 내려가던 양은 골짜구니에 쌓인 눈 위로 이리로 향해 올라오는 듯한 예닐곱 명의 사람을 보았다.
그중 한 명이 멈칫 서더니 ‘서서 쏴’의 자세로 이리를 향해 장총을 쏘았다. 삐융 하고 머리 위를 탄환이 스쳐가며 총소리가 요란하게 메아리를 일으켰다. 엉거주춤 허리를 굽힌 양은 그것이 중공군의 일대임을 알아차렸다.
양은 본능적으로 발길을 돌려 동굴을 향해 기어 올라갔다. 또 몇 발의 탄환이 머리 위 퍽 높은 곳을 날았다.
동굴에 뛰어들자 양은 어깨에 멨던 짐을 내려놓고 동굴 앞 바위에 몸을 눕히고 소총을 점검했다. 안전장치를 풀고 골짜구니를 향해 겨냥을 했다. 사백 야드 안에 들어오면 쏘리라 생각했다. 아직 그때까지 시간이 있었다.
양은 햇빛을 받아 반들거리는 설경을 감상하듯 굽어보았다.
흰 눈이 얹힌 소나무 가지와 떡갈나무. 뒤덮인 눈 때문에 거리의 원근이 분명치 않은 골짜구니, 대리석 조각의 여인의 젖가슴 같은 언덕과 산봉우리.
그러던 양은 난데없이 바른편 눈 속에서 튀어나오는 사람의 그림자에 놀랐다.
“장!”
더펄거리며 장은 기어올라 오고 있었다. 삐융! 그 위를 탄환이 날았다.
그는 아직 레이션 뭉치를 메고 있었다. 하늘에 닿는 숨결로 동글에 올라서자,
“양형!”
하고 쓰러지듯 양의 곁에 몸을 엎드렸다.
“양형!”
그것을 보고 미소 지으려던 양은 언뜻 거두고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왔어?”
“왜라뇨?”
“귀순시키러 왔나?”
“무슨 말씀을…….”
“그럼 왜 왔어?”
장은 얼른 대답을 못 했다. 한참 동안 어깨로 숨을 쉬고 난 그는 말없이 장총을 들어 앞으로 내밀고 탄알을 쟀다.
“왜 왔어?”
장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거북한 듯이 대답했다.
“그냥 갈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약속이 틀려.”
“예?”
“지금이라두 내려가.”
“이제 어델 가요?”
“한편 아냐?”
“양형?”
“난 미담은 싫어.”
“양형!”
장은 애원하듯 양을 불렀다.
“엊저녁 저더러 따지지 말랬지요?”
“넌 배반자야.”
“괜찮아요.”
“데데해.”
“괜찮아요.”
“넌 바보야.”
“괜찮아요.”
“글쎄 내려 가래두.”
양은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장은 골짜구니를 보고 있었다. 벌써 중공군은 산개대형으로 동굴 가까이 올라오고 있었다.
양은 왼켠 쪽에서 올라오는 중공군을 겨누었다. 가만히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그자는 총을 던지고 푹 눈 속에 엎어졌다.
장의 총구에서 탄환이 날았다. 오른켠 중공군 한 명이 뒹굴었다. 장이 양을 건너보고 방긋 웃었다.
그러자 나머지 중공군은 둘로 갈라지며 이쪽 골짜구니와 저쪽 골짜구니로 몸을 숨기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양은 좌로 이동했다. 앞에 드리운 소나무 가지가 사격을 방해했다. 어느덧 중공군은 거의 삼백 야아드 안으로 밀려들었다. 양은 벌떡 몸을 일으켜 ‘서서 쏴’의 자세로 연거푸 세 발을 갈겼다. 그 중 한 명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양은 명치에 뜨거운 동통을 느끼며 쓰러졌다.
“양형!”
장이 벌떡 일어나서 뛰어오려고 했다.
“바보, 엎디어 저쪽을 봐. 그리고 그대로 들어.”
양은 전신의 힘을 모아 소리쳤다.
“장, 손들고 일어나.”
장이 흠칫 놀라며 양을 건너보았다.
“손들고 내려가.”
“아뇨, 양형.”
“내려 가라니까!”
“양형!”
“장, 이 바보, 넌, 내가―.”
“양형!”
양의 얼굴에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운 빛이 흘렀다. 그것은 순시, 갑자기 환희에 가까운 회심의 빛으로 변했다.
“옳지 그러고 보니 넌―.”
“예?”
“그렇군, 날 죽이려고, 나를 죽이려구 되돌아왔군, 그렇지? 그렇다면―.”
양은 마지막 힘을 돋우어 떨구었던 엠원 총을 끌어당기며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내가 내가 널 죽일 테다.”
“아니야!”
장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장은 울부짖으며 양한테로 달려들었다.
타타타탕, 다다다다.
좌우의 골짜구니로부터 장총과 따발총의 일제 사격이 가해졌다.
장은 총을 끌어쥔 채 천천히 한 바퀴 몸을 돌리더니 양이 넘어진 위에 겹치듯이 쓰러졌다. 얽힌 두 몸에서 뿜어나오는 피와 피는 서로 엉기면서 희디힌 눈 속으로 배어들어 갔다.
한참 후 중공군 다섯 명은 옷에 묻은 눈가루를 털면서 천천히 동굴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끝-
2016년 5월 2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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