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주일미사 혹은 축일미사 강론 원고 초본을 올려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원고 초본을 한번 탈고하고 올리는 것이라, 실제 강론은 조금 다르게 하였을 수 있습니다.
자그마한 오류나 오타가 있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제1독서 요나 3,1-5.10
제2독서 1코린 7,29-31
복음 마르 1, 14-20
하느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된 곳일까요? 도대체 어떠한 곳이길래, 우리 신앙인들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느님 나라 입성은 우리의 마지막 목표이며, ‘다른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그곳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생명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야만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을까요?
또 그곳이 도대체 어떠한 곳이길래,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오늘 복음에는 가족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첫 제자 4명만 등장하긴 합니다만, 수천년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왔던 수많은 성인, 성녀들께서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버려두고 하느님의 나라만을 바라며 살아오고 하느님의 나라에 함께 들어가야한다고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아갔을까요?
혹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이 다 있는 곳이다- 라고 얘기하며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고급스럽고 화려하고 세련된 것들이 가득한 장소라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천국에는 천사들이 날라다니면서 산해진미를 차려두었고 온갖 찬송가들이 울려퍼지는 장소라고 묘사하는 그런 성화들도 많이 있었지요. 그런데 요즘 누가 그런 천국에 가고 싶어하겠습니까?
밤낮 찬송노래가 들려오는 천국에 ‘우리 함께 가야지~’ 하고 제가 그러면, 우리 주일학교 친구들 같은 경우에는 스마트폰 게임 열심히 하고 있다가 입을 삐쭉 내밀고 한번 쳐다봤다가 다시 게임 열심히 하겠지요. 그렇게 또 열심히 하다가 저 슥 보고는, ‘신부님, 사제관 와이파이 비밀번호 뭐에요?’하고 물어보고 뭐 그럴 겁니다.
그렇다고 연세 있는 분들이면 그런 모습의 천국을 바라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연세 있는 분들은 어떤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요새 가정축복식을 좀 다니다보면, 홀로 사시는 어머님들이 참 기도를 열심히 하시는 걸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가운데에 예수님 성화, 왼쪽에 성모님 성화, 그리고 오른쪽에 우리, 이 시대 최고의 효자 트로트 가수 임영웅씨 성화 이렇게 모셔놓은 집이 참 많습니다. 천국에는 임영웅씨 같은 분 한 1000분이 공연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으실지, 잘 모르겠네요... 좋으십니까?
네, 물론 좋은 분들도 계시겠지만, 또 형제님들은 그걸 또 보시면서 그렇게 막 좋아하진 않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남사스럽게 저게 뭐하는기야-하면서 불만 가지실 분도 계실 겁니다. 또 사람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때마다 그때이 마음마다 바라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다, 혹은 저렇다 하는 가르침들은 사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하늘 나라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고, 또 저런 하늘나라의 모습이 별로일 테니까요.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의 고심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저런 모습을 지닌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지복직관의 상태로 우리가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많이들 설명하게끔 되었습니다.
지복직관이라는 것은, 지극-히 복된, 더 이상 복될 수가 없는 복됨을 우리가 직접 목격하게 되는, 하느님 안에서 그렇게 된다는 의미인데, 각자가 세상에서 바라는 행복의 모습은 모두가 다르다 할지라도, 하느님 안에서는 더 이상 복될 수 없을 정도로 진정한 행복을 깨닫고 그 안에 머무르게 된다는... 바로 그러한 의미이며, 우리는 세상에서 복됨을 추구하는 데 있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 안에서의 행복이 무엇일까 상상하고 바라고 추구해야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바로 그러한 교리 묵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 제2독서 말씀, 그리고 복음 말씀 가운데서 제가 공통적으로 생각해본 것은, 바로 이렇듯 우리가 바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참으로 사람을 위해 바라시는 것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며, 그리고 사람은 계속해서 그 하느님의 바라심을 위해 내 것을 내려놓고 자리를 박차 일어날 용기를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넓고 큰 도시 니네베를 찾아가 도시의 무너짐을 선포하였던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니네베 백성들의 모습을 보시고 그 재앙을 거두어주셨지요. 당신의 경고가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신의 바람, 참으로 사람이 바른 것을 추구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그 뜻이 더 중요하다라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부끄러움도 자존심도 내려놓으시는 절대자, 참으로 신비한 마음의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모습과 마음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하고 이야기합니다. 잘못 이해하면 이 말씀은 우리가 거짓된 삶을 살아가야한다던지, 아내를 가지면 안 된다던지, 기쁨과 슬픔을 감추어야 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실상 하느님의 의도는 그러한 모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아닌 우리가 항상 더 나은 가치, 새로운 가치를 바랄 마음, 나의 틀림이 있음을 인정하고 새로움을 택할 수 있는, 복음적 표현으로는 아마도, 회개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 말씀은, 그런 하느님의 뜻을,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 알아듣고 자리를 박차고 나선 사람 낚는 어부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 역시 뜨거운 마음으로 언제나 새로움을, 언제나 더 바름을 위해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부어줄 수 있는, 그런 복음 말씀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오늘 연중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서 봉헌하고 있는데, 사실 하느님의 말씀의 힘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운 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부분은, 어떠한 형체를 느낄 수 없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은 하느님이시며,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와 하나 됨으로써 사람을 온전히 변화시키실 수 있는, 세상 어떤 것보다 놀라운 일들을 세상에서 이루고 계시다...라는 바로 그러한 점인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의 말은 헛되이 흩어지지만 하느님의 말씀만은 변함이 없으시며,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머무신 이후로도 수천년간, 그리고 앞으로도 수천년간 혹은 수만년이라도, 계속해서 당신 제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실 것이며, 언제나 새롭고 더 바른 삶으로의 초대를 이루시는, 아주 강렬한 힘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이 부르심을 함께 들으신 여러분들께서도, 참으로 하느님과 머무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를 즐겁게 상상하시며, 임영웅씨 천분도 우리에게 참으로 큰 기쁨이 되겠지만, 하느님 한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복의 기쁨을 생각하시며, 그 삶을 위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여야 할지 즐겁게 묵상하고, 그 변화를 실천하실 수 있는 날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아멘!!
주님,'말씀'으로 변화되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아멘
신부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