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는 동네는 그 오래된 시간만큼 거리의 가로수들도 아름드리 우람합니다. 건물들만 빼곡히 들어찬 도시에 중후한 가로수들은 유일하게 '자연'의 정취를 선사하지요. 그런데 얼마전 거리로 나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겨울을 의연하게 버틴 그 가로수들이 뭉텅뭉텅 잘려나간 모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봄을 맞아 가지치기를 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팔 다리를 다 자른 것처럼 어찌나 살벌하던지.
나무의 이야기
도시만큼이나 오래된 나무들은 그 무성한 가지가 서로 엉켜 외려 자라는데 지장을 줄 수도 있었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초봄 가로수의 가지치기는 연례행사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배려' 없는 연례행사가 그 거리를 걷는 이들로 하여금 한동안 무참한 행렬 사이를 걷는 기분을 느끼도록 합니다. 그런 기분은 보는 이만의 몫일까요? 이혜란 작가의 <나무의 시간>을 통해 '나무'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앙상하고 구부정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 묘목', 나무 시장 한 켠의 보잘 것없던 나무는 흡사 버림받은 아이처럼 초라합니다. 다행히 산속 작은 집의 부부가 이 작은 묘목을 거둡니다.
도시에서 강원도로 내려간 이혜란 작가는 마당의 나무를 매일 매일 관찰하고 그 시간을 헤아려 그림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움직이지도 않는 나무인데도 '작고 어린 나무'가 '차가운 바람에 으스스 가지를 떨며 뿌리를 내렸다'는 표현에 어린 생명의 애잔함과 강인함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드디어 '반짝반짝 이파리가 돋아나는 봄'을 맞이합니다. 나무가 마당 한 켠에 뿌리를 내리고 닭과 강아지와 함께 어울려 지내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다 따스하게 만듭니다.
'여름의 끝자락/ 휘몰아치는 바람은 나무를 뿌리채 흔들었다/ 나무는 있는 힘껏 땅을 움켜잡았다./ 태풍은 온 산을 휩쓸고 지나갔다. / 나무도 작은 가지 하나를 잃었다.'
몰아치는 태풍에 자신을 지키려고 있는 힘껏 땅을 움켜잡았는데도 가지 하나를 잃은 나무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가만히 서있다가 '가지치기'를 한다며 굵직굵직한 가지들이 잘려나갈 때 나무는 어땠을까요? 뭉텅뭉텅 잘려나간 가로수들 사이를 지나기 버거운 이유는 어쩌면 그들의 '소리없는 비명'이 느껴지기 때문 아닐까요?
하늘을 이고 산자락 아래 오도카니 자리잡은 산속 작은 집, 그 마당 앞에 오도카니 서있는 나무의 모습은 하늘과 산의 색이 자연스레 번져 어우러지는 한 폭의 고즈넉한 수채화로 표현됩니다. '별무리가 강물처럼 흐르는 가을', '씨잉씨잉 산이 우는 겨울'을 견디며 어느덧 마당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어린 나무 주변을 뛰놀던 강아지, 그리고 어린 묘목을 기꺼이 품어준 주인 내외의 시간도 흘러갑니다. 존재하던 것이 늙고 사라지는 시간 동안 나무는 무성해져 갑니다.
거의 몸뚱어리만 남을 정도로 가지를 다 잘라낸 나무가 저 정도 덩치를 가지기까지 지나온 시간을 몇 해 일까요? 처음 이 도시가 만들어질 무렵 작고 어린 나무로 심어졌던 가로수들이 지켜본 시간들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너는 누구니?' 하고 달님이 묻고, 그 질문에 바람이 답해줍니다. '너는 천년을 사는 나무란다.'
뭉툭한 가지에서도 다시 새순이 돋습니다. 아마도 가로수들은 이제 100년을 살지도 모른다고 설레는 우리보다 더 긴 시간을 살아낼 것입니다. 그저 길 가에 심어진 나무가 아니라, 긴 시간을 살아낸 존재에 대한 '존중'의 의미를 <나무의 시간>을 통해 깨우쳐 봅니다.
나무를 대하는 마음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아침 라디오 방송에 소개된 사연입니다. 가지치기를 하는 분이 새 둥지를 발견하고, 조심조심 둥지를 피해 가지치기를 하는 모습이 소개된 사연이었습니다. 같은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에 따라 결과가 참 달라지죠? 이 사연을 듣고 떠오른 또 한 권의 그림책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경 작가의 <지하 정원>입니다.
조선경 작가는 우리나라 사람인데 <지하 정원>의 주인공은 '모스'라는 외국 분입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작가는 실제 '모스'라는 청소부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실존 인물 모스 아저씨는 늦은 밤에 힘든 일을 하지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직접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하시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렇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분이 '환기구를 발견했다면?'이란 상상을 통해 이 그림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모스 아저씨가 일하는 지하철은 낡고 오래된 곳입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그 낡고 더러운 지하철이 잠시나마 깨끗한 옛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열심히 청소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터널 깊숙한 곳에 쌓인 묵은 쓰레기 더미때문에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립니다. 아저씨가 이걸 두고 볼 리가 없지요. 아저씨는 터널을 조금씩 조금씩 청소를 해나갑니다. 그러다 달빛이 스며드는 환기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저씨는 그 환기구에 작은 나무를 심습니다. 그리고 물을 주고 잘 가꾸어주죠. 아저씨의 정성스런 보살핌을 받은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탁 트인 하늘로 가지를 뻗어나가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쉼터가 되었습니다.
어두운 지하철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이 온 도시를 다 화사하게 만드는 것처럼 그림책은 표현해 냅니다. 실제로 환기구에서 나뭇가지가 뻗어나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사회는 환기구에서 뻗어나온 가지가 사람들이 쉬어가는 쉼터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마음의 여유', '공간의 여유'를 지니고 있을까요?
새 둥지를 다치지 않고 가지치기를 하더라는 소식을 전한 이는 아침 방송을 진행하는 김창완씨입니다. 김창완씨는 종종 자전거를 타고 아침 방송을 하러 나온다고 합니다. 어느 아침 김창완씨가 말합니다. 이 봄 다시 나무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가 살아있는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라고요.
<나무의 시간> 뒷표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천년의 시간? 얼마나 긴 시간일까? 나무는 그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알 뿐이다.' 시간의 의미, 혹은 삶의 의미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라는 '존재'의 거시적인 시간 또한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모습들로 채워져 갑니다. 당신은 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