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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4 왕궁장암마을 자전거라이딩
☛hiking시간 및 거리 : 12:00-17:00(5시간)
20.0km 왕복 40km
☛hiking코스 : 익산역-참새방앗간-만경강자전거길-익산천-왕궁천-장암마을-귀로
자유인 조동화는
세월앞에 장사없다는 격언처럼 가는 세월 막을수 없어 오늘도 세월과 씨름하며 두발만능자가용으로 자전거페달을 굴리며 왕궁 장암마을을 목표로 망중한의 세월을 낚고 즐거움을 느끼고자 자전거라이딩 늦은시간 12:00 집을 나서다.
장암마을에는 고려 초에 우주 황씨 시조 황민보부터 중시조이자 조선 개국공신 황거중이 낙향하여 거주하였던 마을로 임진왜란 이후까지 약 5백여 년 동안 세거하였던 우주 황씨의 본향이며, 특히 임진왜란 때 이치전투에서 순국한 황박 의병장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는데 장암마을 경노당 뒤쪽에 있는 600여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신비의 은행나무는 조선의 개국공신이면서 호조판서를 지내고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우주황씨 황거중(黃居中)이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호남 최고의 명당 장암마을에는 신선이 놀던 마당바위가 있고, 표옹 송영구선생의 망모정이 있으며 마을앞에는 여자의 젖가슴처럼 둥근모습의 봉실산이 보인다.
2024년도 달랑 달력 한 장 남겨놓고 2025년을 맞을 준비의 시간이여.
"이또한 지나가리라." 유명한 격언이 생각난다.
세월은 흘러가리라. 자연의 순리이기에 받아들이며 사는것이 인생살이 아니던가.
좋은것도 슬픈것도 다 지나가리라. 이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일도 한순간에 지나가는거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무엇이든 "이 또한 지나가리라" 괜찮아 이젠 "다 잘 될 거야"
내일은 내일데로 새로운 날이 밝아오겠지요.
이세상에 오고 싶어 온것도 아니고, 기왕지사 이세상에 왔으니 살아볼만한 세상, 즐겁고 행복을 꿈꾸며 살아야 하지요.
이리도 한세상 저리도 한세상 세월은 흘러갑니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의 벗님들!
건강합시다.
행복합시다.
감사합시다.
☞우주황씨 10대손 황거중
황거중의 본관은 우주(紆州), 자는 경덕(敬德), 호는 사가(四佳), 고려 중윤(中尹) 황민보(黃旻甫)의 10대손이다.
황거중은 우주황씨(紆州黃氏)를 중흥시킨 인물로, 고려 말 이성계를 도와 황산대첩에서 활약하였으며, 조선 개국을 도와 원종공신이 되었다.
황거중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공신녹권(功臣錄卷)을 받았으며,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구암서원(龜岩書院)에 배향되었다.
황거중신도비는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원내월 제각 옆에 세워져있고 그의 묘는 마을 뒷산에 있다. 방형대석에 옥개형 개석을 갖추고 있으며 1855년에 세웠다.
비문은 기우만이 짓고 김문제가 해서로 썼으며 두전도 함께 썼다.
족보의 기록에 갑술년(1394) 원로잔치에 성조께서 친히 동첨하고 취하여 일어나 춤을 추면서 황거중에게 마주 일어나 춤을 추자고 하시자 사양할 수 없어 같이 춤을 추었는데 화공에게 영하여 그림을 그리라 하고 드디어 어포(御袍), 어대(御帶), 은병, 옥술잔 대무도(對舞圖)를 상으로 내리고 곧 공조전서를 삼고 다시 호조판서를 내렸다고 하였다.
↓이묘소는 우주황씨(紆州黃氏)10대손 황거중(黃居中)의 묘소이다.
우주황씨는 1-9대까지는 후사의 기록이 없으므로 10대손 황거중의 자손으로부터 우주황씨 가계가 번창하였으므로 사실상 우주황씨의 시조는 10대손 황거중(黃居中)이 중시조로서 시조라고 할수 있다.
황거중은 본관 우주, 휘는 거중, 자는 경덕(敬德) , 호는 사가(四佳)
황거중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정1품 오늘날의 국무총리급)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공신녹권(功臣錄卷)을 받았다.
부인 파평윤씨이며 둘째부인은 양천허씨이다.
파평윤씨 1남1녀, 양천허씨 3남1녀
사위는 도총제(都摠制) 유습(柳濕)이다.
유습(柳濕)은 고흥유씨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의 도절제사를 역임했다.
우주인 황거중(黃居中)의 사위 고흥유씨 유습(柳濕)장군의 묘가 우주황씨 10대손 황거중묘의 바로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600여년전의 사연을 알길이 없도다.
<유습장군의 묘역아래 엄청난 우주황씨 묘가 잘 단장되여 있는데,
우주황씨10世 중시조 문숙공 휘 거중(1358-1433 고려공민왕7 출생-세조15작고)의 묘이다.
우주황씨(紆州黃氏) 중시조 황거중(黃居中)은 자(字)가 경덕(敬德)이고, 호(號)가 사가재(四佳齋)이다. 1358년(고려 공민왕 7)에 태어났고, 1433년(세조 15)에 사망하였다.
고흥유씨의 선산에 문숙공 거중의 묘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문숙공 거중의 딸이 고흥인 도총제 유습장군한테 출가하였기에 이곳 묘자리를 잡은 것 같다.
유습장군의 장인어른이 이곳에 잠들어 있구나.
우주황씨 문숙공 거중은 호조판서 역임하였다.
거중은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지금의 국무총리격이다.
문숙공 거중의 묘역의 위치는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유습장군묘역 바로아래에 있다.>
10세 중시조(中始祖)인 거중(居中)은 고려말 이성계가 남원 운봉에서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를 때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거중(居中)은 조선개국(朝鮮開國)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서, 정당문학(政堂文學), 공조전서(工曹典書),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한 후 낙향(落鄕)하여 우주(紆州)에 살았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우주로 삼았다.
거중은 고향인 왕궁면 장암(場巖)에서 꽃을 심고, 사람들을 평안하게 두루 만났으며, 거문고를 벗삼아 때로는 술과 시를 즐기시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으며, 여러 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유감(有感) 등 시(詩)와 여제생설(與諸生說) 등 문장(文章)이 있다. 거중(居中)은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김제의 구암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의병장 황박 (黃璞) 장군
황박(黃璞)의 본관은 우주(紆州), 호는 죽봉(竹峰)으로 문숙(文肅)공 황거중(黃居中)의 후손이다.
1564년 전주부 우북면(현 왕궁면) 장암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으며 용모가 출중하고 골격이 우뚝했다.
1582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비변랑을 거쳐 1590년 종4품 전주만호로 봉직하던중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다가 임진왜란을 당했다.
고향에 홀로되신 어머님과 부인, 어린 두 아들을 남겨두고 ᄂᆞᆯ를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그의 나이 28살이었고, 3대 독자였다.
내가 비록 상중이나 어머님의 명을 받들어 자진하여 참전하여 힘을 다해 나라를 구할 것이다”는 각오로 500명의 의병을 모아 6월 금산전투에 이어 7월 웅치전투에서 선봉장으로 싸웠고 이어 이치전투에서 후군장을 맡아 싸웠다.
이치전투에서 선봉장 황진이 적탄을 맞고 쓰러지자 황박 장군이 적을 무찌르고 황진을 구한 후 기력이 다해 1592년 8월 28일 전사했다.
김제시 용지면에 충신 황박 정려가 세워지고, 황박이 죽은 이치에는 충절비가 세워졌다.
『김제향교지』 충훈 편을 보면 ‘문숙공거중후임난순절이치증병사명정충(文肅公居中后壬亂殉節梨峙贈兵使命旌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뜻은 “황박은 문숙공 거중의 후예로 임진왜란 시 이치전투에서 순절했고 증직으로 병사를 받았으며 충신으로 정려를 받았다”이다.
임진왜란 때 이치와 웅치에서 호남을 지킨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 없이 죽어간 전라도 의병들로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是無國家 약무호남시무국가]”라는 말을 하였다.
▶우주황씨 중시조 10세손 居中(거중)
字敬德號四佳自幼時穎悟俊逸能屬文解經出入意表晩六崔公完城李公皆一時模楷講磨道義以成其德
聖朝征阿只拔都於雲峰署公爲從事多效籌策及登寶位首召公拜正堂文學時因麗末之廢而佛敎熾盛公以挽回世道扶植儒敎爲己任建請于 朝曰移風易俗使民回心向道莫如精選儒士之明經飾行者以爲列邑之講師庶可以興化敦俗亟 命施行州郡置敎授訓導職名自公始焉及宴耆舊 上親臨酣歌起舞命公對舞
命畵工圖繪撤御袍御帶銀壺玉杯以賞賜拜工曹典書尋陞戶曹判書有闢異端扶正學之功叅開國原從功臣引年還鄕里四方學者執經而問難庠舎不能容文風自此菀興與學者書略曰讀書之要先正其心開卷之時必須整爾衿歛爾膝不遊爾目不戱爾手專心于書致意於義毋得一字放過母得一義泛看沉潛反覆究其理而想其像又曰老佛之害韓文公言之詳矣大抵吾道之源自堯舜以來脉絡甚明所謂天不變道亦不變者而近世佛敎熾盛非但愚民之沉惑士大夫家亦皆崇奉甚矣世風之澆漓也爲士者當熟讀聖人之書信之篤守之確則彼邪說者不能闖入吾立朝以來每以興學之意開陳於僚友雖不及親見其效庶或有補於世敎也
考終于紆山之正寢訃聞 上悼甚撤市朝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諡文肅遣官致祭禮葬于完州郡飛鳳面內月里後麓亥坐原有體碑神道碑松沙奇宇萬撰碑銘略曰麗氏尙佛仁義充塞公曰先務正衛邪斥斥邪之嚴如斧如鉞功不禹下以承孟闢文敎休明 國朝五百斯爲兆朕民被其澤士林俎豆于金堤郡龍池面平皐龜嚴書院剛齋宋穉圭撰享祝略曰學識精明器局俊整佐命聖朝闢異扶正衿紳誦慕愈久愈切又撰集序曰公起豊沛翊聖朝致太平興學正俗使異敎不得肄可謂知爲國之先務我國家儒敎將興公之闢異實爲之兆勉庵崔益鉉撰院壇記略曰闢佛敎而衛正道功社稷而澤蒼生有遺稿一篇行于世
配貞敬夫人坡平尹氏父左右常侍仁達祖純誠輔翊衛功臣評理忱曾祖大提學安庇大提學瑤玄孫外祖府院君任子松墓附
配貞敬夫人陽川許氏父開城尹僑祖贊成事冠曾祖世子師文敬公琪外祖判書徐興
元至正戊戌正月十一日生
明宣德癸丑九月一日卒
墓完州郡華山面敦義洞後麓戌坐立碑有床石望柱
字는 경덕(敬德)
號는 사가(四佳)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재주와 슬기가 뛰어나 능히 글을 짓고 경서를 해독할 뿐더러 보통 사람의 생각 이외의 것을 생각해 내었다
만륙당 최공(최양(崔瀁):號는 만륙당(萬六堂) 려말선초(麗末鮮初)의 대학자) 벼슬(官)은 이부상서(吏部尙書) 대제학(大提學)과 완성 이공(이백유(李伯由):봉작(封爵)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이조개국공신(李朝開國功臣)은 모두 당시의 모범되는 인물로서 公은 그들과 함께 도의를 강론하고 연마하여 강마도의(講磨道義) 그 덕성을 완성하였던 분이었다
성조(聖朝:태조 이성계(太祖李成桂)께서 아지발도(阿只拔都:고려말에 영·호남을 휩쓸던 왜적의 장수)를 운봉(雲峰)에서 정벌할 적에 公으로 하여금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일을 보게 하시니 公이 용의주도한 묘책을 드리어 그 묘책으로 말미암아 왜적을 섬멸할 수 있었다
그후 이태조 보위(王位)에 오르자 맨 먼저 公을 불러 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에 임명하였다 그 때는 아직 고려말(高麗末) 폐단으로 말미암아 불교(佛敎)가 대단히 번창하여 가위 불길처럼 성하게 일어났으니 公이 세상의 도리를 만회하고 유교(儒敎)를 뿌리박아 심을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고 임금께 의견을 상주(上奏)하여 이르기를
『풍속을 개량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 바른길로 가게 하는데는 경서에 밝고 조행이 엄정한 선비들을 정선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 고을의 향교(鄕校)에서 경서를 강의하고 학생을 지도하는 훈도(訓導)로 삼는 것만큼 더 좋은 게 없습니다 그리하면 아마 교화가 일어나서 풍속이 다스려질 것이외다 급히 왕명을 내리시어 시행하소서』하였다
그리하여 각 주(州)와 군(君)에 교수(敎授)와 훈도(訓導)의 직책을 두게 되었는데 바로 公의 건청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다 이로 인해 도의(道義)가 세워짐에 감복한 임금은 기로(耆老:나이 많고 덕이 높은 사람)들과 옛 친구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 친히 임하시어 취하도록 마신 뒤에 즉흥으로 일어나 춤추고 노래하며 公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명을 하여 같이 즐겁게 추고 또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왕의 곤룡포(袞龍袍)와 옥대(玉帶)를 벗어 公에게 상으로 하사하시고 은술병 옥술잔(銀壺玉杯)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임명되고 곧 호조판서(戶曹判書:정2품 지금의 재무부장관)에 올랐다 이단(異端:불교)을 물리치고 바른 학문(儒學)을 세운 공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참예하였다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오니 사방의 학자들이 경서를 들고 찾아와서 질문을 하는 사람으로 학교(書院)가 꽉 들어차니 다 수용할 수가 없을 정도여서 학문을 숭상하는 풍습이 이로부터 크게 일어났던 것이다
학자들에게 준 글의 대략에 이르기를
『독서의 요결은 제일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나니 책을 펼 때 모름지기 너희 옷깃을 여미고 너희 무릅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너희 눈을 굴리지 말고 너희 손을 희롱치 말고 오로지 책에만 마음을 쏟고 그 뜻을 명백히 함에 두고 한자(一字)라도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뜻(一義)도 범연히 보아 넘기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깊이하여 거듭거듭 되풀이하여 그 이치를 궁구(窮究)하고 그 실상을 상상해야 한다』또 이르기를 『노자와 불교(老佛)의 터무니없는 허무망탄(虛無妄誕)의 해독(害毒)에 대해선 한문공(韓文公:名은 유(愈) 字는 퇴지(退之) 唐나라 때 대학자)이 자세히 언급했노라 대저 우리 유교(儒敎)의 근원은 저 요순(堯舜)으로부터 지금까지 그 맥락이 매우 분명하니 이른바 「하늘이 변치않고 도(道) 또한 변치 않는다」는 말이도다 그런데 근세에 와선 불교가 불꽃처럼 맹렬히 일어나 비단 어리석은 백성들만이 거기에 침혹(沉惑)할 뿐이 아니라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 까지도 또한 모두 숭배하여 받들고 있으니 심하도다!세상 풍속의 천박함이어!선비된 자 마땅히 성인(聖人:孔孟)의 글을 자세히 읽고 그것을 믿고 그것을 독실히 지키어 그것이 확고해지면 저 사악한 말들이(邪說 불교)엿보고 들어오지 못할 것이로다 나는 벼슬길에 오른(立朝) 이래로 늘 바른 학문을 일으키는 데에 뜻을 두고 그것으로써 동료들에게 개진하여 왔다 비록 그 효험을 몸소 보지는 못하였다 할지라도 아마 혹 세상의 교화에는 보탬이 있었으리라고 믿는다』하였다
고향 우산고을(紆州)의 거처하던 큰 방(正寢)에서 천명을 마치니(考終) 부고가 임금에게 알려지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시고 시장과 조회(市朝)를 철폐하시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관계(官階)의 최고관 정1품)」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를 문숙(文肅-문(文)자 시호를 영예로 여김)이라 하였으며 관리를 보내어 초종제례를 엄숙히 치르고 완주군(完州郡) 비봉면(飛鳳面) 월곡리(月谷里) 후록(後麓) 해좌원(亥坐原)에 예법에 따라 장례를 지내었다
체비(體碑) 및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구한말의 의병장)이 지은(撰) 비명(碑銘)에 이르기를 『고려가 불교를 숭상하여 의가 꽉 막히었도다 公께서 맨 먼저 하신 일은 정도(正道:유교)를 지키고 사설(邪說:불교)을 배척함이었도다 사설을 배척하신 그 위엄이 도끼와 같고 또 큰 도끼와 같도다(斧鉞) 그 공(功)이 우임금(禹貢)보다 못하지 않고 맹자(孟子)의 사설 물리친(斥邪說)것을 이어받았도다!학문의 가르침이 크게 밝히어졌으니 우리나라 오백년의 다스림이 이에서 시작되었고 백성들은 모두 그 은택을 입었도다』하였다 사림(士林)들이 김제군(金堤郡) 용지면(龍池面) 평고(平皐)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하고 제사를 지내니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조선 정조(正祖) 순조(純祖) 헌종(憲宗)때의 대학자)가 찬한 축문(祝文)에 이르기를 『학문과 지식이 깨끗하고 밝으며 생각과 도량이 바르고 뛰어나 성조(聖祖:太祖)를 도울 적에 이단(異端:불교)을 물리치고 정도(正道:유교)를 심었도다 사림(士林)들이 公을 기려 사모함이 오랠수록 더욱 간절토다』하였다
또 문집(文集)의 서문에 이르기를 『公이 풍패(豊沛:全州)에서 일어나서 성조(聖朝:太祖)를 도와 태평성대를 이루었고 학문을 일으키고 풍속을 바로잡아 이교(異敎:불교)로 하여금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히 나라를 위하여 먼저 해야 할 일을 알았다고 할지로다 우리나라에 유학이 일어나려 할 즈음에 公이 이단(異端)을 물리친 것이 사실 그 조짐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조(李朝)말의 정치가 대학자)찬한 원단기(院壇記)의 대략에 이르기를 『불교를 물리치고 정도(正道:유교)를 지켰으니 사직(社稷:국가)에 功이요 백성에 은택이로다』하였다
유고(遺稿:공이 남긴 글) 한 편이 세간(世間)에 유행되고 있다
配정경부인인파평윤씨(貞敬夫人坡平尹氏) 부친은 좌우상시(左右常侍) 인달(仁達)이요 祖父는 순성보익위공신(純誠輔翊衛功臣) 평리(評理) 침(忱)이요 曾祖는 대제학(大提學) 안비(安庇)요 대제학(大提學) 요(瑤)는 현손(玄孫)이요 外祖는 부원군(府院君) 임자송(任子松)이요
묘公의 영(塋)에 합봉(合封)하다
配정경부인양천허씨(貞敬夫人陽川許氏) 부친은 개성윤(開城尹) 교(僑)요 祖父는 찬성사(贊成事) 관(冠)이요 曾祖는 세자사(世子師) 문경공(文敬公) 기(璂)요 外祖는 판서(判書) 서흥(徐興)이다
원나라 지정(元 至正18년1358)戊戌정월11일에 태어나서 명나라 선덕(明 宣德8년1433)癸丑9월1일에 卒하다
묘완주군(完州郡) 화산면(華山面) 돈의동(敦義洞) 후록(後麓) 술좌(戌坐)이다 비(碑)를 세우고 상석(床石) 망주(望柱)가 있다 2015년3월 완주군(完州郡) 비봉면(飛鳳面) 월곡리 후록(後麓)에 있는 부군 거중묘(居中墓)로 이장(移葬)하여 합봉(合封)하다
▶우주황씨 11세손 均(균) 김제파
金堤派
明洪武 戊辰生
公早承庭訓德業夙就甫冠質疑者繼乎門指授各稱其意而無不曲折明核也時當麗季聖學晦而邪敎熾公以古聖賢爲法君臣父子孝梯忠信之道勸之人士俗爲之大變丁憂哀毁甚謹守家禮待季交朋友以和義誠信爲主各得其歡心焉太宗庚寅入龍奮司辛卯中司馬後屬內禁衛拜副司直公曰善可以及人足矣何必官爲遂病辭鞱晦深體力行志益堅道益明負笈之士日益衆焉嘗曰讀書固當思索而有疑則尤爲致思必使解疑又從以反覆涵泳切己玩味使聖賢之言漸漬浹洽心與理會矣義理無窮歲月有限人欲易迷天理難復若不日新又新進進不己則德業日至荒虧前日之銖累寸積者擧將失之矣鎭川宋商鉉銘其墓曰惟公學問務大本兮踐履篤實仁且義兮謝絶軒冕志會點兮斥邪爲務補聖學兮
世宗乙丑卒 墓考塋下艮坐立碑有石床石人望柱
配恭人漆原尹氏父漆原府院君子當祖漆原君控曾祖龜城君忠義公吉甫 墓合封
명나라 무진년(明 洪武 戊辰一三八八:高麗 禑王14년)에 태어나시다
공이 일찍부터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덕성스런 행실이(德業) 일찌기 성취하여 겨우 약관(弱冠:二十세)의 나이에 의심을 물어서 밝히려는 사람들로 문에 줄을 이어 다달으니 그 개개인마다 지적하여 가르쳐주는 말이 모두 그 의문나는 뜻에 꼭 들어 맞아 그 복잡한 내용의 자세한 핵심을 명확하게 밝혀내지 않는것이 없었다
때마침 고려말엽이라 성인의 가르침은 (聖學·儒敎) 꽉 막히어 숨어버리고 사특한 교리(邪敎·佛敎)가 일어나 매우 치성하니 공이 옛 성현의 가르침을 법으로 삼고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손하고 임금께 충성하고 벗에게 신의를 지킴으로써 당시 인사들에게 권면(勸勉)하니 당시 풍속이 대번에 확 달라졌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선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몹시 허약한 중에도 엄격히 주자의 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형제를 모시고 벗을 사귐에 늘 화목하고 성실하고 신의로써 주를 삼아 모두 각각 그 환심을 사셨다
庚寅年(一四一○) 太宗10年에 용분사(龍奮司·武班)에 들어가 신묘년(一四一一)에 사마시(司馬·生進科:小科)에 합격하였고 뒤에 내금위(內禁衛:宮內의 경비를 맡아보던 군대)에 배속되어 부사직(副司直:王衛에 속해있던 正五品의 武官)에 임명되었다
公이 이르기를 『착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미칠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어찌 꼭 관직생활을 해야만 하는가?』 하고 드디어 신병(身病)을 칭학(핑게)하고 재주와 학식을 감추고 隱居하면서 깊이 몸소 체를 받고 힘써 행하니 뜻을 더욱 견고해지고 道는 더욱 밝아져 책을 지고 배우려 찾아오는 선비들이 날이 갈수록 넘쳐 났다
公이 이르기를 『책을 읽을 적에는 진실로 마땅히 깊이 생각하여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의심이 있으면 더욱 생각을 골돌히 하면 반드시 의심이 풀어지리라 이어서 더욱더 반복하여 몸에 배도록 익히고 간절히 생각하고 깊이 그 뜻을 이해하도록 읽어서 聖賢의 말씀이 점점 몸에 배고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 마음과 이치가 일치가 되리라. 義理는 끝이 없고 세월은 한이 있으며 사람의 한이 있으며 사람의 욕심은 미흡하기 쉽고 天理는 돌이키기 여려우니 만약 날마다 새로워져 자주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덕업(德業:어질고 너그러운 덕성스러운 행실)이 날로 황폐해지고 이지러져 없어지는데에 이르러 지난날 조금씩 쌓아올린 공이 모두 다 잃어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천 송상현(鎭川宋商鉉)이 公의 묘비명(墓碑銘 죽은 사람의 사적을 새기어 무덤앞에 세우는 비석에 韻文으로 碑文의 末尾에 붙이는 글)에 이르기를 오직 公의 학문은 그 근본을 힘썼음이며 실제로 행실이 독심하도다 어질고 또 의로웠으며 높은 관직을 사절함이로다 뜻이 이미 바른데 정했도다 사교(邪敎·佛敎)를 물리침에 힘쓰고 성학(聖學·儒敎)를 도와 폈도다』라고 하였다
乙丑年(一四四五) 世宗二十七年에 별세하니
묘는 선고의 선영아래 艮坐原에 장례하고 비와 상석과 망주와 人石이 있다
配공인칠원윤씨니 부친은 칠원부원군 자당(子當)이요 조부은 칠원군 공이요 증조는 귀성군(龜城君) 충의공(忠義公) 길보(吉甫)이다
묘공(公)과 합봉하였다
우주황씨 유래(由來)
우주(紆州)는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삼례읍, 비봉면, 익산시 왕궁면, 춘포면 일대의 옛 지명이다.
원래 백제(百濟)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이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우주현(紆州縣)으로 개칭해 금마군(金馬郡)의 속현(屬縣)이 됐다가 고려 현종때(1018년) 전주목(全州牧)에 속했다.
고려 충혜왕 5년(1345년) 우주현은 익산군에 병합되어 익주(益州)가 되면서 우주현이라는 지명은 사라졌다. 조선 1409년(태종)에 전주부(全州府)의 우동면(紆東面), 우북면(紆北面), 우서면(紆西面)으로 각각 나누어졌다.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1914년)에 따라 우동면과 봉상면을 봉동면, 우북면과 제석면을 왕궁면, 우서면과 창덕면을 삼례면으로 각각 통합하면서 1,800년 동안 불리던 우주라는 지명이 안타깝게도 사라졌다.
그러나 김정호가 1861년 발행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紆州(우주)’ 라는 지명이 삼례, 봉상(봉동읍의 옛 이름), 송치(비봉면의 마을) 사이에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다.
우주황씨(紆州黃氏)의 시조(始祖) 민보(旻甫)는 고려 중엽 우주에 토착(土着)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중윤(中尹)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공세(公世)는 검교신호위대장(檢校神虎衛大將)을 역임한 후 우주에 세거(世居)하였다. 몇 대를 내려와 9세 문용(文用)은 문하평리(門下評理, 종2품)를 지낸 후 광정대부(匡靖大夫, 정2품)에 추봉(追封)되었다. 고려 때 인물인 시조 민보(旻甫)부터 9세 문용(文用)까지 9대의 묘소는 화장문화가 일반화된 불교의 영향으로 실전(失傳)되었으며, 현재는 비봉면 내월리에 단소(壇所)만 남아있다.
이렇게 우주황씨는 일찍이 호남 내륙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문장(文章)과 도덕을 겸비한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기틀을 다졌으며, 조선 개국(開國)과 함께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명문(名門)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10세 중시조(中始祖)인 거중(居中)은 고려말 이성계가 남원 운봉에서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를 때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거중(居中)은 조선개국(朝鮮開國)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서, 정당문학(政堂文學), 공조전서(工曹典書),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한 후 낙향(落鄕)하여 우주(紆州)에 살았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우주로 삼았다.
거중은 고향인 왕궁면 장암(場巖)에서 꽃을 심고, 사람들을 평안하게 두루 만났으며, 거문고를 벗삼아 때로는 술과 시를 즐기시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으며, 여러 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유감(有感) 등 시(詩)와 여제생설(與諸生說) 등 문장(文章)이 있다. 거중(居中)은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김제의 구암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거중(居中)의 장남 기(圻)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고, 임피파(臨陂派) 파조가 되었다. 차남 육(陸)은 정읍 현감을 지냈으며, 슬하에 상주목사를 지낸 수정(守正)을 두었으나, 후사(後嗣)가 없어 대(代)가 끊겼다.
3남 균(均)은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고 김제파(金堤派) 파조가 되었으며, 4남 견(堅)은 부사정(副司正)을 지내고 전주파(全州派) 파조가 되었다.
중시조 이후에 가문을 또 한차례 크게 빛낸 인물은 15세 헌(憲)이다. 신동(神童)이라는 말을 듣고 자라 중종 16년(1521년) 20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 문과 을과(乙科)에 급제한 후에 이조판서, 한성판윤, 평안도 감사, 병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거쳤고,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자칫 질시와 모함의 대상이 되면서도 명종 4년(1549년)에 의정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 후의 주요 인물들을 열거하면, 15세 행은(杏隱) 응청(應淸)은 어린 나이에 호남 일대 제일의 군자(君子)라는 명성을 얻어 많은 유생(儒生)이 군자가 되겠다고 다투어 몰려왔으며, 주위에서는 과거에 응할 것을 권유했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여 사서변의(四書辯疑) 3권, 시서변의(詩書辯疑) 2권의 문집을 남겼다. 김제 구암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16세 포(褒)는 덕행(德行) 및 향학(向學)이 뛰어나 주위에서 벼슬길에 나가기를 권했으나, 응하지 않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중(喪中)인데도 의병(義兵)을 일으켜 싸우다가 고산(高山)전투에서 전사(戰死)하였다.
포(褒)의 아들 17세 명세(名世)는 이태백의 시(詩)에 왕희지의 글씨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는데, 병자호란때 의병을 모아 강화도로 싸우러가던 중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서로 화합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 한 후 귀향하여 타계할 때까지 나들이를 금(禁)했다고 한다.
포(褒)의 손자 18세 자후(自厚)는 김장생(金長生), 주세붕(周世鵬)을 사사(師事) 하여 학문으로 대성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익산 금마의 화산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16세 죽봉(竹峯) 박(璞)은 158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서, 권율, 황진 장군 등과 함께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것을 막아 응치(熊峙, 곰티재), 이치(梨峙, 배티재) 대첩(大捷)을 거두었으나 애석하게도 이치에서 전사하였고, 선무원종공신에 올랐으며, 병마절도사로(兵馬節度使)로 증직(贈職)되었다. 현재 이치에 전적비(戰跡碑), 충남 금산(錦山)에 충절비(忠節碑)와 충열단(忠烈壇)이 각각 설치되어 있으며, 김제 용지면 구암리에 정려(旌閭)를 세웠다.
한편, 중시조 거중의 후손들이 언제 왕궁면 장암을 떠나 여러 곳으로 이주했는지를 보면, 임피파는 14세 준(濬)부터 자양동에서 세거(世居)하였으며, 그 형제인 연(演)은 완주군 구이로 이주하였다.
김제파는 15세 응청(應淸)이 1545년에 김제 수동산으로, 16세 수복(壽福)은 좌의정 헌(憲)이 탄핵(1549년)된 후 함열로 각각 이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주파는 왕궁면 장암 인근에 현재 견동(堅洞), 견우(堅紆), 우흥(紆興) 마을이 남아있어 파조인 견(堅)의 후손들이 꽤 오랫동안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13세 서문(瑞門)은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되어 익산 함열로 숨어 이주하였다. 16세 유증(有曾)은 우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전남 영암군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입향조가 되었다.
우주황씨의 태생지인 익산 왕궁면, 옛 우주 고을인 완주군 봉동 등에 현재 살고 있는 후손은 전주파 뿐이고, 임피파, 김제파 후손들은 모두 우주 고을을 일찍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이제 그곳에 더 이상 살지 않고있다.
세월(歲月)
세월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가득 싣고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달렸다. 한여름 가뭄이 심하면 물대는 도랑이 깊어지듯 눈가엔 깊은 도랑이 파였으며, 눈 덮인 들판에 삐쭉 내민 빛바랜 풀잎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은 살짝 스치는 바람에도 낙엽처럼 떨어지고, 탐스런 복숭아를 닮아 터질 것 같던 살갗은 나무껍질이 되어가면서 소도 때려잡을 것 같던 몸과 마음은 능수버들이 바람에 흔들거리듯이 낙조로 떨어져 내리는 저녁 해를 닮아간다
사람들은 흐르는 세월을 멈춰 세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세월은 그 누구도 멈춰 세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세월을 멈추고 싶어 하는 욕망은 흐르는 세월만큼 따라 자란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만은 예외가 있기를 바라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멈춰 세울 수 있는 자동차처럼 세월을 멈춰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이 있을 것 같다. 망상은 허무함을 잉태하여 절망을 가져올 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저 멀리 보이는 세상에 아버지가 앞서 걸어가신다. 철없던 어린시절 언제쯤이면 아버지처럼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아버지가 계신 그곳이 왜 그리 멀게만 느껴졌는지, 왜 그리도 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문득 내가 어디쯤 있는지 돌아본다. 난 제자리에 멈춰 있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가 걷던 그 곳을 내가 걷고 있었다. 세월은 쏜살같이 달려 나를 아버지가 있던 자리로 데리고 왔지만, 아버지는 그 곳에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린시절 그때만큼이나 저 멀리 떨어져 걸어가고 계실 거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서러워 슬픔에 빠져 든다.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살아있는 그날까지 깨닫고 후회하며 사는 것이 사람인가,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강물에 떠있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멈춰 있고 싶어 아우성이다. 그 것이 일장춘몽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멈추려 하지 않는 욕심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제는 아버지가 걸어가는 그 길에 가지 않을 수는 없을까, 지금 이 자리에 머물 수는 없을까, 지금 이대로라도 멈춰있고 싶은 욕망이 세상을 덮어보지만,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가 되어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가고 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가 있던 자리에 와 있는 것을, 무슨 시샘으로 흐르는 세월을 훔쳐내려 했는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세월은 잠시 쉬어갈 틈도 없이 세상사를 만들고, 새로운 세상사는 以前의 세상사를 밀어간다. 밀려가지 않으려는 어리석음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잠시라도 쉬어 가고 싶은 것이 人之常情이다. 흐르는 세월이 무심하다는 말이 귀전을 맴 돌때쯤에는 이미 늦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월은 그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 서있던 자리는 이제 자식의 차지가 되었다. 내 자식들도 내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내가 서 있는 이곳을 동경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무작정 가고 싶어 했으니 당연하리라, 내 자식들은 아마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이 그 냥 가만히 있어도, 가기 싫어도 가야한다는 것을 아직은 모르리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자식들은 나보다 더 현명한 판단을 가지고 세월과 함께 친구처럼 살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을 주고, 누구에게나 낮 가림이 없이 공평하며,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좀더 일찍 깨우쳐 현명한 삶을 살아 주었으면, 세월은 주인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늪이 되기도, 무지개 꽃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아버지의 자식이, 자식의 자손이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것이 순리라면, 세월은 그 순리를 지켜가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어느 자리에 있든지 아무런 상관없이 공평하게 대해주는 세월을 사람들이 닮았으면 좋겠다. 어렵고 슬픈 일이 있더라도 세월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껴주면 희망이 된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세월을 잊고 사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가 정녕 잊어 버려야 할 것은 세월을 탓하는 이기심이 아닐까, 세상일이 지나고 나면 후회만 남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 것은 세월을 아끼지 않은 탓일 것이다. 시간이 ‘금’이라고 하지 않는가, 시간이 흘러 세월이 되는 만큼 ‘금’보다 더 소중하게 아끼면서 최선을 다해 가꾸고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하늘을 품에 안고 세상을 내달리면
뉘라서 그 앞에서 세상사 탓을 할까
내 허물 감추려고 뜬눈을 감지마세
오늘이 슬프다고 꿈마저 버린다면
내일의 희망 또한 물거품 되고 마니
언제나 꿈을 찾아 인생을 걸어보세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흙으로 돌아가리라, 결국에는 흙이 되고 마는 삶을 살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자. 세월을 시간으로 쪼개 쓰는 사람들아, 부른 배를 채우려고 남의 것을 탐하는,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살려는, 남 잘되면 삿대질 해대는 더럽고 추한 마음을 버리자.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날 울면서 후회한 들 이미 때는 늦으리라. 세월을 탓하며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미래를 꿈꾸며 살자, 꿈을 위해 노력하다보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세월은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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