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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3일
말씀: 엡 2:8-10
제목: 구원의 적용
‘T.V 쇼 진품 명품’이라는 곳을 보면 도자기나, 그림 나전칠기 등을 가지고와서 진품인가 그리고 값이 얼마인가를 알아맞히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여기서 진품이라고 판명이 되면 값이 엄청나게 뛰고 가짜라고 판명이 되면 가치가 그의 없는 것이 되지요. 관심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림이나 도자가 등이 진짜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을 가장 귀중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 구원이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이 구원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 구원을 어떻게 이루며 살 것이며 어떻게 적용하며 살 것인가를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이 무엇인가를 가장 선명하게 설명하는 구절이라고 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구원을 얻었는가하는 가르침이 있고 그 가르침을 근거로 해서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교정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는 그 구원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은 헬라어로 ‘soteria,(외부로부터 오는 구원) sozo’인데요, 구출하다 구조하다 건져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죽음에서 건져내고 영원한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어떻게 이루느냐하면 8절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에 의하여’입니다. 구원은 나로 말미암아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었고 내가 선택했고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이런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산 제물이 되지 않았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문을 여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먼저 은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럼으로 구원에 있어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왜요? 구원은 나로부터 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했을 때 이 두 가지가 다 충족되어야합니다. 객관적인 은혜가 주어졌지만 주관적인 믿음으로 적용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았습니까? 그러면 이 구원이 여러분의 생애에 가장 축복이 되어야하며 가장 아름다운 삶이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 다음 10절에, 구원을 어떻게 적용하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여러분 구원을 받았다, 그러면 이 구원은 종말론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땅에서 삶이 구원 받은 자와 구원 받지 못 한자가 별 구별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가야하는데요, 분명한 것은 언제 구별되느냐 하면 심판 때, 확연하게 구별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서 천국간다, 이렇게 표현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만 동일하게 이 땅에서 우리가 떠나도 천국에서 영생토록 삶을 누리는 축복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지만 종말론 할 때 죽어서 천국 간다는 의미보다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간다, 이 땅의 것으로 목표를 삼지 않고 이 땅을 영원한 곳으로 여기지 않고 이 땅은 쉬 사라질 곳이며, 쌓일 곳이 없는 곳이며 이 땅은 나그네 삶을 사는 유한한 곳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그 나라를 준비하며 그 나라에서 합당한 보상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에서 종말론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구원받은 자가 구원받지 못한 자와의 구별이 확연하게,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지만 그러나 구원받는 자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구원을 적용하며 살아가는 구별된 존재임을 우리는 명심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구원을 내 삶에 적용할 때 어떻게 적용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이 세상을 철저히 계획 속에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우연히 적당하게 우리를 만드시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목적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그러니까 선한 일 가운데 우리가 행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선한일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바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이 가능하냐? 네 구원받은 자는 이런 삶이 가능합니다. 종말론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있으면 이 땅의 쉬사라질 것이며 쌓일 곳이 없음을 알기에 이 땅의 욕심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이 땅의 소유 때문에 부패한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천국을 아는 자는 그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는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그 땅을 사는 것처럼, 천국의 영광된 삶을 위해서는 이 땅의 것으로 영적인 가치가 있는 천국의 보상을 산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면 그 허락하심을 통해 선한 일에 동원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먼저 구원은 은혜요 그리고 믿음이라 고 했습니다. 이 둘이 충족되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은혜’란 무엇이고‘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이유 없이 하나님이 선대하시는 행위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쏟아 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은혜를 베풀만한 이유가 없는데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셨기에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았기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수없이 들었을 것인데, 이것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느끼며 깨달으며 확인하는 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문제입니다. 문제는 이런 은혜는 우리가 쉽게 이해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좀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천해야할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좀 정의 한다면 믿음이란? 신뢰하고 의지하며 맡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알고 깨닫고 내 생애를 주께 맡기고 하나님을 신뢰는 하는데, 문제는 자신을 주께 의지하며 맡기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문제가 생깁니다. 믿음은 막연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위에 자기를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인생의 고개와 같은 험한 길을 가는 동안에 줄타기 같은 인생에서 정말로 내 자신을 주님 앞에 던질 수 있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서 은혜에 믿음이 더해질 때 이 둘이 충족될 때 이 땅의 것으로 종노릇하지 않고 그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그래서 구원 받은 자는 반드시 그 구원을 적용시키며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해 잘못된 방향을 잡아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구원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하나님의 선물이란 만왕,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의 선물이란 말입니다. 이 선물은 누가 주었느냐에 따라 선물의 가치가 달라지는데, 누가 이 선물을 주었느냐하면 만왕,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자랑치 못한다고 합니다. 구원은 가장 소중한 것인데 그것이 자랑이 못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간증도 조심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공하고 높은 지위에 올라갔다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님 없는 가운데 일어난 이야기면 이것은 간증이 아니라 자랑입니다. 내가 옛날에 깡패였고 세상에서 엄청난 부를 가진 자였고 아무리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예수님 없는 삶에서 일어난 일이면 절대로 이것은 자기 자랑입니다. 그래서 내 믿음이, 내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아 왔다는 것을 철저히 하셔야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적용하며 살 것인가? 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이 구원을 적용하려면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만드신 바라를 영어성경에는 ‘workmanship’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솜씨라는 말인데요, 이것은 하나님의 걸작이란 말입니다.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걸작 품입니다. 그림을 누가 그렸느냐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그렸느냐, 제가 그렀으면 누가 가지고 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레오라도 다빈치가 그렸다 그러면 값이 엄청나게 뛸 것입니다. 누가 그렀느냐 누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격차이가 천차만별일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단 말입니다. 그 값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믿습니까?
2011년7월 14일자 중앙일보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불과 수십년 전 45파운드(8만원)에 경매된 그림 한 점(사진)이 2억달러 상당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유화 작품으로 판명돼 일반에 전시된다. 이 그림은 당초 사라진 것으로 추정돼왔으나 1649년 영국왕 찰스1세의 소장 목록에 처음 나타났으며 이후 1763년 버킹엄공작의 아들이 경매로 넘긴 기록이 있다. 이 그림은 이후 심한 덧칠로 손상된 상태로 누구의 작품인지도 확인되지 않은 채 1900년 영국의 그림 수집가인 프레드릭 쿡 경이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이후 쿡의 후손들은 이 그림을 1958년 경매에서 불과 45파운드에 팔았으며 2005년 미국 뉴욕주 턱시도 파크의 미술품 거래상인 로버트 사이먼이 대표하는 컨소시엄의 손에 넘어갔다.’2억달러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했을 때 약 200억 정도 되지요. 그러니까 누가 그렀느냐에 따라 가치가 완전히 달라지고 진품이냐에 따라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왜 귀한 존재이며 그 귀함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표현을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 하나님의 걸작 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계획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면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만든 것이란 말입니다. 무엇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까?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자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 품입니다.
그러면 선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출33:18-19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출33절 사건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사건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고 내려오지 않으니까 불안해진 이스라엘백성들이 금송아지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만들어 놓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고 하나님이 굉장히 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다 진멸하기로 결심했는데 모세가 ‘차라리 나부터 죽이십시오.’ 이렇게 기도할 만큼 강력하게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래서 모세를 보고 하나님이 용서하시지만 같이 가나안땅에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금송아지 사건을 잘 알아야 됩니다. 성경에는 송아지를 보고 신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송아지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송아지를 섬기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여전히 섬기는데 송아지가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지요. 사실은 거기에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이나 당시 중근동에 있는 사람들은 신은 네발달린 짐승위에 계시다는 사상이 있습니다. 이 사상을 알아야 금송아지사건 부분이 이해가 됩니다. 아론이 이야기한 것은 저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 금송아지 위에 여호와가 계시다,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금송아지 위에 있는 여호와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강조했습니다. 우리에게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아주 세미하게 다루십니다. 이 정도는 인정되겠지 이 정도는 용납되겠지 이 정도는 다 하는 것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부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부분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백성들을 더 이상 참아내시지 않으시고 명망 시키겠다고 했을 때 모세가 간절하게 목숨을 걸고 기도했고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납하셨습니다.
출33: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모세가 하나님 앞에 용납하심에 대한 보증을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를 봐주시겠다는 증표로 영광을 보여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대한 답입니다. 19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내 앞에 선한 것을 지나가게 하겠다, 즉 선한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선한 삶이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인데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뭘 위해서 만드셨다고요. 선한 일을 위해서 지음 받았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인데요, 하나님의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의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은 자라, 입니다.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았고 구원 얻은 자는 그것을 알고 그 선한 삶이 구별된 삶임을 알고 그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구원 받은 자가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선한 삶을 살아가도록 위로부터 사랑을 공급하시고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선한일 가운데 행하면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 영광된 삶은 바로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6:12절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선한 일을 위해 네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고 부르심을 입은 것은 선한 일을 위해서며 이 선한 일이 하나님께 영광된 삶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의 삶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영광이 가장 크게 나타난 곳이 부활입니다. 요한복음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또 사망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미리 예견하시면서 먼저 보여주신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변화산에서 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빛나는 광체로 변할 때 베드로가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아,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했던 곳입니다. 그 때 하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 지라’그리고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 문이 열리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이 내용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 안에서 기뻐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내가 어떤 멋진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고 선한일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사랑하십니까?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의미에서 구원이 무엇인가를 점검할 때 내 인생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최고의 걸작 품이 내가 받은 구원이라면 그리고 그 구원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두 가지를 생각하셔야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기쁨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기뻐하리라’ 똑같은 음성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아들이라, 딸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여러분 사랑 없이 행한 일은 어떠한 좋은 일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찬양을 열심히 하고 성가대로 잘 섬기고 교사로 헌신하고 그리고 세상에서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고 결심하는데요,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보실 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이나 사랑은 사람으로부터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서7:20절에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리라’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안에 선이나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요 절대로 그 선이나 사랑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패한 욕심과 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지 선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안에 절대로 선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선을 만들어낸다면 자기의 부패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뿐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절대로 선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사랑은 자기 유익을 위해 동원되는 것뿐입니다. 무조건적 사랑, 희생적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안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을 삶에 실천하며 살 때 그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이를 때까지 여러분의 생애가운데 기쁨이 소멸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짜 기쁨을 알면 이세상의 모든 일들은 작은 일입니다. 내 주변의 모든 일들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흥분하고 화를 내고 내가 마음을 쓸 수 있는 것만큼 ‘그가 지으신 바라’하신 하나님의 걸작 품들이 신경 쓸 것만큼 그렇게 큰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꼭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놓치면 손해입니다. 구원받으신 분에게 주신 기쁨 평생 간직하며 살기를 이 시간에 소원하실 때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마음가운데 그것을 이루실 것을 확신합니다.
구원 받은 자가 구원을 이루며 살아갈 때 사랑과 기쁨의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살아가는 복된 심령이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