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대에는 미지의 땅에 대한 상상이나 추측은 배제하고, 확실히 파악되고 있는 땅에 대해서만 정확하게 기술하려는 지리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스트라본(Strabo, 기원전 63~23년경)과 프톨레마이오스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ios)는 천문학의 권위서인 <알마게스트>와 <지리학> 등의 저술로 유명하나, 생애에 대해서는 83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로마 시민권을 가진 그리스인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다가 168년경 세상을 떠난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150년경 프톨레마이오스가 저술한 지리학(Geographia)은 총 8권으로, 제1권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지도투영법에 대해 기술하고, 제2권에서 제7권까지는 당시 유럽인들이 알고 있던 8,000여 지점의 위치를 나타내는 좌표를 열거했고, 제8권은 26개 지역과 지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선대 지리학자인 마리누스(Marinos of Tyre, 70~130년)의 저서와 여행자들의 기록, 로마와 고대 페르시아의 지명사전 등을 참고해 집필했다고 한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은 지구 구체설(球體說)을 부정하는 중세의 그리스도적 세계관에 묻혔다가, 1295년에 이르러 그리스어 필사본이 비잔틴의 수도사인 막시무스 플라누데스(M. Planudes)에 의해 발견되었고, 1406년 교황청 비서관이던 야고보 안젤루스(J. Angelus)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야고보는 <지리학>을 우주지(宇宙誌, Cosmographia)란 제명으로 바꿔 교황 알렉산드르 5세에게 바쳤다.
▲ 1467년 독일의 지도학자 니콜라우스 게르마누스가 그린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크기 42cm×28.8cm).
<지리학>의 원본이 전해지지 않고, 뒤에 발견된 그리스어 필사본에도 지도가 들어 있지 않아 현재로서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직접 지도를 제작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지도에 대해서는 피렌체의 필본상(筆本商)인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Vespasiano da Bisticci)가 쓴 전기에 필사생이던 프란치스코 디 라파치노와 레오나르도 보니세니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를 처음 그렸다고 쓰여 있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는 15세기에 이르러 <지리학>에 기술된 지도제작 방법과 지역 좌표를 이용해 재현해 낸 것으로 본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과 지도가 필사에 의해 간행되다가 1445년경 구텐베르크에 의해 활판인쇄 기술이 발명되자, 1475년 비센자(Vicenza)본을 위시해 15세기에 7종, 16세기 들어서는 30종에 이르는 판본이 유럽 각지에서 속간되었다. 인쇄된 지도가 첨부되기 시작한 것은 1477년 볼로냐(Bologna)본부터라고 하는데, 당시 동판화가인 프란체스코 로셀리(F. Rosselli)가 비스티치의 공방에서 지도를 동판으로 제작하면서 지도의 대량 인쇄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는 세계지도 1도엽과 지역도 26도엽이 첨부되어 있는데, 지역도는 유럽이 10도엽, 아프리카가 4도엽, 아시아가 12도엽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새로운 지리 지식이 터득됨에 따라 지도가 추가되면서 개정 또는 증보판이 이어졌다. 특히 1482년 독일 울름(Ulm)에서 출판된 <우주지>에 실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는 독일의 지도학자 니콜라우스 게르마누스(N. Germanus)가 그리고, 요하네 슈니처(J. Schnitzer)가 처음 목판으로 제작해 32매의 지도가 수록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는 얼핏 보면 경선과 위선이 그려져 있고, 형태가 투영도법에 의해 전개된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 지도투영법과는 상관없다. 지도의 내용도 당시의 세계상이나 지리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경도는 아프리카 북서부의 카나리아 제도를 0°, 아시아 동단을 180°로 표시했고, 위도는 적도를 중심으로 남쪽은 25°, 북쪽은 63°까지 표시했는데, 중국이 나타난 아시아 동단이 180°로 되어 있어 실제보다 60°나 부풀려 계산되었다.
지형의 표현은 유럽 지역과 지중해, 아프리카 북부, 서남아시아는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나, 인도 반도와 동쪽 끝의 동남아시아 쪽으로 갈수록 지형이 부정확해진다. 특히 흑해의 모양은 지금과 비슷하나 카스피해는 가로로 길게 표현되었으며, 스칸디나비아반도는 아예 빠져 있고, 아프리카대륙의 남부는 동쪽으로 길게 늘어나 동남아시아와 이어져 왜곡의 정도가 매우 심하다.
또 실론섬은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에라토스테네스의 지도 표현을 답습하고 있으며, 나일강의 줄기는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었으나 수원지는 ‘달의 산맥(Lunae Montes)’으로 표시되어 있다. 오래전부터 탐험가들에 의해 ‘달의 산맥’이라 불렸는데, 실제로는 우간다와 콩고민주공화국 경계에 솟은 르웬조리산(5,109m)을 가리키는 산으로, 1402년 조선에서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도 등장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를 보면 지도 가장자리에 볼을 부풀려 힘껏 바람을 불어대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12개 그려져 있다. 이것은 당시의 세계상을 반영한 12풍신(風神)을 나타내는 것으로, 세계를 구체가 아닌 원반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던 당시에는 12풍신이 열두 방향에서 계속 바람을 불어대야 땅덩어리가 떠 있다고 생각했다.
스웨덴의 탐험가인 노르덴시월드(Nordenskiold)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를 보고 “콜럼버스의 신세계 발견보다 더 강렬하게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신세계가 아닌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1,000년간이나 닫혔던 암흑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격찬한 것처럼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과 지도는 유럽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촉진제가 되면서 15세기 말 대항해시대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는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도 사용했는데, 신대륙을 아시아 대륙으로 착각한 것은 아메리카 대륙이 없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가 오랜 역사를 통해 동과 서를 연결하는 매체가 되었고, 세계지도 발달에 기여한 바가 큰 것은 두 말할 나위없다. 2006년 런던 옥션에서 1477년에 인쇄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 한 장이 지도로서 사상 최고액인 213만6,000파운드(약 39억 원)에 낙찰된 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