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명절 무렵엔 돈을 더 내는데도 학교 구내 이발소 대신으로 굳이 먼 주접 동네에까지 이발을 하러 보냈다. 그래봐야 그 머리통에 그 얼굴인데 엄마는 조금이라도 더 내 자식이 하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어린 나이로 보는 그 이발소는 이질적인 감정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좁은 공간 안에서의 까다로운 질서는 차라리 어느 위압이었다. 문 앞에 내 단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체에 크레졸 같은 특유의 향부터서 색달랐다. 말이 없어도 사람들은 룰대로 공정을 척척 따랐다.
커다란 안락의자를 중앙으로 해서 보건소에서나 보는 하얀 찬장이 따로 놓여 그 안에는 이발기구와 가위가 의사의 핀셋마냥 가지런히 담겨져 있었다. 의자 정면에는 한쪽 귀가 달아난 큰 거울이 차지하였다. 서랍이 껴있는 정면 찬장엔 얼굴에 바르는 크림이나 하얀 분이 담겨져 있었으며 그 옆으로 면도칼 질을 내는 긴 가죽 꾼이 매달려 있었고 뒤에는 세면대와 작은 난로가 하나 놓여 있었으며 연통에는 으레 작은 수건들이 매달려 순서를 기다렸다.
세면대 옆의 긴 의자는 이발 순서대로 앉은 사람들이 본 신문을 보고 또 보고하며 시간을 달랬으며 무료를 달래줄 양으로 다 뜯겨진 잡지나 만화책도 한자리 차지하였다. 거울 한 쪽엔 영화 포스터 하며 영화배우 사진도 부쳐 놓았으며 잡음 가득한 라디오에선 이미자 노래가 연실 뽑아져 나왔다. 개중에는 면도만 하고 가겠다고 새치기를 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지만 위압적인 질서는 늘 팽팽하였다.
널빤지를 큰 의자에 끼워 앉은키를 맞추고 목에 나일론 보자기를 씌우고 부드러운 하얀 천으로 휘감는다. 거울을 가리키며 앞을 똑바로 쳐다보라하고는 저울질 하듯 머리통을 좌우로 흔들어 보고 바리깡이란 기구를 들면 이내 이발은 시작이다. 머리 아래부터 숙달된 손놀림으로 밀어 오른다. 졸음 방지용인지 시원찮은 기구는 자르는 것이 아니고 머리카락을 뽑는 형국이라 꽤 아팠다.
기구를 다 쓰면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 키를 맞춰 가위질로 긴 웃머리와 옆머리를 재깍재깍 자른 다음, 얼굴에 기름칠을 해대고 면도칼을 가죽 끈에 몇 번쯤 달구듯 쓱쓱 문지른 다음 면도를 한다. 솜씨 없는 아저씨는 귀 뒷덜미를 하강할 때 꼭 표시가 났다. 뜨끔하거나 어느 땐 피가 배인 적도 있었다. 그쯤 하면 아저씨는 집게를 풀면서 잘린 머리카락을 일정한 곳으로 모으고 수건을 털어내며 다음 순서를 부른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다. 머리를 감기고 수건으로 털어서 말린 후 다시 의자에 앉혀서 마무리를 하는데 머리카락이 일률적으로 잘리었는지 아닌지를 하얀 분을 발라가면 상태를 살핀 후 손끝을 가위에 두고 동시에 머리통을 빙 둘러 마지막 가위질로 고르지 않는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마무리를 한다. 그 당시 아이들은 스포츠형 아니면 이부라 하는 짧은 스타일 아니면 제법 멋을 들인 상고머리라 하는 형의 이발을 했고 아버지들은 포마드 기름을 바르고 각을 지게 세우는 형의 이발이 유행이었다.
그때는 기계충이라 하여 머리가 쥐가 파먹은 것처럼 푹 파인 애들도 있었고 몸 안에 이나 벼룩 등이 꽤 많았다.이 벼룩을 잡자고 DDT를 몸에 뿌리던 그 시절은 가발장사들도 많아 긴 머리카락들을 동네방네 돌며 사러 다녔다.이발은 한마디로 머리통 구석구석의 시선집중과 섬세한 손놀림이 필수이며 기술이다. 나는 그 시절 하얀 가운의 아저씨가 무척 부러웠다.
손님이 와도 마치 돈하고는 무관하다 하듯이 눈 하나 꿈쩍 않고 가위질만 할 뿐, 조수들이 알아서 인사도 하고 세면대에서 머리를 빡빡 비벼댔는데 인정사정없이 머리를 물속에 쳐 박고 손가락 끝으로 눌러대는 통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동네 사랑방이면서 폼 나는 그 시절의 이발소, 곳의 벽에는 밀레의 만종이나 다복을 상징하느 도재 그림 아니면 푸쉬긴의 시"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는 시구절이 붙어 있었다.
그 벽걸이에 달라붙은 뜻처럼 부자가되어 모두들 떠났는지 시 구절대로 속아 산 삶으로 갈 곳을 잃어버렸는지 이제 그러한 이발소는 찾을 길이 없으며 그 시절같은 성의는 또 아니다. 하기야 이후 마음에 드는 이발사를 딱 한 번 만나기는 했었다. 나는 미러카락 수가 많아 이발사가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다. 대머리에 가까운 분과 비교하자면 가위질을 세 곱절을 더하여야 하니 당연 그러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공정 거래상 문제가 있다 . 같은 돈 내고 나는 늘 이득인 셈이다. 그래서 또 늘 미안하다. 작업을 하는 중 나는 거울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이 거래에 대해 충실한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역시 조금은 억울하다는 표정이 들어있다. 그래서 나는 이발만큼은 늘 가던데 아니면 가지를 않는다. 덜 미안해질 것 같아서다. 머리카락 수가 셀 정도로 드문드문한 사람과 나의 이발시간을 재 보았다.
시간을 끌며 올을 돌리고 돌려 많은 영역차지를 하도록 애쓰기는 하는데 공연한 헛손질이 많고 내 이발과는 시간차가 컸다. 하루는 그곳의 주인이 내게 큰 선물을 선사하였다. 손님이 없으니 특별히 머리를 솎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무더운 여름 보기만 해도 내가 더워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열심히 숲을 누비며 잡초 치듯이 머리카락을 쳐 내렸다. 그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힌 것을 나는 거울 속에서 보았다.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더미를 보며 그의 성과에 대해 흡족하였다.
손을 숲에 담그자 전과 다르게 많은 짧은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닿는다. 솎은 머리는 한결 시원해져 바깥으로 나오자 날아갈 것 같이 가볍고 산뜻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발소 문을 닫고 말았다. 미장원으로 남자들도 몰려드는 추세에 도저히 감당을 할 수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돈을 더주겠다며 부탁을 해보기도 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는 시간을 어느 정도 채우더니만 시간으로 계산을 하는 것인지 매우 비싼 금액을 제시하였다.
이후 나는 머리를 솎지 않는다. 아무나 그런 기술을 부리고 시간을 할애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요즘에 많이 느낀다. 문득 그를 떠올리자니 내 머리카락을 닮은 내 글이 매칭이 된다. 나는 무수히 떠오르는 잡상을 버리기에는 아깝고 아쉽다하여 이것저것 많이도 주워 담아 글을 만든다.나로서는 이 말을 빼면 저 말이 아쉽고 저 말을 빼자니 느낌이 약하고 하는 등등으로서 꽤 난삽한 형국이되는 노릇이다.
소재는 좋은데 다듬지 않았다 하는 말이 그런 내게 통용된다. 주제를 잘 나타내기 위하여 많은 주석을 단다하였더니 주석으로 주제가 제 빛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바를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듯이 얻은 것을 버린다는 것이 또한 쉽지는 않다. 그런데 막상 글을 솎아내 보려하니 만만하지가 않다. 균형이 안 잡히고 치중하게 되고 요약적이지 않아 잘 줄여지지도 않으며 맥락이 들쑥날쑥 하여 오히려 더 어수선하다.
문득 그가 왜 머리를 깎을 때보다도 솎을 때 시간도 더 들이며 공을 들인 것인지 알 것 같다. 여름 철 그는 한가한 때를 알려주어 그때 찾아오라 하였었다. 애써 가꾼 것에 대한 솎는다는 것의 정성과 성의. 찬찬한 그의 마음을 요즘 나는 배우고 있다. 농부들은 이른 아침에 채소밭에 어김없이 들른다. 어느 참 순식간 잡초를 솎아내고 돌아서는 농부. 그가 솎은 것은 비단 잡초뿐이 아닌 새벽녘 나타나는 벌레들이다.
정성을 다하고 부지런하여야 제대로 얻는다는 생각을 갖는다. 나는 단번에 쉽게 얻으려는 것에 집착하여 난삽함을 경계하지 못하였다. 잡초가 솎아진 채소밭은 아침 햇살에 싱그러우며 말짱하고 아주 산뜻하다. 오늘도 나는 글다듬기를 연습한다. 하다 보니 글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글을 얻는 기분이 들고 무엇을 버려야 얻을 수 있을 것인지를 알 서서히 익히는 것도 같다. 묘하게도 버리는 것이 채우는 것이고 고치다보니 미처 모르고 지나친 대목이 얼굴을 붉히게 한다.
글도 그렇지만 어느 분야이든 장인 정신을 갖은 분은 따로 있다. 그들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정성으로 일을 하는 정말 일을 사랑하는 분들이다. 그런데 요즘은 장인정신은 커녕. 이발 할 곳 자체가 점점 줄어든다. 찾아가도 그 시절 같은 성의는 또 아니다. 대신에 미장원도 다녀봤지만 그 시절의 공정에는 어림도 없는 단순함에 개운치도 않다. 이제는 할아버지 곰방대 같은 위엄 있는 이발소 풍경은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글도 마찬가지로 예전같지가 않다.아무리 잘 쓰고 잘한다 한들 그 시절의 이발사, 하얀 가운의 분위기같은 고아한 품성의 연출이 가능할까. 이발소와 글은 어느 때 모두 시들고 말 것같은 불길한 에감이 든다. 푸쉬긴의 시가 다시금 머릿속에서 맴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 나는 그 누가 내 글을 알아주지 않는다하더라도 정녕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첫댓글 오늘은 지지대 고개를 넘어 엄마한테 갑니다.... 아침부터 언제오냐고 전화가 왔네요... 마음이 이상하게 짠해집니다. 주말 잘들 보내세요....제 친구가 이번에 어느 당의 원내대표가 되었는데 ..말을 잘 하지는 못하는데 같이 대화를 해보면 참 속이 깊은 친구입니다. 그 친구와의 어린시절에 대해 글을 쓸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괜한 오해를 낳을 것도 같아서요....다음주는 20대 때의 제 취직 이야기를 정리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