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통성(通聲)
임병식
팔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숲속과 가로수에 매달린 매미들의 그악스러운 울음소리도 한결 잦아들었다. 한 달 남짓 지칠 줄 모르고 내려쬐는 폭염은 아직 기세가 꺾이지 않았지만, 매미들은 미세하게 변하는 계절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모양이다.
며칠 전에는 그 징조라도 알리듯 고추잠자리도 나타났다. 뙤약볕 아래 느닷없는 출현이 낯설기는 했지만, 날짜를 짚어보니 입추가 지난 때이니 영 생뚱맞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끓어오르던 지열도 아침저녁으로는 한결 누그러진 느낌이다.
그렇지만 한낮은 물론 아침저녁으로 울어대는 매미소리는 여전하다. 어떻게 우나 싶어 나뭇가지에 앉은 말매미를 살펴보니 가슴을 움찔거리며 온몸으로 소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목에서 내는 소리라기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림통을 만들어 내는 듯했다.
나는 요즘 매미가 일종의 득음(得音)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지르는 통성이 곱지는 않아도 우렁차고 깊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오랜 연마 끝에 얻은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고향에는 퇴역을 앞둔 기차가 다녔다. 그 기차는 기적소리도 특이했다. 우렁찬 소리 대신 ‘삑삑’ 하는 소리를 냈다. 낡은 몸체만큼이나 내지르는 소리도 빈약했다.
그 일을 떠올리며 지금 절정기를 맞은 매미소리도 머지않아 그 기적소리처럼 쇠퇴하여 잦아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매미가 목소리가 잠기거나 잦아드는 소리를 내는 것은 보지 못했다. 절정에 이른 순간, 동백꽃이 통째로 땅에 떨어지듯 마지막까지 제 목소리를 다 내고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젊어서는 맑고 싱싱한 목소리를 내다가 중년을 넘기면 득음한 소리꾼처럼 걸걸한 소리를 내고, 노년에 이르면 서서히 목소리가 잦아든다.
그러고 보니 초여름에 처음 들었던 매미소리가 생각난다. 그때는 미성에 가까워 제법 음악처럼 들렸다. 지금은 한껏 깊어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 간헐적으로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저렇게 간절하게 우는 뜻은 무엇일까?’
남은 생이 종점에 이르자 마지막 노래 한 곡을 뽑아내는 것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 땅속에서 보낸 인고의 시간이 덧없다는 하소연일까.
나도 돌아보니 어지간히 세월을 건너왔다. 문득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 무슨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매미의 울음이 한동안 귓가에 머물렀다.
(2026)
첫댓글 계절의 미세한 결을 짚어내는 섬세한 관찰에서 출발하여, 자연의 순리와 인간의 생애를 관조하는 깊은 성찰로 자연스럽게 확장된 글입니다.
매미의 울음소리를 단순한 소음이나 여름의 배경음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득음(得音)'과 '전력(全力)의 노래'라는 존재론적 의미로 끌어올린 시선이 돋보입니다.
"나는 지금 무슨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라는 울림은 지나온 세월과 남은 생의 자세를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삶에 대한 깊은 경륜과 애정이 뱁니다.
오래된 것들은 목소리가 둔탁해지고 새된것은 매미도 마찬가지인것 같습니다.
요즘 우는 매미는 도무지 정겨움이란 없고 걸걸한 탁성이 소음으로만 들립니다.
한여름 매미의 간절한 울음소리를 통해 인생의 세월과 성찰을 퍼올려 주신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 목소리를 온전히 내고 사라지는 매미처럼, 삶의 모든 순간을 신실하고 단단하게 채워가시는 선생님의 발자취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상념에 잠기게 합니다. 늘 따뜻한 울림을 주셔서 감사드리며,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건강이 가득하시길 소망합니다.
매미가 한여름 줄기차게 우는 까닭은 분명 그 이유가 있을듯 합니다.
마지막 종언을 고하는 울음소리는 듣기만 해도 처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