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乙巳年)에 과거 나쁜 추억을 딛고 새로운 재생에 을사년얼 맨듭시다.
갑진년(甲辰年) 대미로 온 이 을사년(乙巳年)은 모도 잘덜 아시겄제만
날씨나 분위기 등이 몹시 스산하고 쓸쓸할 때 쓰는 ‘을씨년시럽다’라고 하는 낱말에 어원이로
그랑께 지끔부텀 딱 120년 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아가꼬 그 당시에 시상(世上) 분위기가 그랬든 것을 표현함시로부텀 생긴 말이여람짜.
실제로 1908년에 나온 <빈상설(鬢上雪)>이라는 소설에 ‘을사년시럽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말이 변해가꼬 지끔에 ‘을씨년스럽다’가 된 거라고 그케 봐람짜.
본래의 을사년(乙巳年)이 지닌 뜻은 오행에서 피란 색자로 '푸른 뱀의 해'가 되아가꼬 지혜·풍요로움·재생이라는 존 뜻이 담겼든 내력이었다고 해람짜.
그라든 것이
일본제국주의가 강압적이로 1905년 11월 17일에 군대를 이끌고 우덜한테 치욕적인 사건을 맨들아가꼬 을사늑약을 맺고 이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시로부텀 대한제국 침탈이 본격적이로 시작되았고 조선통감부를 세워 일제강점기의 발판이 되었지라.
늑약(勒約, 억지로 맺은 조약)이란 명칭은 근대에서 붙였제만, 불법적이로 체결될 당시에는 아무 표제도 없이 체결되아가꼬 뒤에 ‘제2차 한일 협약’이라고도 불렀었고 일제가 ‘을사보호조약’이라 해가꼬 즈그덜이 조선을 보호한단 명분이로 식민지 침탈에 노둣돌로 삼었었지라.
일제가 그날 군대를 동원해서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대신덜을 협박해서 체결된 을사늑약은 조약의 체결에 기본 절차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법상 원천무효였습니다.
또 이후 비준이나 고종황제의 인정도 없었던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고종황제는 이에 부당함을 알릴라고 각국에 친서를 보내는 한편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국제 사회에 을사늑약의 무효를 호소할라고 했제만 일제의 방해와 미국의 비협조로 실패했습니다.
※ 미국은 이미 그해(乙巳年) 7월에 일본과 맺은 <미일 가쓰라-태프트 밀약(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승인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다는 비밀 협약을 맺음)>이라는 꿍꿍이로 일본과 한통속이 되어 그 속내가 따로 있었음.
※ 미일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이름 = 영어: Taft–Katsura agreement, Taft–Katsura memorandum/ 일본어: 桂・タフト協定 (かつら・タフトきょうてい)、桂・タフト覚書 (かつら・タフトおぼえがき)
그날 궁궐 안에까지 무장한 헌병과 경찰을 들여서 대신들을 위협했제만 반대가 심해 부결되자 반대에 비교적 소극적이던 5인만을 밤에 따로 모아 강압으로 조약 승인을 받았으니 이들이 바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5명으로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인 이들이 곧 ‘을사오적(乙巳五賊)’입니다.
그러나 고종은 끝까지 이 문서를 비준하지 않았고 실제로 고종의 을사조약 무효선언서로는 1906년 1월 29일에 작성된 국서로, 1906년 6월 22일에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영국과 프랑스에 보낸 친서도 있습니다.
이렇듯 강박(強迫) 상황에다 전권 위임도 없는 일부 대신의 일탈 행위였고 고종이 즉각적인 무효 확인 외교를 벌인 점 등에 따라 근본적으로 비준 절차 위반에 황제의 전권 대행 위임도 없었던 국제법 위반 협약이었기 때문에 이는 원천적 통상적으로 불법이라고 간주됩니다.
※ 이후 대한민국과 일본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2조)에서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포함하여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한 번 더 확인하였음.
또 당시에 고종은 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헤이그에 이준(李儁, 1859~1907),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이위종(李瑋鍾, 1887~?) 등의 특사를 파견했으나 일본의 방해와 미국의 비협조로 실패했어람짜.
이 원천무효의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일본 제국에 대한 외교권 양도 및 통감부 설치 등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이 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보호국으로 전락하여 사실상 반식민지가 되어 이를 빌미로 대한제국의 외교를 차단하고 정치 군사의 모든 일에 관여함시로 이후 강제병합으로 식민 지배를 하는 발판이로 삼었지람짜.
그란 이후로
날씨나 분위기가 쓸쓸하고 스산할 때 쓰는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생겨났잉께 이 말은 1905년 이후부터 쓰기 시작했겄지라.
이 조약이 체결됐을 때 치욕적이고 슬픈 일로 사람들은 온통 침통하고 참담한 분위기에 빠졌고 그때 이후로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느낌이 들 때면 그때가 떠올라가꼬 ‘을사년의 그 기분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라고 말하게 되았고 그 말이 빈해 ‘을씨년스럽다’로 됐어람짜.
하제만 요참에 이 을사년은 우리 대한민국도 그 슬펐던 을사년의 과거사럴 넘어서가꼬 다시 본래의 뜻인 지혜하고 풍요로움하고 재생에 좋은 해가 되거끄럼 우덜 모도 항꾼에 새로운 대한민국의 재건을 위해 노력덜 하십시다.
※ 구마검(驅魔劍), 옥중화(獄中花), 모란병(牡丹屛), 자유종(自由鐘)... 등 50여 편의 신소설을 썼던 작가인 동농(東濃) 이해조(李海朝, 1869~1927)가 1908년에 펴낸 <빈상설(鬢上雪)>이라는 소설에 '을사년스럽다'란 말이 최초의 기록이로 나옹께 을사년(1905년) 이후 이때부터 썼던 말로 어원을 그리케 봅니다.
2025년 새해 아칙에
-제 59회 / 진도사투리사전 저자 조병현-
첫댓글 건강하시고 새핸 더 좋은 글 그리고 많이 가르쳐주세요.
멋집니다.
이 해도 을씬스러 울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을씬스러움은 다 정치가들이 행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생의 마지막에는 늘 을씬스럽더라구요.
우리라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고민하지 말고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금메라. 위정자덜이 지들 졸대로 펜깔르기에
너죽고 나살자함시로 고무줄 잣대럴 씨넌데
그 판에 씰레가꼬 몰케댕김시로덜 서로서로 모도 고슴도치만칠로 바눌덜만 빠짝 셔가꼬 물라넌 개만칠로덜 기냥 덜... ㅠㅠ
이 을사년 새해에넌 서로에 입장과 처지가 딸러가꼬 생각도 대지금덜 딸름을 몬차 생각함시로
지저끔 고무줄 잣대로 공정을 재지 말고 내남직없이 올발른 같은 척도에 같은 잣대로 올발르게 잼시로
그 지저끔덜 딸른 가운데서 올발른 공통분모럴 머리 맞대고 찾어가꼬
모도가 항꾼에 어울레감시로 오순도순 살어가넌 우리 대한민국이 되기럴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