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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9월 16일 목요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르넬리오 교황은 3세기 중엽 로마의 박해 시대에 교회를 이끌었던 분이다. 이단을 과감하게 배격하고 교회를 지키던 그는 체포되어 이탈리아 중부 항구 도시인 ‘치비타베키아’로 유배되었고, 거기에서 선종하였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루가 7,36-50)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말씀의 초대 ☆☆☆ 오늘의 묵상 ☆☆☆
주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하십니다. 하지만 용서의 원인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여인이 ‘죄를 씻는 절차를 밟았기에’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드러내는 행동’을 보였기에 용서받았습니다. 사랑도 속죄 행위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 오늘 복음에서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예수님과 자리를 함께합니다. 한 사람은 모범적인 바리사이 시몬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죄인인 여인입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 여인을 만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빚진 사람 두 명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치프리아노 성인은 고르넬리오 교황과 같은 시대의 주교다.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난 그는 교사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고, 훗날 카르타고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박해 속에서도 고르넬리오 교황을 도와 교회 재건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설교와 저술로 신자들을 격려하던 치프리아노 주교는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공동체에게 복음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복음 말씀을 받아들이고 굳게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구원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구원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해 주신다. 바리사이들과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그 여인을 죄인 취급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용서는 물론이고, 구원되었다고 선언하신다(복음).
어떤 여자가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주님 뒤쪽 발치에 서서 웁니다. 처음엔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르기까지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를 알기에 주님의 동태를 살핍니다. 여차하면 반격할 태세입니다.
그 여자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기댈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기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죽어 버릴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주님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창녀와 세리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갔을 것입니다. 따라가서 먼발치에서라도 그분을 뵙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발치에 엎드려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주님께서는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한을 풀어 주십니다.
그 여인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여인처럼 모든 것을 주님께 걸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았음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사랑을 받았음에도 사랑을 실천할 줄 모르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주님께서는 죄 용서의 ‘화두’를 던지셨습니다. 사랑하면 용서받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용서를 베풀면 속죄의 길이 열린다는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보복은 어떤 경우라도 ‘밝은 생각’이 아닙니다. ‘악의 세력’이 마음에 심는 ‘어두운 생각’입니다.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가능한 좋은 생각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선한 생각이 많아지면 악한 생각은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용서의 길이 됩니다. 좋은 생각이 많으면 행동은 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운 사람에 대해서는 억지로라도 좋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가 쉬워집니다. 악한 생각을 자꾸 하기에 용서가 어렵습니다. 싫은 사람을 사랑으로 받아 주면, 삶의 ‘업 하나’가 떨어져 나갑니다. 인생을 누르고 있던 ‘짐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사랑과 용서는 신비스러운 속죄 행위입니다.
빚을 많이 진 사람과 적게 진 사람이 둘 다 탕감받았다면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시몬은 대답합니다.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그러한 상식은 잘 알면서 어찌하여 영적으로 빚진 여인이 그만큼 감사하는데 못 알아보느냐고 지적하십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엄청난 자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행복을 깨닫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어찌 나에게 그럴 수 있는가? 어찌 나에게 아픔을 주는가? 내게 이렇게 해도 되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준 아픔은 잊어버린 채 상대방이 자신에게 준 고통만을 기억하려 합니다.
시몬은 지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여인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인을 구원한 것은 그의 믿음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큰 사랑 - 김동욱 부제- 김수환 추기경께서 살아 계실 때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형제도에 관한 찬반 토론이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에 이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대할 때면 특히 더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여인이 어떤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복음은 그 여인이 예수님께 한 행동만을 전합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보여드린 행동은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행동을 ‘큰 사랑’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많은 죄를 용서받아 드러낸 ‘큰 사랑’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 사랑’ 이라고 할 때, 무엇을 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아낌없이 나를 내어주는 사랑일까요, 아니면 더 많은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랑일까요 ? 우리가 누군가의 사랑의 크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오늘 이 여인의 사랑이 왜 큰 것인지는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또 뉘우치면서 겸손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용기 있게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기적은 뉘우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형제도가 폐지된다면 이 기적은 더 많은 사람들한테서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더 큰 사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한테도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바리사이와 예수님 처음부터 예수님은 바리사이에 대해 별로 좋은 인상을 가지지 않으셨던 것
“나는 하느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지난봄에 경작하여 파종을 했고 여름을 무사히 넘겨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을 하였습니다. 내 수확은 이웃에 사는 가톨릭 신자들보다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판결을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많이 거둔 나는 불교신자요, 적게 거둔 자는 바로 가톨릭 신자이니 말입니다.”
그 투고를 받은 잡지사의 주필은 명답을 적어서 그 농부에게 보냈습니다.
“하느님은 가을에 결산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연말에도 결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마지막 날에 결산하십니다.”
그렇지요. 하느님께서는 지금 결산하지 않으시지요. 만약 지금 결산하신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테고, 그 죄 하나하나에 책임을 물어서 결산하신다면 도저히 이 세상에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결산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결산하시기로 결정하셨고, 그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크신 주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조그맣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지요. 저 사람이 저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죄인이라서 하느님께 벌을 받는 것이라면서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을 지금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한 여인이 예수님께 최고의 정성을 보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르지요. 이 모습은 최고의 손님이 방문했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성이 담긴 행동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그렇게 하지도 못하면서,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합니다. 즉,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는 여인을 폄하하는 것은 물론, 이 정성을 받으시는 예수님까지도 부정적인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결산하기로 결정하신 하느님의 뜻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주님의 사랑에 감사해야 하는 것은 물론, 우리 역시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벗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받은 여인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더 나아가 주님 역시 함부로 판단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행하는 굳은 믿음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김귀웅 신부-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고, 바리사이의 누룩을, 그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고도 하셨고,
그들을 꾸짖기도 하셨고, 또 끝에 가서는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들아!”라고
엄하게 질책하기도 하셨습니다. 반대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마귀의 힘을 빌린 것이라며 무시하였고,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었다고
따졌고, 천한 사람들과 사귄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였으며, 더 나아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하면서 진퇴양난의 어려운 질문을 퍼붓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사이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초대를 받아 간 식사 때마다 바리사이들이
곁에 오도록 두셨고, 그 바리사이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셨으며,
심지어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가기도 하셨습니다.
당신과는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다르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 전혀 다른
그들과도 함께 어울리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을 죽이고자 모의하는 것을 알면서까지도 말입니다.
누가 죄인인가?
오늘 복음에서 고을의 이름난 죄인은 더러운 벌레 보듯이 자기를 바라보는 바리사이들이 모인 자리에 용감하게 나아가 참회의 눈물과 더 이상 보일 수 없는 겸손한 자세로 주님께 사랑의 예물을 드린다. 그러나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그녀의 지극한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불결한 여자의 행위로 치부해 버렸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영혼의 눈이 멀어버리기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하고 왜곡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하느님의 용서를 얼마나 받고 살아왔는지,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참아 견디셔야 했는지 그 인내와 자비를 뼈저리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볼 수가 없다.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일이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며 기도를 열심히 바치고 계명을 철통같이 준수하고 봉사를 도맡아 해도, 결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는 보지 못하고 온갖 선입견과 판단으로 가득 차 있던 바리사이 시몬은 스스로 그 두꺼운 자만의 껍질을 벗지 않는 한 그 여자가 겪어온 소외의 아픔과 설움, 거듭되는 죄 속에서 피폐된 영육의 상처와 부끄러움으로 기가 죽어 남몰래 흘린 눈물을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아픔과 죄악까지 사랑으로 받아 안아주시는 예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진실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이 병이야말로 무서운 난치병이요, 가장 심각한 불행이다.
하느님의 자비로 이렇게나마 숨을 쉬고 있으면서 그분께 큰 사랑을 드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내 죄를 울기는커녕 여전히 다른 사람의 ‘티’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나를 이제 더 이상 봐주실 수가 없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때 난 어디로 숨을 것인가? “○○○야, 너에게 할 말이 있다.”
행복을 물들게 하는 복음
-김찬선신부-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지독히도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방 끈이 짧아서 불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이 많아서 불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능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너무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만 행복한 것 같아 미안하고
죄스러울 정도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여인의 눈에 불행한 사나이가 들어왔습니다.
그녀가 보기에 그가 불행한 것은 행복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는 왠지 자기가 행복한 줄 몰랐습니다.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고
누가 행복을 얘기하면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딴 세상 얘기 같았습니다.
그는 행복 불감증 환자,
아니 행복 무감각증 환자였습니다.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
너무도 불쌍하여 여인이 사내에게 다가갔습니다.
사내는 다가섬에 사뭇 당황하며 경계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그가 이성으로 다가선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불순한 목적으로 다가선다고 오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처음에는 생각하였지만
오래 가지 않아 일이 아닌 관계에 그가 매우 서툶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일에 열심하고
매사에 정확하게 처신하고
추구하는 것이 바르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 외에 인간관계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고
인간관계에 감정까지 더해지면
모든 것이 망가질 것이라 질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던 사람.
사랑을 모르는 가여운 사람에게 여인은 꾸준히 다가갔습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가여운 사람에게 행복의 세계를 보여줬습니다.
여인의 행복으로 자신의 불행이 발각되자 사내가 처음에는 당황하며
어둠이 빛을 도망치듯 도망치려 하였습니다.
그래도 여인의 다가섬이 계속되자 어둠이 아침노을에 차츰 물들듯
차츰 여인의 행복에 사내도 물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 일도 없이 순전히 자기만을 향하여 다가오는 사람은
여인이 처음이었습니다.
사내가 일 없이 사람만을 기다린 사람도 여인이 처음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것.
그런 인격적 관계가 있다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
그것을 몰랐었고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바오로의 고백이 바로 이런 고백이 아닐까요?
그토록 열렬히 유대교를 신봉했던 그.
그토록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그.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있다는 것.
그것을 몰랐었고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바오로는 행복합니다.
이제 자신을 행복하게 한 그 복음을 나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 많은 여자 - 김정미 수녀- 22년 전 종신서원 수련을 위해 로마의 국제수련소에 있을 때 모든 수련자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다녀왔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미술관 건물 자체뿐 아니라 도시 전체가 아름다워 시간 가는 것이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그 많은 작품 중 대부분은 기억에서 없어지고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한 작품이 있다.
나아지는 모습
-장재봉신부- 복음이 전하는 여인의 죄가 무엇이었는지 성경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웃들의 냉랭한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고 내침을 받을 게 뻔한 그 자리에 굳이 끼어들어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릴 생각을 했던 까닭도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의 ‘죄’는 온 동네에 소문이 났던 걸 짐작하게 하네요. 그날 그 자리에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주님의 말씀에 제일 놀란 사람은 바로 그 여인이었으리라 싶습니다. 여인은 결코 주님께로부터 뭔가를 얻어낼 마음이 아니었으니까요. 주님의 말씀을 달게 들으며 감동하던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지 혹은 분명치 않지만 견딜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정성을 다해 표현하며 눈물로 고백해 드리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감히 바라볼 염도 못한 탓에 눈물이 주님의 발을 적셨던 것이겠지요. 너무나 송구해서 선뜻 주님의 발에 입을 댔던 것이겠지요. +++ 아름다운 일을 하는 일을 아름답게 보는 시선을 잃은 세상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름다운 마음과 정성마저 가십거리로 삼고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도 같은 교우들 사이에서도 비일비재합니다. 때문에 오늘 저는 말을 골라 사용하고 생각을 단속할 것을 강권해 드립니다. 생각을 단속하는 일은 내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이 어떠할 지를 먼저 기억하는 일입니다. 나와 주님의 평가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깨어있는 일입니다. 내 판단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평가만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제일입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좋아할 일을 합니다. 사랑은 상대의 취향에 자신을 맞춥니다. 내가 좋은 대로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주님이 좋아하실 일에만 마음을 쓰기에 여건도 조건도 넘어섭니다. 전혀 구애받지 않습니다. 주님께 좋은 일이 내게 좋고 주님께서 기쁘시면 나도 기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당신을 향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향한 큰 사랑이 그 여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걸 이제는 “더욱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라는 이르심이라 싶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좋아하실 일이 무엇인지 찾고 또 구하는 사람입니다. 하여 더 큰 사랑으로 그분을 온통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결코 자기 마음에 드는 일만 구하지 않는 큰 사랑을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렇게 하면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아멘
죄인임을 아는 은총 -전삼용신부- 세상에 죄가 존재하게 하시는 목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죄로 인해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죽더라도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하룻밤 만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덕분에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마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죄를 짓기 이전보다 죄를 지은 다음에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임을 더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죄를 더 많이 지어서 더 많이 용서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더 많이 용서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가서 행복하지 못하다가 며칠 단식하고 내 자신의 처지를 조금 더 알아 나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하게 되고 행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하였습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이유는 나와 같은 죄인을 이렇게 큰일을 위해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주님께 합당하지 않은 사람임을 알아 갈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어 더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주님께서 불러주시기에 합당하게 생각될 때는 주님께 대한 감사보다는 내 자신이 주님께 무엇을 해 드리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주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제자는 듣다못해 “지금 온 세상이 스승님을 이미 성인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가장 큰 죄인이라 하십니까?” 성인은 대답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을 다른 이에게 똑같이 주었다면 나만큼 못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네. 난 정말 얼마나 큰 죄인인지...” 왜 성인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벌레만도 못하다고 하고 사람에게 밟히는 모래만도 못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일부러 겸손한척 하려고 그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성인이기 때문에 진정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빛이십니다. 누구든지 빛에 가까이가면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요한 3,19-20) 따라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때문에 더 많은 결점을 찾아내는 반면,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죄를 지으면서도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슨 죄를 짓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고해성사를 원하지만 아직 어둠에 있는 이들은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고해를 하느냐?’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많이 용서받았던 여인은 이미 자신의 죄를 눈물로 속죄할 줄 알았기 때문에 빛 안에 있었던 것이고,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바리사이파 사람은 오히려 예수님과 그 여인을 비난함으로써 스스로 어둠에 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 알아야 얼마나 많이 용서받았는지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성인들만이 스스로의 죄가 얼마나 크고 또 그것을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더 큰지를 알기 때문에 하느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이보다 더 낫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의 죄가 얼마나 크고 또 그것을 용서해주신 하느님의 자비는 또 얼마나 더 큰지 만을 묵상합시다. 그러면 더욱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빌라의 데레사를 지옥으로 데려가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던 그녀의 지옥의 자리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지옥에 다 자리가 있고 지옥에 갈 운명이었습니다. 자신의 지옥 자리를 본 후 아빌라의 데레사는 지옥에 가지 않게 해 주신 은총만으로 평생 감사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열심히 살면 천국 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기 때문은 아닐까요? 누구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용서의 대가’는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내가 얼마나 부당한 죄인이고 또 그리스도의 수난으로써 얼마나 많은 죄를 용서받았는지 깨달읍시다. 그러면 감사와 찬미가 저절로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아흔아홉 번의 친절과 한 번의 상처가 있다면 어떤 것이 더 크게 보일까요? 아흔아홉 번의 친절이 더 크게 보일 것 같지만, 사실은 단 한 번의 상처가 훨씬 더 크게 보입니다. 그 한 번의 상처로 인해서 지금까지 행했던 모든 친절이 가려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 지요? “내가 저 사람만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빠다킹신부 주님 사랑하기
-김인한 신부- 다윗의 위대한 사랑 -송미영 수녀- 일찍이 구약시대에 다윗은 사울 왕의 음악치료사였습니다. 주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고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그를 괴롭힐 때마다 다윗은 비파를 손에 들고 탔습니다. 그러면 악령이 물러가고 사울은 회복되어 편안해졌습니다.(1사무 16,14-23 참조) 다윗은 감성지수(EQ)가 높아서 예술치료를 잘하였던 모양입니다. 또한 다윗은 작은 돌멩이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쳐 이겼지요.(1사무 17,40-54 참조) 돌멩이는 비록 작지만 돌리고 돌리면 원심력이 커져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지성지수(IQ)가 높아서 과학적 사고를 잘하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장재봉 신부- 우리는 흔히 외모를 보고 판단한다 - 김웅태 신부- 꽃잎에도 상처가 있습니다(2003-09-18 ) -양승국신부- 우리는 저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인 듯 합니다. 존경하는 정호승 시인의 말씀처럼 "상처 없는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진주도 상처가 있고, 꽃잎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장미꽃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상처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입을 때 마다 흔히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처를 입어본 사람만이 상처받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깊은 상처를 겪은 사람만이 삶의 진리를 터득하게 됩니다. 결국 좀 더 넓게 생각한다면 상처는 수치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지난 우리 삶 안에서 마치도 상흔처럼, 문신처럼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야말로 결국 우리를 거만하지 않게 만듭니다. 겸손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를 하느님과의 만남에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랜 세월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온 한 가련한 여인, 상처로 인해 늘 아파하고 갈등하고 한 평생 주눅 들어 살아온 한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 너무도 당당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실이 나빴던 여인으로 지칭되는 그 여인은 오랜 방황과 악순환의 세월을 접어보겠다고 그토록 노력했었지만 항상 그때뿐이었습니다. 마음뿐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은 어느새 과거의 비참함에로 떨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해왔습니다. 여인의 머릿속에 늘 잠재되어 있던 큰 걱정거리는 이것이었습니다. "과연 죽기 전에 내가 변화될 수 있으려나? 죽을 때 까지 계속 이렇게 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토록 불가능해보이던 여인의 회개는 결국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오랜 고통의 세월을 견뎌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그녀의 쓰라린 상처를 당신 자비로 아물게 하십니다. 결국 여인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으로 인해 지난 세월의 모든 상처를 완전히 치유 받습니다. 자신을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예수님이 너무도 고마웠던 여인은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예수님께 드릴 가장 좋은 선물이 어떤 것인지 찾아봅니다. 향유가 든 옥합이었습니다. 당시 꽤 값나가던 물건이었습니다. 아마도 여인에게 있어 전 재산과 다름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그 향유를 가져온 여인은 회개의 표시로 예수님 발치에 서서 울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회개가 얼마나 절실했으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다 적셨습니다. 그 눈물을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냅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하나 하나의 행동을 눈여겨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마음은 지상 최고의 봉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봉사는 더 이상 극진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사랑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이었으며 용감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이렇게 행동양식이 달라집니다.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위주로, 이타적으로 변화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됩니다. 오늘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된 여인을 바라보면서 저 역시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봅니다. 우리 역시 누구나 여인 못지않은 "변화와 새 출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참해 보일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토록 비참한 국면을 결정적으로 반전시킬 전환기가 찾아오리라고 확신하면서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매일 망가지고 깨져도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다시 새 인생을 살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기뻐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이 때로 고달프고 때로 열악하기에 고통고 많고 좌절도 많겠지만 다시 한번 "지금이 바로 또 다른 내 인생의 출발점"이라 여기며 힘차게 새 출발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시길 빕니다. "혹시라도 우리 삶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건 우리 자신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그분에 의해서 형성된 것입니다"(정호승, 연인 참조).
<죄사함을 받으려면...> -오상선신부- 나이가 들어갈수록 또 영성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또렷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젊을 때는 멋 모르고 행했던 일들이 얼마나 죄스런 일들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갈수록 더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사는 게 죄지요!> 하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예수님도 <간음하다 잡힌 여인> 기사에서 <너희 중에 죄없는 사람부터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하셨고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떠나갔다!>는 진술도 이러한 면을 시사하고 있는 것같다. 그렇다면 이 죄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어찌 이 죄를 보속하고 기워갚는단 말인가? 그 최선의 방법을 주님께선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답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잘 들어 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사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론적으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배워 알고 있었고 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로 머리로만 이었다. 그러나 이 <행실이 좋지 않다>고 평이 나 있던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가진 것 중 가장 고귀한 것을 예수님을 위해 내어 놓았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신다. 사랑이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점을... 다른 사람들이 머리를 굴리며 이 값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도와 줄 수 있을까 등을 궁리하고 있던 때에 이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는다. 수재의연금을 내면 과연 이것이 수재민들에게 잘 전달은 될 수 있을까? 또 아무렇게나 집행되어 수재민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배불리게 만들지는 않을까? 이러한 생각으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수재민들을 화면으로만 보면서 안되었구나 하며 나는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머리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수재에서 우리 정동 수도원 공동체는 재정상태가 열악함에도 불구하고(사실 마이너스 재정이다...) 선뜻 기금을 내어놓고 월 12만원 용돈에서 형제들이 또 떼어내며 강릉지역 수재민들을 위해 작은 부분을 내어 놓았다. 회관 직원들과 며칠간 수해복구를 위해 간다기에 회관 직원들은 몸으로 만이 아니라 성금을 기꺼운 마음으로 갹출하였고 주위의 사람들 마저도 기꺼이 동참해 주어 수재민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사랑은 이렇게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죄가 크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가 해야하는 유일한 것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뿐이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
사랑과 용서의 등식 -박상대신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피리를 불어도 곡을 하여도 호응하지 않는 장터놀이의 아이들로 치부(置簿)된 가운데, 그들 중의 하나인 시몬(40절)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예수께서는 기꺼이 초대에 응하여 그의 집에 들어 초대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게 된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자리하여 먹고 마시며 어울리는 하느님 지혜는 오직 그 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나게 됨(35절)을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그분은 어떤 모양의 놀이든 기꺼이 응해주시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시는 분이시다. 마태오, 마르코, 요한복음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처음부터 예수님의 적대자로 등장시키는 반면, 루가는 그들에게도 예수님의 손길이 닿게 한다. 루가복음에 등장하는 그들은 예수를 감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왔으며(루가 5,17), 갈릴래아 지방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합세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반감을 가지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시비를 걸고, 고발할 기회를 찾으면서 예수의 일행을 따라다니고 있었다.(루가 5,21.30.33; 6,2.7.11) 비록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무시하고 세례를 거부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였으나, 루가복음의 예수님은 그들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 그들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시는 이유는 거듭 말하지만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이 그 지혜를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 자연히 드러날 것”(35절 참조)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 하느님의 지혜가 죄 많은 여인의 회개와 용서를 통하여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존경했거나 그분을 모셔다가 따로 말씀을 듣기 위해 자기 집에 초대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예수를 고발할 또 다른 빌미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시몬이 손님을 초대해놓고 해야 할 세 가지 관습을 행하지 않았던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관습에 의하면 주인은 손님을 마중하여 어깨에 손을 얹고 평화를 기원하는 입맞춤을 하고, 먼지로 더러워진 발에 물을 부어 씻겨주어야 하며, 약간의 향료를 분향 하든가 향유 한 방울을 손님의 머리 위에 발라주어야 했다. 그런데 시몬은 이 모든 관습적 의례를 행하지 않았고, 반면에 갑자기, 그러나 의도적으로 나타난 ‘행실이 나쁜 죄 많은 여자’가 이를 대신 해버린 것이다.(44-46절) 죄 많은 여인이 예수께 한 행위는 사랑의 행위였다. 여인이 보여준 사랑의 행위에 예수께서는 죄의 용서를 선언하셨다.(48절)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분명 하느님께 속한다. 예수께서는 물론이고 그분과 같은 식탁에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49절)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0절)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네가 보인 사랑이 너의 죄를 용서하였다.”(47절 참조)는 말과도 같다. 결국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신 예수이시지만,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행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극진한 사랑을 보인 사람은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은 것이고, 적게 용서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 것’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 중에는 스스로를 의인이라 생각하는 죄인이 있는가하면, 죄인이라 생각하는 의인도 있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은 예수가 자기를 위해 별로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고, 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은 예수의 죽음이 완전히 자기 때문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자면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죄인이고, 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죄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고, 동시에 예수께 엄청난 빚을 졌다. 우리 중에 이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데 이 빚마저 그분께서 다 탕감해 주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일이다. 결국 사랑하는 것은 용서받는 것이며, 사랑하는 만큼 그 만큼의 용서를 받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 자신에게 더 큰 잘못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평소에 저는 더 심한 장난도 그 친구에게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청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지요. 아무튼 고해성사를 본 뒤, 그 친구에게 가서 사과를 했습니다. 그 당시의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그러한 행동을 한 것 같다고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친구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면서 “됐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당연히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예전과 같은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저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지요. 그리고 이 친구와는 졸업할 때까지 이야기하지 않고 서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때 저는 느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를……. 하지만 용서하지 못했던 그 친구 역시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결국 용서는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며, 무조건 용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편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조건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조건을 답니다. 저 사람에게 진심이 보여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하며, 나에게 어떤 이득을 주어야만 용서하겠다는 말도 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이러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용서해주신 이 여인의 죄는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던 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하고 속으로 말합니다. 바로 용서할 수 없는 여인이라는 것이지요.
이 여인은 깨닫습니다. 이 분은 내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죄를 가지고 있다 해도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믿음을 갖고서 눈물을 흘리며 최고의 사랑을 예수님께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되지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주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해주십니다. 그렇다면 그 용서를 받고 있는 나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나요? 또한 받은 용서를 기억하면서 나 역시 다른 사람을 모조건 용서하고 있나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용서는 무조건 이루어져야하는 것입니다.
처음 그 피골이 상접한 모습의 나무조각상을 무심코 봤을 때 나는 ‘세례자 요한’인 줄 알았다. 많은 화려한 조각상 속에서 갈색의 목각상은 얼핏 보기에도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허리띠로 두르고, 가느다란 팔과 다리, 부스스하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얼굴에 핏기 하나 없어 보였다. 낙타 털옷도 오래 입으면 누더기가 되는구나 생각했다. 목각상인데도 세세한 모습이 살아나 온몸으로 말을 건네는 듯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마르 1,?3.?6)는 말씀을 떠올린 채 조각상 앞에 멈췄는데, 실상 그 목각상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는 달랐다. 그래도 세례자 요한이려니 하고 목각상과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중에 제목을 보았다. 세상에, ‘마리아 막달레나’였다.
나는 놀라 다시 목각상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어디에도 그 화려했다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모습은 없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도록 몸은 마르고, 아무런 장식을 걸지도 두르지도 않은 비쩍 마른 맨발뿐이었다. 그 시기에 나는 종신서원을 준비하는 수련을 받고 있기에 180도 달라진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체험하면 저렇게 될 수 있는가? 나는 성심수녀회를 통해 종신토록 예수 성심께 나를 봉헌하겠다는 서원을 곧 하게 되는데 그때까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예수님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을까? 내게도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는 회개와 삶의 전환이 은혜로 주어질까? 나의 결단은 어떤가, 그렇게 살고 싶은가? 수없는 물음과 부러움이 올라왔다.
바리사이들은 그 여자가 ‘죄 많은 큰 죄인’인 드러나는 현재의 모습만 보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하고 판단하면서 결국 예수님마저 자기들 수준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실상은 바리사이들의 판단은 맞았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하는 가정적인 판단은 옳아서 예수님은 ‘죄인’인 여인에 대한 죄 사함과 그 이후의 여인의 삶에 대해 ‘보이는 것 너머’를 내다보고 계셨다. 바리사이처럼 ‘눈 앞의 죄’의 현상을 바라보시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할 것’을 보고 계셨고 ‘더 큰 용서를 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할 것’을 알고 계셨다.
그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고 그래서 자신의 생애를 바쳐 예수님께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었다
자신의 소중한 이가 주님께 고침을 받은 특은을 얻었던 것인지
선언하신 것이라 싶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그 이유를 세세하게 설명합니다. 이렇게 듣다보면 이 분이 화를 내는 이유에 공감이 갑니다. 하지만 계속 들으면서는 이런 의문의 생각이 들어요.
“정말로 이분이 잘한 것은 하나도 없고 상처만 주었을까? 이 분은 이제까지 단 한 번의 친절함을 행하지 않았을까?”
며칠 전, 서울 신학교 동기 모임에 갔습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구가 다르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 쉽지 않거든요. 아무튼 오랜만에 만나서 옛날의 추억도 떠올리고, 지금 동기들의 근황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석하지 않은 어떤 동기 신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다보니, 계속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만 나누게 됩니다. 저 역시 그 신부의 긍정적인 모습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오로지 부정적인 모습만 생각되더군요. 바로 그 순간, 한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난 그 친구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전에 내가 본당의 어려운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곧바로 도와주더라고.”
그 순간 저 역시 신학생 때 그 친구에게 도움 받은 기억이 떠올려졌습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부정적인 모습만 기억되었는데, 사실은 긍정적인 모습이 더 많았던 것이지요. 맞습니다. 상처를 비롯한 부정적인 모습은 항상 커보였습니다. 이에 비해 친절과 같은 긍정적인 모습은 항상 작아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달리 부정적인 모습보다는 긍정적인 모습에 항상 의미를 두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 점을 찾을 수가 있지요.
어떤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해서 누구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은 뒤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이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까지 의심하여 말하지요.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줄 알 터인데…….”
이렇게 모든 이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여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긍정적인 모습을 골라내십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려는 마음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을 닮고자 한다면,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우리 역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긍정적인 모습들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나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어 이러한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상대방의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모습을 찾아봅시다.
고해성사 중에 주일미사 빠진 것을 고백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끔 그럴 때 물어봅니다. 왜 주일미사를 빠지는 것이 죄가 될까요 하고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대답을 못하시거나,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고백한다고 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초등학생 아이에게 들었습니다.
‘내가 주일을 빠지면 예수님이 아파해요’ 하고 말입니다.
너무나도 단순한 말이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께 다가가지 않는다면 주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지요.
죄라는 말보다 주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사랑에서 어긋나는 삶이겠지요.
주님을 믿고 산다는 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다른 이들이 보기에 성당 다니는 천주교 신자로 믿고 사는 게 아니라,
주님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주님을 품는 사람이 우리들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한 죄 많은 여인이 행복해보입니다.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더 용서받고,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더 평화롭고,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더 많이 행복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그를 몇 번이나 죽이려고 하였고, 그에게서 목숨을 건지려고 다윗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헤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 끝내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1사무 24,1-23; 26,1-25 참조) 다윗은 의지지수(PQ)도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루 갖춘 다윗은 영원히 칭송받는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신명기 6장 5-9절에는 유다인들의 기도의 핵심이 한마디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는 마음(EQ)을 다하고, 목숨(PQ)을 다하고, 힘(IQ)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용서로 표현됩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촌이나 친척들이 잘된다는 것은 더불어 기뻐할 일이어야 하는데 도리어 내 배가 아프다는 표현을 보면 우리들의 못된 심보를 꼬집는 말일 것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저의 삶을 되돌아보아도 그런 못난 심보가 가득한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씨는 다 그렇고 그렇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삶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 강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 없이는 형제 자매가 잘되는 꼴조차 보지 못하는 못나고 모자란 우리인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주제와 처지를 올바로 알 때에만 그분의 도우심을 청할 수 있는 완전한 의탁이 가능할테니까요. 인간은 내 자신의 힘만 가지고는 이기적인 마음, 혼란스러운 욕망을 우리 마음으로부터 뽑아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 내면에 거룩한 생명이 태어나도록 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으십니다.
이렇게 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고 입맞춤을 해 드릴 수 있는 겸손과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변화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시는 주님께서는 당신이 베푸신 놀라운 기적의 공로를 언제나 치유받은 자가 지녔던 믿음의 덕으로 돌려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좋은 것이고 엄청난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온갖 어려움과 삶에 결핍된 요소들이 예수님께 의탁하는 "믿음" 하나로 완전히 축복으로 변화를 받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겨자씨만한 믿음만으로도 우리 기도에 대한 흔쾌한 응답을 주십니다. 믿음이 우리를 살리고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고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말 그대로 믿음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는 하느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자 앞에서는 마음이 약해지십니다. 한 마디로 믿음으로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은 꼼짝 못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주 큰 약점이시지요.
우리들이 예수님을 진정 믿는 사람들이라면 형제 자매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망설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내 믿음이 부족한 탓이요. 내 기도가 부족한 탓인 것을 고백합시다. 믿음의 기도는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도구이고 무기입니다.
초대 공동체에서는 그리스도교를 길의 종교라고도 하였습니다. 길의 종교라는 말의 뜻은 주님과 함께, 모든 이가 구원으로 향하여 걸어가는 종교임을 밝힌 것이라 하겠습니다. 내 형제 자매와 더불어 가지 않는 길은 천국을 향한 길이 아닙니다. 내 형제 자매가 없는 나 홀로 천국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이가 구원되리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다 함께 살릴 것입니다. 나에게 뿐 아니라 모든 이웃들에게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루까 7:36-50]의 사건은 바리세이인 시몬의 집 뜰 안에서 된 일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의 부자집은 정방형의 마당을 한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건물을 세워 지었다. 그리고 마당에는 화원과 우물이 있고, 따뜻한 날에는 그 마당에서 식사를 했다. 이러한 환경에 어떤 귀한 손님을 초대했을 경우에는 그들의 풍속에서 의례이 세 가지 일이 행해졌었다.
1) 주인이 나와 손님 어깨에 손을 얹고 평화를 기원하는 입맞춤을 했고,
2) 길에 먼지로 더러워진 발에 물을 부어 씻겨주는 것.
3) 그리고 약간의 향로를 분향하든가, 장미향 한방울을 손님 머리위에 부어 바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리세이인 시몬은 예수를 초대해 놓고도 그런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은, 예수를 반은 호의로, 반은 멸시하는 태도를 가졌었다는 표였다. 그러나 사람들 틈에 그 집에 들어와 예수를 찾는 죄 많은 여인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었고, 발에 입을 맞추었고, 머리카락으로 닦았으며, 유대여인들이 으례이 목에 걸고 다니던 값비싼 향유를 예수께 발라 드렸던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본 시몬은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저런 죄녀가!" 또 "사람들에게 그토록 명성 높은 예수가 저런 여자가 누구인줄도 모르다니!"하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이렇게 바리세이인 시몬처럼 우리도 다른 이를 잘못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흔히 외모를 보고 판단하거나, 어느 사람의 과거에 집착해서 현실을 용서 못하고 하느님 앞에 그의 참다운 진실한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시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돌아온 탕자를 대하실 때도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쓰며 무슨 짓을 했으며, 무슨 염치로 돌아 왔느냐? 고 따지거나 다시는 안그러겠다는 약속을 받으시고 받아들이시는 것도 아니며, 오직 "아버지를 찾아 돌아왔다는" 그것만을 가지고 기뻐하시는 하느님이시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죄 많은 여인이 눈물로 통회하는 것만을 보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그런데 시몬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은 선한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떳떳했기에 눈물을 흘릴 필요성은 커녕 예수와 자비의 용서가 아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가 남을 용서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 만큼 용서를 받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며, 용서 받아본 적이 없으니, 용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용서가 무엇인지 모르니, 자기도 하느님 앞에 용서 못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진실히 용서하는 바로 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용서하는 그 행위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표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람을 하느님과 갈라놓고 단절시키는 것은 바로 "자기 만족"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타인에게도 아쉬운 것을 모르고, 하느님께 대해서도 아쉬운 것을 모르니, 자기 만족으로 차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거기에는 죄의 용서에 대한 진정한 고마움을 모르기에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살펴 자기를 용서하라. 자기를 용서 못하는 것은 교만이고, 하느님께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열 줄 모르는 것이다. 자기를 용서했으니 타인을 용서하라. 집, 직장, 친구, 이웃 등을 용서하라. 용서함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화해하라. 그럴 때 평화가 있고, 새로이 무엇인가를 의욕있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