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문원 정자에게 종이와 벼루를 갖고 오게 한-정태화
정태화(1602~1673)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유춘, 호는 양파다. 인조 2년(1624) 진사시, 6년(1628) 문과에 각각 급제하였으며, 문과엔 아우 치화와 나란히 합격하여 장안에 화젯거리가 되었다. 1635년에 북방 경비를 위해 설치된 원수부의 종사관이 되고, 이듬해인 병자년 정월에 토산에 진을 치고 청나라 군대와 접전하였다. 이때 원수는 청나라 대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 도망하고 아군의 진영은 형편없이 무너졌다. 정태화는 패잔병을 수습하여 사력을 다해 싸움으로써 적에게 많은 타격을 가했다. 전공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는 사헌부 집의로 승진하였다.
평안 감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연위사(중국 사신이 오갈 때 그들을 접대하는 사신) 최내길(최명길의 형)이 교자를 타고 평양에 왔다. 정태화는 즉시 이 사실을 위에 보고하고 교자를 타고 역을 통과하도록 묵인한 관리들을 문책하였다(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궁핍해진 지방 재정 형편을 감안, 연위사의 교자 사용을 금지하던 때였다).
우의정 최명길이 정태화의 처사에 매우 화가 치밀어 불만을 토로했다.
"공이 우리 형님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조금 후엔 생각을 고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조금 후엔 생각을 고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행한 일은 공적인 처사요 내가 화를 낸 것은 사적인 감정이다.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처사에 성을 내는 일이 말이 되겠는가!"
그 뒤로 최명길은 이 일을 다시 거론하는 일이 없었다.
정태화가 정승으로 있고 이세화가 승문원 정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공무로 정승을 방문한 이세화가 정승화가 정승이 보는 앞에서 종이와 벼루를 갖고 오도록 하인에게 시켰다. 이를 본 정태화는 정자 이세화에게 명했다.
"하인에게 시키지 말고 정자가 직접 가지고 오라!"
이세화의 얼굴엔 모욕당한 기본 나쁜 기색이 역력하였다. 훗날 이세화는 정태화의 조카인 정재해에게 그 당시의 섭섭했던 심정을 토로하였다.
"상공이 나에게 하인의 할 일을 시키다니 그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러자 정재해가 상세히 해명하여 주었다.
"상공의 지위란 일반 백관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네. 내 예를 하나 들지. 병조판서나 호조판서 자리가 비게 되면 이조 판서가 직접 추천서를 가지고 와서 대신에게 결재를 올리는데 이 때 벼루는 이조판서가 손수 들고 온다네. 정승의 지위란 이러한 것이거늘 불과 9품직을 벗어나지 못하는 승문원 정자가 붓과 벼루를 좀 들고 온들 그것이 무슨 큰 대수인가. 이 사람아!"
정재해의 설명을 듣고 난 이세화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시골에서 생장한 촌놈이라 조정의 예의를 알 턱이 있는가? 만약 오늘 이러한 설명을 듣지 않았던들 끝내 내 잘못을 깨닫지 못할 뻔하였네."
이세화는 극구 사과하였으며 그 뒤부터 조종의 모든6 예절과 전례를 두루 익혀 몸소 모범을 보였다.
■ 어여쁜 기생의 유혹으로 인생의 진로가 바뀐-오성군
오성군(?~?)은 종실로서 주색으로 일생을 보낸 당대의 호걸로 이름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향락생활도 젊은 시절 한때일 뿐 그도 이제 80 고령의 늙은이가 되어 지난날을 조용히 돌이켜볼 때가 되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젊은 시절을 조직 술과 여자로 일관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유혹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한 때문인가, 아니면 천성이 그것을 좋아한 때문인가?"
묻는 말에 대답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긴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나는 본시 어릴 적부터 20여세가 될 때까지 계집아이처럼 얌전하기만 하였지. 혹시 누가 쳐다만 보아도 나는 공연히 얼굴이 빨개지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네. 어느 날 잘 아는 무인이 나를 속이고 유인하는 바람에 그 무인을 따라가 보니 그 집은 기생이 있는 술집이었네. 시끄러운 노랫소리, 오고가는 술잔을 보고 심기가 불편하여 나는 즉시 되돌아오려고 했으나 기생들이 애교를 떨며 만류하는 바람에 그만 돌아올 용기를 잃고 말았지. 어여쁜 기생 하나가 나의 눈을 응시하면서 입고 있던 저고리를 벗지 않겠나. 우윳빛 같은 속살과 꽃봉오리 같은 그의 유방을 본 나는 그만 정신이 몽롱해져서 결국 그 여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 말았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오로지 주색에 빠져 끝내 헤어나지 못하였다네. 지금 생각하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그 무인 친구 때문에 보게 된 그 여인의 젖가슴 때문일세.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나를 본보기로 삼아 청소년들을 가르쳐서 유흥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미리 조처하는 일이라네."
■ 국수로서 시골 하수에게 당한-덕원령
덕원령(?~?)은 종실로써 바둑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국수의 호칭을 얻었다.
하루 어떤 사람이 마당에 말고삐를 매고 있었다. 덕원이 누구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저는 번을 서려고 올라온 향군입니다. 저도 바둑을 무척 좋아합니다.
나으리께서 국수라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물리치지 마치고 한번 대국해 주시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덕원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주니 그 사람은 덕원에게 조건을 제시하였다.
"대국에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만약 나으리가 지면 소인에게 봄철 양식을 대주시고, 소인이 지면 저기 마당에 매어 둔 말을 나으리께 바치겠습니다."
덕원도 그가 제시한 내기 조건을 쾌히 수락하였다. 첫번째 대국에서 덕원이 한 점을 이기고 두번째 대국에서도 또 한 점을 이겼다. 그 사람은 군말 없이 자기의 말을 내놓았다. 덕원은 그 말을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약속 이행이라 하지만 명색이 국수라 불리는 고수가 하수에게 말을 받는다는 것이 체면이나 자존심에 걸리기 때문이다. 덕원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농담으로 한 약속이니 그 말을 받을 수 없네."
덕원이 받기를 꺼려했지만 그 사람은 정색을 하며 고집하였다.
"나으리께 소인이 감히 식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끝내 고집하고 자기의 말을 두고 떠나갔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갔다. 어느 날 그 사람은 다시 화서 또 내기 바둑을 간청하였다. 덕원은 할 수 없이 대국을 시작하였는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두었지만 그의 수를 알 도리가 없었다. 불계패를 당하고 말았다. 바둑은 졌지만 영문이나 알고 싶어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라고 청하니 그는 죄송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저는 저 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나 제가 번을 서는 동안 저 말을 먹여 줄 데가 없어 결국 제 말은 굶어 죽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소인은 그 말을 살릴 욕심으로 조그만 바둑 재능으로써 감히 나으리를 기만하게 된 것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덕원은 국수라고 알려진 자신의 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