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주유소 아들)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고 자판기에서 나오는 커피를 우두커니 보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열린다. 초췌한 모습의 아버지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목구멍으로 커피 한 모금을 넘기는데 의자에 널브리진 채 눈을 감고 있던 아버지가 손님 많았는지 묻는다. 손님. 모닝 차주 그녀 생각에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고 한다. 올려진 입꼬리를 감추려고 종이컵을 입에 물었다.
“사람들이 백원 이라도 더 싼 셀프 주유소를 좋아하지 여기로 오겠어요. 세상 물정 모르는 손님이나 오지. 그리고 어떤 여자 손님이 와서 현금 2 만원 결제 하길래 서비스로 현금영수증 20만원 끊어 줬어요. 나중에 정산할 때 취소하지 마세요. 그 대신 오늘 일당 받지 않을께요.”
기운 없이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내 머리통을 휘갈긴다. 내시경 검사받느라 속이 텅 비어 있어서 힘이 없을 텐데 손끝이 꽤 맵다. 아버지에게 아프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때와 달리 웃음이 나온다. 그런 나를 야릇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위내시경 검사 결과를 물어보았다. 특별히 지병이 없는 아버지의 건강검진결과는 항상 나를 안심시켰다.
“아버지 위 걱정 말고 오늘 일당 값 잘하고 퇴근해라. 아버지는 집에 가서 좀 쉴란다.”
주유소 운영을 두고 수차례 아버지와 상의했다. 아버지 연세에 종일 주유소에서 근무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했다. 주유소에서 나는 기름 냄새에 수면제라도 들어있는지 잠이 쏟아지는 경우가 많았다. 주유소를 셀프로 바꾸면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니 졸음 때문에 곤욕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내 말을 아버지는 매번 무시했다. 그깟 졸음 하나 견디지 못하고서는 주유소를 운영할 자격이 없다는 아버지의 생각은 꼿꼿이 서 있는 대나무 같았다. 아버지는 변하지 않았다. 지친 나는 주유소 운영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았다.
하는 일마다 잘되지 않았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동시에 부모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부모님 잔소리를 멜로디처럼 들을 경지에 올랐을 때 아버지는 주말만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권했다. 거의 명령에 가까운 아버지 말을 따라야 했기에 주머니에 포크를 쑤셔 놓고 주말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잠이 물 밀듯 밀려오면 주머니에 있는 포크를 꺼내 손가락 끝을 쿡쿡 찔렀다. 손끝으로 효과가 없을 때는 발가락 끝도 찔러 댔다. 언젠가 내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본 아버지가 사무실에 미니 커피자판기를 들여놓았다. 커피가 잠을 도망가게 한다고 아버지는 생각했었다.
사무실을 나가려는 아버지의 팔을 붙잡았다. 모닝 차주 그녀를 두고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내가 모닝 차주 그녀에게 전화를 해도 되는지 물었을 때 그녀가 네 라고 했어요. 그런데 용기가 나지 않아요.”
“쯧쯧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아버지는 혀를 차고는 사무실을 나가버린다. 아버지 말처럼 나는 정말 한심한 남자일까? 주머니에 있는 종이를 꺼냈다. 김사장님 핸드폰 번호가 적힌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휴지통에 던졌다. 모닝 차주 그녀의 핸드폰 번호가 적힌 현금영수증 종이가 천근만근처럼 느껴진다. 다시 주머니에 쑤셔 놓고 포크를 꺼내려는 찰나 주유소 입구에 검정색상의 자가용이 진입하고 있다. 서둘러 사무실을 나오는데 전에 없이 발걸음이 가볍다. 주유기 가까이 서자 자가용 창문이 열리고 얼굴을 내민 손님이 “가득히요.”라고 말한다.
모닝 배로 보이는 자가용이다. 이렇게 큰 자가용에 기름을 가득히 넣다 보면 시간이 꽤 걸린다.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한 잠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마취제를 맞은 듯 점점 몸에서는 힘이 빠지고 정신은 혼미해지는 이런 상황이 힘들고 너무 싫었다. 가느다란 주유기를 잡고 손목에 힘을 싣고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세우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하고 나면 내 몸에 있던 에너지는 바닥이 난다. 주유가 끝나고 주유기에서 손님이 있는 운전석까지 가는 거리가 지구를 한 바퀴 돈 기분에 휩싸인다. 내 몰골에 손님 대부분은 염려보다는 저 사람 왜 저래 하는 시선과 함께 신용카드를 내민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다.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들어오는 바람에 커피는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고 보니 포크로 손가락을 찌르는 일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지금쯤 잠이 쏟아져야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일까. 손님 자가용이 출입구를 빠져나가는 동안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주유기 곁을 떠나지 않고 멀쩡하게 서 있었다. 주유하는 시간이 길지도 힘들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