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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그만두고 별다른 활동이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취미 생활이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하여 보았으나,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가끔 영남 유가 후손 벗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히 연비를 따져보게 되는데, 어려서 객지에 나와서 보고 들은 것이 없고, 어릴 때 조부께서 너는 여헌 선생 자손이니 조상의 내력을 바로 하여야 한다고. 자주 말씀을 하셨으나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부께서 하세하신 후 삼종숙이신 봉익(鳳翼)공께서 자주 오셔서, 나를 작은집 승지공의 주손이라 하여 자상하게 여러 집안의 내력을 일러주셨지만, 그때는 그저 어른께서 말씀하시니 들어 드리는 것이 예의라 생각하고 깊이 새겨듣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 하니, 자연 대화에 깊이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때 느낀 것이 나의 조상 자랑하지 말고 상대의 조상에 대한 내력을 잘 아는 것이, 그들과 더욱 가깝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늦은 공부가 쉽지 않아서, 여러 문중의 내력을 좀 더 체계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그 집안 선조님들의 묘갈, 묘지, 행장, 가장을 보면, 윗대의 내력과 그분들의 행적과 외가와 처가, 자손들의 이름과 사위, 외손까지 기록되어 있어서,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되어 각 문중의 묘갈을 수집하고, 정리하기로 하였으나 자료를 충분히 모으기가 쉽지 않아, 우선 수집된 자료를 년대 순으로 분류하여, 행적을 약술하였다, 자료가 소략한 어른들의 내력을 찾다 보니, 문집에 수록되지 않은 자료도 더러 찾게 되어 묘갈명 뒤에 수록하였다.
의성 김문은 나와 특별한 집안이니, 나는 외가인 검재에서 태어나 6세까지 검재에서 자랐다. 외조부 규환(圭煥)공은 학봉 선생의 후손으로 승지와 초산부사를 지내신 겸와선생 진형(鎭衡)공의 증손자이고, (아버지 응암 공(익모(翊模))은 영월부사와 승지를 지내신 진우(鎭右)공의 손자로 겸와 공의 손자로 입후 됨) 조모께서는 성주 사도실 동강 선생의 주손(冑孫)인 심산선생 창숙(昌淑)공의 맏따님이고, 7대 조모께서는 봉화 해저의 학자이신 소암선생 진동(鎭東)공의 막내 따님(장시행: 시하)이고, 고조모 풍양 조씨께서는 검간 조정(趙靖) 선생의 후손인 조기문(趙起文)공의 따님으로, 외가가 의성김씨 해저의 승지 와은선생 한동(翰東)공의 둘째아들 희복(熙復)공의 외손녀이다, 자라면서 자연 외가에 가서 놀게 되고 장성하여서도 또한 그러하였고 노년에 들면서는 더욱 그러하여 계회(契會)도 의성 김문과 관련이 많은 집안사람들과 가지게 되어 자주 어울리다 보니 의성 김문의 벗들이 “말하기를 전주 류씨는 청계공 제 6파이고 자네는 의성 김씨이네” 하며 나를 대하는 것이 마치 문중 사람 대하듯 다정하게 대하니 고맙기 그지없다.
이 자료는 혼자 보려고 모은 것인데 자료를 찾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 의성 김문의 제현들게 보여 드려 빠진 부분을 보완 할수있기를 바램이다
워낙 천학 비재하여 행여나 김문의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나 외손으로 외가 윗대 어른 분네들의 이력을 알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니 크게 야단 맞을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함이다
묘갈명을 보면서 다시 한번 명문가의 외손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기축 년 5월 외손 인동 장달수가 외람되게 쓰다.
* 분량이 많아서 일부만 올립니다
묘갈명 의성김씨 청계공 자손
0 김용비(金龍庇)
시조 고려 태자첨사 휘 용비 부군의 묘소가 경상도 문소현(의성) 남쪽 오토산 진향에 있는데 의성현 사람들이 공이 베푸신 은덕을 잊지 못하여, 산소 주변에서 나무를 하거나 짐승을 키우지 못하게 하고, 수 백 년이 지나도록 때에 맞추어 제사를 지네고 있다.
정덕 년간(1517년)에 모재 김안국 상공이 경상도 관찰사로 나왔는데, 김상공의 선조 용필(龍弼)공은 첨사공의 아우이다. 김상공이 첨사공의 고사를 듣고 감동하여 세금과 부역을 감해주었다. 선조 10년(1577)에 후손 이조정랑 성일이 일가 자손들에게 고하여 재력을 모아
묘전에 비을 세우게 되어, 후손인 전 교리 우옹에게 공의 사적을 돌에 새기게 하였다.
백성들이 공을 흠모하는 것은 파촉 사람들이 제갈공명의 사당을 세운 것이나, 양양(襄陽)
사람들이 양호(羊祜)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이다.
(註)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진(晉) 나라의 양호(羊祜)가 군대를 맡고 있으면서 갑옷을 입지 않은 채 항상 가벼운 옷을 입고 허리띠를 느슨히 풀어 놓고 있었는데도, 군사들이 모두 그 덕에 감복하였다. 그 뒤에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이 되어 오(吳) 나라를 치다가 병사(病死)하였는데, 그가 죽자 변경을 지키던 오나라 군사들까지 그의 덕을 사모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 뒤에 양양(襄陽) 사람들이 양호가 즐겨 노닐던 현산(峴山)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석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타루비(墮淚碑)’라고 불렀다. 《資治通鑑節要 第25卷 漢紀 後帝禪下》
始祖太子詹事府君墓碑 동강 김우옹 찬
我始祖高麗太子詹事府君諱龍庇公之墓。在慶尙道召文縣治之南五土山震向之原。縣人以府君有功德於民。久而不敢忘。共爲禁其樵牧。又相與立祠縣中。以時修祀。罔敢不虔。臧獲之在境內者。官復其徭。以奉祀事。如是數百年。以爲故事。正德間。慕齋先生金相國安國。出按是路。實我府君之弟龍弼後也。感其事。嘉其俗。*爲申蠲復之令。自此邑人奉之彌謹。萬曆五年。府君之裔孫吏曹佐郞誠一。告于同宗子孫。各出財力。爲之立碑于墓前。作治逾時而功告訖。使裔孫前副校理宇顒。記其事以入石。宇顒竊惟古者。凡有功德於民者。皆在祀典。能禦大災則祀之。能捍大患則祀之。所以厚報功施。不忘初也。降及後世。尙有遺意。其有功德入人之深者。則皆有以致其崇敬而興慕景嚮焉。如孔明之在巴蜀。遺黎祭於道陌。羊祜之在襄陽。行旅爲之墮淚。皆出於人情之自然而不能已者也。我始祖之在召文。觀其邑民之崇敬慕嚮。至於綿歷異代累數百年之久而不敢忽忘焉。則非功德入人之深而能如是乎。惜乎。我國之載籍不備。無所考證。不知我祖之於斯民。能禦大災者何事。能捍大患者何事也。獨其興慕崇敬有出於人情之自然者。則愈遠而愈不可泯耳。府君三子五壻。長子諱宜。尙書左僕射。次諱紘。義城府院君。次諱英。判典客寺事。左僕射之子曰瑞之。內盈少尹。少尹之子曰台權。奉翊大夫。文睿府左司尹。司尹之子曰居斗。奉翊大夫。工曹典書。典書之子曰宣略將軍都萬戶洊。萬戶之子曰縣監永命。縣監之子曰承文知事漢啓。知事之後三世而至成均生員諱璡。有五子。曰克一。今爲通訓大夫密陽府使。曰守一。曰明一。皆生員。曰誠一則吏部也。曰復一。成均學錄。文儒彬彬。萃于一家。當世稱之。府院君之子曰英烈。義城君。義城君之子曰興復。上護軍。曰申復。護軍。女適領議政韓永矴。二護軍之後。冠紳輩出。而韓議政有三子。曰確。左議政,西原府院君。曰磌。參判。曰。正郞。左議政之子曰致仁。西城君。曰致義。靑陽君。曰致禮。西陵君。女爲德宗大王妃。卽昭惠后也。寔誕我成宗大王及月山大君婷。判典寺事諱英。子諱之銳。艸溪郡守。郡守之子長諱光富。奉翊大夫兵部判書。次諱修德。某官。某官之子諱用超。佐我太祖大王。爲原從功臣湖南道兵馬節制。節制後六世而至宇顒先君子諱希參。仕我中仁明三大王朝。蜚英臺閣。佐銓天曹。操履學行。取重士林。官至通政大夫三陟府使。有四子。曰宇弘。今爲通訓大夫光州牧使。曰宇宏中。直大夫議政府舍人。曰宇容。未仕。其弟則宇顒也。五壻之後。名卿鉅公。前後相望。載在譜牒。今不殫錄。夫以我始祖積德之厚。流澤之遠。至於數百年而愈益光顯。使我輩裔孫。得以藉其餘烈。承其家訓。勸忠勉孝。以自樹立於世。此其源流所自。可謂深且遠矣。吾子孫。其又何敢忽焉而不之識也。今吏部與同宗諸賢。立石以識之。其追遠報本。用意勤至。所謂佳子孫者。其不在玆耶。宇顒忝在末裔。謭陋不文。不克敷揚我祖之功德。而懼夫湮晦莫之白也。徒以同宗諸軍過誤見推。義不敢辭。於是乎略序其首末如右。
* 蠲復之令(견복지령): 세금을 면제하도록 명을 내림.
(주) 의성군지
鎭民祠 在朝陽館東高麗太子僉事 金龍庇 有功德於民故邑人設位以祭 正德間其傍孫金安國按本道始爲立祠後孫金誠一揭號鎭民
진민사: 조양관 동쪽에 있는데, 고려조에 태자첨사를 지낸 김용비가 백성들에게 베푼 공덕이 있어서 읍인들이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방 후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1517년(중종12)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사우를 세우고 진민사라 하였다. 후손 김성일의 글이 있다.
0 김거두(金居斗) 1339년(충숙왕 복위8)
고려태자첨사 용비의 현손이며, 문예부 좌사윤 태권의 아들이다. 어머니 안동 김씨는 판관 승고(承固)의 따님으로, 상락공(上洛公) 방경(邦慶)의 증손녀이다.
고려조에서 공조전서(공조판서)를 지냈다. 부인 문화 류씨는 대언(代言: 승지) 총(總)의 따님으로,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 문정공(文正公) 경(璥)의 현손녀이다.
아들은 한분으로 洊은 선략장군 진례도 도만호를 지냈다. 증손자 한계(漢啓)는 집현전 학사로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병을 칭탁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 풍산현으로 이거하였으니 그때부터 자손들이 안동에서 살게 되었다.
先祖奉翊大夫工曹典書府君碣陰記 재산 김성탁 찬
公諱居斗。義城人。高麗太子詹事諱龍庇之玄孫。文睿府左司尹諱台權之子。妣安東金氏。判官承固之女。上洛公邦慶之曾孫。以元至元己卯生。仕高麗。官至工曹典書。其前後履歷壽年行治。世遠莫得以徵焉。配文化柳氏。代言總之女。修文殿太學士文正公璥之玄孫。有一子曰洊。宣略將軍進禮島都萬戶。陽村權公祭其墓。有樂我名敎頑立懦起語。內外支裔。世有達官聞人。多不可盡錄。其最著者。曾孫集賢殿學士漢啓。當莊陵遜位。謝病不仕。七代孫鶴峯文忠公誠一。以德行勳業。爲世所宗師。公晩歲居安東豐山縣。子孫爲安東人始此。公之藏。在府南加峴朴日洞午向原。墓道舊無顯刻。迺者。府居後孫。合謀鳩財。建石以表之。終始幹其事者。十二代孫世鎰也。
0 김한계(金漢啓) 1414년(태종14)~1461년(세조7)
자는 형운(亨運).
증조부는 거두(居斗). 조부는 존(洊) 아버지는 현감 영명(永命). 형은 한철(漢哲)이다.
외조부는 이지유(李之柔)이고. 안보(安堡)의 사위이다.
세종(世宗) 17년(1435 을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하위지와 동방)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성삼문과 동방). 집현전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451년(문종 1) 좌정언(左正言)이 되었으며, 경연(經筵)에 출입하여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직제학을 거쳐 1454년(단종 2) 성균관직강이 되고 이어 승문원교리를 겸하였으며, 또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여 《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승정원부승지를 지내고 다시 정언이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같은 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으나 사양하였다.
* 國朝人物志v1 (端宗朝) 金漢啓
義城人縣監永命子高麗典書居斗曾孫世宗戊午生員文科直提學世祖受禪
謝病歸不復仕[주:莊陵續志]族兄涉太祖丙子文科大司成[주:國朝榜目]
*國朝捷錄v01 士純文忠公鶴峯義城人壬辰守晉州憂悴文岺伯父璡祖禮範曾万謹高漢啓鶴峯五兄弟皆別號與桐崗爲族兄弟
十一代祖考知承文院事府君墓表 귀와(龜窩) 김굉(金㙆) 찬
惟景泰乙亥端宗大王之遜位于光廟也,一時殉義之臣,如六臣諸賢,乃其著者時則先祖知院事府君謝病南歸,竟以端廟昇遐之越四年,辛巳卒世,噫,府君與成,河諸賢,同被選大小科第,俱以集賢學士,出入經幄,論思獻替知,遇恩寵,卽一體之臣, 及其不幸處變,而盡忠所事則或誓心圖報,而殉身於當日,或超然遠擧而沒世於遐莣,以各得其心之所安,雖其所處之爾殊,而其自靖獻王之義,又未嘗不同也,嗚呼,悲夫府君諱漢啓,上祖諱錫,以新羅敬順王別子,封義城君,遂以爲貫,中世諱龍庇,高麗太子詹事,襲封義城君,是生諱宜上,護軍,是生諱瑞芝, 少尹,於府君爲五世,高祖諱台權,左司尹,金鏞之變, 遇害禁直,曾祖諱居斗,典書,祖諱洊,萬戶,麗末奉典書公南下,卜居于安東府邦適洞,洞名邦適,蓋取邦之衰矣,我安適歸之義云,考諱永命,縣監,妣廣州李氏,牧使諱之柔女,妣光州金氏,少監諱務女,妣安東權氏,左議政諱專女,府君李氏出也,永樂甲午生,宣德乙卯司馬正統,戊午文科,享年四十八,墓在府北 佳川茂隱山負坎原,嗚呼,府君行治履歷,世遠不可得以詳矣,然謹按李氏墓誌曰,一男某文科,與成三問,河緯地同榜,事文宗端宗,歷敡清要,輔益弘多, 光廟受禪,謝病不仕,端廟朝端義錄曰,金某世宗戊午登第,官直提學,世祖受禪,謝病不復仕, 其他見譜牃及先輩文集者,雖詳略不同而其受禪後處義,則無異辭,噫,此府君大節也,大節如此,餘可以推,抑㙆於此,尤有所感歎者,夫以司尹公之死難禁中,萬戶公之掛冠南下,與府君之謝病不起,世殊而義同,跡異而志一,孤忠隱節萃于一室吁亦偉矣,
我朝以節義勵世,所以致崇奬於勝國秉節之士, 端廟靖義之臣者,靡不用極而獨府君三世不與焉,是爲千載不盡之恨,然於府君亦何有哉,配德山宋氏墓合窆,後配竹溪安氏,內禁衛堡女,墓府君墓下數十武許,三男萬謹進士萬愼萬欽生員,三女郡守曹末孫,司正金泰石,司果宋巨程,萬謹二男仁範,禮範,贈承旨,萬愼無后,萬欽三男鵾,鵬,鵷,判官,禮範三男璡,贈判書,珽,參奉,璲,鵷三男元胤,亨胤,僉樞貞胤,璡五男克一內資正,守一察訪,明一生員,誠一副提學,諡文忠,復一司成,亨胤四男安繼主簿,善繼牧使,賢繼,克繼都事,玄仍以下多不盡載,文學科宦奕世輩出,倘所謂贏於躬者,裕於後源之長而流之遠者非耶,府君墓舊有碣歲久剝落,今將改䜿,後孫斗燦正運弼冕主其事,託㙆以陰記,不敢以不文辭,謹敍次如右,
0 김예범(金禮範) 1479년(성종 10, 기해)∼1550년(명종 5, 경술).
자는 국헌(國憲). 병절교위(秉節校尉)이다. 손자 성일(誠一)가 귀하게 되어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다. 현재 내앞의 종가를 지었고, 안동 의성김씨 川前派를 흥기시켰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병절교위 부군(秉節校尉府君)의 묘갈명 을해년(1575, 선조 8) 학봉 찬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휘(諱)는 예범(禮範)이고, 자는 국헌(國憲)으로, 선조(先祖)는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이다. 9대조 휘 용비(龍庇)께서는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태자 첨사(太子詹事)에 이르렀으며, 비로소 문소(聞韶 의성(義城)의 고호(古號)임)에 입적(入籍)하였는데, 백성들에게 공덕을 베풀어서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제사를 모시고 있다. 8대조 휘 의(宜)께서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다. 7대조 휘 서지(瑞之)께서는 조현대부(朝顯大夫) 내영 소윤(內盈少尹)을 지냈다. 6대조 휘 태권(台權)께서는 봉익대부(奉翊大夫) 문예부 좌사윤(文睿府左司尹)을 지냈다. 5대조 휘 거두(居斗)께서는 봉익대부(奉翊大夫)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고조 휘 천(洊)께서는 진예도 도만호(進禮島都萬戶)를 지냈다. 증조 휘 영명(永命)께서는 신령 현감(新寧縣監)을 지냈다. 할아버지 휘 한계(漢啓)께서는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를 지냈는데, 노산조(魯山朝 단종(端宗)을 가리킴)에 벼슬하여 경악(經幄)에서 논사(論思)하였고, 사간원에서 곧은 말을 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나다는 소문이 조정 안에 자자하였다. 그런데 시사(時事)가 한번 변함에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청해 남쪽으로 돌아왔다가 병으로 인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 동생인 김한철(金漢哲), 매서(妹壻)인 정륜(鄭綸)이 서로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하여 한 집안에서 세 사람이나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었다. 아버지 휘 만근(萬謹)께서는 정유년(1477, 성종 8)에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해주 오씨(海州吳氏)에게 장가들어 성화(成化) 기해년(1479, 성종 10) 2월 2일에 복주(福州) 임하현(臨河縣) 천전리(川前里)에 있는 집에서 할아버지를 낳았다.
할아버지께서는 타고나신 천품(天稟)이 청렴하고 개결하여 주고 받음에 있어서 반드시 살펴서 하였고, 향당(鄕黨)에서 처신함에 있어서는 삼가고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성스러워서 향당 사람들이 모두 착한 사람이라고 기리었다.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 일을 아주 잘 조처하였는데, 조비(祖妣)이신 단양 신씨(丹陽申氏)께서도 능히 부덕(婦德)으로 짝이 되었다. 그리하여 안팎에서 근검 절약하였으므로 가도(家道)가 이에 이루어졌다.
처음 하상(河上)에다가 집을 지을 적에 청사(聽事)를 크게 하고 뜰과 행랑을 넓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손들이 번성하여 당우(堂宇)에 꽉 들어차게 되었다. 그리하여 매번 경조사(慶弔事)가 있을 때마다 주인과 빈객의 자리가 각각 정해진 바가 있었으니, 사람들이 그제서야 두 분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항상 이르기를, “문호(門戶)의 흥성함과 쇠퇴함은 자손들의 현부(賢否)에 달려 있는 법이며, 자손들의 현부는 그 책임이 부형(父兄)에게 있다. 우리 가문은 조상들께서 경사를 쌓은 덕분에 대대로 사대부 집안이 되었는데, 가문의 명성을 떨치지 못하고 갑자기 이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오늘날의 책임이 나에게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때 마침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고호(古號)임)의 권공 간(權公幹)께서 우리 큰고모할머니의 배필이 되었는데, 평소에 학행(學行)이 저명하였다. 이에 드디어 우리 아버지에게 명하여 권공을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였는데, 아버지께서는 능히 그분의 학문을 잘 전수받았다. 우리 형제들이 가정에서 훈육을 받아 조금이나마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할아버지께서 자손들에게 훌륭한 계책을 남겨 주신 덕분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성품이 고상하여 시냇물과 바윗돌을 좋아하였다. 이에 만년에 물가에 정자를 하나 지어 놓고는 명절 때가 되면 반드시 벗들을 불러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었으며, 가끔 쓸쓸하게 홀로 가서 즐기시다가 돌아올 줄도 잊곤 하였다. 나이 72세 때 병으로 인해 집에서 졸하니, 그해는 바로 가정(嘉靖) 경술년(1550, 명종 5) 7월 26일이다. 그해 아무 달 아무 날에 현(縣)의 서북쪽에 있는 비리곡(飛鯉谷) 태좌 진향(兌坐震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었다. 부인께서는 할아버지보다 11년 먼저 졸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같은 무덤에 모시었다.
공(公)께서는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우리 아버지로 휘가 진(璡)이며, 을유년(1525, 중종 20)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차남은 김정(金珽)으로 참봉에 특별히 제수되었는데, 이는 효성이 있어서 표창받은 것이다. 삼남은 김수(金璲)이다. 장녀는 충의위(忠義衛) 이극필(李克弼)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진성 이씨(眞城李氏)인 이희안(李希顔)에게 시집갔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좌정승(左政丞) 민제(閔霽)의 4대손인 민세경(閔世卿)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김극일(金克一)로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 1)의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지냈다. 차남은 김수일(金守一)로 을묘년(1555, 명종 10)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삼남은 김명일(金明一)로 갑자년(1564, 명종 19)에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고 말았다. 사남은 김성일(金誠一)로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지냈다. 오남은 김복일(金復一)로 성균관(成均館)에 분관(分館)되어 관직에 임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장녀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인 유성(柳城)에게 시집갔는데, 일찍 과부가 되었다가 이어 죽고 말았다. 차녀는 진성 이씨(眞城李氏)인 이봉춘(李逢春)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문화 유씨인 유란(柳瀾)에게 시집갔다.
참봉을 지낸 김정(金珽)은 영가 권씨(永嘉權氏)에게 장가들었다. 김수(金璲)는 감천 문씨(甘泉文氏)에게 장가들어 3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김협일(金協一)이고, 차남은 김지일(金至一)이며, 삼남은 아직 어리다. 장녀는 우석수(禹錫壽)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황식(黃式)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충의위(忠義衛)를 지낸 이극필(李克弼)은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이 이수(李遂)이다. 이희안(李希顔)은 2남 5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이정회(李庭檜)이고, 차남은 이정백(李庭柏)이다. 장녀는 권뢰(權牢)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심(柳潯)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권의중(權義中)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박원준(朴元俊)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할아버지의 내외 여러 손자와 증손자는 모두 47인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주역에선 여경을 찬양하였고 / 易贊餘慶
서경에선 유곤을 찬미하였네 / 書美裕昆
덕으로써 후손에게 전하였으니 / 流光以德
뿌리로 말미암아 잎 무성하네 / 葉茂由根
아아 나의 할아버지 그분께서는 / 嗚呼我祖
실로 능히 그렇게 하시었도다 / 寔克以之
첨사공이 가문을 처음 열으며 / 詹事濬源
복야공이 기반을 이어받았네 / 僕射承基
감문공 거친 다음 내윤공 있고 / □□內尹
좌사공 거친 다음 수부공 있네 / 左司水部
오대토록 고려의 조정 안에서 / 五代麗庭
그 영광이 줄줄이 이어졌다네 / 承光接武
날래고 굳세었던 장군께서는 / 矯矯將軍
간성 같은 본조의 장군이었고 / 干城本朝
시원스레 훤하였던 현감공께선 / 憲憲縣宰
수령 칠조 베푼 치적 드러났었지 / 政著七條
지원공은 절개를 떨쳐일어나 / 知院奮節
옥당에서 높다라니 날아올랐지 / 翶翔玉堂
그때 마침 나라에 일이 많아서 / 適時多事
벼슬 자리 내던지고 시골로 갔지 / 賦歸柴桑
그 다음의 진사공 대에 미쳐서 / 逮于進士
이분께서 할아버지 낳으셨다네 / 是生王考
두 대 동안 덕 숨긴 채 지내었으니 / 二世隱德
그에 따른 복이 크게 일어났다네 / 將大厥祚
어진 행실 하는 것이 영예가 되고 / 爲仁是榮
탐하지 않는 것이 보배가 됐지 / 不貪惟寶
녹봉 받지 않았어도 강녕하였고 / 靡祿而康
관작이 없었어도 존경받았지 / 匪爵而尊
오로지 어버이께 효도 다하여 / 惟孝于親
자손에게 훌륭한 계책 남겼지 / 克詒于孫
청백으로 가문에 유풍 전하고 / 淸白遺家
시례 풍조 집안에 전해 주었지 / 詩禮傳門
자손들이 대단히 번성하여서 / 振振子姓
가문 명성 수립할 수가 있었지 / 庶幾有立
푸른 연꽃 한 꼭지에 나란히 나고 / 靑蓮竝蔕
단계에 세 사람이 급제하였지 / 丹桂三馥
자식들이 잘났던 탓이 아니라 / 匪爾之良
할아버지 덕분에 그리 된 거지 / 惟乃祖德
집안에 경사스런 일이 있음이 / 門戶之慶
지금부터 더욱더 많아지리라 / 從今益延
울창한 숲 우거진 서쪽 산 보니 / 鬱彼西岑
잉어 못 물가에 자리해 있네 / 濱于鯉淵
아무 아무 시내와 아무 아무 산 / 某水某丘
모두 다 그 앞에 조아려 있네 / 咸在其前
옛날에 노니시고 쉬시던 곳에 / 昔焉游息
지금은 혼령께서 오르내리리 / 今也降陟
천 년 만년 세월이 흐르더라도 / 千秋萬歲
길이길이 무덤 속서 편히 계시리 / 永安封域
先祖考秉節校尉府君墓碣銘乙亥 학봉 찬
王父府君。諱禮範。字國憲。其先新羅宗姓也。九代祖諱龍庇公。仕高麗。官至太子詹事。始籍于聞韶。以有功德於民。邑人至今俎豆之。八代祖諱宜。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七代祖諱瑞之。朝顯大夫。內盈少尹。六代祖諱台權。奉翊大大。文睿府左司尹。五代祖諱居斗。奉翊大夫。工曹典書。高祖諱洊。進禮島都萬戶。曾祖諱永命。新寧縣監。祖諱漢啓。副知承文院事。仕魯山朝。論思經幄。秉直薇垣。珪璋聞望。藉甚朝右。逮時事一變。乞外南歸。病不復起。時弟漢哲, 姊壻鄭綸。相繼登第。桂林三枝。世以爲榮。考諱萬謹。丁酉進士。聘海州吳氏。以成化己亥二月初二日。生府君于福州臨河縣之川前里第。府君天資廉介。取與必審。處鄕謹事親孝。鄕黨推爲善人。治家甚幹。祖妣丹陽申氏。又克配以德。內外勤約。家道乃成。初起第於河上。必大其廳事。拓其庭廡。未幾子孫蕃碩。充衍堂宇。每慶弔有事。主阼賓席。各有其位。人始服其先見。嘗謂門戶之興替。係子孫賢否。子孫賢否。其責在父兄。吾門承祖先積慶。世爲冠冤之胄。而家聲不振。遽至於此今日之責。顧不當在我耶。適永嘉權公幹。來配我伯祖姑。學行素著。遂命我大人往師之。大人克傳其學。吾兄弟承庭訓。粗有成。無非詒燕之餘也。性雅愛泉石。晩年作亭臨水。佳辰令節。必命侶觴詠。或時翛然獨往。樂而忘歸焉。年七十二。以病卒于第。實嘉靖庚戌七月二十六日也。是年月日。堋于縣西北飛鯉谷兌坐震向之原。夫人。先府君十一年而卒。至是同壟焉。公草本。無公字。生三男二女。長我大人諱璡。乙酉生員。次珽。特拜參奉。褒孝也。次璲。女長適忠義衛李克弼。次適眞城李希顔。大人娶左政丞閔霽四代孫世卿之女。生五男三女。長克一。登嘉靖丙午科。前星州牧使。次守一。乙卯生員。次明一。甲子生員。早歿。次誠一。前弘文館修撰。次復一。分成均館待次。女長適文化난001柳城。早寡。繼歿毁也。次適眞城李逢春。次適文化柳瀾。參奉娶永嘉權氏。璲娶甘泉文氏。生三男四女。長協一。次至一。次幼。女長適禹錫壽。次適黃式。餘幼。忠義生一男遂。希顔生二男五女。長庭檜。次庭柏。女長適權牢。次適柳潯。次適權義中。次適朴元俊。餘幼。內外諸孫曾孫男女。凡四十七人。銘曰。
易贊餘慶。書美裕昆。流光以德。葉茂由根。嗚呼我祖。寔克以之。詹事濬源。僕射承基。缺二字。一本。監門。內尹。左司水部。五代麗庭。承光接武。矯矯將軍。干城本朝。憲憲縣宰。政著七條。知院奮節。翺翔玉堂。適時多事。賦歸柴桑。逮于進士。是生王考。二世隱德。將大厥祚。爲仁是榮。不貪惟寶。靡祿而康。匪爵而尊。惟孝于親。克詒于孫。淸白遺家。詩禮傳門。振振子姓。庶幾有立。靑蓮竝蔕。丹桂三馥。匪爾之良。惟乃祖德。門戶之慶。從今益延。鬱彼西岑。濱于鯉淵。某水某丘。咸在其前。昔焉游息。今也降陟。千秋萬歲。永安封域。
돌아가신 할머니 의인(宜人) 영해 신씨(寧海申氏)의 묘갈명 학봉 찬
할머니의 성은 신씨(申氏)로, 단양(丹陽)의 명문 집안이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서 크게 드러난 사람으로는 태복시 정(太僕寺正)을 지낸 휘 득청(得淸)이 있는데, 과거에 급제해 현달하여 문호(門戶)를 크게 키웠다. 그의 아들은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휘 운(芸)으로, 이분이 바로 할머니의 고조이다. 강계 교도(江界敎導)를 지낸 휘 영석(永錫)은 증조이다.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를 지낸 휘 지(祉)가 할아버지인데, 마음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행실이 당대에 높았다. 벽동 군수(碧潼郡守)를 지낸 휘 명창(命昌)이 아버지이고, 영양 남씨(英陽南氏)로 종사랑(從仕郞)을 지낸 남정귀(南貞貴)의 딸이 어머니이다.
할머니께서는 세족(世族)의 집안에서 태어나 덕문(德門)의 집안으로 시집왔는데, 시집오기 전에 집에서는 정숙(貞淑)한 덕으로 소문이 났고, 시집와서는 엄숙하고 화목한 아름다움이 드러났다. 시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성과 정성을 다하였고, 동서들과는 화목하게 지내었다. 제미(齊眉)함에 있어서는 형포(荊布)의 공경을 다하였고, 중궤(中饋)함에 있어서는 술과 음식의 마땅함이 있었다. 제수(祭需)를 조촐하고 깨끗하게 장만하여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무격(巫覡)에 빠져 음란하게 하지 않았고, 노복들을 은혜로 보살펴서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인자하고 온화하여서 상대방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으니, 이는 대개 그분의 천성이 그런 것이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시아버지 진사공(進士公)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 며느리는 예(禮)를 알고 효(孝)를 아니 참으로 영녀(令女)이다.” 하였으며, 식자(識者)들은 모두 말하기를, “집안에 덕스러운 부인이 있으니 김씨 가문은 흥할 것이다.” 하였다.
아아,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공명정대한 자질을 가지시고 맑은 덕으로 성취하였고, 할머니께서는 유순하고도 아름다운 의범(懿範)으로써 부인의 법도를 닦았다. 그리하여 내외가 아름다운 짝이 되어 조상들의 제사를 이었으니, 문호가 흥성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풍수(風樹)가 그치지 않아 오래 사시지 못한 탓에 덕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하였는바, 돌아가신 지가 어느 사이에 30여 년이나 되었다. 아, 슬프도다.
할머니께서는 성화(成化) 을미년(1475, 성종 6) 12월 16일에 태어나시어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 35) 12월 23일에 돌아가셨다. 다음해 아무 달 아무 날에 현(縣)의 서북쪽에 있는 산의 비리곡(飛鯉谷)에 장사 지내었는데, 이곳은 새로 묏자리를 잡은 곳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부인보다 11년 뒤에 돌아가셨는데, 부인의 묘에서 뒤쪽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안장하였으니, 실로 같은 무덤인 것이다.
할아버지의 휘(諱)와 자손들의 세계(世系)는 할아버지의 묘비에 갖추어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쓰지 않으니, 이는 다시금 고(告)하는 것이 두려워서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단양이라 신씨의 사대부 집안 / 丹陽之冑
대대로 나라의 대성 되었네 / 世爲大姓
할아버지 부사공 그분께서는 / 在祖副使
저와 같이 아름다운 행실 있었네 / 有此景行
그 어짊과 효성에 신복(信服)되어서 / 仁孝潛孚
착한 사람 태어나게 하시었다네 / 淑人代生
아름답다 우리의 왕부께서는 / 懿我王父
오로지 덕만을 행하시었네 / 惟德之行
어머니의 교화를 이어받아서 / 承于陰敎
부녀자의 예법을 법받으셨네 / 式是壺儀
시부모를 섬김에 순종한 것은 / 舅姑之順
친부모를 섬기던 효 옮긴 것이고 / 孝之移也
동서들과 화락하게 지낸 행실은 / 妯娌之歡
형제 자매 우애를 미룬 것이네 / 悌之推兮
남편인 할아버지 섬기면서는 / 事我君子
부부간에 손님처럼 공경하였고 / 饁婦其賓
우리 집안 제사를 모시면서는 / 佐我蘋蘩
주녀처럼 물가에서 마름 뜯었네 / 周女于濱
은혜는 종들에게 스며들었고 / 恩濡臧獲
교화는 종족에게 두루 미쳤네 / 化及宗族
자애롭고 유순하며 온화하였고 / 慈柔惠和
단정하고 똑똑하며 정숙하였네 / 端明令淑
우리 집안 자손에게 덕 남겼으니 / 詒我子孫
그에 대한 복받음이 끝이 없으리 / 綏祿無疆
그 덕에 대한 보답 못 누렸으니 / 德不享報
그 은혜 그리는 맘 망망도 하네 / 風樹茫茫
무덤 자리 살피어서 자리 정하니 / 爰卜其兆
산 저쪽 서쪽의 언덕이로다 / 于彼西岡
생각건대 할아버지 계신 산소가 / 惟我祖墓
실로 그 산소 곁에 임하여 있네 / 實臨其塋
무덤 같이하잔 맹서 이루었으니 / 誓成同穴
신령께선 반드시 편안하시리 / 必神所寧
先祖妣宜人寧海申氏墓碣銘 학봉 찬
夫人姓申氏。丹陽望族也。至麗季。其著者。太僕正諱得淸。登第顯榮。克大其門。其子曰中郞將諱芸。實高祖。江界敎導諱永錫。實曾祖。義盈庫副使諱祉。實祖。孝友因心。行高當世。碧潼郡守諱命昌。實考。英陽南氏從仕貞貴之女。實妣。夫人生于世族。配于德門。在室而貞淑之德聞。移天而肅雍之美著。事舅姑致孝謹。接妯娌惇和睦。齊眉盡荊布之敬。中饋有酒食之宜。蠲潔蘋蘩。祀不淫於巫覡。恩恤僕隸。怒不形於容色。仁慈惠和。與物無忤。蓋其天性然也。先舅進士公嘗曰。此婦知禮知孝。眞令女也。人之識者咸曰。門有德母。金氏其興乎。嗚呼。我王父以亮直之資。濟以淸德。夫人用柔嘉之懿。修其壺儀。內外匹休。以承烝嘗。門戶之興。不其宜歟。風樹不止。壽未克遐。德不享報。霜露之感。忽焉三紀。嗚呼痛哉。夫人生以成化乙未十二月十六日。卒以嘉靖庚子十二月二十三日。葬以翌年某月日。原曰乾巽。谷曰飛鯉。卜新兆也。王父公後夫人十一年而終。厝于墓後若干步。實同壟也。恭惟王父之諱字。子孫之世系。備于大墓。不書。懼再告也。銘曰。
丹陽之胄。世爲大姓。在祖副使。有此景行。仁孝潛孚。淑人代生。懿我王父。草本。母。惟德之行。承于陰敎。式是壺儀。舅姑之順。孝之移也。妯娌之歡。悌之推兮。事我君子。饁婦其賓。佐我蘋蘩。周女于濱。恩濡臧獲。化及宗族。慈柔惠和。端明令淑。詒我子孫。綏祿無疆。德不享報。風樹茫茫。爰卜其兆。于彼西岡。惟我祖墓。實臨其塋。誓成同穴。必神一本。神心。所寧。
0 김진(金璡) 1500년(연산군 6, 경신)∼1580년(선조 13, 경진).
자는 영중(瑩仲), 호는 청계(靑溪). 아버지는 병절교위 예범(禮範)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기묘명유(己卯名儒)들을 찾아 가르침을 배워 견문을 넓히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또한, 음사(淫祠: 邪神을 祭祀하는 사당)나 귀신은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멀리 하매 무당이 그의 마을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을 남쪽 산에 염흥방(廉興邦)의 사당이 있었는데, 그는 “네가 전조(前朝: 고려)의 간신으로서 죽었어도 남은 죄가 있는 터에 어찌 너의 귀신을 용납하여 백성들을 미혹(迷惑)하게 하랴.” 하고 이를 헐어버렸다.
선생은 다섯 아들에게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道)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으니,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고, 만약 소인으로 산다면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라고 훈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 되었다.
* 성균관 생원을 지낸 선고 부군(先考府君)의 행장 학봉 찬
돌아가신 아버지의 휘는 진(璡)이고, 자는 영중(瑩仲)이며, 성씨는 김씨(金氏)로 의성인(義城人)이다. 고려조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태자 첨사(太子詹事)에 추증된 휘 용비(龍庇)가 그 시조이다.
고조의 휘는 영명(永命)으로 신령 현감(新寧縣監)을 지냈으며, 증조의 휘는 한계(漢啓)로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를 지냈으며, 할아버지의 휘는 만근(萬謹)으로 성균관 진사를 지냈으며, 아버지의 휘는 예범(禮範)으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영해 신씨(寧海申氏)이다.
몇 대토록 안동부(安東府)에서 살다가 진사공 때에 이르러 비로소 임하현(臨河縣) 천전리(川前里)로 이사하였다. 아버지께서는 홍치(弘治) 13년 경신년(1500, 연산군 6) 2월 3일 정해에 태어나시어 만력(萬曆) 8년 경진년(1580, 선조 13) 윤4월 23일 신유에 졸하시었다. 이해 7월 29일 갑신에 장사 지내었는데, 향년은 81세였다.
아버지께서는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에 봉해진 민제(閔霽)의 5대손으로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민세경(閔世卿)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버지보다 34년 먼저 졸하였다.
장남 김극일(金克一)은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밀양 부사(密陽府使)를 지냈다. 차남 김수일(金守一)은 을묘년(1555, 명종 10)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삼남 김명일(金明一)은 갑자년(1564, 명종 19)에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고 말았다. 사남 김성일(金誠一)은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 1)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 되었다. 오남 김복일(金復一)은 경오년(1570, 선조 3)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이 되었다.
장녀는 전주 류씨(全州柳氏)인 류성(柳城)에게 시집갔는데 일찍 죽었다. 차녀는 권지 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 이봉춘(李逢春)에게 시집갔다. 삼녀는 문화 유씨인 유란(柳瀾)에게 시집갔다. 서얼 아들은 김연일(金衍一)이고, 서얼 딸은 2명이며, 내외의 여러 후손은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이다.
아버지께서는 태어나심에 아주 특출 나서 얼굴 모습이 기이하였다. 이에 할아버지 진사공께서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소자(小字)를 문회(文會)라고 하라고 명하고는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것이기에 이름을 지으면서 그 뜻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다. 나이 16세 때 비로소 고모할머니의 남편인 청부(靑鳧)의 권공 간(權公幹)에게 나아가 시례(詩禮)의 학문을 수학하였다. 권공께서는 집안에서의 행실을 아주 잘 닦았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방도가 있어 모두 효제(孝悌)의 도리로 가르치고 인도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이 모두를 자신을 비우고 공손하게 받아들여 마음속으로 감복하여 힘써 실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몇 해 만에 학업이 크게 진보되어 같은 동류들이 괄목상대하였다.
우리 외할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뜻과 행실을 살펴보고는 이에 동상(東床)의 선택을 하였다. 외할아버지의 동생으로 현량과(賢良科) 출신인 민세정(閔世貞)은 기묘년의 명유(名儒)였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에게 나아가 수학하면서 당대 여러 군자들의 논설을 들었는데, 이로부터 견문이 날로 넓어지고 문예(文藝) 역시 통달하게 되었다. 을묘년(1525, 중종 20)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이어 성균관에 유학(遊學)하면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학문을 하는 교우를 맺으니, 한때의 명사들이 모두들 벗으로 허여하였다.
일찍이 호남(湖南) 최운수(崔雲秀)와 함께 경산(京山)의 사자암(獅子庵)에서 글을 읽었는데, 최운수가 복통을 앓아 밤새도록 측간을 들락거렸다. 산에 맹수가 많았으므로 함께 측간에 가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때마다 함께 가면서 열흘이 지나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느 날 밤에 마구 퍼붓는 소낙비 속으로 최운수를 부축하여 나가서는 담장 사이에 의지해 서 있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절 뒤편 처마 쪽에서 갑자기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땅이 울렸다. 아버지께서는 최운수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고 여기고는 갑자기 측간 안으로 뛰어들면서 소리쳐 불렀다. 그러자 최운수가 말하기를, “나도 역시 그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면서, 오랫동안 서로 놀라 마주 보면서 탄복하였다. 최운수가 말하기를, “그대에게는 부모님이 계시다. 내가 과연 호랑이를 만나서 그대와 함께 죽었다면 몸을 허락한 후회가 없었겠는가?” 하니, 아버지께서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천 리 먼 곳에서 함께 나그네가 되었으니, 창졸간에 화란을 당하게 되면 의리상 마땅히 서로 구해 주어야 한다. 선유(先儒)가 ‘죽는 것으로는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니다.” 하였다. 최운수의 복통이 한 달여 만에 나았는데, 아버지의 높은 의리에 감동하여 사람들을 만날 적마다 착한 행실을 이야기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기었다.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폐한 채 임하현(臨河縣)의 부암(傅巖)에 집을 지은 다음 온 가족을 거느리고 가서 살았다. 그리고는 조석으로 부모님이 계신 곳에 가서 문안하느라 강을 건너 왕래하였는데,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치더라도 폐하지 않았다. 혹 다른 곳에 출타하였을 경우에는 돌아오면서 반드시 부모님이 계신 곳에 먼저 들른 다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항상 집안이 가난하여 봉양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탄식하여 아무리 하찮은 음식이라도 반드시 먼저 부모님께 보내 드렸는데,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부모님께서 드셨다고 말하면 몹시 기뻐하였다.
부암(傅巖)의 곁에 서당(書堂) 한 칸을 지어 놓고는 자제(子弟)들과 향당의 몽매한 선비들을 모아 학령(學令)을 세우고 과정(課程)을 엄하게 하여 곡진하게 가르치면서 싫증을 내거나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수십 년 동안 끊이지 않았다. 이에 학도들 가운데 흥기한 사람이 많아서 글 읽는 소리가 온 경내에 들리었다.
경자년(1540, 중종 35)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경술년(1550, 명종 5)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염습하고 장사 지내며 제전(祭奠)을 올림에 있어서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따라서 하기를 힘썼다. 중형(仲兄)과 함께 집상(執喪)하면서 아주 삼가서 하였고, 3년 동안 여묘 살이를 하면서는 종시토록 해이하게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특히 제사를 삼가서 지냈는데, 재계(齋戒)하는 3일 동안에는 안팎을 엄하게 신칙해서 감히 시끄럽게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제사에 임해서는 엄숙하고 공경스럽게 하여 다른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는 매번 자손들에게 가르치기를, “집안이 흥성하느냐 몰락하느냐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는 데에서 말미암는 법이다. 어찌 제사를 공경히 지내지 않으면서 복을 누리는 경우가 있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세속 사람들이 무당을 숭상하는 것을 통분하여 무당이 집안으로 들어올라치면 엄하게 꾸짖어 내쫓으면서 마치 자신의 몸이 더럽혀진 것처럼 하였다. 이에 당시의 크고 작은 무당들이 아버지의 이름만 들어도 모두 벌벌 떨면서 아버지가 살고 있는 마을에는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임하현의 남쪽 산 높은 곳에 신당(神堂)이 하나 있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고려의 염흥방(廉興邦)이 그 신당의 신이라고 하였다. 무당의 무리들이 이에 의지하여 요사한 짓을 하면서 풍속을 무너뜨림이 날이 갈수록 심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그의 죄를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염흥방 너는 고려조의 큰 간신으로 죽어도 남은 죄가 있어서 천지가 용납하지 않는 바이다. 그 신(神)은 이미 죽었고 그 귀(鬼)는 신령하지 않다. 그런데 어찌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우리 백성들을 미혹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허물어 버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완구(宛丘)의 풍속(風俗)이 이로 인하여 조금은 고쳐지게 되었다.
또 도적의 괴수가 있어서 산골짜기에 숨어 있으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감히 대들지 못하였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용감하게 관가에 고발하여 토벌해 제거하고는 말하기를, “옛날에 양두사(兩頭蛇)를 쳐 죽여 파묻고서도 오히려 음덕(陰德)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 하물며 이 도적의 환난이 어찌 머리가 두 개인 뱀에 그치겠는가.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에 대한 보답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는 슬하에 있던 어린 자녀들이 모두 8남매나 되었는데, 대부분 칠팔 세가 되었거나 강보에 싸여 있는 상태였다. 이에 아버지께서 온갖 고생을 다해 기르면서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한밤중에 양쪽으로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있으면 어린아이가 어미젖을 찾았는데, 그 소리가 아주 애처로웠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는데, 비록 젖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젖꼭지를 빨면서 울음을 그쳤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말씀하실 적마다 좌우에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들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일찍이 세상 사람들이 첩에게 미혹되어서 적자(嫡子)를 해치는 것을 탄식하여 반드시 성격이 온순한 사람을 골라서 첩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날마다 성심껏 보살피고 길러 자기 소생과 같이 사랑하는 의리를 반복해서 가르쳤다. 만약 이를 어기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엄한 말로 꾸짖어 뉘우쳐 고친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아버지께서 대들보에 있는 제비집을 보니 주둥이가 노란 제비새끼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제비 한 마리가 죽고 남은 제비 한 마리가 새끼를 기르고 있었다. 얼마 뒤에 수놈이 다른 암놈을 한 마리 데리고 와 두 마리가 함께 제비집으로 들어갔는데, 제비새끼들이 모두 먹이를 달라고 입을 벌리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버지께서 가서 살펴보니, 새끼들이 모두 부리에 쪼여져 있었다. 이는 대개 뒤에 데리고 들어온 제비가 새끼들을 해친 것이었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동물들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이것은 하늘이 나를 경계시킨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시 한 수를 지어 좌우에 걸어 놓고서 잠계(箴戒)의 뜻을 부쳤다.
그러자 제모(諸母)들이 모두 위엄스러운 훈계에 감복하여 우리 남매들을 보호하고 기르기를 더욱더 부지런히 하면서 마치 미처 하지 못할 듯이 하였다. 그 덕분에 우리 여러 남매들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도 수화(水火)나 기한(飢寒)의 걱정을 면하고 오늘날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하늘처럼 가없는 그 은덕은 우리들을 낳아 주신 데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다.
자애롭게 길러 주신 것이 이미 지극하였는데, 가르침 역시 엄격하여 아무리 나이가 어린 자식이라 하더라도 항상 학당(學堂)에서 공부하게 하였으며, 마을로 나가서 장사를 치르거나 물건을 사고파는 놀이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글을 읽는 여가에는 가끔씩 앞으로 와 앉도록 한 다음 나직한 말로 옛사람들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일일이 들어서 말씀하시면서 자세하고도 곡진하게 가르쳐 주셨다. 여러 자식들이 불초하여 가정에서 받은 가르침을 제대로 다 봉행하지는 못하였으나, 과거에 급제해서 조정의 녹봉을 받고 있는 것은 실로 남은 경사가 미친 바이다.
아버지께서는 형제들 사이의 우애가 아주 도타웠다. 할아버지께서 미처 재산을 나누어 주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아버지께서 마지기 수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었는데, 몹시 공평하여서 제매(弟妹)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모두 말로만 나누고 문서로 작성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대개 말로 문서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에서는 몇 대가 내려오도록 계권(契券)이 없는데도 한 번도 재산 문제로 서로 다투는 일이 없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일찍 홀로 되어 의지할 곳이 없는 친정 조카 민추(閔樞)가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데리고 와서는 여러 자식들과 함께 가르치고 길러 마침내 장성하게 되었다. 작은아버지가 자식이 많아 제때에 시집 장가를 들이지 못하자 재산을 내어 혼수를 마련해 세 딸을 시집보내 주었다. 막내고모의 병이 위독해져 창졸간에 장사 준비를 못할 것을 염려하여 목수를 택해 관을 만들어서 보내 주었으며, 돌아가심에 미쳐서는 장사 치르는 데 관한 모든 일을 온 힘을 다해 주선하여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두들 칭찬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여 자녀들이 가난하게 살까 염려하여, 뻐꾸기의 은혜가 늙어서도 쇠해지지 않았다. 나누어 주는 것의 많고 적음은 빈부의 차이를 가지고 기준으로 삼았는데, 이 역시 말로 나누어 주고 문서로 작성하지 않았다.
말년에 영해(寧海)의 청기현(靑杞縣)을 유람하고는 그곳 산골짜기가 그윽하고도 한적하며, 또 낚시질하거나 밭갈이하는 즐거움이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곳으로 이사해 살면서 항상 종들에게 농사일을 권장하는 것을 일삼았다. 이에 곡식을 수확하는 것이 많았는데, 이를 쌓아두지 않고 자손이나 종족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여러 아들들이 혹 노년에 너무 수고로이 일한다고 간하면, 아버지께서는 “농사는 백성들의 직업이다. 백성이면서 농사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자성(粢盛)을 마련해 올리고 처자식을 먹여 기르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비록 뜻밖의 말이 있더라도 내가 내 힘으로 먹는데,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기력이 강건하여서 말년에도 활쏘기를 좋아하였다. 매번 좋은 명절을 만나면 시골의 벗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과 더불어 농사짓는 법에 대해 담론하고 고통스러운 바를 물었다. 술안주를 마련해 술을 마심에 있어서는 오직 진솔하게 하기를 힘썼다. 술이 몇 순배 돌면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먼저 활 쏠 채비를 차리고는 함께 활 쏘기할 짝을 불러서 나란히 섰는데, 동안(童顔)에 학발(鶴髮)이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과 같았다. 활을 단단하게 잡은 모습이 생기가 있었으며, 활을 쏘면 반드시 표적을 맞추었다. 일찍이 이에 대해 지은 시가 한 수 있어서 “팔십 먹은 늙은이가 과녁 맞춤 다투니, 북소리 둥둥 울려 마른 창자 동케 하네.[八十老翁爭中六 鼓聲雷動起枯腸]” 하였는데, 듣는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싫어함이 천성에서 나와 다른 사람의 선행을 들으면 반드시 칭찬하여 천양하였고, 악행을 들으면 반드시 관에 알려서 치죄하였다. 이 때문에 자못 착하지 않은 자들에게 질시를 받았으나, 역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바닷가 고을의 풍속이 무뢰 하여서 양갓집의 자제들이 어려서는 배울 줄을 모르고 장성해서는 더욱더 게으름을 부렸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현의 인근에 통문(通文)을 돌려 서당(書堂)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부사(府使)로 있던 양사기(楊士奇)가 상량문(上樑文)을 지었으며, 관가의 창고에 있던 쓰고 남은 곡식을 내어 공사하는 비용에 보태었다. 현의 사람들이 이로부터 비로소 글을 배울 줄을 알아 여러 자제들이 사적(仕籍)에 올랐다.
아버지께서는 일찍이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도는 정성을 쌓아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우선이다. 만약 믿음을 받지 못하는데 한갓 말만을 숭상한다면 자기를 비방한다는 의심을 면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리고 신하 된 자는 차라리 옥처럼 부서질지언정 자신의 목숨이나 보전하려 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여기겠으나, 소인 노릇을 하며 산다면 나는 죽은 것처럼 여길 것이다.” 하였으니, 군자와 소인을 분별함이 이와 같이 엄격하였다.
매번 권공(權公)께서 가르쳐 주신 은혜를 생각하여, 여러 아들들이 현달하는 것을 보면 문득 “너희들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아느냐? 참으로 나의 스승께서 나를 가르쳐 주신 수고가 없었다면 너희들은 이미 군오(軍伍)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내가 삼생(三生)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다면 지하의 영령(英靈)들을 뵐 수가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이 점을 잘 알라.” 하였다.
맏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매번 제사(祭祀)를 잇는 것을 중하게 여겨 둘째 형의 아들 김철(金澈)을 후사로 삼게 하였다. 그런 다음 청기현(靑杞縣)의 별업(別業)에 딸려 있는 제전(祭田)은 영세토록 나누지 말도록 유명(遺命)을 내렸다. 그리고 장사 치르는 도구는 모두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도록 하였고, 가난한 자녀들은 유밀과상(油蜜果床)을 쓰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중자(衆子)들이 종가(宗家)를 공경하는 의리를 밝히고, 서얼이 적자를 능멸하는 폐단을 경계하였는데, 말한 바는 모두가 치명(治命)이었다.
감기에 걸리자 임하(臨河)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이는 대개 처음의 뜻을 잊지 못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임종하시면서 말하기를, “내 나이가 이미 아주 많은데, 하늘이 나에게 누리게 해 준 것이 많다. 그러니 다시 무엇을 더 구하겠는가.” 하면서, 기쁜 기색을 띠고 슬프게 여기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면서 시골에서 살아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탓에, 비록 은덕(隱德)이 있기는 하였지만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는 것이 아버지에게 있어서 더하거나 덜할 것이 없지만, 자식 된 입장에서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저절로 그만두지 못하는 바가 있다. 만약 지나치게 추켜세워서 비난을 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선현들께서 이미 경계하였는바, 여러 아들들이 비록 형편없기는 하지만 역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감히 피눈물을 쏟으면서 행장을 지어 아뢰는 바이다.
先考成均生員府君行狀 학봉 선생 찬
先府君諱璡。字瑩仲。姓金氏。義城人。高麗贈銀靑光祿大夫, 尙書左僕射, 太子詹事諱龍庇公。其始祖也。高祖諱永命。新寧縣監。曾祖諱漢啓。副知承文院事。祖諱萬謹。成均進士。考諱禮範。秉節校尉。妣。寧海申氏。數世居安東府。進士公始移臨河縣川前里。府君生于弘治十三年庚申二月初三日丁亥。卒于萬曆八年庚辰閏四月二十三日辛酉。葬于是年七月二十九日甲申。享年八十一。娶左議政驪興閔霽五代孫秉節校尉世卿之女。先府君三十四年而卒。男克一。登嘉靖丙午文科。前密陽府使。次守一。乙卯生員。次明一。甲子生員。早卒。次誠一。登隆慶戊辰文科。議政府舍人。次復一。登庚午文科。刑曹佐郞。女長適文化柳城。早歿。次適權知成均館學諭李逢春。次適文化柳瀾。庶男衍一。庶女二。內外諸孫男女若干人。府君生而岐嶷。狀貌異常。曾王父進士公。見而奇之。命小字以文會曰。此兒必興吾門。名其識也。年十六。始從伯姑壻靑鳧權公幹。受詩禮之學。權公家行甚修。敎人有方。其誘掖提撕者。無非孝悌之道。府君一皆虛已遜受。無不心服而力行之。數歲中。學業大進。儕輩刮目。我外祖府君察其志行。乃有東床之擇。外祖弟賢良科世貞公。己卯名儒也。府君又從之遊。得聞當世諸君子緖論。自是見聞日廣。文藝亦達。乙酉中司馬。仍遊學泮中。與河西金麟厚結爲同榻之友。一時名士。多稱許。嘗與湖南崔雲秀。讀書于京山之獅子庵。崔患河魚。達夜如廁。山多猛獸。人無將護者。府君十起必偕。浹旬無倦色。一日夜大雨如注。扶崔而出。倚立墻壁間。不覺入睡。寺後簷忽摧聲震地。府君以崔爲虎所攬。遽入廁呼之。則崔曰。吾亦以君爲死於虎矣。相與驚歎者久之。崔曰。君有父母。吾果遭虎。而君與之同死。則得無許身之悔耶。府君曰。吾二人。千里爲客。倉卒遇患。義當相救。先儒所謂不許以死者。非此之謂也。崔月餘乃瘳。感其高義。見人輒稱其善。聞者多之。早辭擧業。卜築于臨河之傅巖。挈家以居之。朝夕問安于父母之所。涉江來往。雖風雨不廢。或出遊從他。還必先父母之所。然後乃退。常以家貧闕養爲嘆。雖菽水菜羹。必先送之。使者還曰。進御云則喜。傅巖傍構書堂一區。聚子弟及鄕黨蒙士。立學令嚴課程。敎誨諄諄。不厭不倦。如是積數十年不輟。學徒多興起。絃誦之聲。聞於一境。庚子丁外艱。庚戌丁內艱。殮葬祭奠。務從朱文公家禮。與仲氏執喪甚謹。廬墓三年。終始不懈。平居尤謹於一本。平生謹於。祭祀。齊三日。戒飭內外。無敢喧譁。莅事嚴敬。人莫敢仰視。每敎子孫曰。人家興廢。必由祭祀。豈有祭祀不謹。而能享其福者乎。嘗憤世俗崇信巫覡之事。在門墻則嚴加麾斥。若將浼焉。當時大小巫。聞府君名。則莫不戰慄。府君所居之里。皆辭不入。有神堂在縣之南山高處。俗傳高麗廉興邦乃其神云。巫覡之徒。倚以爲妖。傷風敗俗。日以益甚。一日府君數其罪曰。汝以前朝巨奸。死有餘罪。天地之所不容。其神草本。身。已死。其鬼不靈。豈可使居高臨下。以惑吾民乎。卽令毁之。宛丘之俗。亦因此而小革焉。又有賊酋潛住山谷。殺越人于貨。人皆畏縮。莫敢誰何。府君挺身告官。討捕除之曰。昔擊兩頭蛇埋之。猶有陰德之報。況此賊患。豈止兩頭蛇而已乎。吾子孫必受其報矣。伯氏甫登第。而先妣違背。膝下諸雛凡八人。而多在髫齔襁褓中。府君辛勤撫鞠。靡所不至。夜則左右抱携。兒求母乳。其聲甚哀。府君自乳之。雖無甘液。兒輒嚥之止哭。府君每發此言。左右莫不嗚咽泣下。嘗嘆世人惑嬖害嫡。卜妾必畜其性度溫順者。日以誠心字育。愛同已出之義。反覆敎詔。若有違忤。則必嚴辭譴斥。竢悔改乃已。見梁燕乳雛。黃口滿巢。而一燕死。一燕獨乳。俄而雄更呼雌。雙飛入巢。黃口皆呀呀張口而墜。就視之則皆口棘焉。蓋後燕所毒也。府君愕然曰。物尙如此。況人乎。此天所警我也。卽作詩揭左右。以寓箴戒之意。諸母咸服威如之訓。視保益謹。猶恐不逮。諸雛雖弱齡失恃。而得免水火飢寒。以至今日。昊天罔極之德。非但生我而已。慈養旣至。而敎導亦嚴。雖幼少者。常令居業學堂。不得輒至閭巷間。習爲墦商之戲。讀書之暇。時或賜坐。從容歷擧古人嘉言善行。提耳而面命之。諸孤不肖。雖不能奉承庭訓。冒玷科選。竊祿于朝者。實餘慶所及也。兄弟之間。友愛彌篤。王父公未及傳家。府君計畝分田。極其均平。弟妹咸悅。皆從口分而不置契券。蓋以口當券也。故吾家歷數代無契券。而一無所爭焉。先妣有姪樞。早孤無依。府君提以歸。敎養同於諸子。竟至成立。季父多子女。嫁娶不能以時。出財辦裝。嫁遣三女。季姑病革。慮其倉卒無具。爲擇木治棺以送。及歿。送終諸事。極力營辦。鄕隣皆稱道之。家世淸寒。念子女貧窶。鳲鳩之恩。至老不衰。其給與多寡。以貧當爲率。亦皆口授而無券。晩年嘗遊寧海之靑杞縣。愛其山洞幽閒。且有耕釣之樂。遂移居。常以課奴勸農桑爲事。得穀雖多。亦不蓄。輒分諸子孫宗族之貧者。諸子或以暮年勤勞爲諫。乃曰。農。民職也。民而惰農。民之棄也。況粢盛之供。妻子之育。皆出於此。雖有意外之言。吾食吾力。庸何傷乎。氣力康健。晩而喜射。每遇佳辰令節。則招集山翁溪友。與之說桑麻問疾苦。黃鷄白酒。惟眞率是尙。酒數行。府君必先決拾。呼耦竝立。童顔鶴髮。望若神仙。審固躍如。發必中的。嘗有詩曰。八十老翁爭中六。鼓聲雷動起枯腸。聞者歎服。好善嫉惡。出於天性。聞人善行。則必稱美而揚之。惡行則必欲聞官而治罪。以故頗爲不善者所忌。而亦不屑意焉。海鄕無賴。良家子弟。幼不知學。長益偸惰。府君通于縣境。令刱立書堂。府使楊士奇爲撰上梁文。出官倉剩餘。以助其費。縣人自此始知學書。諸子通仕籍。嘗曰。事君之道。當以積誠見信爲先。若不見信。而徒言之爲尙。則其免謗己之疑者鮮矣。且爲人臣者。寧須玉碎。不宜瓦全。汝等爲君子而死。則吾視猶生也。爲小人而生。則吾視猶死也。其嚴君子小人之辨如此。每念權公敎誨之恩。見諸子榮顯。輒曰。汝知所以致此乎。苟非我師敎我之勤。汝等已編軍伍矣。我不能報三生之恩。無以見地下英靈。汝等其知之。伯兄無子。深念繼祀之重。以仲兄之子澈爲後。遺命以靑杞別業屬祭田。永世不得分。喪具皆從儉約。窮寒子女。不得用油蜜果床。明衆子敬宗之義。戒庶孼陵嫡之弊。所言皆治命也。及感疾。力欲返臨河舊居。蓋首丘初志也。臨終曰。吾年壽已極。天之餉我多矣。復何求哉。怡然不以爲慽焉。府君身居畎畝。名不顯於世。雖有隱德。人鮮克知之。嗚呼。世之知不知。雖無加損於府君。而人子顯親之心。自有所不能已者。若其溢美以取譏。則先賢已有戒。諸子雖無狀。亦不爲也。敢泣血具狀以聞。
선비(先妣) 민씨(閔氏)의 묘지 학봉 선생 찬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34년째 되는 해인 경진년(1580, 선조 13)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이에 여러 아들들이 어머니의 묘 앞에다 장사 지내고는 서로 더불어서 피눈물을 쏟으면서 말하기를, “효자는 후환을 염려함이 깊은 법이다. 장사를 지냄에 있어서는 반드시 지석(誌石)을 넣는 법인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에는 아직까지 지석이 없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아무리 어진 군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보고 무덤인 줄 알아서 도로 덮어 주겠는가.” 하였다. 이에 마침내 돌에 새겨서 무덤 안에 묻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생각건대, 민씨는 여흥(驪興)에서 흥성하였는데, 상의 봉어(尙衣奉御)를 지낸 민칭도(閔稱道)가 있어서 고려 초에 처음으로 벼슬하였다. 그 뒤로 가문이 극히 번성하여 정승 자리에 오르거나 문형(文衡)을 잡은 자들이 10여 대에 걸쳐서 나왔는데, 그들의 훈명(勳名)과 사업(事業)이 역사책에 많이 실려 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좌정승(左政丞)을 지내고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에 봉해진 휘 제(霽) 호 어은(漁隱)이 왕비(王妃)를 낳아 헌릉(獻陵 태종(太宗)의 묘호(廟號)임)의 배필이 되었다. 이분이 바로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니, 이로 말미암아 종손과 지손들이 백대토록 그 경사스러움을 받을 것이다. 헌릉께서 그 집에 여러 차례 행행(幸行)하여 시종하는 신하들에게 명해서 그 일을 노래하게 하였는데, 성석린(成石磷)의 시에 이른 바 ‘어은은 대문 안 깊은 곳에서 임금 타신 가마를 맞이하누나.[漁隱門深迎鳳輦]’라고 한 시가 그것이다.
어은공께서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은 민무질(閔無疾)로,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졌다. 여성군의 아들이 민촉(閔矗)으로, 아무 관직을 지냈는데, 이분이 어머니에게 증조가 된다. 할아버지는 아무 관직을 지냈는데, 휘가 흥(興)이다.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세경(世卿)이며, 어머니는 영가 권씨(永嘉權氏)로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지낸 권호(權皓)의 딸인데, 정덕(正德) 무진년(1508, 중종 3) 모월 모일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낳았다.
어머니께서는 자품이 단정하고 정숙하였으며, 성품이 본디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므로 시집오기 전에 본가에 있을 적부터 사람들이 이미 현부(賢婦)가 될 것을 알았다. 14세 때 시집와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배필이 되었는데, 몸은 정순(貞順)의 마땅함을 실행하였고, 마음은 투기하는 생각이 없었으며, 얼굴에는 희로(喜怒)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종들을 부리면서는 욕설을 하지 않았는바, 지극한 성품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시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순종하여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고, 여형제나 동서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온화하여 예모가 있었다. 시집의 친족들에게 화목하게 대하였고, 인근 사람들에게 어질게 대하였다. 이에 온 집안의 여자들이 모두 부인으로서의 범절을 우러렀다.
집안의 살림살이가 본디 가난한 데다가 자녀들이 많았으므로 직접 누에를 치고 길쌈을 하여 옷감을 마련하였으며, 지출과 수입을 헤아려서 끼니가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리하여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손수 여러 아이들의 옷을 두루 다 마련하였고, 흉년이 든 해에도 쌀독에 곡식이 가득하여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이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사방을 돌아다니며 학문을 하면서도 집안일에 대해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있었다.
병오년(1546, 명종 1)에 맏형이 과거에 급제한 뒤 바닷가의 고을에서 며느리를 보게 되었는데, 한여름철을 당하여 침식을 잊고서 행장을 꾸린 탓에 일을 치른 뒤 병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늙은 여종과 어린 자식의 손에 병든 몸을 내맡긴 탓에 의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지도 못하고, 약을 먹거나 침을 맞지도 못하였다. 그러면서 황급하게 허둥대는 사이에 마침내 큰 화에 걸려들고 말았다. 이때가 6월 14일로 향년이 39세였다.
이때에는 슬하에 어린 자녀가 모두 8남매였는데, 대부분이 칠팔 세 되었거나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였다. 이에 죽음에 임해서는 자식들을 돌아보고는 슬피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한번 죽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남겨진 아이들만을 염려하였으니, 아아, 하늘이여, 신령이여, 어찌 차마 이렇게까지 하신단 말입니까. 우리 형제들이 그런 처지에서도 수화(水火)의 재난을 면하고 성장하여서 남자는 장가를 들고 여자는 시집을 갔으며, 잇달아 과거에 급제해서 조정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은 그 모두가 어머니의 음덕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
아아, 비록 돌아가신 뒤에 영광이 미쳐 왔으나 녹봉으로 봉양하지 못하였는데, 30여 년의 세월이 어느 사이에 지나가 묘 앞에 심은 나무가 제법 자라났다. 그러니 천하의 통곡 소리를 다한다 하더라도 이 슬픔을 다할 수가 없고, 천하에 있는 말을 다 쓴다 하더라도 이 통한을 서술할 길이 없는바, 이 슬픔과 이 한스러움은 하늘이 다하고서야 그칠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휘는 아무로, 을유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아들은 아무 아무이고 딸은 아무 아무이며, 내외의 여러 후손은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이다.
아들 사인(舍人) 성일(誠一)은 피눈물을 쏟으며 삼가 쓴다.
先妣閔氏墓誌 학봉 찬
先妣卒三十四年庚辰。先君上世。諸孤奉葬于先妣墓前。相與泣血而言曰。孝子慮患也深。葬必有誌。而先妣之墓。尙闕焉。易世之後。雖有仁人君子。何所徵而掩之。於是刻片石。乃埋其幽曰。惟閔氏。興自驪興。有尙衣奉御稱道。始仕麗初。其後克大。位勻軸秉文衡者十數代。勳名事業。多在國乘。入我朝。左政丞, 驪興府院君諱霽號漁隱。乃誕大姒。克配獻陵。是爲元敬王后。本支百世。由玆毓慶。獻陵屢幸其第。命從臣歌其事。成石磷詩所謂漁隱門深迎鳳輦者是也。漁隱有三子。長曰無疾。驪城君。驪城有子曰矗。某官。於妣爲曾祖。祖曰某官諱興。考曰秉節校尉諱世卿。妣曰永嘉權氏。丹城縣監皓之女也。以弘治편001戊辰某月日。生先妣。資稟端淑。性本仁孝。其在室也。人已知其爲賢婦。十四。來配先君子。身服貞順之宜。心絶妒忌之慮。喜怒不形於容貌。罵詈不加於婢使。其至性蓋如此。事舅姑順而無違。待姨난001姒和而有禮。睦於夫黨。仁於隣里。族婦宗女。咸仰其壺儀。家素貧窶。而又多子女。躬蠶績以備剪製之具。量出入以供庚癸之費。未寒而手中之線。遍及羣兒。年飢而盎中之粟。可活八口。先君得以遊學四方。而不以家事經心焉。丙午歲。伯兄登第。娶婦于海郡。當盛暑廢寢食以裝束。旣行而得疾。委諸老婢弱息之手。診視無所問。藥石無所求。蒼皇奔走。遂遘大禍。寔六月十四日也。享年三十九。時膝下諸幼凡八人。而多在髫齔襁褓中。臨歿顧視泫然流涕。不以一死爲悲。而乃以遺孩爲念。天乎神乎。胡忍是耶。吾兄弟猶得免水火至成立。男而有室。女而有家。以至聯桂籍。竊位于朝者。無非陰德之報也。嗚呼。榮雖逮後。而祿不及養。三紀茫茫。墓木已拱。窮天下之聲。無以盡其哀。殫天下之辭。無以述其恨。其哀其恨。終天而止矣。先君諱某。乙酉生員。男某云云。女某云云。內外諸孫男女若干人。男舍人誠一。泣血謹誌。
贈資憲大夫吏曹判書金公墓碣銘 幷序 우복 경경세 찬
金之氏於義城者。爲東韓望族。高麗時有名龍庇。仕爲太子詹事。其子宜爲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子孫遂燀赫。凡歷五世。至公之曾祖副知承文院事諱漢啓。皆以鉅卿達官名于世。惟公之祖成均進士諱萬謹。考秉節校尉諱禮範。始隱不仕。公之妣曰。寧海申氏。郡守命昌女也。公諱璡。字瑩中。生而岐嶷。幼而知學。伯姑壻權公幹有家行。以孝悌敎人。公甫成童。卽往受業。旣冠。聘驪興閔氏。則閔氏之季父曰世貞。乃中廟朝賢良科及第己卯名儒也。公又從之游。得聞當世諸君子緖論。自是聞見日廣。藝業日進。遊太學入上舍。駸駸爲輩流所推許。尋棄擧子業。卜築于臨河縣之傅巖。以訓後生爲事。闢書堂一區。聚子弟及鄕之蒙士于其中。立科條程督之。提撕誘掖。備盡其方。積數十年不輟。學徒稍盛。絃誦聞一境。公之五子。三人取大科。二人升上庠。皆及公康健時爲公之榮。歲時省覲。鞾笏滿床。觀者嘖嘖歆歎。始公之生也。進士公奇愛之。小字以文會曰。是孫必能昌吾門。至是而果驗焉。公居家奉二親甚謹。省寒燠供滫瀡。務盡其歡。喪而致哀。廬墓三年。友弟妹篤至。分財產不置券。家庭無間言。撫育甥姪如己子。其貧不能嫁娶者。悉力資遣之。尤致誠於祭祀。齊之曰。飭內外無得譁。祭之日。肅敬將事。常曰。祭祀不謹則祖考不享。亦人家興替之所由也。可不謹乎。至於淫祀非鬼之事。則又憤疾之若浼己。巫覡不敢入其閭。縣之南山有祠。俗傳高麗廉興邦乃其神。巫覡輩倚以作妖。肆爲誣惑。公馳往數之曰。汝以前朝巨奸。死有餘罪。豈可容汝不靈之鬼以惑愿民乎。卽毀撤之。俗以稍定。嘗語諸子之仕者曰。事君之道。當以積誠見信爲先。然後犯顏而能入。又曰。人寧直道以死。不可枉道以生。汝等爲君子而死。則吾視猶生也。爲小人而生。則吾視猶死也。晩年。遊寧海之靑杞縣。愛其山廻水繞。有耕釣之樂。遂挈家而居之。課童僕力農桑以自給。每遇佳辰令節。黃鷄白酒。招山翁溪友。相與爲眞率。酒數行輒命射。先決拾呼耦。鶴髮童顏。昂然正立。發必破的。一座皆驚。以爲地仙焉。臨命。怡然謂子弟曰。吾年逾大耋。天餉我厚矣。復何求哉。公生于弘治庚申。歿以萬曆庚辰。得年八十一。葬于臨河縣東景出山震向之原。與閔氏爲前後封。閔氏故左議政霽之五代孫。秉節校尉世卿之女。得婦道甚。先公三十四年。年若干而終。公歿後十二年壬辰。公之男誠一爲慶尙右道節度使。推恩贈公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閔氏貞夫人。公之祖若考皆有贈如式。又後十四年丙午。朝廷以誠一討賊有功。錄宣武原從勳一等。加贈公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嗚呼。公之榮於是而益顯矣。男長克一。內資寺正。以詩鳴。次守一。成均生員。自如道察訪。次明一。成均生員。早卒。次卽誠一。有德行有事業。後學稱爲鶴峯先生。季復一。昌原都護府使。女長適柳城。次適成均館直講李逢春。季適柳瀾。庶男衍一。庶女二。內外孫曾男女凡百餘人。公之孫參議涌。於經世爲執友。一日。以狀授經世而言曰。此吾叔父鶴峯公所狀吾王父之行也。諸父爲王父具麗牲石。請銘於西厓。諾而未成。諸父相繼淪沒。西厓又已下世。涌等旣悲且懼。思以累吾子以成諸父之志。幸卒圖之。余辭謝不獲。退而讀其狀則其末有曰。府君身居畎畝。名不顯於世。雖有隱德。人鮮知之。知不知雖無加損於府君。而人子顯親之心。自有所不能已者。若其溢美以取譏。則又諸孤之所大懼也。嗚呼。是足以傳信於百世矣。後生晩出。何敢贅辭。謹摭其大者如右。而系以銘。銘曰。
孰不愛子。患不能誨。亦或誨之。久則必懈。能誨能久。惟公能愛。不爲小仁。爲大仁害。匪亟匪徐。有秉無改。晧天不忘。俾食所漑。旣中旣才。亦騰其馤。公在高堂。庭鳴玉佩。封植之澤。逮玆未艾。維公有行。我最其槩。孰不可書。維此尤大。景出之麓。江源濊濊。我銘斯闕。以詔來昧。
0 김 정(金珽) 1508년(중종 3)~1578년(선조 11)
호는 호은정(壺隱亭). 청계공의 아우.
효성이 지극하였고 친상을 당함에 3년 동안 여묘(廬墓) 살이를하였다.
선조 때 참봉에 제수되었다.
* 통사랑(通仕郞)으로 중부 참봉(中部參奉)을 지낸 김공(金公)의 묘갈명
을유년(1585, 선조 18) 학봉 찬
영남(嶺南)의 복주(福州)에 덕을 숨기고 사는 선비가 있었으니, 그분의 휘는 정(珽)이고, 자는 영숙(瑩叔)이다. 문소 김씨(聞韶金氏)로, 고려조 때 태자 첨사(太子詹事)를 지내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휘 용비(龍庇)가 먼 조상이다. 그 뒤 여러 대에 걸쳐서 벼슬아치가 나와 대대로 명망이 있었다.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를 지낸 휘 한계(漢啓)는 노산조(魯山朝 단종(端宗)을 가리킴)에 벼슬하여 일찍이 현달하였다. 그러나 세조(世祖)에게 선위(禪位)함에 미쳐서는 관직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았는데, 이분이 공의 증조할아버지이다. 이분이 성균관 진사를 지낸 만근(萬謹)을 낳았다. 진사공께서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예범(禮範)을 낳았다. 교위공께서는 벽동 군수(碧潼郡守)를 지낸 신명창(申命昌)의 딸 단양 신씨(丹陽申氏)를 아내로 맞아들여서 공을 낳았다.
공께서는 성품이 아주 효성스러워 집안에 있으면서는 일찍이 어버이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전후로 여묘살이를 하면서는 상을 마칠 때까지 죽을 먹었고, 곡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으며, 한 번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원근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는 모두들 감탄하였다. 명묘(明廟) 초에 고을에서 지방의 평판을 채집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금상께서 즉위하시어 특별히 효자(孝子)로 정려(旌閭)하는 은전을 거행하였으며, 중부 참봉(中部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공은 우리 아버지의 막내 동생이다. 처음에는 예안현(禮安縣)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는데, 뽕나무를 공경하는 마음이 간절하였고, 형제간의 정이 깊었다. 이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종가(宗家) 부근에 터를 잡고 살았다. 사시(四時)로 제사를 지낼 적에는 제사를 돕는 것을 오직 공경으로써 하였다. 초하루와 보름, 정조(正朝)와 동지(冬至)의 제사에 참예하는 것을 늙어서도 폐하지 않았으며, 제철에 나는 물품을 얻을 적마다 천신(薦新)하기 전에는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에 대해서 사람들이 더욱더 칭찬하였다.
공께서는 몸가짐이 본디 엄숙하였고 언행이 법도가 있었다. 그러므로 향리 사람들이 경외하여 감히 그른 짓을 하지 못하였으며, 무슨 일이 있으면 모두 찾아와서 공에게 물어서 결정하였다. 말년에는 앞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는 호은정(壺隱亭)이라고 편액을 달았는데, 빙 둘러서 연꽃 연못을 만들었으며 꽃나무를 옮겨 심었다. 그리고는 날마다 시골 친구들을 불러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면서 농사짓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초연한 마음으로 소요하면서 오직 마음에 맞는 대로 행하였다.
공께서는 영가 권씨(永嘉權氏) 아무개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後嗣)가 없었다. 나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는 막내 여동생이 태어나 돌도 안 지났었다. 그러자 공께서는 보살펴 줄 사람이 없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데려다가 양녀(養女)로 삼은 다음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길러 시집을 보내었다. 공의 자애롭고 인자함은 귀신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으니, 마침내는 측실(側室)에게서 아들을 얻어 후사가 끊기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백도(伯道)에게 후사를 끊기게 하였던 하늘이 어찌 아는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공께서는 정덕(正德) 무진년(1508, 중종 3)에 태어나시어 만력(萬曆) 무인년(1578, 선조 11)에 졸하였으니, 향년은 71세이다. 이해 11월 13일에 이곡(鯉谷)에 있는 선영의 왼쪽 모좌 모향(某坐某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었다. 부인 권씨는 장사 지낸 지 한 달 남짓 되어서 돌아가심에 이에[乃] 합부(合祔)하였다. 공의 아들 김홍일(金弘一)은 전 현감 김농(金農)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1녀 1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나 김성일은 어려서부터 공에게 오랫동안 은혜로운 훈육을 받았다. 그 은혜에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였는데, 묘소의 잔디가 이미 묵었으니, 추모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돌아보건대 못난 나의 글재주로는 공의 그윽한 광채를 천양(闡揚)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의리에 있어서 사양할 길이 없기에 삼가 두 번 절하고 피눈물을 닦으면서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이곡(鯉谷)이라 산언덕은 그윽도 한데 / 鯉原幽幽
낙동이라 강물결은 넘실대누나 / 洛水盈盈
석 자쯤 되는 무덤 하나 있으니 / 有封三尺
효자가 묻혀 있는 무덤이라네 / 孝子佳城
通仕郞中部參奉金公墓碣銘 乙酉 학봉 찬
嶺之南福之州。有士之隱德者焉。諱珽。字瑩叔。聞韶人。高麗太子詹事。贈銀靑光祿大夫, 尙書左僕射諱龍庇。其遠祖也。奕世冠冤。代有聞人。副知承文院事諱漢啓。仕魯山朝。嘗顯矣。逮世祖受禪。棄官不起。於公爲曾祖。是生成均進士諱萬謹。進士生秉節校尉諱禮範。校尉娶碧潼郡守命昌之女。丹陽申氏。生公。公性克孝。家庭之間。未嘗有咈親之事。前後居廬。終喪啜粥。哭不絶口。足不還家。遠近聞者。莫不感歎。明廟初。府採鄕評。轉聞于朝。今上卽阼。特擧旌孝之典。除公中部參奉。不赴。公於我先子季也。初贅居禮安縣。恭桑念切。孔懷情深。乃還于故里。卜隣宗家。四時烝嘗。助祭惟敬。朔望正至之參。至老不廢。每得時物。不薦不嘗。永慕之誠。人益稱之。公持身素嚴。言行有法。鄕里敬畏。無敢作非。有事則咸聚而咨決焉。晩年構亭前溪。扁曰壺隱。環以蓮池。蒔以花木。日與園翁溪友。具鷄黍說桑麻。逍遙象外。惟意所適。公聘永嘉權某之女。無後。歲丙午。我先妣捐背。季妹生未晬。公不忍其無恃。乃養以爲女。辛勤撫鞠。以至婚嫁。其慈仁一念。足以孚感神人。終有側室子。血嗣不絶。伯道之天。豈曰無知。公生于正德戊辰。卒于萬曆戊寅。享年七十一。是年十一月十三日某甲。堋于鯉谷先塋之左某坐某向之原。夫人權氏。葬踰月而歿乃。一本。仍。祔焉。男弘一。娶前縣監金農之女。生一女一子。皆幼。誠一自在髫齔。久蒙恩育。報微涓埃。墓草已宿。追慕之懷。曷有窮已。雇惟謭劣。實無以闡揚幽光。而義無可辭。謹再拜抆血以銘。銘曰。
鯉原幽幽。洛水盈盈。有封三尺。孝子佳城。
0 김 수(金璲)
호는 대계(大溪). 정(珽)의 아우. 親喪을 당함에 형과 함께 3년 동안 廬墓살이함.
참봉에 제수되었다.
0 김극일(金克一) 1522(중종 17, 임오)∼1585(선조 18, 을유).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 증 통례 만근(萬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예범(禮範)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청계공 진(璡)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병절교위 세경(世卿)의 딸이다.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커서는 아우 명일(明一)·성일(誠一)과 함께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 뒤 수의부위·사용을 거쳐, 1551년에 승문원정자·저작·박사가 되었다. 1553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얼마 뒤 형조좌랑·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홍원현감(洪原縣監)을 역임하였다. 1556년 청홍도도사(淸洪道都事)를 거쳐, 1558년 성균관직강·형조정랑·예조정랑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경상도도사를 거쳐, 1560년에 다시 예조정랑이 되었다. 얼마 뒤 군기시첨정과 평해군수를 역임하였다. 1566년에는 사재감첨정을 거쳐 다시 예천군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569년(선조 2) 성균관사성과 사도시정(司歸寺正)을 거쳐, 외직으로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성주목사 시절 ≪계몽익전 啓蒙翼傳≫을 간행해 스승 퇴계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1575년 밀양부사에 임명되고, 1582년 내자시정, 이듬해에는 사헌부장령을 겸하였다. 그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했고,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문장은 고결하고 창고(蒼古)해 한 글자도 진부한 말이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시에 뛰어나 시인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저서로는 ≪약봉일고 藥峰逸稿≫가 있다.
배위 숙부인 이씨는 동지중추부사 위(葳)의 따님이다.
아들이 없어서 동생 귀봉 수일의 아들 철(澈)을 후사로 삼았다. 4녀를 두었으니,
맏사위 조정(趙靖)은 호가 검간(黔澗)이며 퇴계 문인으로 대과에 급제 봉상시정.증 이조판서
둘째사위 류기(柳裿)는 겸암선생 운룡(雲龍)의 아들로 낭천현감(狼川縣監)이며.
셋째사위 이윤여(李胤呂)는 생원이고.
넷째사위 장여화(張汝華)는 인동장씨 안양공의 후손. 호는 사계(砂溪)로 진사
0 김 수(金璲)
호는 대계(大溪). 정(珽)의 아우. 親喪을 당함에 형과 함께 3년 동안 廬墓살이함.
참봉에 제수되었다.
0 김극일(金克一) 1522(중종 17, 임오)∼1585(선조 18, 을유).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 증 통례 만근(萬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예범(禮範)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청계공 진(璡)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병절교위 세경(世卿)의 딸이다.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커서는 아우 명일(明一)·성일(誠一)과 함께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 뒤 수의부위·사용을 거쳐, 1551년에 승문원정자·저작·박사가 되었다. 1553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얼마 뒤 형조좌랑·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홍원현감(洪原縣監)을 역임하였다. 1556년 청홍도도사(淸洪道都事)를 거쳐, 1558년 성균관직강·형조정랑·예조정랑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경상도도사를 거쳐, 1560년에 다시 예조정랑이 되었다. 얼마 뒤 군기시첨정과 평해군수를 역임하였다. 1566년에는 사재감첨정을 거쳐 다시 예천군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569년(선조 2) 성균관사성과 사도시정(司歸寺正)을 거쳐, 외직으로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성주목사 시절 ≪계몽익전 啓蒙翼傳≫을 간행해 스승 퇴계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1575년 밀양부사에 임명되고, 1582년 내자시정, 이듬해에는 사헌부장령을 겸하였다. 그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했고,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문장은 고결하고 창고(蒼古)해 한 글자도 진부한 말이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시에 뛰어나 시인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저서로는 ≪약봉일고 藥峰逸稿≫가 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배향되었다.
배위 숙부인 이씨는 동지중추부사 위(葳)의 따님이다.
아들이 없어서 동생 귀봉 수일의 아들 철(澈)을 후사로 삼았다. 4녀를 두었으니,
맏사위 조정(趙靖)은 호가 검간(黔澗)이며 퇴계 문인으로 대과에 급제 봉상시정.증 이조판서
둘째사위 류기(柳裿)는 겸암선생 운룡(雲龍)의 아들로 낭천현감(狼川縣監)이며.
셋째사위 이윤여(李胤呂)는 생원이고.
넷째사위 장여화(張汝華)는 인동장씨 안양공의 후손. 호는 사계(砂溪)로 진사
철(澈)은 아들은 시온(是榲)이니 표은 선생으로 숭청처사라 칭하였다.
표은은 8남 7녀를 두었으니.
방열(邦烈)은 生員이고。방형(邦衡),기(炁),방걸(邦杰)은 大司成이고,방찬(邦贊),
방조(邦照),방현(邦顯),방겸(邦謙)이다。
사위는 권극중(權克中)이고,김휘세(金輝世)는 문정공(文貞公) 계암(溪巖) 김령(金坽)의 아들로 호는 송파(松坡)로 용궁현감과 공조좌랑을 지냈고. 권극정(權克正)은 권별(權鼈)의 아들로 生員이고,정자고(鄭自固)이고,김종급(金宗汲)은 문절공 김담(金淡)의 후손인 한성부 서윤 김우익(金友益)의 손자이고,이유오(李兪吾)는 진성이씨로 풍기군수 이송(爾松)의 아들이고,권두경(權斗經)은 충정공(忠定公) 충재 선생 벌(橃)의 5세손으로, 호는 창설재(蒼雪齋). 생원시와 대과에 급제, 영산현감,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통훈대부내자시정 약봉선생묘갈명(通訓大夫內資寺正藥峯先生墓碣銘)
약봉(藥封) 김선생의 이름은 극일(克一), 자는 백순(伯純), 관향은 문소(聞韶)이다.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김예범(金禮範)의 손자이고, 증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청계(淸溪) 선생 김진(金璡)의 아들이다.
청계 선생은 큰 덕망과 무거운 명성이 있었는데 성균생원으로서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여흥(驪興) 민상국(閔相國) 5대손 민세경(民世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덕행 문학이 있으니, 세상에서 ‘김씨오룡(金氏五龍)’이라고 한다.
선생은 차례에 있어서 장남인데, 어려서 영명 준수하여 말을 토하면 문득 사람을 놀라게 하니,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조금 자라서는 도산(陶山)의 이 선생(李先生)에게 배웠는데 우뚝하게 성취함이 있자 이 선생께서 매우 아끼고 무겁게 여기셨다.
25세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교서관 정자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모친의 상을 당했는데, 상을 마치고 괴원(槐院)에 선발되어 들어가고, 정자·저작·박사를 거쳐서 천거로 기거랑이 되었다. 이윽고 형조 원외랑으로 옮기고, 사헌부 감찰로 갔다.
외직으로 나가서 홍원 현감, 청홍도사(淸洪都事:충청도사)가 되고, 내직으로 돌아와 직강, 형조 정랑, 예조 정랑이 되었다. 또 경상도사(慶尙都事)가 되고, 또 예조 정랑을 거쳐서 군기시 첨정이 되었다. 또 평해 군수로 나갔다가 들어와 사재감 첨정이 되었다. 또 예천군수로 나갔다가 들어와 성균관 사성이 되고 사도시정으로 옮겼다. 또 외직으로 나가서 성주 목사, 밀양 부사가 되었는데, 청계 선생이 생존해 계셔서 그 녹을 누리셨다. 청계 선생이 돌아가시고 3년이 되어 내자시정에 제수되었다.
4년이 지나 64세 때인 만력(萬曆) 13년(1584) 1월 7일에 집에서 세상을 마쳤는데, 그 해 모월 모일에 임하현(臨河縣) 북쪽 비리곡(飛鯉谷) 묘향(卯向) 등성에 안장했다.
선생은 높은 재능과 탁월한 식견으로 이미 가정의 가르침에 젖고 또 일찍 대현의 문하에서 배워 학문은 자기에게 넉넉하고 도는 실용에 적합했으나 명리를 구하기에 무심하고 나아가 취하기에 등한하였다. 오직 집안 살림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기 때문에 군을 빌어서 봉양을 다하는 것으로 영광으로 삼았으니, 세상에서 이른바 청반(淸班)의 벼슬과 같은 것은 선생이 이미 남에게 밀쳐서 주었다.
선생은 모두 다섯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이르는 곳에는 반드시 유학을 일으키고 후학을 장려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았으며, 거관(居官)과 치민(治民)에 있어 충직하고 후하며 공정하고 청렴하니, 치적이 당세에 순량(循良)의 으뜸으로 꼽혔다. 군자가 말하기를 “송나라에 염계(溓溪) 선생이 주현(州縣)에서 본분을 지키면서 그 도를 행하기를 즐거워했더니, 지금 선생이 거의 여기에 가깝다!”고 했다.
선생이 지은 문장은 고고(高古) 준결(峻潔)하여 세속의 기미가 없고, 특히 시에 능하여 풍아(風雅)의 유향(遺響)을 얻었다. 유고(遺稿)가 있었는데 불행히 화재를 당하고 남은 약간 권이 세상에 행한다.
숙인(淑人) 수안이씨(遂安李氏)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이위의 딸인데, 부도가 매우 잘 닦여서 남편을 짝함에 어긋난 덕이 없었다. 선생보다 10년 후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65세였다. 선생의 묘에 부장(附葬)했다.
선생은 아들이 없어서 아우 귀봉(龜峯) 선생 김수일(金守一)의 아들 진사 김철(金澈)로 하여금 대를 잇게 했다. 딸은 네 사람인데 군수 조정(趙靖), 현감 유기(柳綺), 생원 이윤려(李胤呂), 진사 장여화(張汝華)에게 출가했다. 김철은 찰방 김종무(金宗武)의 딸에게 장가들어 김시온(金是慍)을 낳았는데 호는 표은(瓢隱)이고 또한 높은 절의와 아름다운 덕으로 한자들의 숭앙을 받았다.
여덟 아들이 있는데 생원 김방렬(金邦烈)·김방형(金邦衡)·김기(金炁)·대사성 김방걸(金邦杰)·김방찬(金邦贊)·김방조(金邦照)·김방현(金邦顯)·김방겸(金邦謙)이고, 일곱 사위는 권극중(權克中), 좌랑 김휘세(金輝世). 생원 권극정(權克正), 정자고(鄭自固), 김종급(金宗汲), 이유오(李兪吾), 현감 권두경(權斗經)이다. 내외 현손 남녀가 모두 수백 명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91년인 지금 숙종 임금 즉위 11년 을축년(1685)에 고장 사람들이 동택(蕫澤)의 고사를 따라 경산(景山)에 경덕사(景德祠)를 건립하여 청계 선생에게 향사를 드리는데, 선생 5형제를 배향했다. 다음에 명(銘)을 붙인다.
청계의 가정에서
능히 훌륭하게 잘 계승함은
선생의 덕일세
도산 문하에서
강론하고 탁마함은
선생의 학문일세
상체화가 아름답게 빛남에
날로 달로 서로 힘쓰니
또한 형제간의 즐거움일세
규운이 밝게 빛나
문장으로 크게 울리니
그 명성이 성대했네
저 세상 사람들은
나아가 취하기를 힘써서
날로 급급했으나
우리 선생께서는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며
자신의 직분에 힘쓸 뿐이었네
팔순 고령(高齡)의 부친이 계시매
다섯 고을 수령이 되어 봉양하니
효도함에 옛 법도 따랐네
그 벼슬은 약하고
그 작위는 낮으나
그 덕만은 높았네
우뚝한 저 경산에
제기를 갖추어 제사 드림은
많은 선비들의 숭앙하는 바일세
현고께서 임하시고
여러 아우들 따르니
그 광채 빛나지 않는가
곡성의 북쪽
비리연 위 언덕은
만대에 잠드신 곳일세
비석에 명시(銘詩)를 새겨
그 아름다움을 기리고
아득한 후세에 보이네
종5대손 구관(具官) 김세호(金世鎬) 삼가 찬술하다.
* 백형(伯兄)께 올린 제문 학봉 찬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큰 화가 서리서리 얽히었으니 / 大禍糾纏
가문의 복 어쩜 이리 박복도 한가 / 門祚何薄
삼 년 동안 여묘살이하였건마는 / 三載居憂
풍수의 후회는 미칠 수 없네 / 風樹莫及 (주1)
지난해에 서울이라 객지 땅에서 / 去歲京師
둘째 형님 초상을 당하였었지 / 仲氏云喪
두 동생과 한 분 형님 그렇게 모여 / 二弟一兄
강가에서 상여를 떠나보냈지 / 送柩江上 (주2)
서로 손 부여잡고 통곡할 제에 / 相攜痛哭
흐른 눈물 황천에 사무쳤었지 / 有淚徹泉
이내 몸은 그때 당시 죄를 짓고서 / 我時負罪
황급하게 남쪽으로 관직 옮겼지 / 遑遽南遷 (주3)
형님께서 시원으로 들어가셨는데 / 兄入試院
직접 뵙고 하직인사 못 올리었지 / 未得面辭
눈물을 흩뿌리며 한강 건너며 / 揮淚渡漢
머리 돌려 보느라고 걸음 더뎠지 / 回首遲遲
세월은 빠르고 빠르게 흘러 / 光陰鼎鼎
해가 이미 두 번이나 바뀌었었지 / 歲已再易
천리 멀리 서로를 바라보면서 / 千里相望
몸 외로워 그림자 쓸쓸도 했지 / 形單影孑
훌쩍 떠나 시골로 돌아가설랑 / 逝將賦歸
시골에서 모시고 살고 싶었지 / 相從丘壑
도리어 이내 몸은 상루에 걸려 / 顧余湘纍 [주4]
진퇴유곡 어찌할 수 없게 되었지 / 進退維谷
그런 데다 몸에는 병조차 들어 / 病又纏身
동쪽으로 가려다가 결국 못 갔지 / 累掣東行
그러다가 지난해 겨울 어느 날 / 乃於去冬
형님께서 병 걸렸단 소식 들었지 / 聞兄疾嬰
곧바로 쾌차했단 소식 듣고는 / 旋獲勿藥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했었지 / 喜懼交幷
내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리오 / 豈料一疾
병 한 번 앓으시고 이에 이를 줄 / 而至此極
부음이 갑자기 이르러 오매 / 訃音忽至
하늘을 바라보니 아득만 했지 / 視天漠漠
놀란 맘에 땅바닥에 엎드려서는 / 驚呼投地
눈물 이어 피눈물을 쏟아내었지 / 淚繼以血
관직에서 물러나 상복 입는 게 / 解官持服
실로 나의 지극한 정이었건만 / 實余至情
형세와 맘 서로가 어긋나서는 / 勢與心乖
옥에 갇힌 것마냥 구속되었지 / 拘繫如囹
그런 데다 마침 또 흉년이 들어 / 又値年饑
구황하는 정사가 한창 급했지 / 荒政方急
조정 명령 몹시도 엄했던 탓에 / 朝令甚嚴
사신 수레 타고서 길을 떠났지 / 使軺將發
초상 소식 들은 지 몇 달 되도록 / 聞喪數月 [주5]
곡 한 번도 하지를 못하였었지 / 尙後一哭
그러면서 적당한 날 되길 기다려 / 猶冀得便
장삿날에 미치어서 가려 하였지 / 以及襄事
슬프구나 높지도 않은 벼슬이 / 嗟哉薄宦
코를 꿰어 오갈 수 없게 하였네 / 受人穿鼻
관직을 오랫동안 비울 수 없어 / 官不可曠
자리를 떠나 있을 수가 없었지 / 次不可離
걸핏하면 견제를 당하는 탓에 / 動遭牽縛
끝끝내 돌아갈 수가 없었지 / 終莫之歸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형제는 한 기운을 받고 났으니 / 兄弟一氣
손과 같고 또다시 발과 같으며 / 如手如足
천륜이라 그에 따른 은혜와 의리 / 天倫恩義
무겁기가 산보다도 더 무겁다네 / 重於山岳
더구나 이내 한 몸뚱어리는 / 況余一身
형님 은택 특별히도 많이 받았네 / 偏荷兄澤
내 나이 아홉 살에 어머니 잃고 / 九歲失恃
형님 따라 여기저기 나다녔었지 / 隨兄南北
이내 몸 어루만져 길러 주었고 / 撫我育我
가르쳐서 장성하게 키워 주었지 / 敎我成我
가이없는 형님의 크나큰 은혜 / 罔極之恩
어버이의 은혜와 다름이 없네 / 同於孃爺
그 은혜 갚으려나 길이 없으니 / 欲報無路
단지 나의 뼛골 속에 새기었다오 / 但銘在骨
내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리오 / 何意死生
생사간에 못 돌보아 주게 될 줄을 / 而莫相恤
병중에는 약 한 첩도 못 올리었고 / 病不分艾
돌아갈 땐 임종조차 못하였다오 / 歿不面訣
염습할 땐 관 곁에 있지 못했고 / 殮不憑棺
장사할 땐 무덤 자리 못 임했다오 / 葬不臨穴
그 누가 말했던가 골육간 정이 / 誰謂骨肉
도리어 친구만도 못한 법이라 / 不如友執
사람 도리 깡그리 끊어졌으니 / 人理滅絶
죽지 않고 또다시 무얼 하리오 / 不死何爲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세월이 물 흐르듯 빨리 흘러서 / 日月流邁
상기(喪期)가 끝나는 날이 있음에 / 卽遠有期
친척들은 모두 다 그곳에 가고 / 親戚皆在
마을 사람 모두 다 모였을 텐데 / 鄕曲畢集
나는 홀로 그 어떤 사람이기에 / 我獨何人
아직도 머나먼 이곳에 있나 / 尙在地角
하늘까지 사무치는 애통스런 맘 / 窮天之慟
이 지경에 이르니 더욱 간절해 / 到此益切
슬픔을 머금은 채 정성 올리며 / 緘哀展誠
먼 이곳서 한 잔 술로 전 올린다오 / 遠奠菲薄
유명은 본디가 한 이치이니 / 幽明一理
영령께선 흠향하실 수가 있으리 / 庶幾歆格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주1]풍수(風樹)의 후회 : 부모가 죽어서 봉양할 수 없게 된 것을 후회한다는 뜻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 제9권의 “나무는 고요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고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2]강가에서 상여를 떠나보냈지 : 학봉의 둘째 형인 귀봉 수일(守一)은 찰방(察訪)으로 있다가 사직한 뒤 선조(宣祖) 16년(1583) 6월에 여관(旅館)에서 졸(卒)하였는데, 이때 학봉은 황해도 순무어사(黃海道巡撫御史)로 나가 있다가 나중에 강가에서 곡하고 호상(護喪)하여 여주(驪州)에 이르렀다. 《年譜》
[주3]남쪽으로 관직 옮겼지 : 학봉은 선조 16년 7월에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주4]상루(湘纍) : 죄를 지어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을 말한다.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무고를 당하여 상수(湘水)로 쫓겨나 있다가 죽었으므로 이렇게 이르는 것이다. 여기서는 학봉이 외직인 나주 목사로 나간 것을 말한다.
[주5]초상 …… 못하였었지 : 학봉의 큰형 약봉 극일(克一)이 선조 18년(1585) 1월에 졸하였는데, 학봉은 7월이 되어서야 휴가를 받아 고향에 올 수 있었다. 《年譜》
藥峯先生金公墓誌銘 밀암 이재
先生諱克一字伯純。藥峯其號也。系出聞韶。高麗太子詹事龍庇之後。曾祖諱萬謹。成均進士贈左通 禮。祖諱禮範。秉節校尉贈左承旨。父諱璡。成均生員贈吏曹判書。三世推恩。以先生之弟鶴峯文忠公故。判書公種德毓慶。篤生五賢子。以德業文章。冠冕一世。世謂之金氏五龍。先生其長也。幼豪爽俊逸。從判書公遊太學。出語輒驚人。洛下大夫士爭相傳熟稱神童云。少長遊陶山李先生之門。文學卓然早成。先生甚器重之。嘗因其有向誤今覺之語。還書勉之曰。無以得小爲足。深以作輟爲戒。積之以久。何憂卒無得耶。其所以期之遠大者如此。二十五擢上第。初隷芸閣。是年丁內憂。服除選入槐院。由正字著 作陞博士。尋薦授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內而歷刑曹佐郞,司憲府監察,成均館直講,刑禮曹正郞,軍器寺司宰監僉正,成均館司成,司䆃寺正。出則佐湖西嶺南兩幕。知洪原縣,平海,禮泉郡,星州牧,密陽府事。判書公八袠尙無恙。連享專城之養。判書公卒三年。改正內資寺兼司憲府掌令。年六十四。以萬曆十三年正月七日卒。其年某月某甲。葬臨河縣北飛鯉谷卯向之原。南距承旨公墓若干步。母贈貞夫人閔氏。左議政文度公霽之五世孫。秉節校尉世卿之女。配淑夫人李氏。同知中樞府事葳之女。後 先生十年歿。合祔公墓左。無子有四女。以弟察訪守一之子成均進士澈爲後。女長適郡守趙靖。次適縣監柳裿。次適生員李胤呂。季適進士張汝華。進士有一子曰是榲。卽世所稱瓢隱先生是也。有高節偉行。嘗爲陵署郞。有官矣。後人不以官稱。稱之曰崇禎處士。有八男七女。男曰邦烈生員。邦衡,炁,邦杰大司成,邦贊,邦照,邦顯,邦謙。婿權克中,金輝世佐郞,權克正生員,鄭自固,金宗汲,李兪吾,權斗經修撰。內外曾玄孫男女數百人。先生以逸羣之才。早親有道。高步文學之科。旣又大闡嵬科。聲望出等夷。宜躋淸顯 之塗。以鳴國家之盛。顧不屑諧世取寵。惟丐閒便養是急。筮仕四十年。官不過州郡牧守而止。至今談明宣郅隆之際者。不能無遺恨。然先生隨遇盡職。不以外內貳其心。所至率以興裨斯文。表章善行。以助成風敎爲務。以故五邑政績。爲當世循良最。一時遇不遇命也。何足爲先生病哉。鄕人倣董澤故事。立廟以祀判書公。以先生五兄弟配食從享。先生之文峻潔蒼古。絶無世俗陳腐語。尤長於詩。穠淡淸婉。各極其趣。一世以詩文名家者。咸推先生執牛耳。後之尙論者。以爲先生之詩。本風雅以漱其芳潤。參歷代以 庀其體裁。非後世騷人墨客雕琢以爲工者比也。不幸散佚兵燹中。有如干卷藏于家。今距先生之歿百四十有一年。來孫命錫晜孫敏行等。奉家牒來命栽曰。先祖葬時。未及納銘幽堂。旋遭執徐兵作。後値家世多故。因循至于今未也。世遠益無徵。豈無蕘竪躑躅之虞。玆以追誌累吾子。栽以邈然後生。非所敢任。而聞先生之風則稔矣。相役與有榮焉。其何敢終辭。謹据家牒。掇其大者而係以銘。銘曰。
於休太宰詩禮傳。五棣聯芳公首先。維時陶翁方樂育。公居四科以文學。早闡黃甲藹厥聲。連縻郡紱恬 寵榮。八袠在堂五城養。政先風化治莫尙。位雖云細績彌光。世雖云遠存者長。有窅其隧闕顯刻。追昭厥美詔無極。
0 김수일(金守一) 1528년(종종 23, 무자)∼1583년(선조 16, 계미).
자는 경순(景純), 호는 귀봉(龜峰), 청계공의 둘째 아들로.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누차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향리인 임하현(臨河縣) 부암(傅巖)에 백운정(白雲亭)을 짓고, 유연자적하며 집안 자질과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56세 때 유일(遺逸)로 천보(薦補)되어 은혜에 감사하려고 상경하였다가 여저(旅邸)에서 병사했다.
부인 흥양이씨는 지례현감 월간(月磵 이전(李腆)의 따님이고, 문간공(文簡公)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질녀이다. 아들이 두 분이니 맏은 운천 용(涌)이고, 둘째 대박 철(澈)은 백부 약봉의 후사가 되었다. 사위 황여일(黃汝一)의 호는 해월헌(海月軒)으로 대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 예천군수, 길주목사를 지냈고, 박수근(朴守謹)은 증 참판 병백당(病柏堂) 운(蕓)의
아들로 호는 소천(蘇川)이고 사옹원 봉사를 지냈다.
아들 용(涌)은 퇴계 선생의 아들 첨정 준(寯)의 따님을 맞아 5남 2녀를 두었다.
(운천 선생 행록에 자세하다)
아들 철(澈)은 대사간 문간공(文簡公) 구암(久菴) 김취문(金就文)의 아들 찰방 김종무(金宗武)의 따님을 맞아 아들 시온(是榲)을 두었다.
둘째 형님에 대한 제문 계미년(1583, 선조 16)
오호라 슬프고도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형님이여 형님이여 형님이시여 / 兄乎兄乎
이 동생은 그 어떠한 사람입니까 / 弟何人哉
형님께서 병들어 누워 있을 때 / 兄之病矣
이 동생은 서쪽 지방 순행하느라 / 弟在西巡
아파할 때 그 아픔을 못 나누었고 / 痛不分艾
약 달일 때 직접 약을 못 달였다오 / 藥不親丸
형님께서 돌아가시었을 적에는 / 兄之逝矣
사신 일이 다 끝나지 아니하여서 / 使事未完
영결하며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 訣不得面
장사에는 참석조차 못하였다오 / 喪不躬莅
천리 먼 길 형님 상여 내려갈 적에 / 旅櫬千里
외로운 혼 의지할 데가 없어서 / 孤魂無倚
나그네로 떠도는 중에 있으며 / 凡在行路
오히려 코끝 시큰거리었다오 / 猶且酸鼻
이 동생은 실로 어떤 사람이기에 / 弟實何人
한 번 곡하는 것도 제때 못했나 / 尙後一哭
천륜조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 天倫至此
사람 도리 있어서는 어떠하리오 / 人理何若
형님께서 남쪽으로 돌아가신 게 / 聞兄南返
그 날짜가 초가을에 있었다 하니 / 期在首秋
형님 관을 뫼시고서 가는 것이야 / 扶櫬以去
비록 그리 할 길이야 없었다지만 / 縱未自由
제때 가서 상구에다 절을 한다면 / 倘及拜柩
또한 형님 뵙는 것과 같았을 텐데 / 亦若見兄
변경의 일 곤란한 점 많은 데다가 / 邊事多梗
큰비가 또 쏟아 붓듯 내리퍼부어 / 大雨如傾
길 가면서 자주 지체되었던 탓에 / 道途濡滯
앉은 채로 그만 날짜 놓쳐 버렸네 / 坐過時月
배천 땅에 도착했을 때에 미쳐선 / 逮到白川
장사 치를 날짜 이미 박두했건만 / 期日已迫
눈앞에 놓여 있는 나랏일들이 / 眼前王事
아직도 다 끝나지를 아니하여서 / 尙未了訖
손꼽아서 장사 일정 헤아려 보니 / 屈指計程
형세상 제때에 갈 수가 없었네 / 勢不相及
계속해서 듣건대 외론 종적이 / 續聞孤蹤
남쪽 지방 수령이 되었다 하니 / 作吏南荒
사임하고 장사에 달려가려던 / 解官會葬
계획 이미 틀어져 버리었다오 / 計墜杳茫
아아, 다 끝났구나 글러졌구나 / 已矣已矣
사람의 탓이런가 하늘 탓인가 / 人耶天耶
이 동생이 그렇게 되게 한 거지 / 弟實自貽
그 누가 그리 되게 한 것이겠나 / 夫孰使然
죄를 진 채 애통한 마음 머금고 / 負罪含痛
죽으려고 해도 죽을 길이 없으니 / 求死無緣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지난날에 형님께서 살아 계실 때 / 昔兄在世
몹시도 강녕하고 건강하시어 / 最爲康强
오래도록 사시면서 천수 누리어 / 謂享期頤
끝없는 복 받으리라 여겼더니만 / 受祿無疆
그 어찌 뜻했으랴 불행하여서 / 豈意不淑
갑작스레 이런 재앙 걸려들 줄을 / 遽罹此殃
사람의 목숨 길고 짧은 것이야 / 人生脩短
명에 달린 거라고들 말은 하지만 / 雖曰有命
이번에 만나게 된 이런 변고는 / 今者遭變
어쩜 그리 불행도 하단 말인가 / 又何不幸
병든 몸을 이끌고서 사은하는 건 / 扶疾謝恩
의리에 있어서는 옳은 것이며 / 固是其義
형제간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 兄弟在遠
그만두라 권하기가 어려웠었네 / 亦難勸止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 事已至此
애통해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 痛恨何益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남쪽으로 가는 길은 저리도 길고 / 南路方永
장맛비는 날마다 내리쏟는데 / 雨潦日積
홀로 영구 실은 수레 몰면서 가니 / 獨駕靈轜
다시 누가 있어 상여 잡고 갔겠나 / 誰復扶歸
형제간의 정에 있어 귀중한 것은 / 所貴兄弟
죽을까 봐 걱정하는 데에 있는데 / 死喪之威
동생이 있건마는 나와 같으니 / 有弟如我
다시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랴 / 復何所爲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하수라 저 강물은 넘실거리고 / 河水沄沄
남산이라 저 산은 푸르른 속에 / 南嶽蒼蒼
선조들은 윗자락에 누워 계시고 / 先塋在上
돌아가신 큰형님은 그 곁에 있네 / 亡兄在傍
둘째 형님 다시 또 그리로 가서 / 兄又歸止
영원토록 서로 간에 의지를 하니 / 永有依從
형님께선 이러한 것을 알아서兄 / 兄其知此
한 궁으로 가서 편히 계시는구료 / 往寧一宮
지극한 애통을 글로 쓸 수 없나니 / 至哀不文
또한 역시 다시 또 무슨 말 하리 / 亦復何說
바닷가서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 瀝血海崖
한강물 물굽이에 슬픔 부치네 / 寄哀漢曲
유명간에 영원토록 이별을 하고 / 永訣幽明
저 하늘을 쳐다보니 아득하구나 / 視天漠漠
[주]형제간의 …… 있는데 :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죽어서 장사 지낼까 하는 두려움에, 형제간에 몹시 걱정해 준다.[死喪之威 兄弟孔懷]” 하였다.
先考宣務郞自如道察訪府君墓誌 아들 운천 용 찬
先府君諱守一。字景純。姓金氏。鼻祖諱龍庇。爲高麗太子詹事。實始居義城。以有功德於民。邑人至今俎豆之。是生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諱宜。僕射生朝顯大夫內盈少尹諱瑞之。少尹生奉翊大夫文睿府左司尹諱台權。司尹生奉翊大夫工曹典書諱居斗。歷再世至通訓大夫副知承文院事諱漢啓。是高祖。成均進事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諱萬謹。是曾祖。秉節校尉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諱禮範。是祖。成均生員累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諱璡。是考。夫人閔氏。左議政驪興府院君文度公霽五代孫世卿之女。五子聯芳。榮耀一世。府君於次爲第二。以嘉靖戊子十一月丁巳。生于臨河縣川前里第。資稟英明。狀貌端嚴。淸秀有風稜。爲文章。滂沛頓挫。無世俗氣。尤長於詩。丙午。丁內艱。乙卯。中司馬試。嘗遊退溪之門。講問心學。明白洞澈。先生稱許。累魁鄕選。而輒屈於有司。不以得喪爲欣戚。退而作亭於臨河之傅巖。佳辰令節。奉老携朋。以燕以遊。樂而忘世。治家嚴肅。用心愷悌。謹祭祀斥巫覡。門庭斬斬。嫁貧女畜孤兒。親戚咸歸。敎誨子姪。訓迪後生。好善疾惡。遇事剛果。鄕人敬憚之。常以早失所恃。爲無涯之痛。奉椿府盡其誠孝。樂有賢弟兄。友愛篤至。而家世淸白。慮其貧窶。則不分臧獲。咸推與焉。庚辰。丁外艱。餰粥疏食。廬墓三霜服闋而病纏臟腑。柴毀日甚。銓曹適以遺逸薦。補自如道察訪。仕進本非所樂。而天恩不可不拜。且以京城有醫藥之便。遂力疾赴謝。仍留診視。而罪積不孝。禍延旅邸。癸未六月初八日也。享年五十六。諸父皆仕顯在朝。監備凶禮。事用無闕。乃於七月。奉柩還鄕。以九月某日。葬于景出飛鶴山先塋下兌震之原。從其志也。先妣漢陽趙氏。有九代祖諱良琪。高麗時年十三。襲父爵爲摠管。從征日本。能挫敵全師。元帝大奇之。賜玉帶錦袍。摠管之孫曰左政丞龍源府院君諱仁璧。龍源之子曰右議政漢平府院君諱涓。赫世冠冕。甲于三韓。曾祖諱永孫。槐山郡守。祖諱讜。司猛。考諱孝宗。宣略將軍忠佐衛副司果。配曰李氏。左議政鐵城府院君之曾孫。知禮縣監腆之女。先妣以純柔懿質。毓於顯閥。德充於容。識慮類士君子。選所宜歸。以媲我府君。含章守貞。在饋無遂。內政坤儀。惟府君之志是順。族婦宗女。皆法象其賢。吾兄弟得以有家有子。以至折桂搴蓮。慶延門闌者。無非積善之餘也。痛所天遠離遠背。哭泣幾殆。及見孤筮仕佩符。奉板輿稱壽爵。每以獨享其榮爲悲。又念在家諸子女。凡所供獻。日以手分封寄爲事。鳲鳩之慈。蓋亦天得也。生於癸巳三月丁巳。卒於庚戌二月乙亥。壽七十八。以四月七日壬午。合祔先君之墓。禮也。男二人。長涌。庚寅文科。前行司憲府執義,知製敎。次澈。癸卯進士。爲伯父后。實惟宗嗣。女二人。長適黃汝一。乙酉文科。前行司憲府掌令。次朴守謹。司甕奉事。涌娶退溪李先生之子僉正寯之女。生五男二女。長是柱。己酉生員壯元。次是楗。次是楨。己酉生員。次是棱。次是相。女長適裵尙益。次適李廷俊。皆士人。澈娶大司諫金就文之子察訪宗武之女。生一男曰是榲。掌令。生一男曰中允。乙巳俱中生員,進士。內外曾孫男女若干人。嗚呼。我府君早棄諸孤。不克終養。事偏親二十八年。而孤實愚無識知。所以承顔順志。多有乖戾。累典專城。旋赴旋歸。口體之養。亦未愜意。而風樹之感。忽焉至此。蒼天蒼天。有如是邪。有如是邪。孤之不肖。不足以稱道先德。然而無以識諸幽者。用敢略敍世系志行之萬一。入片磁納之玄堂之側。終天之哀。與玆石永久。皇明萬曆紀元之三十八年四月二日。男前行司憲府執義,知製敎涌。泣血謹誌。
0 김명일(金明一) 1534년(중종 29, 갑오)∼1570년(선조 3, 경오).
자는 언순(彦純). 호는 운암(雲巖).청계공의 第3子. 퇴계 이황(李滉) 문인.
1569년(선조 2) 향시(鄕試)에 합격. 이듬해 회시(會試)를 보러 형 수일과 함께 上京했다가 병이 심해져 귀향하던 도중 경기도 龍仁에서 향년 37세로 졸하였다.
제향:泗濱書院. 저서:『聯芳世稿』•『雲巖日記』.
영양남씨 남두공(南斗公)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을 두었다. 부인은 젊은 나이에 남편 상을 당한 뒤에도 어린 자녀들을 훌륭히 기르면서 집안의 기둥으로 제사를 받들고 노복들을 잘 통솔하여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아들은 약(瀹)이고, 딸은 봉사(奉事) 권욱(權旭)에게 시집을 갔다
成均生員雲巖金公墓表 갈암 이현일 찬
公姓金氏。義城人。上祖諱龍庇。顯高麗王氏時。爲太子詹事。高祖諱漢啓。仕本朝。官至通訓大夫副知承文院事。曾祖諱萬謹。成均進士。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祖諱禮範。秉節校尉。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考諱璡。成均生員。累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妣驪興閔氏贈貞夫人。左議政文度公諱霽之六世孫。處士諱世卿之女。生五男子。曰克一成均司成。曰守一自如察訪。曰誠一卽鶴峯文忠公。曰復一昌原府使。公於倫次居第三。諱明一。字彥純。自幼孝友祥順。穎悟 勤敏。家庭日用云爲。無一或掛於過差。讀書學文。功力兼人。爲文詞日就月將。聲譽藹鬱。嘗以判書公命。讀書紹修書院。錦溪黃公俊良一見知其爲遠器。及其還也。作古風詩一篇以贈之。時退陶老先生方講道陶山。公與弟文忠公執經請敎于門下。老先生手書箴銘以畀之。所以期許之者不淺。於是兄弟交相講磨。質疑請益齋居攻苦。至忘寢食。嘉靖甲子。與弟文忠公及昌原公俱登璧水之選。一時以爲榮。公素多疾病。欲輟擧從所好。以親故不得自專。將入泮宮。作詩若書。上老先生。先生爲之和詩答書。惓惓有策 勵奬進之意。其在泮宮也。言辭擧止。從容和粹。一遵師門軌則。己巳。與仲兄若季弟俱捷鄕解。赴試京師。不幸遇疾而歸。察訪公亦不入試場。與之同還。至龍仁之金亮驛。奄至不祿。察訪公護柩南下。以是年十月某日。葬于亞尼山艮向之原。享年三十七。公之配曰英陽南氏。性嚴有法度。事舅姑奉君子。孝謹備至。執公之喪。哭泣哀毀。有過人之行。撫育孤幼。慈愛雖篤。而所以敎戒之者。方嚴整肅奉祭祀以誠。御婢僕有法。鄕里莫不稱歎。有丈夫子一人曰瀹。女子子一人適奉事權旭。瀹有三男二女。男長曰是㯳。次是枰, 是榘。女長適生員權尙達。季適士人裴益謙。是㯳生二男一女。男長曰黯。季曰。女適士人金裕後。是枰有一男一女。男曰默。女適士人金如翼。是榘無子。以再從弟瓢隱公是榲之子邦贊爲後。黯有三男。長曰學逵。次學堯。甚秀而文。早卒。季曰學培。儀曹員外郞。有二男二女。男長曰學遠早卒。次學重。默有一男曰學增。亦早卒。邦贊有二子。曰恒重,履重。學逵有二子。長曰世鐸。有志行。不幸早卒。有二子。長曰景濂。內外曾玄來晜孫男女凡若干人。公資稟粹美。早知內外輕重之分。性又酷好佳山水。判書公嘗就落淵之 南水石幽絶處。結一庵堂。號曰仙遊亭以畀公。公得之以爲終老之計。又於所居秋月里上流。有層巖斗起。俗號爲雲褰巖。公築臺其上。仍自號曰雲巖。暇日輒往來遊嘗。悠然有自得之趣。至於世利紛華。泊然無所動其心。又能勸飭後進。諄諄善誘。間有成就之者。始文忠公嘗欲爲公碣墓。石旣具。未及琢建。適會壬辰兵亂。鶴老尋又下世。因循未果。距公下世今百三十有餘年。一日公之四世孫恒重,五世孫世鉉等。以員外君所撰公行實記一通來。請余所以表其墓者曰。先祖志行之懿。固不可泯沒無傳。文忠公建石 刻表闡揚幽潛之意。亦不宜孤負。而家世多故。迄茲遷就。吾儕藐孤孫大懼不孝。獲罪幽明。惟執事旣世通家。且猶及見聞之世。必能道吾祖志業行誼。敢拜以請。玄逸作而言曰。諸君之見責是也。玄逸於今日之請。固有所不敢辭者。其如衰退荒忽。文字短淺。不能究闡幽微。信示久遠何。諸君重以大義要責。於是不得終辭。仍竊惟念玄逸之王母夫人於公爲內外兄妹。固嘗聞諸父兄丈老之言。公天資近道。旣又早親有道。得聞聖賢相傳旨訣。服膺而謹守之。若使天假之年。以竭其力。則其所就其可量歟。嗚呼。茲可以 觀其志而審其德矣。則應曰諾。遂据家傳行實記。參以舊聞。輒論次其世系來歷志行梗槩。使之書于墓石上。後之君子庶有攷焉。
上之二十九年昭陽協洽八月壬寅。載寧李玄逸述。
철(澈)은 아들은 시온(是榲)이니 표은 선생으로 숭청처사라 칭하였다.
표은은 8남 7녀를 두었으니.
방열(邦烈)은 生員이고。방형(邦衡),기(炁),방걸(邦杰)은 大司成이고,방찬(邦贊),
방조(邦照),방현(邦顯),방겸(邦謙)이다。
사위는 권극중(權克中)이고,김휘세(金輝世)는 문정공(文貞公) 계암(溪巖) 김령(金坽)의 아들로 호는 송파(松坡)로 용궁현감과 공조좌랑을 지냈고. 권극정(權克正)은 권별(權鼈)의 아들로 生員이고,정자고(鄭自固)이고,김종급(金宗汲)은 문절공 김담(金淡)의 후손인 한성부 서윤 김우익(金友益)의 손자이고,이유오(李兪吾)는 진성이씨로 풍기군수 이송(爾松)의 아들이고,권두경(權斗經)은 충정공(忠定公) 충재 선생 벌(橃)의 5세손으로, 호는 창설재(蒼雪齋). 생원시와 대과에 급제, 영산현감,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통훈대부내자시정약봉선생묘갈명(通訓大夫內資寺正藥峯先生墓碣銘)
약봉(藥封) 김선생의 이름은 극일(克一), 자는 백순(伯純), 관향은 문소(聞韶)이다.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김예범(金禮範)의 손자이고, 증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청계(淸溪) 선생 김진(金璡)의 아들이다.
청계 선생은 큰 덕망과 무거운 명성이 있었는데 성균생원으로서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여흥(驪興) 민상국(閔相國) 5대손 민세경(民世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덕행 문학이 있으니, 세상에서 ‘김씨오룡(金氏五龍)’이라고 한다.
선생은 차례에 있어서 장남인데, 어려서 영명 준수하여 말을 토하면 문득 사람을 놀라게 하니,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조금 자라서는 도산(陶山)의 이 선생(李先生)에게 배웠는데 우뚝하게 성취함이 있자 이 선생께서 매우 아끼고 무겁게 여기셨다.
25세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교서관 정자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모친의 상을 당했는데, 상을 마치고 괴원(槐院)에 선발되어 들어가고, 정자·저작·박사를 거쳐서 천거로 기거랑이 되었다. 이윽고 형조 원외랑으로 옮기고, 사헌부 감찰로 갔다.
외직으로 나가서 홍원 현감, 청홍도사(淸洪都事:충청도사)가 되고, 내직으로 돌아와 직강, 형조 정랑, 예조 정랑이 되었다. 또 경상도사(慶尙都事)가 되고, 또 예조 정랑을 거쳐서 군기시 첨정이 되었다. 또 평해 군수로 나갔다가 들어와 사재감 첨정이 되었다. 또 예천군수로 나갔다가 들어와 성균관 사성이 되고 사도시정으로 옮겼다. 또 외직으로 나가서 성주 목사, 밀양 부사가 되었는데, 청계 선생이 생존해 계셔서 그 녹을 누리셨다. 청계 선생이 돌아가시고 3년이 되어 내자시정에 제수되었다.
4년이 지나 64세 때인 만력(萬曆) 13년(1584) 1월 7일에 집에서 세상을 마쳤는데, 그 해 모월 모일에 임하현(臨河縣) 북쪽 비리곡(飛鯉谷) 묘향(卯向) 등성에 안장했다.
선생은 높은 재능과 탁월한 식견으로 이미 가정의 가르침에 젖고 또 일찍 대현의 문하에서 배워 학문은 자기에게 넉넉하고 도는 실용에 적합했으나 명리를 구하기에 무심하고 나아가 취하기에 등한하였다. 오직 집안 살림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기 때문에 군을 빌어서 봉양을 다하는 것으로 영광으로 삼았으니, 세상에서 이른바 청반(淸班)의 벼슬과 같은 것은 선생이 이미 남에게 밀쳐서 주었다.
선생은 모두 다섯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이르는 곳에는 반드시 유학을 일으키고 후학을 장려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았으며, 거관(居官)과 치민(治民)에 있어 충직하고 후하며 공정하고 청렴하니, 치적이 당세에 순량(循良)의 으뜸으로 꼽혔다. 군자가 말하기를 “송나라에 염계(溓溪) 선생이 주현(州縣)에서 본분을 지키면서 그 도를 행하기를 즐거워했더니, 지금 선생이 거의 여기에 가깝다!”고 했다.
선생이 지은 문장은 고고(高古) 준결(峻潔)하여 세속의 기미가 없고, 특히 시에 능하여 풍아(風雅)의 유향(遺響)을 얻었다. 유고(遺稿)가 있었는데 불행히 화재를 당하고 남은 약간 권이 세상에 행한다.
숙인(淑人) 수안이씨(遂安李氏)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이위의 딸인데, 부도가 매우 잘 닦여서 남편을 짝함에 어긋난 덕이 없었다. 선생보다 10년 후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65세였다. 선생의 묘에 부장(附葬)했다.
선생은 아들이 없어서 아우 귀봉(龜峯) 선생 김수일(金守一)의 아들 진사 김철(金澈)로 하여금 대를 잇게 했다. 딸은 네 사람인데 군수 조정(趙靖), 현감 유기(柳綺), 생원 이윤려(李胤呂), 진사 장여화(張汝華)에게 출가했다. 김철은 찰방 김종무(金宗武)의 딸에게 장가들어 김시온(金是慍)을 낳았는데 호는 표은(瓢隱)이고 또한 높은 절의와 아름다운 덕으로 한자들의 숭앙을 받았다.
여덟 아들이 있는데 생원 김방렬(金邦烈)·김방형(金邦衡)·김기(金炁)·대사성 김방걸(金邦杰)·김방찬(金邦贊)·김방조(金邦照)·김방현(金邦顯)·김방겸(金邦謙)이고, 일곱 사위는 권극중(權克中), 좌랑 김휘세(金輝世). 생원 권극정(權克正), 정자고(鄭自固), 김종급(金宗汲), 이유오(李兪吾), 현감 권두경(權斗經)이다. 내외 현손 남녀가 모두 수백 명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91년인 지금 숙종 임금 즉위 11년 을축년(1685)에 고장 사람들이 동택(蕫澤)의 고사를 따라 경산(景山)에 경덕사(景德祠)를 건립하여 청계 선생에게 향사를 드리는데, 선생 5형제를 배향했다. 다음에 명(銘)을 붙인다.
청계의 가정에서
능히 훌륭하게 잘 계승함은
선생의 덕일세
도산 문하에서
강론하고 탁마함은
선생의 학문일세
상체화가 아름답게 빛남에
날로 달로 서로 힘쓰니
또한 형제간의 즐거움일세
규운이 밝게 빛나
문장으로 크게 울리니
그 명성이 성대했네
저 세상 사람들은
나아가 취하기를 힘써서
날로 급급했으나
우리 선생께서는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며
자신의 직분에 힘쓸 뿐이었네
팔순 고령(高齡)의 부친이 계시매
다섯 고을 수령이 되어 봉양하니
효도함에 옛 법도 따랐네
그 벼슬은 약하고
그 작위는 낮으나
그 덕만은 높았네
우뚝한 저 경산에
제기를 갖추어 제사 드림은
많은 선비들의 숭앙하는 바일세
현고께서 임하시고
여러 아우들 따르니
그 광채 빛나지 않는가
곡성의 북쪽
비리연 위 언덕은
만대에 잠드신 곳일세
비석에 명시(銘詩)를 새겨
그 아름다움을 기리고
아득한 후세에 보이네
종5대손 구관(具官) 김세호(金世鎬) 삼가 찬술하다.
* 백형(伯兄)께 올린 제문 학봉 찬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큰 화가 서리서리 얽히었으니 / 大禍糾纏
가문의 복 어쩜 이리 박복도 한가 / 門祚何薄
삼 년 동안 여묘살이하였건마는 / 三載居憂
풍수의 후회는 미칠 수 없네 / 風樹莫及 (주1)
지난해에 서울이라 객지 땅에서 / 去歲京師
둘째 형님 초상을 당하였었지 / 仲氏云喪
두 동생과 한 분 형님 그렇게 모여 / 二弟一兄
강가에서 상여를 떠나보냈지 / 送柩江上 (주2)
서로 손 부여잡고 통곡할 제에 / 相攜痛哭
흐른 눈물 황천에 사무쳤었지 / 有淚徹泉
이내 몸은 그때 당시 죄를 짓고서 / 我時負罪
황급하게 남쪽으로 관직 옮겼지 / 遑遽南遷 (주3)
형님께서 시원으로 들어가셨는데 / 兄入試院
직접 뵙고 하직인사 못 올리었지 / 未得面辭
눈물을 흩뿌리며 한강 건너며 / 揮淚渡漢
머리 돌려 보느라고 걸음 더뎠지 / 回首遲遲
세월은 빠르고 빠르게 흘러 / 光陰鼎鼎
해가 이미 두 번이나 바뀌었었지 / 歲已再易
천리 멀리 서로를 바라보면서 / 千里相望
몸 외로워 그림자 쓸쓸도 했지 / 形單影孑
훌쩍 떠나 시골로 돌아가설랑 / 逝將賦歸
시골에서 모시고 살고 싶었지 / 相從丘壑
도리어 이내 몸은 상루에 걸려 / 顧余湘纍 [주4]
진퇴유곡 어찌할 수 없게 되었지 / 進退維谷
그런 데다 몸에는 병조차 들어 / 病又纏身
동쪽으로 가려다가 결국 못 갔지 / 累掣東行
그러다가 지난해 겨울 어느 날 / 乃於去冬
형님께서 병 걸렸단 소식 들었지 / 聞兄疾嬰
곧바로 쾌차했단 소식 듣고는 / 旋獲勿藥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했었지 / 喜懼交幷
내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리오 / 豈料一疾
병 한 번 앓으시고 이에 이를 줄 / 而至此極
부음이 갑자기 이르러 오매 / 訃音忽至
하늘을 바라보니 아득만 했지 / 視天漠漠
놀란 맘에 땅바닥에 엎드려서는 / 驚呼投地
눈물 이어 피눈물을 쏟아내었지 / 淚繼以血
관직에서 물러나 상복 입는 게 / 解官持服
실로 나의 지극한 정이었건만 / 實余至情
형세와 맘 서로가 어긋나서는 / 勢與心乖
옥에 갇힌 것마냥 구속되었지 / 拘繫如囹
그런 데다 마침 또 흉년이 들어 / 又値年饑
구황하는 정사가 한창 급했지 / 荒政方急
조정 명령 몹시도 엄했던 탓에 / 朝令甚嚴
사신 수레 타고서 길을 떠났지 / 使軺將發
초상 소식 들은 지 몇 달 되도록 / 聞喪數月 [주5]
곡 한 번도 하지를 못하였었지 / 尙後一哭
그러면서 적당한 날 되길 기다려 / 猶冀得便
장삿날에 미치어서 가려 하였지 / 以及襄事
슬프구나 높지도 않은 벼슬이 / 嗟哉薄宦
코를 꿰어 오갈 수 없게 하였네 / 受人穿鼻
관직을 오랫동안 비울 수 없어 / 官不可曠
자리를 떠나 있을 수가 없었지 / 次不可離
걸핏하면 견제를 당하는 탓에 / 動遭牽縛
끝끝내 돌아갈 수가 없었지 / 終莫之歸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형제는 한 기운을 받고 났으니 / 兄弟一氣
손과 같고 또다시 발과 같으며 / 如手如足
천륜이라 그에 따른 은혜와 의리 / 天倫恩義
무겁기가 산보다도 더 무겁다네 / 重於山岳
더구나 이내 한 몸뚱어리는 / 況余一身
형님 은택 특별히도 많이 받았네 / 偏荷兄澤
내 나이 아홉 살에 어머니 잃고 / 九歲失恃
형님 따라 여기저기 나다녔었지 / 隨兄南北
이내 몸 어루만져 길러 주었고 / 撫我育我
가르쳐서 장성하게 키워 주었지 / 敎我成我
가이없는 형님의 크나큰 은혜 / 罔極之恩
어버이의 은혜와 다름이 없네 / 同於孃爺
그 은혜 갚으려나 길이 없으니 / 欲報無路
단지 나의 뼛골 속에 새기었다오 / 但銘在骨
내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리오 / 何意死生
생사간에 못 돌보아 주게 될 줄을 / 而莫相恤
병중에는 약 한 첩도 못 올리었고 / 病不分艾
돌아갈 땐 임종조차 못하였다오 / 歿不面訣
염습할 땐 관 곁에 있지 못했고 / 殮不憑棺
장사할 땐 무덤 자리 못 임했다오 / 葬不臨穴
그 누가 말했던가 골육간 정이 / 誰謂骨肉
도리어 친구만도 못한 법이라 / 不如友執
사람 도리 깡그리 끊어졌으니 / 人理滅絶
죽지 않고 또다시 무얼 하리오 / 不死何爲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세월이 물 흐르듯 빨리 흘러서 / 日月流邁
상기(喪期)가 끝나는 날이 있음에 / 卽遠有期
친척들은 모두 다 그곳에 가고 / 親戚皆在
마을 사람 모두 다 모였을 텐데 / 鄕曲畢集
나는 홀로 그 어떤 사람이기에 / 我獨何人
아직도 머나먼 이곳에 있나 / 尙在地角
하늘까지 사무치는 애통스런 맘 / 窮天之慟
이 지경에 이르니 더욱 간절해 / 到此益切
슬픔을 머금은 채 정성 올리며 / 緘哀展誠
먼 이곳서 한 잔 술로 전 올린다오 / 遠奠菲薄
유명은 본디가 한 이치이니 / 幽明一理
영령께선 흠향하실 수가 있으리 / 庶幾歆格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주1]풍수(風樹)의 후회 : 부모가 죽어서 봉양할 수 없게 된 것을 후회한다는 뜻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 제9권의 “나무는 고요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고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2]강가에서 상여를 떠나보냈지 : 학봉의 둘째 형인 귀봉 수일(守一)은 찰방(察訪)으로 있다가 사직한 뒤 선조(宣祖) 16년(1583) 6월에 여관(旅館)에서 졸(卒)하였는데, 이때 학봉은 황해도 순무어사(黃海道巡撫御史)로 나가 있다가 나중에 강가에서 곡하고 호상(護喪)하여 여주(驪州)에 이르렀다. 《年譜》
[주3]남쪽으로 관직 옮겼지 : 학봉은 선조 16년 7월에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주4]상루(湘纍) : 죄를 지어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을 말한다.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무고를 당하여 상수(湘水)로 쫓겨나 있다가 죽었으므로 이렇게 이르는 것이다. 여기서는 학봉이 외직인 나주 목사로 나간 것을 말한다.
[주5]초상 …… 못하였었지 : 학봉의 큰형 약봉 극일(克一)이 선조 18년(1585) 1월에 졸하였는데, 학봉은 7월이 되어서야 휴가를 받아 고향에 올 수 있었다. 《年譜》
藥峯先生金公墓誌銘 밀암 이재
先生諱克一字伯純。藥峯其號也。系出聞韶。高麗太子詹事龍庇之後。曾祖諱萬謹。成均進士贈左通 禮。祖諱禮範。秉節校尉贈左承旨。父諱璡。成均生員贈吏曹判書。三世推恩。以先生之弟鶴峯文忠公故。判書公種德毓慶。篤生五賢子。以德業文章。冠冕一世。世謂之金氏五龍。先生其長也。幼豪爽俊逸。從判書公遊太學。出語輒驚人。洛下大夫士爭相傳熟稱神童云。少長遊陶山李先生之門。文學卓然早成。先生甚器重之。嘗因其有向誤今覺之語。還書勉之曰。無以得小爲足。深以作輟爲戒。積之以久。何憂卒無得耶。其所以期之遠大者如此。二十五擢上第。初隷芸閣。是年丁內憂。服除選入槐院。由正字著 作陞博士。尋薦授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內而歷刑曹佐郞,司憲府監察,成均館直講,刑禮曹正郞,軍器寺司宰監僉正,成均館司成,司䆃寺正。出則佐湖西嶺南兩幕。知洪原縣,平海,禮泉郡,星州牧,密陽府事。判書公八袠尙無恙。連享專城之養。判書公卒三年。改正內資寺兼司憲府掌令。年六十四。以萬曆十三年正月七日卒。其年某月某甲。葬臨河縣北飛鯉谷卯向之原。南距承旨公墓若干步。母贈貞夫人閔氏。左議政文度公霽之五世孫。秉節校尉世卿之女。配淑夫人李氏。同知中樞府事葳之女。後 先生十年歿。合祔公墓左。無子有四女。以弟察訪守一之子成均進士澈爲後。女長適郡守趙靖。次適縣監柳裿。次適生員李胤呂。季適進士張汝華。進士有一子曰是榲。卽世所稱瓢隱先生是也。有高節偉行。嘗爲陵署郞。有官矣。後人不以官稱。稱之曰崇禎處士。有八男七女。男曰邦烈生員。邦衡,炁,邦杰大司成,邦贊,邦照,邦顯,邦謙。婿權克中,金輝世佐郞,權克正生員,鄭自固,金宗汲,李兪吾,權斗經修撰。內外曾玄孫男女數百人。先生以逸羣之才。早親有道。高步文學之科。旣又大闡嵬科。聲望出等夷。宜躋淸顯 之塗。以鳴國家之盛。顧不屑諧世取寵。惟丐閒便養是急。筮仕四十年。官不過州郡牧守而止。至今談明宣郅隆之際者。不能無遺恨。然先生隨遇盡職。不以外內貳其心。所至率以興裨斯文。表章善行。以助成風敎爲務。以故五邑政績。爲當世循良最。一時遇不遇命也。何足爲先生病哉。鄕人倣董澤故事。立廟以祀判書公。以先生五兄弟配食從享。先生之文峻潔蒼古。絶無世俗陳腐語。尤長於詩。穠淡淸婉。各極其趣。一世以詩文名家者。咸推先生執牛耳。後之尙論者。以爲先生之詩。本風雅以漱其芳潤。參歷代以 庀其體裁。非後世騷人墨客雕琢以爲工者比也。不幸散佚兵燹中。有如干卷藏于家。今距先生之歿百四十有一年。來孫命錫晜孫敏行等。奉家牒來命栽曰。先祖葬時。未及納銘幽堂。旋遭執徐兵作。後値家世多故。因循至于今未也。世遠益無徵。豈無蕘竪躑躅之虞。玆以追誌累吾子。栽以邈然後生。非所敢任。而聞先生之風則稔矣。相役與有榮焉。其何敢終辭。謹据家牒。掇其大者而係以銘。銘曰。
於休太宰詩禮傳。五棣聯芳公首先。維時陶翁方樂育。公居四科以文學。早闡黃甲藹厥聲。連縻郡紱恬 寵榮。八袠在堂五城養。政先風化治莫尙。位雖云細績彌光。世雖云遠存者長。有窅其隧闕顯刻。追昭厥美詔無極。
0 김수일(金守一) 1528년(종종 23, 무자)∼1583년(선조 16, 계미).
자는 경순(景純), 호는 귀봉(龜峰), 청계공의 둘째 아들로.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누차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향리인 임하현(臨河縣) 부암(傅巖)에 백운정(白雲亭)을 짓고, 유연자적하며 집안 자질과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56세 때 유일(遺逸)로 천보(薦補)되어 은혜에 감사하려고 상경하였다가 여저(旅邸)에서 병사했다.
부인 흥양이씨는 지례현감 월간(月磵 이전(李腆)의 따님이고, 문간공(文簡公)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질녀이다. 아들이 두 분이니 맏은 운천 용(涌)이고, 둘째 대박 철(澈)은 백부 약봉의 후사가 되었다. 사위 황여일(黃汝一)의 호는 해월헌(海月軒)으로 대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 예천군수, 길주목사를 지냈고, 박수근(朴守謹)은 증 참판 병백당(病柏堂) 운(蕓)의
아들로 호는 소천(蘇川)이고 사옹원 봉사를 지냈다.
아들 용(涌)은 퇴계 선생의 아들 첨정 준(寯)의 따님을 맞아 5남 2녀를 두었다.
(운천 선생 행록에 자세하다)
아들 철(澈)은 대사간 문간공(文簡公) 구암(久菴) 김취문(金就文)의 아들 찰방 김종무(金宗武)의 따님을 맞아 아들 시온(是榲)을 두었다.
둘째 형님에 대한 제문 계미년(1583, 선조 16)
오호라 슬프고도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형님이여 형님이여 형님이시여 / 兄乎兄乎
이 동생은 그 어떠한 사람입니까 / 弟何人哉
형님께서 병들어 누워 있을 때 / 兄之病矣
이 동생은 서쪽 지방 순행하느라 / 弟在西巡
아파할 때 그 아픔을 못 나누었고 / 痛不分艾
약 달일 때 직접 약을 못 달였다오 / 藥不親丸
형님께서 돌아가시었을 적에는 / 兄之逝矣
사신 일이 다 끝나지 아니하여서 / 使事未完
영결하며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 訣不得面
장사에는 참석조차 못하였다오 / 喪不躬莅
천리 먼 길 형님 상여 내려갈 적에 / 旅櫬千里
외로운 혼 의지할 데가 없어서 / 孤魂無倚
나그네로 떠도는 중에 있으며 / 凡在行路
오히려 코끝 시큰거리었다오 / 猶且酸鼻
이 동생은 실로 어떤 사람이기에 / 弟實何人
한 번 곡하는 것도 제때 못했나 / 尙後一哭
천륜조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 天倫至此
사람 도리 있어서는 어떠하리오 / 人理何若
형님께서 남쪽으로 돌아가신 게 / 聞兄南返
그 날짜가 초가을에 있었다 하니 / 期在首秋
형님 관을 뫼시고서 가는 것이야 / 扶櫬以去
비록 그리 할 길이야 없었다지만 / 縱未自由
제때 가서 상구에다 절을 한다면 / 倘及拜柩
또한 형님 뵙는 것과 같았을 텐데 / 亦若見兄
변경의 일 곤란한 점 많은 데다가 / 邊事多梗
큰비가 또 쏟아 붓듯 내리퍼부어 / 大雨如傾
길 가면서 자주 지체되었던 탓에 / 道途濡滯
앉은 채로 그만 날짜 놓쳐 버렸네 / 坐過時月
배천 땅에 도착했을 때에 미쳐선 / 逮到白川
장사 치를 날짜 이미 박두했건만 / 期日已迫
눈앞에 놓여 있는 나랏일들이 / 眼前王事
아직도 다 끝나지를 아니하여서 / 尙未了訖
손꼽아서 장사 일정 헤아려 보니 / 屈指計程
형세상 제때에 갈 수가 없었네 / 勢不相及
계속해서 듣건대 외론 종적이 / 續聞孤蹤
남쪽 지방 수령이 되었다 하니 / 作吏南荒
사임하고 장사에 달려가려던 / 解官會葬
계획 이미 틀어져 버리었다오 / 計墜杳茫
아아, 다 끝났구나 글러졌구나 / 已矣已矣
사람의 탓이런가 하늘 탓인가 / 人耶天耶
이 동생이 그렇게 되게 한 거지 / 弟實自貽
그 누가 그리 되게 한 것이겠나 / 夫孰使然
죄를 진 채 애통한 마음 머금고 / 負罪含痛
죽으려고 해도 죽을 길이 없으니 / 求死無緣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지난날에 형님께서 살아 계실 때 / 昔兄在世
몹시도 강녕하고 건강하시어 / 最爲康强
오래도록 사시면서 천수 누리어 / 謂享期頤
끝없는 복 받으리라 여겼더니만 / 受祿無疆
그 어찌 뜻했으랴 불행하여서 / 豈意不淑
갑작스레 이런 재앙 걸려들 줄을 / 遽罹此殃
사람의 목숨 길고 짧은 것이야 / 人生脩短
명에 달린 거라고들 말은 하지만 / 雖曰有命
이번에 만나게 된 이런 변고는 / 今者遭變
어쩜 그리 불행도 하단 말인가 / 又何不幸
병든 몸을 이끌고서 사은하는 건 / 扶疾謝恩
의리에 있어서는 옳은 것이며 / 固是其義
형제간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 兄弟在遠
그만두라 권하기가 어려웠었네 / 亦難勸止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 事已至此
애통해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 痛恨何益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남쪽으로 가는 길은 저리도 길고 / 南路方永
장맛비는 날마다 내리쏟는데 / 雨潦日積
홀로 영구 실은 수레 몰면서 가니 / 獨駕靈轜
다시 누가 있어 상여 잡고 갔겠나 / 誰復扶歸
형제간의 정에 있어 귀중한 것은 / 所貴兄弟
죽을까 봐 걱정하는 데에 있는데 / 死喪之威
동생이 있건마는 나와 같으니 / 有弟如我
다시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랴 / 復何所爲
오호라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하수라 저 강물은 넘실거리고 / 河水沄沄
남산이라 저 산은 푸르른 속에 / 南嶽蒼蒼
선조들은 윗자락에 누워 계시고 / 先塋在上
돌아가신 큰형님은 그 곁에 있네 / 亡兄在傍
둘째 형님 다시 또 그리로 가서 / 兄又歸止
영원토록 서로 간에 의지를 하니 / 永有依從
형님께선 이러한 것을 알아서兄 / 兄其知此
한 궁으로 가서 편히 계시는구료 / 往寧一宮
지극한 애통을 글로 쓸 수 없나니 / 至哀不文
또한 역시 다시 또 무슨 말 하리 / 亦復何說
바닷가서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 瀝血海崖
한강물 물굽이에 슬픔 부치네 / 寄哀漢曲
유명간에 영원토록 이별을 하고 / 永訣幽明
저 하늘을 쳐다보니 아득하구나 / 視天漠漠
[주]형제간의 …… 있는데 :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죽어서 장사 지낼까 하는 두려움에, 형제간에 몹시 걱정해 준다.[死喪之威 兄弟孔懷]” 하였다.
先考宣務郞自如道察訪府君墓誌 아들 운천 용 찬
先府君諱守一。字景純。姓金氏。鼻祖諱龍庇。爲高麗太子詹事。實始居義城。以有功德於民。邑人至今俎豆之。是生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諱宜。僕射生朝顯大夫內盈少尹諱瑞之。少尹生奉翊大夫文睿府左司尹諱台權。司尹生奉翊大夫工曹典書諱居斗。歷再世至通訓大夫副知承文院事諱漢啓。是高祖。成均進事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諱萬謹。是曾祖。秉節校尉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諱禮範。是祖。成均生員累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諱璡。是考。夫人閔氏。左議政驪興府院君文度公霽五代孫世卿之女。五子聯芳。榮耀一世。府君於次爲第二。以嘉靖戊子十一月丁巳。生于臨河縣川前里第。資稟英明。狀貌端嚴。淸秀有風稜。爲文章。滂沛頓挫。無世俗氣。尤長於詩。丙午。丁內艱。乙卯。中司馬試。嘗遊退溪之門。講問心學。明白洞澈。先生稱許。累魁鄕選。而輒屈於有司。不以得喪爲欣戚。退而作亭於臨河之傅巖。佳辰令節。奉老携朋。以燕以遊。樂而忘世。治家嚴肅。用心愷悌。謹祭祀斥巫覡。門庭斬斬。嫁貧女畜孤兒。親戚咸歸。敎誨子姪。訓迪後生。好善疾惡。遇事剛果。鄕人敬憚之。常以早失所恃。爲無涯之痛。奉椿府盡其誠孝。樂有賢弟兄。友愛篤至。而家世淸白。慮其貧窶。則不分臧獲。咸推與焉。庚辰。丁外艱。餰粥疏食。廬墓三霜服闋而病纏臟腑。柴毀日甚。銓曹適以遺逸薦。補自如道察訪。仕進本非所樂。而天恩不可不拜。且以京城有醫藥之便。遂力疾赴謝。仍留診視。而罪積不孝。禍延旅邸。癸未六月初八日也。享年五十六。諸父皆仕顯在朝。監備凶禮。事用無闕。乃於七月。奉柩還鄕。以九月某日。葬于景出飛鶴山先塋下兌震之原。從其志也。先妣漢陽趙氏。有九代祖諱良琪。高麗時年十三。襲父爵爲摠管。從征日本。能挫敵全師。元帝大奇之。賜玉帶錦袍。摠管之孫曰左政丞龍源府院君諱仁璧。龍源之子曰右議政漢平府院君諱涓。赫世冠冕。甲于三韓。曾祖諱永孫。槐山郡守。祖諱讜。司猛。考諱孝宗。宣略將軍忠佐衛副司果。配曰李氏。左議政鐵城府院君之曾孫。知禮縣監腆之女。先妣以純柔懿質。毓於顯閥。德充於容。識慮類士君子。選所宜歸。以媲我府君。含章守貞。在饋無遂。內政坤儀。惟府君之志是順。族婦宗女。皆法象其賢。吾兄弟得以有家有子。以至折桂搴蓮。慶延門闌者。無非積善之餘也。痛所天遠離遠背。哭泣幾殆。及見孤筮仕佩符。奉板輿稱壽爵。每以獨享其榮爲悲。又念在家諸子女。凡所供獻。日以手分封寄爲事。鳲鳩之慈。蓋亦天得也。生於癸巳三月丁巳。卒於庚戌二月乙亥。壽七十八。以四月七日壬午。合祔先君之墓。禮也。男二人。長涌。庚寅文科。前行司憲府執義,知製敎。次澈。癸卯進士。爲伯父后。實惟宗嗣。女二人。長適黃汝一。乙酉文科。前行司憲府掌令。次朴守謹。司甕奉事。涌娶退溪李先生之子僉正寯之女。生五男二女。長是柱。己酉生員壯元。次是楗。次是楨。己酉生員。次是棱。次是相。女長適裵尙益。次適李廷俊。皆士人。澈娶大司諫金就文之子察訪宗武之女。生一男曰是榲。掌令。生一男曰中允。乙巳俱中生員,進士。內外曾孫男女若干人。嗚呼。我府君早棄諸孤。不克終養。事偏親二十八年。而孤實愚無識知。所以承顔順志。多有乖戾。累典專城。旋赴旋歸。口體之養。亦未愜意。而風樹之感。忽焉至此。蒼天蒼天。有如是邪。有如是邪。孤之不肖。不足以稱道先德。然而無以識諸幽者。用敢略敍世系志行之萬一。入片磁納之玄堂之側。終天之哀。與玆石永久。皇明萬曆紀元之三十八年四月二日。男前行司憲府執義,知製敎涌。泣血謹誌。
0 김명일(金明一) 1534년(중종 29, 갑오)∼1570년(선조 3, 경오).
자는 언순(彦純). 호는 운암(雲巖).청계공의 第3子. 퇴계 이황(李滉) 문인.
1569년(선조 2) 향시(鄕試)에 합격. 이듬해 회시(會試)를 보러 형 수일과 함께 上京했다가 병이 심해져 귀향하던 도중 경기도 龍仁에서 향년 37세로 졸하였다.
제향:泗濱書院. 저서:『聯芳世稿』•『雲巖日記』.
영양남씨 남두공(南斗公)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을 두었다. 부인은 젊은 나이에 남편 상을 당한 뒤에도 어린 자녀들을 훌륭히 기르면서 집안의 기둥으로 제사를 받들고 노복들을 잘 통솔하여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아들은 약(瀹)이고, 딸은 봉사(奉事) 권욱(權旭)에게 시집을 갔다
成均生員雲巖金公墓表 갈암 이현일 찬
公姓金氏。義城人。上祖諱龍庇。顯高麗王氏時。爲太子詹事。高祖諱漢啓。仕本朝。官至通訓大夫副知承文院事。曾祖諱萬謹。成均進士。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祖諱禮範。秉節校尉。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考諱璡。成均生員。累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妣驪興閔氏贈貞夫人。左議政文度公諱霽之六世孫。處士諱世卿之女。生五男子。曰克一成均司成。曰守一自如察訪。曰誠一卽鶴峯文忠公。曰復一昌原府使。公於倫次居第三。諱明一。字彥純。自幼孝友祥順。穎悟 勤敏。家庭日用云爲。無一或掛於過差。讀書學文。功力兼人。爲文詞日就月將。聲譽藹鬱。嘗以判書公命。讀書紹修書院。錦溪黃公俊良一見知其爲遠器。及其還也。作古風詩一篇以贈之。時退陶老先生方講道陶山。公與弟文忠公執經請敎于門下。老先生手書箴銘以畀之。所以期許之者不淺。於是兄弟交相講磨。質疑請益齋居攻苦。至忘寢食。嘉靖甲子。與弟文忠公及昌原公俱登璧水之選。一時以爲榮。公素多疾病。欲輟擧從所好。以親故不得自專。將入泮宮。作詩若書。上老先生。先生爲之和詩答書。惓惓有策 勵奬進之意。其在泮宮也。言辭擧止。從容和粹。一遵師門軌則。己巳。與仲兄若季弟俱捷鄕解。赴試京師。不幸遇疾而歸。察訪公亦不入試場。與之同還。至龍仁之金亮驛。奄至不祿。察訪公護柩南下。以是年十月某日。葬于亞尼山艮向之原。享年三十七。公之配曰英陽南氏。性嚴有法度。事舅姑奉君子。孝謹備至。執公之喪。哭泣哀毀。有過人之行。撫育孤幼。慈愛雖篤。而所以敎戒之者。方嚴整肅奉祭祀以誠。御婢僕有法。鄕里莫不稱歎。有丈夫子一人曰瀹。女子子一人適奉事權旭。瀹有三男二女。男長曰是㯳。次是枰, 是榘。女長適生員權尙達。季適士人裴益謙。是㯳生二男一女。男長曰黯。季曰。女適士人金裕後。是枰有一男一女。男曰默。女適士人金如翼。是榘無子。以再從弟瓢隱公是榲之子邦贊爲後。黯有三男。長曰學逵。次學堯。甚秀而文。早卒。季曰學培。儀曹員外郞。有二男二女。男長曰學遠早卒。次學重。默有一男曰學增。亦早卒。邦贊有二子。曰恒重,履重。學逵有二子。長曰世鐸。有志行。不幸早卒。有二子。長曰景濂。內外曾玄來晜孫男女凡若干人。公資稟粹美。早知內外輕重之分。性又酷好佳山水。判書公嘗就落淵之 南水石幽絶處。結一庵堂。號曰仙遊亭以畀公。公得之以爲終老之計。又於所居秋月里上流。有層巖斗起。俗號爲雲褰巖。公築臺其上。仍自號曰雲巖。暇日輒往來遊嘗。悠然有自得之趣。至於世利紛華。泊然無所動其心。又能勸飭後進。諄諄善誘。間有成就之者。始文忠公嘗欲爲公碣墓。石旣具。未及琢建。適會壬辰兵亂。鶴老尋又下世。因循未果。距公下世今百三十有餘年。一日公之四世孫恒重,五世孫世鉉等。以員外君所撰公行實記一通來。請余所以表其墓者曰。先祖志行之懿。固不可泯沒無傳。文忠公建石 刻表闡揚幽潛之意。亦不宜孤負。而家世多故。迄茲遷就。吾儕藐孤孫大懼不孝。獲罪幽明。惟執事旣世通家。且猶及見聞之世。必能道吾祖志業行誼。敢拜以請。玄逸作而言曰。諸君之見責是也。玄逸於今日之請。固有所不敢辭者。其如衰退荒忽。文字短淺。不能究闡幽微。信示久遠何。諸君重以大義要責。於是不得終辭。仍竊惟念玄逸之王母夫人於公爲內外兄妹。固嘗聞諸父兄丈老之言。公天資近道。旣又早親有道。得聞聖賢相傳旨訣。服膺而謹守之。若使天假之年。以竭其力。則其所就其可量歟。嗚呼。茲可以 觀其志而審其德矣。則應曰諾。遂据家傳行實記。參以舊聞。輒論次其世系來歷志行梗槩。使之書于墓石上。後之君子庶有攷焉。
上之二十九年昭陽協洽八月壬寅。載寧李玄逸述。
0 김성일(金誠一) 1538년(중종 33, 무술)∼1593년(선조 26, 계사).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청계공 (璡)의 넷째 아들로 무술년(1538, 중종 33) 12월 을사일 정해시에 임하현 천전리(川前里) 집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
경상우도병마절도사•초유사•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로 재임 중. 진주성에서 병사하였다.
시호:文忠. 증 이조판서
선조 15년(1582)년 부군 45세 때 검제로 이거(移居)하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권행(權幸)의 후손이며, 전력부위(展力副尉) 권덕황(權德凰)의 따님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봉되었다.
0 아들 셋, 딸 셋으로,
장남 * 집(潗)의 호는 애경당으로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이고,
차남 * 역(湙)의 자는 호원(浩源) 종사랑(從仕郞)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27세에 졸하다
삼남 * 굉(浤)은 종사랑(從仕郞)이다.
장녀는 * 홍수약(洪守約)장사랑(將仕郞) 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 권태일(權泰一) (호는 장곡(藏谷). 대사간, 전라감사 형조참판) 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 김영조(金榮祖) (호는 망와(忘窩). 6번 어사, 부제학, 대사헌, 이조참판)에게 갔다.
측실 소생 아들은 넷이고 딸은 둘로
아들 * 잠(潛)은 훈도(訓導)이고, * 심(深), *침(沈), *명(溟)이며,
장녀는 * 이사첨(李士瞻)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 정연종(鄭連宗)에게 시집갔다.
0 집(潗)은 아들 넷과 딸 넷을 낳았는데,
장남 * 시추(是樞)의 호는 단곡(端谷) 생원이고,
차남 * 시권(是權)의 호는 봉파(鳳坡) 진사이고,
삼남 * 시강(是杠)의 호는 행촌(杏村) 진사이고
사남 * 시절(是梲)의 자는 자고(子高) 생원이다,
장녀는 * 오여벌(吳汝橃)(호는 경암(敬菴). 교리. 대구, 청송, 창원부사)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 김연조(金延祖)(호는 광록(廣麓), 문과 급제. 정자(正字) 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 권상충(權尙忠)(호는 월곡(月谷), 충재 권벌의 증손자 증 집의)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 김석중(金錫重)에게 시집갔다.
0역(湙)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 권태정(權泰精)에게 시집갔으며, 측실 아들은 *시가(是榎)이다.
0굉(浤)은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시절(是梲)을 후사로 삼았으며,
딸은 둘로,
장녀는 * 김응조(金應祖)(호는 학사(鶴沙). 승지, 대사간, 한성우윤) 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 신열도(申悅道)(호는 나재(懶齋). 정랑, 정언, 울진현감, 장령)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손(孫)과 증손(曾孫)은 모두 90여 명이다
주) 사위 김영조와 손서 김염조, 김응조는 형제간이며, 안동 미동의 유연당 감대현의아들로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첫댓글 묘갈명이란 무덤앞에 세우는 비석에 쓴 글을 말한다.내 조상들의 묘갈명을 모아 해제를 달아준 낙민 장달수군은 우리집 외손인데 얼마전 까지도 모보험회사 임원으로 일 하다가 은퇴 했다. 인동 旅軒 자손인데 내 증조부와 그의 외증조부가 형제 간이다. 조선일보 칼럼을 쓰는 조용헌등과 함께 독립투사 향산 이만도선생의 고택에 자주 모이는 영남 한학의 고수이다.---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