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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꿈은 이루어진다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선불교에서는 말을 세우지 말라고 한다[不立文字]. 그리고 구질구질한 말 대신 사람의 마음을 콕 질러 곧바로 가리키라고 한다[直指人心]. 불경에 그런 말씀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 이런 가르침은 부처님의 시대로부터 별도의 채널로 비밀히 전수되어 내려왔다는 것이며[敎外別傳], 스승에서 제자에게로, 글자나 말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져 왔다고 한다[以心傳心].
핑계 없는 무덤은 없고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그 당시, 특히 중국에서 불교가 이렇게 몸바꿈을 하면서 꽃을 피운 것은 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는 세계의 종교 역사상 보기 드문 일로서 그 가르침의 방식이 혁명적이다 못해 참으로 과격하며 어찌 보면 이율배반적이기도 하다. 남더러는 말하지 말라면서 자기는 어쨌든 몇 마디라도 말을 하고 앉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 최소한의 말마저 하지 않았거나 어디서 몇 마디 말을 했더라도 그 한 말을 누군가가 글자로 옮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선불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아예 몰랐을 것임은 확실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순환논리에 빠지는 기분도 좀 있으나 이 선불교의 가르침은 이렇게 풀어야 하지 않나 싶다. 곧 ‘척’ 하면 삼척인 줄 알고 ‘쿵’ 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린 줄 알아야지 안 그런가? 미주알고주알 일러 줘야 겨우 알아듣고, 그 알아들은 말 몇 마디를 누구처럼 신주단지 모시듯 받들고 거기에만 얽매이는 그런 아둔한 문자주의, 근본주의에서 벗어나란 말씀 아니겠나! 그러니 이 가르침을 이심전심으로 알아채어 새겨듣기를, 불립문자, 그건 말을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을 우상화하거나 절대시하여 너무 얽매이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라는 말씀일 게다. 물을 건너면 잊어 버려야 하는 뗏목처럼 말이나 글은 그저 뜻을 전하는 방편으로만 삼아 잘 써먹으라는 말씀이렷다.
그렇다. 우리는 말하는 동물이다. 말이라는 방편, 곧 그 뗏목이 없고는 의식주도 앎도 사랑도, 심지어 해탈마저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이왕이면 제대로 된 말을 제대로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말을 줄여야 할 때는 줄이고 입을 다물고 말을 잊어야 할 때가 오면 또 그리 해야만 할 것이다. 영어로 하자면 case by case, 무릇 세상사가 그러하듯 말이라는 것도 침묵이라는 것도 때와 장소, 처지와 경위에 맞게 해야 하는 것은 세속이나 불문이나 다름이 없으리라.
그런데 여기서 잠깐 옆길로 가 보자.
우리가 어떤 말을 하려면 생각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생각이라는 것을 아무 것도 없이, 말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맹탕으로 할 수 있을까? 가령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면 ‘사과’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고 사과를 생각할 수 있겠으며 ‘붉다’라는 말이 없거나 아예 모른다 치면 ‘붉은 사과’를 생각할 수 있을까?
현대의 철학이나 뇌과학의 거의 확립된 결론은 ‘아니다’ ‘못 한다’이다. 한국어든 영어든 어느 나라 말이든 간에 말에 의존하지 않고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혼자서 가만히 실험을 해 보시기 바란다. 낱말 없이 무엇을 떠올리며 어떤 문장 없이 머릿속의 생각만으로 논리를 펼쳐 나갈 수 있는지를.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30대 초반의 나이로 홀연히 강호에 나타나 언어학계의 내로라하는 무림들을 변형생성문법(變形生成文法 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이란 단칼로 쓸어 버린 촘스키(Avram Noam Chomsky, 1928~)에 의하면 세계 모든 언어는 선천적이고 보편성을 지닌 언어 능력을 바탕으로 뻗어 나온 것이라지만 그 뻗어 나와 생성되는 방식은 언어마다 다르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태어나 자라면서 어떤 모국어를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도 거의 틀이 정해질 것이다. 가령 아이에게 영어부터 가르쳐서 그 아이의 모어가 되게 하면 그 아이는 한국어가 모어인 아이와는 다른 사고방식, 다른 세계에서 성장하는 것이 되고, 말하자면 그 둘은 옆자리에 같이 있어도 동시에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되겠다. 이러니 부모가 어느 쪽으로 언어를 선택하여 자식을 가르치냐 하는 것은 어느 세계를 선택하여 아이에게 던져 주느냐에 다름 아니다. 만약 부모의 모어와 다른 선택을 하여 던져 주면 부모 자식이 한 집에서 한솥밥을 먹고 살아도 다른 차원의 딴 세상 사람을 키움이다.
이런 사정은 한 가족의 범위를 벗어나 바깥 사회나 민족 단위로 가도 마찬가지다. 어떤 겨레가 자기들 말을 잊고서는 구성원의 주류가 이미 다른 민족의 말을 쓰고 있다면 그 겨레는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허깨비만 살아 있는 셈이다. 그 가까운 예로 우리의 머리맡, 만주의 벌판과 사냥터에서 일어나 중원을 지배했던 여진족의 후예, 만주족이 있다. 우리말과도 관련이 깊어 보이는 남퉁구스어의 한 갈래, 피둥피둥하게 살아 있는 만주어(ᠮᠠᠨᠵᡠ ᡤᡳᠰᡠᠨ Manju Gisun)를 호기롭게 지껄이며 질풍노도와 같은 엄습으로 우리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줬던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비록 아직도 약 천만 명의 만주족이 주로 중국의 동북지방, 곧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만주 지방에 흩어져 살며 인디언 보호구역의 미국 원주민들처럼 자신이 만주족의 후예입네 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신고하고 있지만 그것 말고는 주위의 한족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만주어를 막힘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흑룡강성의 외딴 마을 산지아지(三家子)의 80대 노인 세 사람뿐이며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70대 노인 열다섯 명이란다. 그런데다 이들도 평소에 만주말을 할 기회가 거의 없으며 있어도 잘 하려고 들지 않은 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니 실질적으로 만주어는 이미 죽은 말이며 앞으로 몇 년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의 모어로서는 하나도 남김없이 씨가 말라 버릴 것이다.
1961년까지만 해도 이 외딴 마을 사람들의 85%가 만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차 한족이 이주해 오더니 주위의 언어 환경도 걷잡을 수 없이 바뀌었다. 1986년에는 50%로 떨어지더니 2002년에는 18%인 186명뿐이었고 2009년에는 100명 아래로 떨어졌으며 이제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게 되었다.
뜻있는 만주족 청년 몇 사람이 조상들의 말을 살리겠다고 만주어 강습도 열곤 하지만 정부의 뒷받침도 전혀 없고 민중의 호응도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2006년, 중국 전체에서 이곳 단 한 군데의 초등학교에서 일주일에 두 시간씩 특활로 만주어 교습 시간이 열렸으나 여기서 만주 낱말과 만주 글자를 간간이 익히는 아이들도 쉬는 시간 종이 치면 곧바로 중국말로 떠들고 논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누르하치(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ᠨᡠᡵᡤᠠᠴᡳ Aisin Gioro Nurgaci)의 영도 아래 만주에서 후금이 일어나고 곧 이어 1644년 산해관을 지나 중국을 정복했을 때 만주어는 자부심 큰 만주족 병사들과 황실을 꼭대기로 한 정복민족의 공식 언어로서 군림하였다. 한족과의 인구비례에 있어서 1:20 내지는 청나라의 융성기에는 1:50에 이르렀다는 열세 속에서 역대의 청나라 황제들은 일찌감치 만주어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한편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그 모어의 미래를 염려하여 세심하게 대비하였다. 몽고글자를 다듬어 만주문자를 제정하고 중요한 문서는 반드시 만문과 한문을 나란히 써서 작성하였다[滿漢合璧: 지금도 자금성에 가면 이런 간판들을 볼 수 있다]. 수많은 한적을 번역하고 민감한 기밀문서는 만주어로만 작성하는 등 풍부한 문자기록을 나라가 망하는 날까지 끈질기게 생산하였다.
청제국(大淸國,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Daicing Gurun: 1636~1912)의 황금기를 이룬 강희제(康熙帝, Kangxi Emperor, ᡝᠯᡥᡝ ᡨᠠᡳ᠌ᡶᡳᠨ Elhe Taifin: 재위 1661 ~ 1722:)는 만주어의 미래를 처음으로 심각하게 염려한 바에 따라 중국 본토 각지에 흩어진 젊은 만주족 자제들을 만주어 캠프로 보내 만주어를 굳히게 했다. 건륭제(乾隆帝, Qianlong Emperor, ᠶᠣᠩᡴᡳᠶᠠᡥᠠ ᡥᡡᠸᠠᠩᡩᡳ Yongkiyaha Hūwangdi: 재위 1735 ~ 1796)는 만주족 학생들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빡빡한 만주어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이때 청제국의 만주어 사용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건륭제 끝 무렵부터 만주어 사용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중국 본토의 거대한 한족 인구를 다스리고 한족 문화를 접하면서 한족의 바다 속에 상대적인 소수로 각지에 파견된 팔기군(八旗軍 ᠵᠠᡴᡡᠨ ᡤᡡᠰᠠ Jakūn Gūsa) 병사 등 만주족들은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 오던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차차 달리 대하면서 한어와 한문화에 젖어 들어갔다. 다음 황제인 가경제(嘉慶帝 Jiaqing Emperor ᠰᡠᠩᡤᡳᠶᡝᠨ ᡥᡡᠸᠠᠩᡩᡳ Sunggiyen Hūwangdi: 재위 1796 ~ 1820)의 시기에 이르자 만주어 자체에 중국어가 상당량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만주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있었다. 하지만 도광제(道光帝 Daoguang Emperor ᡧᠠᠩᡤᠠᠨ ᡥᡡᠸᠠᠩᡩᡳ
Šanggan Hūwangdi: 재위 1820 ~ 1850)의 시대에 이르자 만주군의 정예인 팔기군조차 만주어 배우기를 꺼렸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한족 관리는 늘어나고 발언권도 세어졌으며 만주족 자신이 난만하게 흐드러진 중화문명과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화되어 갔으니 선대 황제들의 애쓴 보람도 없이 청제국의 멸망 이전에 벌써 만주어의 사용은 거의 기울어져 있었다.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부의(宣統帝 溥儀 Xuantong Emperor Puyi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ᡦᡠ ᡳ Aisin Gioro Pu I: 재위 1908 ~ 1912)의 경우 황제 자신이 만주어를 할 줄 몰랐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자 이제 만주족들은 보복과 핍박의 대상이 되었으며 고향땅인 만주 본토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얼마 전에 이미 물꼬가 터져 있던지라 이젠 거침없이 한족이 밀려들어왔다. 뒤이어 일제의 꼭두각시인 만주국이 세워지자 언감생심, 만주어 대신 일본어 교육이 강화되었으며 뒤이어 중국이 공산화 되고서는 잇달아 문화혁명의 재앙이 덮쳤다. 홍위병들은 소수민족의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려 들었으니 이 때문에 대부분의 만주족들은 마치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처럼 더욱 더 정체성을 숨기느라 이름부터 고쳐 한족 행세를 했으며 집안에서도 누가 들을세라 만주어 사용을 꺼렸다.
어린아이들에게 언어가 전수되지 않으면 그 언어는 당연히 조만간 사망하고 만다. 그 후 비록 정세가 변하여 소수민족에 대한 압박이 얼마간 풀어져서 문화혁명 시기에 200만이라고 신고되던 만주족의 숫자가 일시에 천만 명으로 늘어났지만 이 잃어버린 시간으로 인해 한 번 끊어진 언어 전수의 고리는 뒤늦게 나타난 극소수의 운동가나 호사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내어 이을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즈음 자라난 이세, 삼세들은 시대의 혼돈에 거의 맥을 놓았던 그 부모나 조부모 세대들에서 완전히 달리 자라나 이젠 철저히 한화되고 세뇌된 서류상만의 소수민족 자제로서 도대체 자신들이 왜 만주족과 만주어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하는지 자부심과 의무감은커녕 도무지 그런 관심 자체가 없어졌다. 그렇다. 만주어 부활의 최대 장애는 정부의 무관심도 형편없는 기반시설이나 재정, 교사와 교재의 부족이나 그 무엇도 아닌 만주족 자신들의 의식 부재, 열정의 부재다.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해 보자.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에 만주족이 다른 언어 정책을 썼다면 만주어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입말로 여태껏 보존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혹시 지금 수억의 중국인들이 쏼라쏼라 중국어 대신 ‘시 사이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면서 만주어를 사용하고 있지나 않을까?
누르하치의 열네 번째 아들이자 뒤를 이은 홍타이지(崇德帝 Hong Taiji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ᡥᠣᠩ ᡨᠠᡳᠵᡳ Aisin Gioro Hong Taiji 재위 1626 ~ 1636)의 이복동생인 도르곤(睿親王 Dorgon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ᡩᠣᡵᡤᠣᠨ 섭정: 1643 ~ 1650)이 일단 장성을 넘어 베이징으로 들어오기는 했는데 엄청난 수의 한족을 오래도록 다스리자니 앞길이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도르곤에게 다가와 묘책이랍시고 소삭거린 이가 명나라의 유신이자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이었던 김지준(金之俊: 한족으로는 드문 김씨다)이었다. 만주족들은 처음에는 중국 본토에 강력한 만주화 정책을 펼쳐 저항하고 거부하는 자들은 모조리 확 쓸어버릴 요령이었으나 그리 하자니 양쪽에서 큰 희생이 따르겠고 모처럼 군림한 정복왕조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때 김지준이 도르곤에 선을 대어 다가가 설득하여 얻어낸 ‘신의 한 수’가 ‘열 가지의 따르고 안 따르기[十從十不從]’란 기막힌 계책이다.
1. 남자는 따르되 여자는 안 따른다. (여자는 만주족의 체 두변발을 안 따라해도 된다)[男從女不從]
2. 산 자는 따르되 죽은 자는 안 따른다. (죽으면 한족의 풍습대로 매장한다)[生從死不從]
3. 양은 따르되 음은 안 따른다. (내세를 위한 불교 등 종 교나 풍습들은 그대로 둔다)[陽從陰不從]
4. 벼슬아치는 따르되 종은 안 따른다. (관리들은 만주족 의 예법대로 하고 노비들은 옛날처럼 입고 행동한 다) [官從隸不從]
5. 어른은 따르되 아이는 안 따른다. (아이일 때는 한족의 원래 풍습대로 하고 성인이 된 후에 체두변발 등 만 주 풍습을 따른다) [老從少不從]
6. 유가는 따르되 불교/도교는 안 따른다. [儒從釋道不從]
7. 창기는 따르되 배우나 가수는 안 따른다. (경극 등을 하는 경우에는 한족의 의복과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 다) [娼從優伶不從]
8. 벼슬자리에 관련해서는 따르되 혼인에 관해서는 안 따 른다. (결혼시 남자는 만주옷을 입되 여자는 명나라 의 복식을 한다) [仕宦從婚姻不從]
9. 국호는 따르되 관직명은 안 따른다. [國號從官號不從]
10. 노역이나 세금은 따르되 문자나 언어는 안 따른다. [役稅從文字言語不從]
그렇지. 남자는 나가 죽어도 좋지. 아이와 여자만 챙겨 놓으면 언어와 문화, 정체성은 어쨌든 살아남는다. 의뭉스러운 김시랑은 미리 알아챈 것이렷다. 음이 양을 이기고, 컴컴하고 후미진 골짜기가 우뚝 솟아 뽐내는 봉우리를 감싸 언젠가는 결국 허물어 버릴 것을. 김지준 덕분에 한족은 적어도 가정과 2세 교육에서 비롯된 그 언어와 문화를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지만 만주족은 어언 300 년 만에 나라도 망하고 말도 잃고 민족도 사그라졌다. 김지준은 그밖에도 ‘만주족은 장사를 하면 안 된다. [旗人不得經商]’라는 원칙을 은근슬쩍 관철시켰는데 이 때문에 경제권은 점차 한족들에게 넘어갔다. 돈줄을 놓아 버리고서도 만주족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리로다 했던 걸까? 다른 건 몰라도 위 열 번째 항목과 이 장사할 수 없다는 맹랑한 항목이라도 거부됐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이 정도에서 ‘역사의 가정’ 놀이는 건너뛰어 남의 일 같지 않은 만주족의 현실로 돌아오건대, 한 번 돌아선 애인의 마음은 되돌리기 힘들고 이렇듯 한 번 몸에서 빠져나간 죽은 자의 넋과 얼은 다시 불러들일 수가 없다. 학교마다 영어수업이 유행처럼 번지고 초등학교에서부터 저 시골의 작은 지방자치단체에까지 돈 들이고 공들여 영어전용지역(English Only Zone)이 건설되는가 하면 영어공용화를 대놓고 외치는 어느 나라의 현실이 아직은 기우라지만 글쎄다, 강희제도 설마 그렇게까지 망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그의 이유 있던 염려가 우리 염려가 아니 되라는 법은 없겠다.
그런데 이런 우려와는 영 딴판으로 지구 저쪽 편에서는 지난 백 년간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난 천오백 년 내지 이천 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입에서 사라졌던 옛말이 되살아나 이스라엘의 오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날마다 쓰는 국어가 되었다. 부활이란 이런 것이다. 그것도 한 사람의 끈질기고 피나는 노력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히브리어(עִבְרִית Hebrew) 이야기다. (미국에만도 25만의 히브리어 사용자가 있다)
아시다시피 유태인들은 수천 년 동안 고향을 잃고 떠도는 민족이었다. ‘성스러운 말(לשון הקודש Lashon Ha-Kodesh)’이라고 일컫는 고전 히브리어(성서 히브리어)는 가나안 지방에 살던 유태인들이 AD 70년, 로마와의 전쟁에서 져서 이른바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를 당하여 흩어지기 전부터 이미 서서히 잘 쓰이지 않게 되어 가고 있었다. 대신에 히브리어의 사촌 격인 북쪽의 아람어(Aramite)가 많이 침투하여 심지어 예수의 모어도 아람어로 알려져 있다. 한편 지중해 동쪽 지역의 행정어로는 그리스어(Greek)가 떠오르고 있어서 상당수 유태인들은 아람어를 쓰거나 그리스어를 썼으며 일부는 히브리어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나 대략 AD200년에서 AD400년 사이, 히브리어는 중동이나 유럽 각지로 흩어지던 유태인들뿐만 아니라 고향 언저리에 남아 있던 본토박이들에게도 날마다의 입말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에 기도나 경전 암송 등 종교의 의식이나 공부, 기타 특수한 경우에 몇 마디씩 쓰이는 의전 언어로서는 꾸준히 명맥을 이어갔다. 그리고 각지의 유태인들은 그 고장의 현지어를 배워서 생활을 꾸려가는 한편 토착민들이 수시로 가하는 박해에 시달리며 이로 인해 더욱 굳어진 유태교 신앙심으로 똘똘 뭉쳤다. 그러면서 자기들 소집단 안에서는 자기들이 발전시켜 자기들만 쓰는 일상용어가 있었으니 종교 의식에서 쓰는 고전 히브리어도 아니고 게토 바깥의 현지어와도 다른 제3의 언어였다. 동부 유럽을 중심으로 서유럽에 걸친 유태인 집단에서 널리 쓰던 이디시어(Yiddish ייִדיש)나 이베리아 반도 등지에서 발달한 라디노어(Ladino)가 대표적이다. 이디시어는 독일어 문법을 바탕으로 많은 히브리어 어휘가 들어간 혼성 언어이며 라디노어는 스페인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이디시어로 쓴 문학은 노벨상까지 받았다).
그런데 1858년, 당시에는 러시아 제국령이었고 지금은 벨라루스에 속하는 소도시인 루즈키(Lushki, Лужкі)라는 곳의 유태인 촌에서 엘리에제르 이츠하크 페를만(Eliezer Yitzhak Perlman)이라는 이름의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뒷날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Eliezer Ben-Yehuda)로 개명한 이 사람이 죽은 히브리어를 살아 있는 일상어로 살려낸 바로 그 사람이다. (‘벤 예후다’란 ‘유태의 아들’이란 뜻)
예후다는 세 살 때 유태인 초등학교[cheder]에 들어가서 히브리어와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열두 살 때는 이미 토라(Torah)와 미쉬나(Mishna), 그리고 탈무드(Talmud) 같은 유태교 경전을 상당량 독파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뛰어난 아들을 유태교 성직자인 랍비(rabbi)로 만들려고 탈무드 학교[yeshiva]로 보냈는데 거기서 그는 유태 계몽주의(Haskalah, Jewish Enlightenment השכלה)를 접하고는 성직보다는 세속의 활동에 이끌렸다. 이 계몽주의 운동은 유대인들에게 주변 사회와 융화하라고 부추겼고 현지의 언어와 세속적 학문, 경제적 생산양식을 받아들이라면서 한편으로는 주로 히브리어 문학을 통한 유태 문화의 부활도 꾀하였다.
언어에 남다를 소질을 보인 예후다는 나중에 불어와 독일어, 러시아어를 배웠으며 랍비 수업 대신 뒤나부르크(Dünaburg, Daugaupils 지금의 라트비아에 소재)의 러시아 김나지움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히브리어 신문 하샤하르(HaShahar)를 접하였고 시오니즘(Zionism)을 알게 되었다.
1877년 열아홉 살 때 그는 이 김나지움 공부를 마쳤는데 같은 해에 러시아는 슬라브족 사촌격인 불가리아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토만 터키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 사건은 그 이전 그리스(1829), 이탈리아(1849)의 부활과 함께 예후다에게 깊은 충격과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불가리아인도 되는데 유서 깊은 유태인은 왜 안 되나? 비록 사람들은 흩어졌고 언어도 더 이상 일상용어로 쓰이지 않지만 만약 유태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가 그 땅에서 히브리어를 현대적으로 부활시킬 수만 있다면 민족은 독립을 얻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흩어진 유태인들이 현지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을 막고 유태 사회를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 일생의 목표를 향해 조만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열아홉 살 즈음이었다.
1878년 러시아를 떠난 예후다는 우선 파리로 가서 소르본 대학에 유학하며 중동의 역사와 정치를 비롯한 다양한 과목을 수강하였는데 특히 히브리어로 강의되는 고급 히브리어 과정에 열중하였다. 이때 예후다는 팔레스타인에서 온 어느 유태인과 파리 몽마르트르의 한 카페에서 오로지 히브리어만 사용하여 대화를 해 보았는데 실제로 대화가 이루어지는 환희로운 경험을 했다. 이로써 예후다는 새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가 민중의 입말로 실용적으로 정말 쓰일 수 있겠다고 더욱 믿게 되었다. 그러다 알제리로 건너간 뒤에는 그곳 유태인들과 말이 되든 안 되든 오직 히브리어로만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파리와 알제리에 있는 동안에 그는 여러 출판물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펼쳐 유태인 사회로부터 갖가지 반응을 이끌어냈다.
1881년, 스물 세 살의 청년 예후다는 히브리어 부활이라는 엄청나고도 무모한 계획을 가슴에 품은 채 아내인 데보라(Devora, née Jonas)와 함께 아직은 오토만 터키 제국령인 팔레스타인 땅을 밟았다. 그는 배에서 내리면서부터 그곳에서 마주치는 유태인마다에게 오로지 히브리어만으로 얘기를 하려 들었다. 시장의 장사꾼이든 여관 주인이든 각자가 아는 히브리어 몇 마디로 그럭저럭 대꾸를 해 오기는 했다. 하지만 예후다나 그 사람들이나 도무지 아는 어휘가 적은데다 적시에 필요한 단어가 모자람을 절실히 느꼈다. 이렇게 부딪히면서 예후다는 이 모든 유태인들이 오로지 히브리어만으로 서로 원활하게 대화하는 세상을 기어코 만들고 말리라는 결심을 더욱 굳히고는 그 실행을 향해 무섭게 나아갔다.
예루살렘에 정착한 그가 간추린 히브리어 부활의 기본 계획은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가정에서 히브리어를 쓴다.
둘째,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쓴다.
셋째, 낱말, 낱말, 낱말…. (낱말이 필요하다.)
우선 인근의 학교에 마침 가르치는 자리가 나자 예후다는 그곳을 근거로 자신의 이상을 주위에 전파하였다. 이디시어 사용 등 흩어져 살던 때의 언어 행태를 집어치우고 새로운 히브리어 사용으로 대체하자는 혁신적인 목표와 방안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열렬한 시온주의자 유태인들마저도 예후다의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이는 드물었다. 이들 대부분은 정치적인 일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완전 독립을 쟁취한 후 어떤 언어를 쓸 것인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일부에서는 동조와 협조는커녕 신성한 히브리어를 상놈들의 일상용어로 끌어내리자는 소리냐며 힐난하고 핍박하였다. 이런 수구꼴통들은 특히 이디시어를 쓰는 아슈케나짐(אשכנזים Ashkenazim: 중세부터 유럽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의 일파)들 사이에 많았는데 이들은 유대인 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거센 세력이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은 예후다의 이상은 꿈같은 이야기이며 그런 노력은 괜한 헛짓이 될 거라고 그 성취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였다. 아니면 만약 아이들이 히브리어만 배우고 자라면 커서 다른 나라 말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될 거라고 걱정들을 했다. 가정에서 한국말부터 먼저 가르치면 영어를 잘 못 배우거나 배우더라도 어설픈 영어를 하게 될 거라고 걱정하던 얼마 전까지의 상당수 재미동포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장애에 머뭇거릴 예후다가 아니었다. 1882년, 첫 아들 이타마르 벤 아비(Ittamar Ben-Avi)가 태어나자 아내와 약속하고 다짐하기를, 이 아이에게는 오직 히브리어만 가르치고 다른 모든 언어는 차단한다는 선언이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방문객이 오는 날엔 아이를 미리 침실로 보내 가두었다. 외국어를 전혀 못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 뒷날 그 아들의 회고록에 의하면 심지어는 새소리, 짐승의 울음소리마저 못 듣게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히브리어가 아니니까.
이러한 엄격한 감시와 노력 속에서 왠지 아이는 말배움이 늦어 걱정이 됐는데 어느 날 일이 터지고 만다. 예후다가 외출한 후 러시아 출신의 유태인인 그의 아내가 무심코 아이에게 러시아 자장가를 흥얼거려 버렸는데 때마침 돌아온 예후다는 이를 보고 집안이 떠나가듯 불같이 화를 내었고 아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맙소사! 아빠엄마의 이 엄청난 난리에 충격을 받은 네 살배기 아들의 굳게 닫혔던 말문이 어느 순간 거짓말 같이 트이고 만 것이다. 이 아들의 입에서 생전 처음으로 히브리어 말마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이 순간이 이천 년 동안 죽어 있던 히브리어가 살아 있는 아이의 입에서 모어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예후다는 마침내 성공하였다! 그리고 일단 가정에서 성공하였다!
예후다의 다음 목표는 학교였다. 학교에서 조직적으로 철저히 가르치지 않으면 언어는 되살릴 수 없다. 반대로 언어를 말살하려면 교실에서부터 못 쓰게 하고 교과서를 없애고 교과목을 폐지하면 된다. 아이가 무심결에 금지된 언어를 내뱉으면 벌을 주고 불이익을 주고 열등감과 창피를 준다. 바로 일제가 조선 아이들에게 한 수법이다.
예후다는 이스라엘의 모든 교육기관은 모든 과목을 히브리어로만 가르칠 것을 역설하였다. 교회당도 마찬가지였다. 기도문 낭송뿐만 아니라 설교도 히브리어로 해야 언어를 되살릴 수 있다고 했다. 이리하여 자라나는 젊은 세대가 학교에서, 교당에서, 가정에서 히브리어로 자유로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비로소 히브리어는 부활의 중턱을 넘어서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리가 나자 예후다는 냉큼 이를 받아들여 정말로 다른 말을 일체 섞지 않고 히브리어로만 설명하고 묻고 대답하는 수업을 끝까지 진행했다. 비록 짧은 기간의 수업 경험이었지만 인상적이며 성공적인 본보기로서 다른 이들도 이 방식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비록 교재도 엉망이고 훈련받은 교사도 드물고, 무엇보다도 히브리어 용어나 어휘가 턱없이 모자랐지만 어쨌든 이 대신 잇몸으로 씹으며 히브리어만의 수업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예후다는 학교에서도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예후다의 마지막 목표, 낱말, 낱말, 낱말…
사실 예후다는 아들에게 처음 말을 가르칠 때부터 적당한 낱말이 없거나 모자람을 날마다 절감했다. 실생활에는 있어야 하지만 경전에는 없는 말들. 가령 인형, 손수건, 자전거 따위를 뭐라고 해야 하지? 예후다는 어린 아들을 위하여 밤새 새로운 히브리어 낱말을 손수 만들어 냈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 날에도 또 수십 개의 새 낱말이 필요해진다! 이리하여 예후다는 히브리어 신조어를 만드는 쉬지 않는 기계가 되어 수많은 어휘를 생산했다. 그리고 이런 새 낱말들을 신문에 실어 널리 유통되게 했다. 그 가운데는 이때까지 쓰이는 것도 많지만 버림받은 것들도 있다. 나중에는 히브리어의 말토막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같은 셈(Sem)어로서 뿌리가 가까운 아랍어의 말조각도 가져다 끼워 썼다.
이러면서 예후다는 <히브리어 고대 및 현대어 대사전(A Complete Dictionary of Ancient and Modern Hebrew)>이라는 거대한 히브리어 사전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전 편찬을 돕고 히브리어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히브리어 위원회(Hebrew Language Council)’를 만들었는데 이는 1953년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히브리어 아카데미’로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예후다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아내 데보라는 다섯 아이를 낳고 서른여섯 살에 결핵으로 죽었다. 유언으로 자기 여동생과 재혼하라고 해서 맞이한 아내가 헴다(Hemda)이다. 예후다도 평생 고생하던 결핵으로 예순넷에 죽었는데 이 둘째 아내는 예후다와 결혼 후 내내 그의 사전 편찬을 도왔으며 예후다의 사후에는 이를 마무리하여 전7권의 완성판으로 발간해 내었다.
예후다의 업적은 물론 위의 세 항목에 그치지 않는다. 1884년에는 시오니즘 히브리어 신문인 하츠비(HaZvi הצבי)를 펴냈으며 여러 매체에 글을 쓰는 등 갖가지 일을 곁들였지만 그 모든 일들의 지향점을 따라가면 히브리어의 부활이라는 한 목표로 모아진다.
물론 히브리어의 부활이 예후다 한 사람만의 노력에 전적으로 힘입은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뜻을 같이하여 그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때마침 밀려들어온 수많은 유태인들이 이러한 이상에 즉각 동조할 수 있는 민족적 사회적 분위기와 역량이 임계점 가까이 차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막상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쏟아져 들어오자 같은 유대인 사이에도 혼란이 일어나면서 자연히 공용어 문제가 떠올랐으니 그 무슨 대안보다 예후다의 준비된 아이디어가 부각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정이 크다. 그리고 한 번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젊은 부모들은 히브리어만 쓰는 학교나 캠프에 경쟁적으로 아이들을 내보냈으며 집에서도 아이들이 히브리어만 쓰기를 부추기고 부모들도 아이들을 따라 배우며 옛날 쓰던 말들을 미련없이 버려 갔다. 이렇듯 몇 십 년 만에 물결은 완전히 한 쪽으로 흘러 덮쳐 어느새 그 누구도 군소리 없이 눈만 뜨면 새 히브리어를 입에 담는 새 세상이 거짓말같이 도래했다.
아무튼 예후다라는 한 사람의 초인적인 정열과 노력이 일생 동안 끊임없이 불씨를 당겼음은 사실이다. 이 불씨로부터 젖었던 들판에 마침내 불길이 옮아 붙었으며 때마침 불어 주는 바람으로 활활 타올라 들판을 모조리 태운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불씨를 당긴 이를 잊지 않고 1922년 그가 만 64세로 죽자 3만 명이 모여 애도하였으며 예루살렘의 명동, 다운타운의 한 길거리 이름을 그에게 바쳤으니 바로 벤 예후다 거리(Ben Yehuda Street)다.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 그는 쓰러진 말을 다시 세운 사람이요[再立言文], 땅에 묻힌 돌비석을 파 일으키고 짜모아 통틀어 오백만이나 쓰는 현대 히브리어라는 금자탑으로 다시 쌓아 올린 사람이다[The reviver of Hebrew]. 이런 일은 기나긴 인류 역사에 여태 단 한 번밖에 없다. 하루 열여덟 시간까지 사전 편찬에 몰두하며 진력하던 그가 마침내 쓰러져 삶을 마감하기 한 달 전, 그때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 통치하던 영국 당국은 마침내 히브리어를 이스라엘의 공식 언어로 지정하였다.
꿈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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