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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모놀과 정수 원문보기 글쓴이: 이종원
'ㄱ' 자로 꺾어진 두동교회
익산만큼 교회가 많은 동네가 또 있을까. 구한말 개항도시 군산을 통해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전주 가는 길에 있어 아무래도 일찍 개화가 되었다. 마을을 지나치면 교회종탑들이 우뚝 서있어 마치 금강변을 오가는 황포돛배처럼 보일 정도로 교회가 많다. 그러나 남의 종교를 인정하자 않는 폐해도 엄연히 존재한다. 원불교 성지가 있는 익산땅에서 선교는 엄두도 못내고 천년고찰이자 보물(대웅전)까지 가지고 있는 숭림사가 처음 템플스테이를 할때 목사들이 데모를 해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배타적인 모습은 이땅의 초기 기독교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서양 선교사가 한복을 입었고 초기 신부들은 갓을 쓰고 다녔다. 민초의 얼굴을 닮아야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할 수 있다. 몇 년전 명동성당에서 토착화 미사에 참여했는데 포도주와 밀떡 대신 막걸리와 시루떡으로 미사봉헌을 한적이 있었다. 아프리카는 종 대신 큰 북을 친다고 한다. 캄보디아에 선교를 떠난 신부님은 하나같이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현지인과 동화되지 않으면 선교를 할 수 없는 이유때문이다.
삼베옷을 입고 두건을 쓴 예수님, 저고리를 걸친 마리아의 모습을 난 두동교회에서 보았다.
교회건물이 'ㄱ'자로 껵여 이색적이다. 당시 유교적 관습 탓에 남녀가 함께 앉을수 없는 노릇. 남녀평등을 주창하는 교회에서 이것을 받아 들였다.
아마 교회는 민초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타종교에 대해 마음을 열고 사람들품에 다가서는 것이 진정한 선교가 아닐까 싶다.
오른쪽은 여성(동서), 왼쪽은 남성(남북), 가운데 휘장이 쳐 있어 남녀가 눈을 마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교회가 청소년들 연예장소였다는 말은 두동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신 목사님의 강론대는 모서리에 자리하고 있어 전체를 다 볼 수 있고 남자도, 여자도 모두 목사님을 바라볼 수 잇다. . 마루를 높였고 가운데 8각 기둥을 세워 목사님의 권위를 세웠다.
강단은 단을 높였고 창문틈으로 빛이 쏟아지면서 나름 신성한 분위기를 느껴진다. 일제 강점기때는 이곳에 학교를 세워 민족혼과 독립정신을 가르치기도 했다. 일본 순사가 검문오면 급히 불온서적(?)을 강단 마룻바닥에 숨겨 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표안나게 열 수 있도록 마루가 열려 있다. 독립투사도 저 마루에 숨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서까래를 보라. 천국을 연결하는 핏줄처럼 보인다.
이런 유서깊은 교회에 사연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3천석 지기 박재신의 이야기부터 꺼내고자 한다.
박재신은 얼마나 부자인지 사방 30리에 그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갑부였는데 학교를 세우고 주변 소작농 500호의 세금까지 대납해줄 정도로 원래 천성이 고왔다. 그런데 그에게 늘 아쉬운 것이 있다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선교사 해리슨과 안신해 전도사가 박재신의 어머니와 부인을 전도하게 된다.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말에 박재신은 여자들이 교회 나가는 것을 묵인했다. 주의 기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내가 덜컹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10리가 넘는 이웃마을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가는 아내가 안스럽고 내심 아들까지 생겼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자기집 사랑채를 내어주며 예배를 드리게 했다.
마침내 그토록 기다렸던 아들이 태어났고 요한이라고 이름지어주었다. 박재신은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자기집 곳간을 내어 주고 그곳에 두동교회를 세웠다. 그의 전폭적인 지지(?)와 경제적 도움으로 교회는 날로 성장했고 신도수가 무려 80명으로 늘어났다. 하긴 지주가 믿으라면 소작농은 어찌할 방법이 없겠지. 더 나아가 교회안에 학교까지 세웠고 민족교육에서도 앞장 섰다.
그런데 하느님의 심술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무슨 오묘한 뜻이 있길래, 글쎄 요한이 5살이 도는 해에 그만 병으로 죽고 만다. 이때부터 박재신은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고모상을 당했을 때 출상일이 주일이라 3일장을 못하고 4일장을 해야한다는 전도사와 충돌이 일어나 신자들을 자기 집에서 모두 내쫒는다.
더구나 신자들 대부분이 박재신의 소작농이기 때문에 눈치 보느라고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80명의 교인수가 20명으로 줄어든다. '빵을 선택할 것인가 , 주님을 선택할 것인가' 기로에 놓인 교인들은 온갖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온전한 믿음생활을 이어갔다.
이 부근에서 유일하게 박재신 땅이 아닌 채소밭을 구했고 목숨같은 돈을 갹출해서 1929년 드디어 두동교회 터를 잡는다. 그것도 낫놓고 'ㄱ'자도 모르는 무식쟁이에다 아무 힘도 없는 소작농들의 힘으로 말이다.
땅은 샀지만 건물을 세울 돈이 없었다. 그런데 1929년 6월 안면도 소나무를 실은 배가 군산앞바다에서 침몰하자 질좋은 안면송이 밀물에 쓸려 근처 성당포까지 떠내려 온 것이다. 소나무 주인이 나무를 찾으러 왔다가 다시 가져갈 방법이 막막하자 바로 이곳사람들에게 헐값으로 나무를 팔았고 오늘날 두동교회의 뼈대가 된다.
일제강점기때는 민족혼 교육, 6.25전쟁시 이 교회가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되었고 강단 마룻장 아래 밀실에 당시 청년들이 몸을 숨겼다고 한다.
이렇게 대하드라마같은 사연이 깃들어 있어 교회가 더욱 사랑스럽다.
환난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신다는 성경말씀을 두동교회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찌보면 조변석개처럼 변하는 내 신앙은 박재신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120여가구의 두동마을 주민의 99%가 두동교회 신자들이다. 오후 2시인데도 새로 지은 교회에서는 찬송가가 끊이지 않았다. 만약 힘없고 낮은 자들이 힘을 모아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면 아마 교회 기둥은 넘어졌고 신심은 모래알처럼 흝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주님은 이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난 참 신앙인의 모습을 두동교회에서 보았다.
위치:전북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385-1 전북 문화재 자료 제179호
제일 가운데....서까레. 질좋은 안면송이다.
먼지가 잔뜩 묻은 오르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오르간에서 나오는 반주소리를 들었을까
두동교회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따라 하늘이 유난히 맑다. 교회의 종소리가 유난히 청량하게 들리는 듯하다 |